하나님 앞에서 떨지어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까닭에 그들을 치사 (오만) 칠십 명을 죽이신지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륙하셨으므로 백성이 슬피 울었더라
삼상 6:19
땅이여 너는 주 앞 곧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 떨지어다
시 114:7
블레셋이 언약궤를 가져간 지 7개월이 되었다. 저들은 그로 인해 몹시 시달리다 이스라엘로 돌려보낸다. 이를 수레에 싣고 그 안에 자신들이 겪은 독한 종기와 쥐 형상의 금 신상 다섯씩을 각각 만들어 제물로 함께 보냈다. 그때 “벧세메스 사람들이 골짜기에서 밀을 베다가 눈을 들어 궤를 보고 그 본 것을 기뻐하더니, 수레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이르러 선지라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암소들을 번제물로 여호와께 드리고, 레위인은 여호와의 궤와 그 궤와 함께 있는 금 보물 담긴 상자를 내려다가 큰 돌 위에 두매 그 날에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께 번제와 다른 제사를 드리니라(13-15).” 모처럼 활력을 되찾은 듯하였다.
그런데 다소 황당한 사건이 벌어진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까닭에 그들을 치사 (오만) 칠십 명을 죽이신지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륙하셨으므로 백성이 슬피 울었더라(17).” 나름 잘한다고 잘하다 그리 된 것이라, 어리둥절하기까지 하다. 이를 알듯이 오늘 시편의 말씀이 명료하게 정리한다.
땅이여 너는 주 앞 곧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 떨지어다
(114:7).
들떠서 함부로 굴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을 당한 것이다. 하나님을 온전히 경외함이란 이처럼 두려운 일이다.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잠 4:8).” 행여 호기심에 또는 우쭐하여 멋대로 굴다 주의 엄위하심을 잃을 수 있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내가 날마다 주를 송축하며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145:1-2).
이미 주가 싫어하시는 일이 자행되었는데 여호와의 궤와 함께 저들 나름 자신들을 괴롭히던 금 독종과 금 쥐 신상을 각각 자신들 좋을 대로 만들어 함께 보낸 것이다. 이를 호기심으로 들여다보다 저와 같은 일을 당했다.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주의 백성이 아니다.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사 1:13).” 성경은 때로 우리를 당혹스럽게 할 정도로 엄위하시다. 하나님은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을 바로 알기를 원하신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
나름은 자신들이 아는 대로 한다고 한 것을 두고, 우리는 두려워 떨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즐거워하시는 것은, “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공의를 행하여 그의 하나님의 규례를 저버리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 의로운 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거워하는도다(사 58:2).” 이는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엡 4:17).” 그러므로 우리의 온전한 일은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신 6:6).” 삼가 조심 또 조심해야 할 일이다… 때로는 내가 원치 않는 일도 따라야 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 21:18).”
성경은 누누이 일러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고후 4:5).” 가끔은 이 길이 맞나? 싶다가 또 가끔은 계속 이 일을 감당해야 할까? 하는 회의가 들기도 하면서, 어찌하면 그만둘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온통 마음을 휘저을 때가 있다. 한데 오늘 본문이 마치 이러한 나의 마음에 일침을 가하듯 주의 일은 호기심이나 적성에 따라 하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닌 것을 밝히시는 듯하다. 구경하다 저들 70명이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했다. 하나님은 결코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신다. 혹시나 하는 기대와 궁금증으로 소홀히 다가갈 수 있는 분이 아니다. 섣불리 하고 안 하고 할 문제도 아니다. 이는 엄연히 내가 시작하고 내가 선택한 일이 아니다. 오늘 시편은 이를 일깨운다.
땅이여 너는 주 앞 곧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 떨지어다
그가 반석을 쳐서 못물이 되게 하시며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
(114:7-8).
단지 신기하고 놀라운 흥밋거리가 아니다. 구경꾼으로 기웃거리다 설마, 하고 안일하게 다가가다 저와 같은 일을 당하였다. 엄히 일러,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이것이 우리에게 두신 사명이다. 맡기신 사역이다. 오히려 새끼를 떼놓고 눈물을 흘리며 수레를 끌고 묵묵히 이스라엘 땅으로 궤를 옮긴 두 마리의 암소가 귀하다. 하나님 앞에 번제물로 드려진 두 암소의 경우와 사람들의 망동이 대비된다. 한낱 미물에 불과한 것 같이, 기웃거리며 구경삼아 다가왔던 사람들보다 경건하고 엄숙하였다. 오히려 이 아침 저 두 마리 암소에게서 배운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 17:10).”
