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
사흘 전에 잃은 네 암나귀들을 염려하지 말라 찾았느니라 온 이스라엘이 사모하는 자가 누구냐 너와 네 아버지의 온 집이 아니냐 하는지라 사울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니이까 또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니이까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말씀하시나이까 하니
삼상 9:20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시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
시 117:2
우리에겐 저마다 순수하였던 때가 있다. 더욱이 주의 부르심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신을 돌아보아,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말씀하시나이까….” 하던 날이 있었다. 베냐민 자파라는 말로 시작하는 오늘 본문은, 사울은 스스로도 ‘베냐민 지파일 뿐’이라는 겸손함이 어려있다. 베냐민 자파는 작지만 가장 용맹스런 지파로 정평이 나있다. “베냐민은 물어뜯는 이리라 아침에는 빼앗은 것을 먹고 저녁에는 움킨 것을 나누리로다(창 49:27).” 한데 저들은 이스라엘 총회와 맞서 싸워 지파 자체가 사라질 위기에까지 처한 경우도 있다(삿 20, 21장). 그때도 열한 지파를 상대로 1, 2차 전쟁은 승리로 이끌고 3차에서 패한 전력이 있다.
하나님의 기준은 우리와 달라서,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삼상 16:7).” 일찍이 예수님도 스스로를 이끌어 세례 요한에게 나가실 때 저를 가리켜,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마 11:8-9). 곧 하나님은 이력이나 저의 외모나 그 어떤 우리의 자격을 가지고 주의 일을 맡기시지 않는다. 다만.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시 37:5-6).
우리로 주께 맡기라 하고, 주가 이루신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갈 6:9-10).” 어제는 누가 왔고, 나는 더 이상 저의 가정도 그 신랑의 사역에 대하여도 관여하지 않기로 하였다. 다만 주가 주가 보내시는 저이인데, 스스로를 좀 돌보라고 이른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아직 마흔도 안 돼, 퇴행성관절염에 류머티즘까지… 그렇다고 측은지심이나 연민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일, 본인이 맡은 바 사역에 대한 열정이나 그 소명을 잃는 것에 대하여 더는 기운 빼며 다툴 게 아니었다. 어떤 말끝에 본인이 할 것이라, 처음 주셨던 그 마음을 가지고 목사 안수도 감내하겠다고 하는 말에 나는 찬사를 보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 것은 때가 되면 거둘 것이다. 우리 안에 시작한 이가 이루실 것이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약 1:2-3).”
지지와 호응이 필요할 때였다. 우리가 주를 섬김은 그저 막연한 처사가 아니라, 스스로를 돌보고 그 몸을 다스리며 건사하는 일에도 게으르지 말아야 할 거였다. 그리 내버려두는 것 자체가 주를 경멸하는 일인 것을 강조하였다. 필요하면 정신과도 상담도 필요할 것이다. 나는 저가 이스라엘의 네 번째 사사 드보라와 같이 용맹하게 주만 바라보고 달려가기를 기도하였다. “그 때에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자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는데 그는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에 거주하였고 이스라엘 자손은 그에게 나아가 재판을 받더라(삿 4:4-5).” 지금은 또 여자 목사도 교단마다 세우는 터라, 언제까지 요지부동인 저의 신랑만 붙들고 씨름할 게 아니었다. 저는 그냥 내버려두고, 자신이나 주의 길을 달려가게 하는 것이 나을 거였다. 때론 희생을 치러야 할 때도 있다. 언제까지 아이나 남편으로 발목 잡힌 듯 허덕일 수는 없었다.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이라(약 5:20).” 아이를 위해서도 그게 나았다. 나는 마음이 어려우면서도 스스로 그리 마음을 건사하는 저에게 주의 권능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하였다. 지혜자도 일러, “생명의 경계를 듣는 귀는 지혜로운 자 가운데에 있느니라(잠 15:31).” 이런저런 사정과 여건으로 미적거리기에는 언제 주가 오라 하실지 모른다. 그러니 “훈계 받기를 싫어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경히 여김이라.” 저는 냅두고, 본인이나 “견책을 달게 받는 자는 지식을 얻느니라(32).” 말씀으로 붙들려 달려가기를 말하였다. 여태 같이 씨름한 것은 그래도 주의 종인데, 부르심을 받은 자일 텐데, 하는 마음에서였는데 그를 다스릴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시었다. 나도 더는 그를 향하여 마음을 더하는 게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기도할 뿐 더는 뭐라 끼어들듯이 나서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서다. 그런 터에 저의 마음이 그게 옳았다.
