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전봉석 2022. 6. 5. 05:06

 

오늘 왕의 생명을 내가 중히 여긴 것 같이 내 생명을 여호와께서 중히 여기셔서 모든 환난에서 나를 구하여 내시기를 바라나이다 하니라

삼상 26:24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시 127:1

 

 

다윗을 따르는 사람이 육백 명 가량이 되었다. 더는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움직이고 숨어 지내기에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만큼 도피생활에 위험이 어려워졌다. 다윗이 십 사람들에 의해 발각되어 사울에게 전해졌다. 그들은 전에도 사울에게 다윗을 밀고한 적이 있다(23:19-29). 다윗은 스스로도 답답했을 것이다. 도대체 왜 쫓기고 살아야 하는지,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 언제까지 이와 같은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늘 하루하루가 긴장의 연속이고 전쟁과 같은 날들이었다.

 

우리 삶도 때로 그와 같은 것은, 늘 대적하는 마귀에게 늘 쫓기며 사는 것이다. 이를 주님은 도적이라 규정하셨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늘 우리 영혼을 훔치려는 도적과 같은 사탄과 우리를 지키려는 목자 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말씀하고 계신다. 특히 우리 스스로 자신이 믿음 위에 잘 서 있다고 할 때가 가장 위험하다고 바울은 알려준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이에 주님은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 26:41).” 하시며 우리의 실상을 말씀하신 바 있다.

 

이 길이 맞나? 싶은 때부터 언제까지 이러고 있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은 때도 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여러 생각이 뒤엉기듯 어지럽히고 마음이 어려울 때가 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겪는 회의와 갈등이 아닐까? 이런다고 이게 다 무슨 소용이 있겠나? 싶은. 그런저런 생각으로 마음이 어지러울 때 막내 동생이 전화를 하였다. 서울로 옮겨올 생각은 없는가, 하고 물었고 자신들도 기도 중인 교회 개척에 관한 생각을 말하였다. 이러저러한 자리가 있고, 누가 어떤 제안을 하였는데 나더러도 같이 하면 어떻겠나? 하는 그런 소리였다. 생각 아래 여러 생각이 모여들었고 그렇잖아도 뭔가 다른 방식이 필요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마음이 어지러운 상태였다.

 

문득 오늘 다윗의 심정을 생각하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언제까지 이유도 없이 쫓겨야 하는 것인지, 더는 숨어 다니기에는 따르는 인원도 많고, 그 생활도 말이 아니었을 텐데. 그런 저에게 또 한 번의 기회가 왔다. 저와 함께 하는 자가 고한다. “아비새가 다윗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오늘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넘기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내가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 번 찌를 것이 없으리이다 하니(삼상 26:8).” 어쩌면 이는 하나님이 주시는 다시없는 기회다. 여러 생각이 저를 어지럽혔을 것은 당연하다.

 

하나님의 뜻을 찾는다는 게 참 어렵다. 그럴 때 우리의 기준을 주님은 알려주셨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먼저 ‘주의 나라와 주의 의’를 구한다는 것. 세상은 그런 게 아니라며 여러 기회와 상식을 들추는데, 실은 이런저런 생활의 염려와 근심이 우리 마음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어서 주님이 들려주시는 말씀에서 숨겼던 마음이 들통난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34).” 오늘 우리에게 더하시는 날들의 수고와 괴로움으로 족하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으로 중심을 잡을 것인지.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시 1:6).

 

이런저런 일을 두고 왜 생각이 없겠나? 누가 어떤 제안을 하고 또는 무슨 일을 같이 하고자 할 때도,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 6:16).” 동생의 말에 나는 기도하면서 생각해보기로 하고 통화를 끊었다. 교회를 이루어간다는 일은 주의 일이고 나는 거기에 쓰인 바, 주의 종이면 묵묵히 어떤 명령이나 주가 이루시는 것이 있을 것이라 확신하였다. 아무 것도 안 하는 것 같고, 아무런 성과가 없는 것 같아도 그 일을 주관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라. 나는 동생에게 표현하기를 하나님이 답삭 들어다 옮겨 쓰실 때까지 나는 기다리겠다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인천으로 옮겨 올 때도, 와서도, 지금까지도 주가 이루시고 계신 것을 나는 안다.

 

다만 근신할 따름이다.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계 16:15).” 기회가 기회가 아닐 수도 있다. 오늘 본문의 핵심은 그것이다. 아비새의 말처럼 벌써 두 번째 찾아온 기회다. 모두가 잠들었다. 이쯤했으면 사울을 죽여도 그 명분은 마땅하다. 앞서도 저를 살려주었고 사울은 깨닫고 이를 후회하며 돌아갔다. 한데 다시 또 같은 일이 반복이었다. 할 때 다윗의 기준은 하나다.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하고, 다윗이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은 죽을 날이 이르거나 또는 전장에 나가서 망하리라(9-10).” 곧 이를 해도 주가 하실 일이지, 우리가 나서서 여러 이치와 타당성을 고려하여, 궁리하고 일을 도모하는 것은 아니다. 때론 그 상식이 또는 감정이 우리로 그릇 행하게 한다. 현실은 원래 호시탐탐 노리는 사탄의 간계로 이뤄져 있다. 그럴듯한 기회가 얼마나 많은지…. 이 사람 저 사람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 하고 그게 옳다고 말할 때도 많다.