그런데 그게 어디 쉬운가? 누가 알아주길 기대하고, 혹시나 하는 바람은 본심이 되고, 괜한 기대로 하나님을 경홀히 여기며 마치 주신 사명을 흥정하듯 주와 타협하려 들 때가 또 얼마나 많은지! 가볍고, 탐탁지 않은 마음으로 꾸역꾸역 이 일을 수행하는 것을 두고 마치 대단한 의나 쌓는 것처럼… 그런 우리에게 성경은 단호하시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이것이 우리의 본분이고 올바른 자세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나 자신을 드린다는 것, 우린 그저 기뻐하며 횡재한 듯 들떠서 구경꾼으로나 몰려가 함부로 이 일을 감당해서는 안 된다. 묵묵하게 여호와의 궤를 싣고 온 두 마리의 암소처럼, 나는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 아멘.
때론 서로의 바른 길을 위해 듣기 싫은 권면과 교제도 필요하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10:16).” 이는 마냥 즐겁고 신나는 일만은 아니다. 누군가에게 뜯기고 씹히고 먹혀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하나,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8-10).” 이것이 우리가 서로에게 들려주어야 하는 말이다. 서로가 그러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위로 해야 한다.
인내를 더해줄 수 있는 것이 ‘코이노이아’다. 이는 헬라어로 ‘공유하다’, ‘공통하다’의 뜻을 가진 단어다. 서로가 서로에게 그리 행하여 줄 의무가 우리에게는 있다. 이는 먼저 하나님과 나 사이의 교제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요일 1:3).” 우리가 사귐이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함께 누림이다. 나아가 ‘너와 나’ 곧 성도의 관계가 그런 것이다.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7).”
이는 주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는 성도의 삶이다. 필연적인 관계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 3:10-11).” 우리가 가는 길에는 인내가 필요하다. 인내는 서로의 격려로 새 힘을 얻는다. 서로 피차…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3:13).” 곧 우리로 속하게 하신 교회의 목적은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라면, 그를 향해 나아가는 데는, 교회의 이유가 되는 ‘피차 권면하여’ 파선하는 자가 없도록 하는 데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 앞뒤 구절에서 더 긴밀하게 이를 논증하고 있다. ‘피차 권면하여, 잡고 있어야 하는 이유’가 저의 논거다. 곧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14).”
목적은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하는 자’가 되려는 것. 시작할 때 붙들었던 확신을 ‘끝까지 견고하게 잡기’ 위해 서로가 해야 할 일, 권하고 위하여 함께 걷는 것. 오늘 본문에서와 같이 어리석고 아둔한 백성은 이를 구경삼아 호기심으로 다가갔다. 기웃거리듯 안이함으로 여겼다. 주가 맡기신 사역을 그리 취급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히브리서를 통해 몇 개의 단어로 이 논거를 추론할 수 있다. ‘완고함, 죄, 유혹, 악, 믿지 않음’을 주목하며, 다시 읽어보면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히 3:12-14).”
‘완고하다’는 것은 자기 생각으로 딱딱해진 마음이다. 자기의지나 생각이 워낙 굳어져서 누가 뭐라 해도 그 군면이 다 튕겨져 나간다. 그 원인을 기자는 ‘죄의 유혹’으로 인한 것이라고 한다. 갖가지 유혹들이 있는데 결국 이에 이끌리는 것이 죄다. 유혹 자체가 죄일 수는 없다. 머리 위로 새가 날아다닐 수는 있다. 마틴 루터의 비유처럼, 그 새가 내 머리 위에 둥지를 틀게 하면 그것이 죄다. 성도로 사나 안 믿는 자로 사나 세상 즐거움을 마다할 수는 없다. 남들처럼 남부럽지 않게 살고자 하는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한데 이것이 내 안에 둥지를 틀기까지, 곧 하나님보다 먼저 위하고 바랄 때, 그것들이 어느새 나의 마음을 장악한다. ‘악’이란 이를 의도적으로 따르는 것이다. 어쩌다 그리 된 것이 아니다. 알면서도 마다하지 않고, 이내 그리로 향하는 것이다. “두렵건대 네 존영이 남에게 잃어버리게 되며 네 수한이 잔인한 자에게 빼앗기게 될까 하노라(잠 5:9).” 하여,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49:20).
