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시편 119편 -3
49-72
사울은 사무엘이 정한 기한대로 이레 동안을 기다렸으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는지라
삼상 13:8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내게 소망을 가지게 하셨나이다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
시 119:49-50
사울의 심정이 이해가 된다. 블레셋이 군사를 소집하여 병거 삼만, 마병 육천을 거느리고 믹마스에 진을 쳤다(5-7). 전세가 불리하자 이스라엘 군사들이 숨거나 도망치기 시작한다. 또한 저들이 들고 있는 무기라고는 보잘것없는 괭이나 삽 쇠스랑이나 도끼, 무뎌진 쇄 채찍이 고작이었다. 평소 저들은 그러한 병기가 필요한 국가가 아니었다. 하나님이 통치하고 다스리심으로 그의 보호하심과 막아주심으로 살았던 민족이다. 그러니 생활도구인 보습이나, 도끼나 괭이를 벼리려고 해도 블레셋 사람들의 마을로 내려가서 대장간을 찾아갔어야 했다(20-21). 그러니 “싸우는 날에 사울과 요나단과 함께 한 백성의 손에는 칼이나 창이 없고 오직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에게만 있었다(22).
열악한 저들의 병력과 병기는 사울을 불안하게 하였던 모양이다. 출정에 앞서 주의 선지자 사무엘을 기다리는데 길갈에 오지를 않으니 백성들은 흩어지고 적군은 위협적이라, 것도 그럴 수 있었겠다(8). “사울이 이르되 번제와 화목제물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여 번제를 드렸더니(9).” 이는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거룩한 것이라… 일의 발단은 아들 요나단의 섣부른 판단으로 비춰진다. “요나단이 게바에 있는 블레셋 사람의 수비대를 치매 블레셋 사람이 이를 들은지라 사울이 온 땅에 나팔을 불어 이르되 히브리 사람들은 들으라 하니(3).” 실은 믿음으로 저는 적군을 향해 나아갔다. “너희는 마음을 강하게 하며 담대히 하고 …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이가 그와 함께 하는 자보다 크니.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이는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반드시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리라!(대하 32:7).” 하는 믿음이 본능처럼 저의 속에는 있었다.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빌 1:28).”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전적인 하나님에 대한 의뢰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오리니 주는 기사를 옛적에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이라(사 25:1).” 그러므로 이를 붙들고 적군을 향해 달려나간 요나단의 결행이 사울의 주저함을 극대화시킨다. 사람을 보고, 저들을 의지하려 했던 사울의 판단을 말이다.
사무엘을 기다리던 사울의 마음을 조급하게 한 것은 흩어지는 백성들이었다. “백성은 내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하는 저의 이유는 궁색할 따름이다(11). 하여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하지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 하니라(12).” 저의 말이 납득은 간다. 하지만 앞서 사무엘은 예배, 주께 간구함의 참 의미를 일깨운다. 즉 “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전 5:1).” 그러니 실은 그 중심의 일이다. 입으로나 즉흥적인 감정으로는 어떤 것인들 선하지 않을까?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사 29:13).”
신앙은 인내다. 이는 엄연한 싸움과 같다. 사울은 기다릴 수 없었고 그 이유는 사람들이 흩어지고 스스로는 상대할 수 없을 것 같은 적병들이 몰려왔다. 한데 성경은 일러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합 2:3).” 곧 하나님의 때가 있음을 알게 한다. 그래서 바울은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 8:25).” 곧 현실적인 상황과 하나님의 시간은 엄연히 다른 것을 말한다. 그런데 사울은 급박했던 상황만 생각하지 정작 하나님의 함께 하심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었다. 주변의 도움이 정작 우리가 바라야 할 것을 바로 보지 못하게 하는 경우를 본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121:1-2).