 

이럴 때 바울의 고백은 놀라운 좌표가 된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실은 나의 이런 태도로 아내와 가끔 다툼이 될 때도 있다. 답답하고 이기적이고 우유부단하다는 것이다. 누구는 몰아세우듯 나무랄 때도 있다. 좋은 기회를 걷어차는 꼴도 있다. 괜찮은 생각이라 여겨, 난들 여러 생각이 시달리지 않겠나? 제일 질리도록 공격하는 것은 나의 숱한 갈등과 생각들이다. 

 

그러니 늘 가장 어려운 적은 내 안의 나다. 이대로 괜찮은 걸까? 하고, 더 나은 무엇을 해야 하는 게 아닐까? 늘 일의 진척은 없고, 어떤 성과도 없이 허송세월만 보내는 것 같은 때, 나의 우유부단함이 주의 일을 그르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럴 때면 노아를 생각한다. 노아는 방주를 지으라는 주의 명령에 무던히 따랐다. 저는 과연 갈등이 없었을까? 무려 120년이다. 기척도 없는 일을 두고 사람들의 시선은 곱기만 했을까? 처나 자식들의 반감은 없었을까? 성과도 없는 답보 상태에서 정작 물로 심판하신다는 하나님의 홍수 심판은 감감 무소식이고, 누구 하나 이에 감동하여 같이 주의 뜻을 따르는 것도 아니고. 언제까지인지 묘연하기만 한 상태로 있는데, 저마다 사람들은 잘만 살아가고, 나름의 성공사례들은 저의 비현실적인 삶을 비웃기라도 하듯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며 잘들 살아가는데. 과연 저는 무엇으로 버틴 것일까?

 

오늘 다윗이 그 답을 준다. 나의 허기진 마음에 대답한다. 누구보다 사울을 죽이고 이 모든 고통을 끝내고 싶은 심정이야 다윗보다 더한 사람이 어디 있겠나? 훗날 저의 아들 솔로몬이 아버지 다윗의 믿음을 이렇게 회고하는 듯하다.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는 우매한 자들의 품에 머무름이니라(전 7:9).”,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 16:32).” 곧 다윗은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이유만으로 번번이 죽음의 위협까지도 감수하였다.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는 기회조차 그리하지 않았다.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나니 너는 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삼상 26:11)." 저에게 절대적인 우선은 하나님의 권위이다. 주의 기름부음 받은 자는 곧 주의 처분만이 옳다. 

 

괜찮은 생각이고 좋은 기회라 해서 덥석 그리 할 일이 아니다. 누가 뭐래도, 하는 일도 성과도 없으면서(늘 그와 같은 자격지심이에도) 나는 교회를 염두에 둔다. 누구는 나더러 너무 무력하다 한다. 단순하다고도 한다. 그때마다 왜 이런저런 생각을 난들 안 하겠나? 저의 말이 백 번 옳다 해도 그 일은 내가 결정할 일이 아니다. 하나님이 부여하신 권위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것이란 소리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 예수님이 하신 일도 순전히 하나님 아버지의 뜻 안에서였다. 하나님과 하나이심을 아시면서도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 그러므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이를 분별하는 덴 절대적인 근거가 있다. 하나님이시다. 우리 손에는 말씀이다.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나니" 하는 다윗의 결의는 결코 개인적인 견해가 아니다. 저는 그야말로 절호의 기회를 박차고 나온 꼴이다. 남들이 다 비웃을 일이다. 하나 우리가 바라는 것,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 6:12-13).” 날마다 되뇌는 주기도문의 결론이다. 이 땅을 살면서, 이는 호기로움도 아니고 통큰 배짱도 아니다. 오롯이 하나님을 우러르며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일이다. 궁극적으로 우리의 바람은 주의 뜻을 거스를 때가 많다. 그럼에도 묵묵히 “대저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리라(합 2:14).” 주가 이루실 것이다. 

 

신앙은 이성도 감정도 아니다. 현실을 초월한다.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행 27:25).” 노아의 심정도 그러하지 않았을까? 설령 이러다 자기 생이 끝난다 해도, 저는 다시 눈을 뜨면 구원의 방주를 지을 뿐이었다. 정작 120년의 긴 시간이 저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 무던히 하루하루 흐르는 동안의 그 하루만이 전부였다. 아브라함의 신앙도 그러했다.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 알 같이 많을 것이란 주의 약속은 그 이상의 섭리였음을 저는 알고 있엇따. 우르를 떠나 25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나이는 들고 더는 생식 기능조차 다하지 못할 나이에 얻은 아들까지… 그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 하실 때도… 이는 자포자기가 아니다.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동일하였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히 11:39-40).”