그야말로 두려운 일이다. 죄의 본질은 하나님보다 더 좋아하는 모든 것이다. 그 마음을 내버려두는 게 죄의 유혹이다. 현실은 ‘거짓’이며, ‘헛것’임을 말씀을 통해 알면서도 세상을 뿌리치지 못하는 게 죄다. ‘믿지 못함’은 죄다. 결국 ‘완고한 마음’으로 인함이다. ‘스스로 잡고 있는 것’이다. 이를 지탱하려는 자기 힘과 노력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신뢰하지 않는다. 성경의 가르치심, 기다림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그러느니 세상이 더 빠르다. 아는 사람, 어떤 관례와 방식, 스스로 잡고 있는 무엇을 하나님 사랑하기보다 우선하는 것. 돈이나 명예, 권력이나 부유함이 죄가 아니다. 이를 얻고자 자기 마음을 내어주는 것이 악이다. 세상이 내 안에 둥지를 틀게 하였다. 성도의 교제는 고리타분하다. 믿는다고 하면서 선한 싸움은 없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 마음을 지키려는 인내가 없다. 그럼 당연히 악한 마음이 지배한다.
살인, 강도, 자살, 거짓말, 도둑질과 같은 것들은 순간적이다. 가령 그때에, 다윗에게 요나단과 같은 친구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일어나 수풀에 들어가서 다윗에게 이르러 그에게 하나님을 힘 있게 의지하게 하였는데(삼상 23:16).” 만일 그러한 상황에서 다윗이 혼자 떠돌아야 했다면 어땠을까? 하나님은 그때 요나단의 권면을 저에게 더하셨다. 우리는 서로의 믿음을 지켜야 한다.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막 13:13).” 물론 믿음과 기도는 개인적인 신앙이다. 이를 견디는 일도, 인내도 전적으로 개인적인 몫이다. 그러나 서로의 인내가 우리 안에 착한 일을 하게 한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주를 믿고 신앙 안에서 바르게 산다는 것이 떄론 참 외롭고 고독한 일이다. 아무런 성과도 없고, 되레 나의 길은 모호하기만 할 때, 이 길이 맞나? 싶다가 우울감이 또는 슬픔이 엄습할 때… 금세 어떤 유혹은 우리로 완고함을 더한다. 나를 걸려 넘어뜨리는 것은 실제 남이 아니라 나의 완고함이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며
야곱의 집안이
언어가 다른 민족에게서 나올 때에
유다는 여호와의 성소가 되고
이스라엘은 그의 영토가 되었도다
(114:1-2).
더는 애굽으로 돌아갈 수 없다. 다시는 홍해로 향해 나아가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 애굽은 없고, 홍해는 광야로 향하는 길일 뿐이다. 하나님이 나로 ‘살게 하시려고’ 오늘 여기에 두셨다. 이를 위해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 5:15).” 예전에 목사 안수식 때 어느 나이 드신 목사님이 설교 중에 하였던 말이 생각난다. ‘우리는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입니다.’ 하던, 그러므로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빌 1:27-28).” 이를 받아들임으로 묵묵히 앞으로 나아간 두 마리의 암소 같이 순종할 것인지, 여전히 기웃대듯 구경하다 멸망의 길을 자초할 것인지. 나는 하나님을 더욱 의뢰할 수 있기를.
바다가 보고 도망하며
요단은 물러갔으니
산들은 숫양들 같이 뛰놀며
작은 산들은 어린 양들 같이 뛰었도다
(3-4).
우리 가는 길에 물러갈 것은 물러가게 하시고, 함께 뛰놀게 하실 것은 기쁨으로 자로 앞장서게 하신다. 이는 내가 하는 일이 아니다. 내가 선택하고 내가 결정한 길도 아니다. 우리에게는 전적으로 주를 신뢰하는 믿음밖에 없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사 12:2).” 고로,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32:6).