두리번거리며 여러 산을 둘러본다. 믿을만한 구석이 있을 때, 소위 등 비빌 언덕이 있을 때 우린 애타게 주를 바라는 마음이 부족하다. 은혜를 기다릴 마음이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스스로 어찌 해보려하거나 누구, 어디 도움을 구할 데가 있다는 것이 우리로 믿음의 간절함을 소멸시킨다. 성경은 엄연히 상황윤리(狀況倫理)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나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이유는 의미가 없다. 상황윤리는 1966년 조셉 플레쳐가 대중화시킨 논리다. 상황에 따라 정상 참작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부득이 그럴 수밖에 없다는 이와 같은 논리가 적용되면 성경의 절대주권은 무색해진다. 모든 상황을 고려할 때 ‘그럴 수밖에 없는 처지’가 우리 인생의 대부분이다. 그러나 우린 엄연히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사랑’으로 살아야 한다.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고전 13:6).” 실제 이를 적용하면 열에 아홉은 손을 저으며 감당할 수 없다고 한다. 한데 성경은 결국 이를 알게 하신다. 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다. 그럼에도 주를 바라는 것,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 3:17-18).”
‘그럴 수도 있지’ 또는 ‘그럴 수밖에 없지’ 하는 마음이 우리의 생활을 주도하면, 사울 꼴 난다! 나름의 명분과 이해로는 잘한 것이다. 전쟁에 앞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여야 했고, 이를 위해 자신이 인위적으로라도 그 일을 한 것은 잘한 일이다. 실제 우리 삶에 이와 같은 신앙이 팽배하다. ‘안 하는 것보다는 낫지’ 하고 여기는 것들도 많다. 그렇게 자신을 허용하고 합리화하면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은 와해된다. 스스로 괜찮다고 여기면 죄를 자복할 수 있는 기회조차 잃는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 28:13).” 저들이 주 앞에 돌아오지 못하는 것은 이미 스스로는 충분히 돌아왔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만하면 됐지, 하는 생각으로 말이다.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사 55:7).” 그러니 그 속에 자신이 뭐 그리 잘못했는지를 알지도 못한다. 자백할 것도 깨끗함을 받을 것도 없다. ‘뭘 또 그렇게까지 생각하는가?’ 하는 논리가 상황윤리다. 한데 성경은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9-10).” 솔직히 그러는 까닭은 사람을 보고 사람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늘 사울의 모습은 이를 일갈한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럴 수도 있었던 것도 실은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함이 아니라, 사람들을 붙잡아두기 위한 것이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 그러므로 우리의 절대적인 신앙이란 열에 아홉이 현실과 맞지 않다. 사람들과 부대낀다. 뭘 꼭 그렇게까지 믿나? 하는 반문을 갖게도 한다. 누가 내게 광신도, 환자, 심지어는 정신병자란 표현을 쓰는 것도 그럴 때이다. 적당하다는 게 실은 완전히 대적하는 마음보다 더 난해한 신앙인지도 모른다. 적당히 믿으면서도 오히려 잘만 사는 친구들이나 더 잘 사는 안 믿는 가족들로부터 조롱거리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사울의 오늘 처신이 뭘 그렇게까지 하나님이 싫어하실 일인가? 하는 의아한 마음도 든다. 더한 경우도 숨 막히게 넘쳐나는 현실에서 우리 신앙을 절름발이로 만드는 것은 상황논리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욜 2:13).” 왜 우리 하나님은 그럴듯한 제사보다 상한 심령을 더 사랑하신다는 것인지,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51:17).
하면 “주께서 혹시 마음과 뜻을 돌이키시고 그 뒤에 복을 내리사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소제와 전제를 드리게 하지 아니하실는지 누가 알겠느냐(욜 2:14).” 결국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이 문제다. 이를 인정하는 것이 자신을 스스로 놓아두는 일보다 어렵다.
오늘 시편은 이를 일거에 함축하고 있다.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내게 소망을 가지게 하셨나이다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
(119:49-50).
이는 나를 돌아오게 하실 때 한 올의 지푸라기 같은 심정이었다. 말씀이 나로 소망을 가지게 하셨고, 고난 중의 위로였으며, 나를 살리셨다. 하여,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51, 71).