 

곧 우리의 신앙은 그처럼 놀라워서 우리 것, 이상으로 우리를 통치하고 다스리신다. 세상적으로 보면 어리석고 답답한 모습이겠으나, 그래서들 저마다 뭔가 이뤄야 한다는 당위와 그 성과를 놓고 부흥을 견주고는 해도. 그래서 교회마다 사람 수에 연연하고 교회 규모를 늘리는 데 기를 쓰고, 사람들은 이를 보고 목회의 성공여부를 판단할지 모르겠으나… 나야 말로 모르겠다. 그런 건지 어떤 건지, 이래야 하는 건지 저래야 하는 건지, 이대로 더 가는 게 어리석을 뿐인지. 하지만 분명한 것은 말씀으로, 나는 말씀으로 노아처럼, 아브라함처럼, 새로 허락하신 오늘 하루로 전부이어야겠다. 다른 방도를 모색해야 한다면…. 주가 그리 이끄실 것이다. 오늘은 다만, 말씀뿐이라! 다윗의 결정이 나에게 들려주시는, 오늘의 주의 음성이다. 저는 또 다시 쫓기는 자로 숨어야 한다. 사울의 감정적인 결단이나 의지는 믿을 게 못 된다. 별 수 없다, 다시 광야로 쫓겨간다 해도.

 

“사울이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도다 내 아들 다윗아 돌아오라 네가 오늘 내 생명을 귀하게 여겼은즉 내가 다시는 너를 해하려 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어리석은 일을 하였으니 대단히 잘못되었도다 하는지라(21).” 자기감정, 그 판단과 기준의 허망함은 사울의 부르짖음으로 헛것임을 알 것 같다. 점점 더 중히 여기는 세상 것들에서 나는 무엇을 붙들 것인가?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약 4:15).” 하면, 주가 하실 것이다. 이대로 아무 것도 아니었던 것처럼 끝난다 해도,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그의 손을 펴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사 14:27).”

 

오늘 시편으로 이를 더욱 확고히 가다듬을 수 있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127:1).

 

하나님이 하지 않으시는 일은 모두가 헛되다. “거기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으로 말미암아 너희와 너희의 가족이 즐거워할지니라(신 12:7).” 하나님으로 복이 있는 자의 즐거움이란, “네가 누울 때에 두려워하지 아니하겠고 네가 누운즉 네 잠이 달리로다(잠 3:24).” 이는 든든하기 때문이다. 굳이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그 책임을 내가 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히 13:6).” 이에,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2).

 

실제로 나는 참 잘 잔다. 아내에게 핀잔 아니 핀잔을 들을 정도로 잘 잔다. 다들 어떻다고 해도 나는 이른 시간에 잠들었다가 새벽 몇 시에 눈을 뜨든지, 일찍 눈을 뜨는 대로 일어나 앉는다. 오늘은 새벽 두 시, 눈을 뜨면 세수를 하고 옷을 차려입고 말씀 앞에 앉는다. 길면 길게 말씀을 되새기고, 늘 나의 생활을 상관하는 말씀을 붙든다. 어제는 내 안의 ‘나발’과 내 안의 ‘아비가일’을 두고 종일 그 의미가 서로 새로웠다. 오늘은 어제 오후 동생과의 대화 때문에도 그렇고 이런저런 상황 때문에도 그렇고, 뭐라도 해야 하나? 하는 마음의 어려움이 풀렸다. 어디서 새로운 것을 도모해야 하는 것인지, 다시 알겠다. 아는 사람만 아는 일이지만, 주의 말씀은 살아있다. 나의 골수를 쪼갠다. 어쩜 그렇게도 시의적절하신지. 마치 누가 미리 언질을 주고 그리 본문을 정하고 기다리셨던 것처럼, 때를 따라 기가 막히다. 나에게 성경이란, 피할 수 없는 저울 같고, 하루를 비춰보는 거울같고, 매끼 먹어야 하는 양식이고, 치대며 기대어 널브러져도 상관없는 품 같다. 아침에는 늘, 하나님이 가깝다.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세어도

스스로 구원하지 못하는도다

구원하는 데에 군마는 헛되며

군대가 많다 하여도

능히 구하지 못하는도다

(33:16-17).

 

그러니 세상 기준으로 나를 몰아갈 게 아니다. 내가 나를 공격하는 생각들도, 당장 또 자리에서 일어서기 무섭게 불안이 또 걱정이 엄습하여 나를 잡아끈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전 2:11).” 실제 숨을 쉴 수 없을 것처럼 가슴이 답답하고 짓눌려, 하루에도 몇 번씩 약을 삼키고 숨을 고를 때도 주가 행하실 것을 믿는다. 살리시든지 죽이시든지, 이리 가게 하시든지 저리 가게 하시든지, 다만 말씀 앞에 나를 앉히신 이가 나로 행하게 하고, 완수하게 하실 것을… “여호와여 주는 나의 등불이시니 여호와께서 나의 흑암을 밝히시리이다(삼하 22:29).” 그러므로,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산성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

(59:1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