주가 우리를 인도하신다. 우리가 생각하고 마음 먹는다고 되는 게 아니다. “너희의 구속자시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이신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게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너를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사 48:17).” 우리는 얼마나 엉뚱한 길에 한눈을 팔고 사는지, 물론 그 모든 게 이유와 사연이 있다. 들추고 보면 사연 없는 삶이 없고, 그 마음마다 숨기고 사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하나, “레바논에 살면서 백향목에 깃들이는 자여 여인이 해산하는 고통 같은 고통이 네게 임할 때에 너의 가련함이 얼마나 심하랴(렘 20:23).” 사는 게 고역이라는 말, 다들 나름 산다고 사는데 그 삶이 고된 것은 당연하다. 그것이 죄로 이어진 우리 인생의 숙명이다. 한데 이를 끊고 주의 자녀로 값없이 삼으신 것인데, 언제까지 그 일로 가련하게 살 것인지.
자신의 건강을 돌보는 것도 주의 일에 합당하도록, 그 일가를 일구어 가정을 건사하는 것도 주의 일에 합당하도록… 한데 그 길을 막는 것이면 그러한 열심이 오히려 허물이 되고 죄악이 된다. 더러는 방치하며 그것으로 관심과 사랑을 추구하는 경우도 있다. 더욱이 자신을 방기하듯 몸은 점점 비대해지고 여러 질병이 아우성인데도 그 고통으로 상대의 마음을 붙들고 있으려는 것은 죄다. 하나님을 우롱하고 자신을 땅에 묻어두는 일과 다르지 않다. 당뇨에 복부비만, 과체중에 갑상성에 온갖 질병을 가지고 스스로를 괴롭힐 뿐 아니라 상대를 어렵게 하는 일이니… 나는 대놓고 정신과 상담이든, 입원치료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스스로를 학대하듯 입이 좋은 것과 하고 싶은 것에만 즐겨하는 것이 그 몸을 맡기신 이에 대한 존중은 아니지 않겠나? 스스로를 자기 것이라 여기는 것보다 무서운 태만도 없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5-6).” 이에 따른 마음이 온전하지 못할 때 저로는 우리로서 할 수 있는 게 없다. 위하면 위할수록 서로를 망치는 일이다. 이는 자식 일이나 자신 일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빌 4:9).” 멋대로 살면서 주가 함께 하신다는 믿음보다 무서운 거짓 숭상도 없다.
하나님이 주의 종으로, 지도자로 세우시는 목적은 분명하다. 오늘 말씀에서도 “내일 이맘 때에 내가 베냐민 땅에서 한 사람을 네게로 보내리니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라 그가 내 백성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리라 내 백성의 부르짖음이 내게 상달되었으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았노라 하셨더니(16).” 내 백성, 내 백성, 내 백성 하시며 연거푸 세 번이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감추지 않으신다.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에게 예언하라 그들 곧 목자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자기만 먹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진저 목자들이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겔 34:2).” 두려운 일, 자기만 먹는 목자는 화 있을진저! 대체 우리는 무엇을 먹고 사는가?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이 말씀을 이르매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운지라(삿 2:4).” 말씀으로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8:3).”
그리 하는 일이 없으니 좀이 쑤셔서 애처럼 게임에 열중하고, 책도 읽는다 하여 무슨 책인가 했더니 추리소설이란다. 아니면 유튜브… 집에 처박혀 할 게 없이 용을 쓰는 거라. 전형적인 무기력증으로 저를 보건대 정신과적인 치료가 필요한 것이지 의지적인 문제로만 치부하기엔 스스로도 감당이 안 되는 지경이었다. 그 또한 뭐라 해서 말을 안 들으면, 어쩌겠나?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행 20:28).” 스스로 삼가 주의 일을 염두에 두지 않는데 더는 사역자로, 그의 곁에서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본인이 하겠다는 사모의 말이 나는 눈물겨웠다. 그러는 동안 저의 처지도 말이 아닌 거라. 인간적으로야 안타까울 뿐인데, 우리의 역할은 인지상정에 의한 연민으로가 아니다.