돌아보면 나의 날들이 나를 살렸다. 죽을 것처럼 힘들게 굴던, 그래서 어린나이에 뭘 안다고 수면제를 모으고, 누가 어떻게 죽었다는 소리에 이를 듣고 안도하며 부러워하게도 했었는지… 가끔은 그 지나간 날들이 아득하여 내 일이 아니었던 것 같기도 했다. 문득 떠오르는 장면이… 남들이야 우습게 여길 이야기지만, 한참 그렇게 힘들어할 때가 중1이었는데, 그때 하나님은 한 소녀를 곁에 있게 하셨고 저의 개인적인 취향, 글쓰기를 참 좋아하던 아이와의 편지가 나의 첫사랑이었다. 수도 없이 썼다. 평소에 둘이 만나면 말도 잘 못하면서 어쩜 그렇게 편지로는 수다스러운지, 나는 저의 살아왔던 이야기에 눈물짓기를 읽을 때마다 그랬던 것 같다. 저도 그랬었을까?
나는 지금도 내 이야기를 쓰다 울 때도 있다. 그런 걸 아버지의 목회지가 옮겨지면서 우리는 평소처럼 편지만 썼을 뿐인데, 저의 동네에 어떤 소문이 돌았는지, 그 집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저의 삼촌이 인천까지 찾아와 협박조로 나를 윽박질러 더는 편지를 못 쓰게 하였는데, 그 위협이 ‘데리고 살라’는 것이었다. 그때 내 나이 고작 열다섯이었는데 말이다. 사랑이 참 무서운 것이란 걸 그때 알았다. 결혼은 책임이고 사랑의 결과라는 논리 정연한 저의 말이 나는 위협적이었고, 나는 겁먹은 채 아무런 언질도 없이 연락을 끓었다. 그때의 그 절벽, 내가 지금도 가끔씩 울다 깨는 때는 어릴 때 아이들의 괴롭힘이나 놀림이나 왕따 당하는 외로움 때문이 아니다. 더는 어쩔 수 없는, 절벽 같은 사랑. 그 끝에서 나는 종종 그녀를 생각한다.
뜬금없이 왜 그때 일이 떠오른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심정 막바지에서 나를 돌려세우신 게 주의 말씀이었다. 평생을 안간힘을 쓰며 살았던 것 같다. 지금도 그녀를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진다. 어쩌면 그때 우리가 거의 하루에 두 통씩 주고받았던 편지의 글자 수만큼 괴로운 날들의 연속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렸으니까, 그땐 몰랐으니까, 하고 고개를 저어보지만…
여호와여 내가 밤에
주의 이름을 기억하고
주의 법을 지켰나이다
내 소유는 이것이니
곧 주의 법도들을 지킨 것이니이다
(55-56).
말씀 앞에 나를 세우시기까지 내가 지나온 날들이 때론 가혹하고 서러웠다 싶은데, 또 다른 한편으론 그녀도 그랬을 것을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기도 하면서. 삶이란 온통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변명과 변명의 징검다리를 위태롭게 건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는 내게 주만 바람이란,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 5:13).” 어쩌면 모든 삶이 다 특수하고 유별난 것이겠지만, 당시 가난한 목사의 아들로 장애를 가진 지진아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겪었을 내 영혼의 어쩔 수 없었을 것을 생각하면 가엾다. 처연하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어린 게 참 애달프고 구슬프게 살았던 것 같다. 그런 절박함에서,
여호와는 나의 분깃이시니
나는 주의 말씀을 지키리라 하였나이다
(57).
하는 오늘 시인의 처연함이야말로 어떠한 인생인가를 짐작하게 한다. 그러니 무엇이라 구하든지 들으실 것임을 나는 확신하는 까닭이,
그는 흉한 소문을 두려워하지 아니함이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의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
(112:7).
주밖에 내가 의뢰할 이는 없다. 지혜자도 일러, “ 너는 갑작스러운 두려움도 악인에게 닥치는 멸망도 두려워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는 네가 의지할 이시니라 네 발을 지켜 걸리지 않게 하시리라(잠 3:25-26).” 그러므로
내가 전심으로 주께 간구하였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119:58).