시편의 이와 같은 말씀 앞에 나는 부복한다. 고개 숙여 엎드려 주의 인도하심만을 구한다. 고질적으로 나는 자주 우울하고, 늘 어디가 아프다. 차라리 못 견디게 아프면 드러눕기라도 할 텐데, 고통도 적당하여서… 그것으로 이처럼 주 앞에 앉을 수도 있지만, 그것 때문에도 자주 몹쓸 마음이 들기도 한다. 이제는 이런 이야기를 하지 말아야지, 하고 가급적이면 말씀만으로 말씀에만 집중하려 하다가도 그 말씀이 나의 처지와 상황에 상관이 없다면 그 또한 무슨 소용이겠나? 들린다면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보인다면 나 자신을 눈여겨 봐야 한다. 우리가 서로 서로에게 상관이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상관 있다는 것은 동사다. 서로 관련이 있고, 간섭을 하는 일을 상관한다고 한다. 말씀이 나를 상관하시듯, 나의 시시콜콜한 일상의 이야기가 말씀과 상관하고, 너의 이야기가 또한 나의 이야기와 상관함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권능이 임하시는 것을 체험한다. 말씀의 임재가 실제의 삶에서 실현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바다야 네가 도망함은 어찌함이며
요단아 네가 물러감은 어찌함인가
너희 산들아 숫양들 같이 뛰놀며
작은 산들아 어린 양들 같이
뛰놂은 어찌함인가
(5-6).
저것들이 물러가고 뛰놂은 내가 그리로 향하기 때문이고 나로 하여금 그 길이 주의 길임을 알게 하려는 것이었으니,
땅이여 너는 주 앞 곧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 떨지어다
그가 반석을 쳐서 못물이 되게 하시며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
(7-8).
이 놀라운 역사는 고스란히 나의 일상에서다. 피차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의 일이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고전 6:11).” 가끔은 막연하여 ‘이 길이 맞나?’ 싶을 때, 주가 나와 함께 하셨던 지나온 길을 떠올리고는 한다. 나 같은 자를 돌이켜 주의 길로 들어서게 하시기까지, 미처 내가 알지 못했던 수많은 이들의 눈물과 기도가 있었다는 것을 잘 안다. 눈물을 흘리며 수레를 끌고 여호와의 궤를 주의 땅으로 가져갔던 암소 두 마리를 생각한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3:5).” 나는 아무 것도 자랑할 것 없으나 그 쓰심에 감사할 따름이다. 아프면 아픈 것으로, 슬프면 슬픈 것으로.
누가 일찍 문자를 하며 기도를 부탁한다. 나는 저의 지난한 이야기를 듣는다. 출근 전, 오죽하니 그런저런 시시콜콜한 말을 내게 알리며 기도를 부탁할까? 늘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기억나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전에 어느 목사님이 늘 교회 앞 오토바이 수리점과 시비가 있었다. 소음은 물론 매연으로 교인들은 힘들어하고, 교인들이 끌고와 여기저기 주차하는 차들로 오토바이 주인은 힘들어하고, 그렇게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하루는 저가 술에 취해 교회로 찾아왔다. 목사는 마뜩찮아 술 깨고 다시 오라며 대화를 시비로 알고 돌려보냈다. 저는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며 횡설수설하다 돌아갔다. 다음 날 저는 가게 안에서 자살한 채 발견되었다. 목사님은 그 일로 한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주 앞에 회개했다. 그때 저의 말을 들어주기만 했어도, 평소 똑같이 시비를 걸게 아니라 조금만 주의 사랑으로 대했어도, 목사님은 밀려드는 죄책감으로 한동안 신음하였다.
나는 그와 같은 고백이 가끔씩 나를 찌른다. 누구와 마주하기 싫을 때, 저의 말이 말도 안 되는 것 같아 상종도 하기 싫을 때, 더는 그 기회가 없을 수도 있다! 나는 일부러라도 저 목사님의 이야기를 송곳처럼 바지에 넣고 다닌다. 순간순간 나를 찌름으로 행여하도 외면하지 않으려고, 오직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6-7).” 아, 이 놀라운 은혜를 나는 저이에게 들려주고 말해주어야 하는 사람이다. 때론 우울하고 힘들다가도 주의 놀라우신 은총이 송곳처럼 나를 찌르시기도 한다. 비록 나는 부족하나,
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
(86:1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