여호와께서는
영원무궁하도록 왕이시니
이방 나라들이
주의 땅에서 멸망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고아와 압제 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가 다시는
위협하지 못하게 하시리이다
(시 10:16).
주가 행하실 것을, “대저 여호와는 우리 재판장이시요 여호와는 우리에게 율법을 세우신 이요 여호와는 우리의 왕이시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이라(사 33:22).” 그러므로 우리의 역할은 오직 하나,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내가 저의 친정오빠나 친정아빠였으면… 하는 감정이 울컥, 하고 일 정도로 안됐고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0-21).” 부디 묵묵히 주의 길을 걸어가기를.
그렇게 오늘 본문은 이를 강조하심이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 1:26).” 하나님이 그렇게 택하심은…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27-29).” 우리로 스스로를 내세우며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었다. 곧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어떠할지를 주는 다 아신다. 이 귀한 선물 같은 사명을 바로 붙들고 서기를.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그러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 곧 우리는 누구도 구원할 수 없다. 스스로도 자신을 이길 수 없다. 당해낼 수가 없다. 이를 인정하는 것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히 6:11).” 오늘도 이와 같은 한 날을 또 허락하심은,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시 19:7-8).
이 한 날에, 우리를 부르시고 택하신 그 목적을 바로 알 때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롬 9:1).” 그의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은 대체 무엇일까? 같은 민족 유대인으로서 주를 알지 못하고 저버리고 사는 자들에 대한 사랑이었을 텐데,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창 17:7).” 하나님의 언약은 영원하시다. 오늘의 이스라엘은 눈이 가려져 여전히 모세오경을 붙들고 예수를 구주로 인정하지 못하는 일이었으니, 더는 그럼 소망이 없다는 소린가?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롬 11:25-26).” 택한 바 저의 백성이면, 돌이키실 때가 올 것이다. 이는 즉 이스라엘이 모두가 이스라엘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자식이 모두가 아브라함의 자식이 아니듯이 목사가 전부가 주의 종이 아니고, 믿는다고 믿는 이가 모두가 구원 받을 자는 아니었다. 곧 육신의 자녀가 아닌 약속의 자녀가 주의 백성이고, 창세전 이미 예정하시고 택정하신 자로 주의 나라에 거하게 하실 것이다.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롬 9:8).”
그러므로 저가 주의 부르신 주의 종이면 주께서 일으키실 것이고 돌이켜 주의 일을 하실 터… 더는 그 끝을 우리는 알 수가 없고, 다만 우리에게 맡기신 바 우리로 가라 하시는 길을 묵묵히 걸어나갈 따름이었다. 이에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빌 4:4-5).” 곧 주의 기쁨이 내 안에 있을 때 그 기쁨으로 또한 누구에게도 관용으로 주의 사랑을 더할 수 있을 것이다. 단지 우리의 인내와 수련으로 이 길을 걸어가는 게 아니었다.
이를 오늘 시편으로 축약하면,
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할지어다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시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
(117편 전문)
곧,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예배하리니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
(22:27-28).
어느 것도 주의 것이 아니신 게 없다. “내가 너보다 앞서 가서 험한 곳을 평탄하게 하며 놋문을 쳐서 부수며 쇠빗장을 꺾고 네게 흑암 중의 보화와 은밀한 곳에 숨은 재물을 주어 네 이름을 부르는 자가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줄을 네가 알게 하리라(사 45:22-23).” 주가 주님이신 것을 알게 하실 것이다. 우리는 다만 주를 바라보며,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출 34:6).” 곧 “네 하나님 여호와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심이라 그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너를 멸하지 아니하시며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잊지 아니하시리라(신 4:31).” 하여,
오직 하나님은 긍휼하시므로
죄악을 덮어 주시어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그의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의 모든 분을
다 쏟아 내지 아니하셨으니
(시 78:38)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시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
(117: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