오늘 시인의 당당한 요구가 나는 좋다. 말씀이 나로 소망을 갖게 하셨고, 돌이켜 주 앞에 세우신 것이니까. 그 말씀이 나를 책임지시고 나를 누구보다 붙드시고 인도하실 것임을. 주는 엄연히 내게 말씀하셨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사 55:11).” 또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 말씀이 살았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게 확실하면 그 말씀이 나로 나의 남은 생을 전심으로 주께로만 향하게 하실 것이다. 주여!
내가 내 행위를 생각하고
주의 증거들을 향하여
내 발길을 돌이켰사오며
주의 계명들을 지키기에 신속히 하고
지체하지 아니하였나이다
(59-60).
그러한 삶이기를. 저 모든 나의 지난날들이 주의 놀라우신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주의 사랑인 것을 확신하면서, 그 사랑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빌 3:20).” 세상에 더는 바라는 것 없다. 자식들 일이나 가족들 문제도 엄연히 주가 알아서 하실 것, 나는 다만 한 가지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후 5:1).” 그러므로
악인들의 줄이 내게 두루 얽혔을지라도
나는 주의 법을 잊지 아니하였나이다
내가 주의 의로운 규례들로 말미암아
밤중에 일어나 주께 감사하리이다
(61-62).
번쩍 눈을 뜨고 이처럼 이른 시간에 주 앞에 앉음은,
나는 주를 경외하는 모든 자들과
주의 법도들을 지키는 자들의 친구라
(63).
오늘도 말씀을 함께 나누고, 나의 사사로운 이야기 속에서 주의 살아계심이 드러나기를.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요일 3:21-22).” 그저 하나님으로 담대할 따름이다. 까짓 거, 그래봐야 인생인 것을.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땅에 충만하였사오니
주의 율례들로 나를 가르치소서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주의 종을 선대하셨나이다
(64-65).
나는 오늘 말씀으로 배짱이다. 이는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대하 7:14).” 말씀이 그렇다면 죽었다 깨어나도 그런 것이다. 사람, 별 거 없다. 다들 이래저래 어렵게 사는 인생을 지켜보다보면, 어제 오후에는 혼자 있는 집에서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 연속으로 방송하는 <나의 아저씨> 후반부 몇 회를 보다 울었다. 새삼… 인생이 참 다들 아프고 가엾어서,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이서, 그러니 더 무엇으로 위로를 삼아야 할 텐데 그런 가운데서 주를 알기란.
내가 주의 계명들을 믿었사오니
좋은 명철과 지식을 내게 가르치소서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66-67).
그러므로 내게 복이라면, 고난이 유익이었다. 나의 어린시절, 또는 지워지지 않는 기억의 어떤, 절벽 앞에서, 이제는 마음껏 주의 이름을 부르며 주만 바라고 무조건 말씀만 신뢰하고 사는 오늘의 내가 스스로도 부럽다. 누가 뭐라든지, 더는 사방이 다 절벽이라 해도,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71).
이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어서 세상 누구에게도 설명할 방도가 없다. 다만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신 7:6-7).” 나는 주의 것이다.
교만한 자들이 거짓을 지어
나를 치려 하였사오나
나는 전심으로
주의 법도들을 지키리이다
(69).
이는,
주는 선하사 선을 행하시오니
주의 율례들로 나를 가르치소서
(68).
주의 가르치심이 매일 매순간 나를 감싸고 인도하심이었다. 그럴 때에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46:1).
이와 같은 말씀이 내 것이 되었다. 곧 “산들이 떠나며 언덕들은 옮겨질지라도 나의 자비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나의 화평의 언약은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너를 긍휼히 여기시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사 54:10).” 이것이 나를 두고 약속하시는 말씀이라면, 오늘 시편의 말씀으로 모든 게 확증되는 셈이다. 다시 한 번,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좋으니이다
(71-7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