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전봉석 2022. 6. 9. 05:07

 

백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삼상 30:6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시 131:1

 

 

감정과 이성 사이에 평온함이 있다. 백성들은 당장 일어난 일에 다윗을 죽이려 하고 다윗은 그와 같은 다급한 때에 주를 찾고 저의 이름으로 새 힘을 얻는다. 블레셋 방백들의 반대로 이스라엘 자신의 민족과의 전투에서 제외되고 돌아왔을 때, 아말렉이 저들의 본거지 시글락을 습격하여 식솔과 모든 가산을 휩쓸어 갔다. 이러한 때에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여 새 힘을 얻는다는 것, “백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삼상 30:6).”

 

다른 한 부분은, 이에 저들이 주께 묻고 이 모든 것을 되찾으려 나섰을 때 이백 명 가량의 사람들이 가던 길에 지쳐서 기진하여 남겨두고 나머지 사백여 명만 가서 저들에게서 고스란히 가솔들을 구출하고 그 이상의 것을 취하여 돌아온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중간에 도태된 자들을 취급하는 일에 있어, “다윗이 이르되 나의 형제들아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치러 온 그 군대를 우리 손에 넘기셨은즉 그가 우리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이같이 못하리라(23).” 하고 공평하게 저들을 다스려 나누었다. “이 일에 누가 너희에게 듣겠느냐 전장에 내려갔던 자의 분깃이나 소유물 곁에 머물렀던 자의 분깃이 동일할지니 같이 분배할 것이니라 하고, 그 날부터 다윗이 이것으로 이스라엘의 율례와 규례를 삼았더니 오늘까지 이르니라(24-25).”

 

그뿐 아니라 그때 취한 전리품을 근방의 유다 장로들과 벧엘, 여아로엘, 여라므엘, 라갈, 겐, 홀마, 고라산, 아닥, 헤브론에 있는 자신들, 곧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왕래하던 모든 곳”의 사람들과 나누었다(26-31). 여기서 먼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데서 오는 위기와 그 위기를 당하였을 때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섰을 때에 모든 것이 해결되고 남음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를 훗날 다윗은 시로 남겨,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

잠시 후에는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 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37:9-11).

 

풍성한 화평으로 모든 게 해결되는 것을 두고, 바울의 설교 한 대목은 그 울림이 크다. 한 마디로 정신 차리라는 것.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살전 5:3-6).” 안이할 때에 고통이 임하고, 이를 피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지 않도록 ‘빛의 아들들답게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하는 말씀 앞에서 가만히 그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사탄은 가만히 기다렸다가 우리의 약점을 노린다. 자격지심, 우울감, 열등의식, 자만, 교만, 악의적인 마음을 틈타 우리를 공격한다. 저들도 시글락이 비었다는 것을 노렸다. 여자와 노인, 자녀들만 남았다는 것을 알았다. 순간 이를 알고 대처할 수 없는 것을 노린 것이다. 그래서도 성경은 일러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8-9).” 이를 위하여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 6:14-17).”

 

누가 오는 토요일에 검사가 시작되어 다다음 주에 수술을 하게 되었다. 대략 아는 바로 그 일로 지난 10년간 없던 생리를 다시 하고, 이런저런 몸의 반응으로 고통을 호소하였다. 우리 나이가 어중간하여 늙지도 않았는데 젊지도 않아, 늙음과 젊음 사이에서 몸은 마치 가을나무와 같이 낙엽을 말리고 떨구고 껍질을 말리고 벗겨 오는 겨울을 준비하는 것과 같다. 곧 잃을 것은 잃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것이다. 나는 저의 이런저런 사연을 위로하고, 염려하지 말 것을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이는 새로워지는 속사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오늘도 보면 ‘그럴수록’ 주를 의지하였던 다윗의 다윗다움을 새삼 돌아보게 되는 본문이었다. 앞서 요셉은 그 된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창 45:7).” 하고 이 모든 일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것과 같이.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후 1:8-9).” 이 놀라운 믿음만 견지할 수 있다면 무엇도 두렵지 않을 것이다.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이를 다시 솔로몬의 시로 읽어본다면,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127:1-2).

 

우리의 평안함은 잠으로 나타나면서 안식을 주시는 이가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한다. 어디서 읽은 내용 중에 미국인들 가운데 50% 이상이 수면제 없이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그중 70% 이상이 일상을 사는 데도 수백 가지의 안정제를 복용해야 한다고 한다. 저들은 모든 문제를 정신과적인 일로 연계하여 상담을 기본원칙으로 하여 우리의 문제를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결국은 우리가 감정을 통제하지 못할 때 범죄에 이르게 된다. 오늘 본문에서도 “백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5).” 순간적이고 우발적인 감정이 걷잡을 수 없는 일을 도모하는 것이다. 이에 다급할수록 주를 의지하였던 다윗은,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이 두 상태를 두고 새삼 생각할 게 많아진다. 지금 다윗도 동일한 처지였다. “(다윗의 두 아내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과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도 사로잡혔더라)(4).” 그 속은 또 오죽했을까?

 

같은 일을 겪으면서 서로 다른 행동을 취하는 것은, 화를 다스릴 수 있는 것은 정신과적인 문제로 상담과 약물이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약 1:19-20).” 곧 이를 두고 솔로몬은,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여도 마음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잠 14:29).” 즉 화를 낸다고 해결될 문제는 없다. 분을 내어도 하루가 가기 전에 화해하라는 바울 사도의 권면은 우리의 약함을 잘 알기 때문이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엡 4:26).” 그럴 수 있는 길은 누구를 겨누어 자신이 분을 표출하고 보복하려 하기보다 주께 아뢰고 주를 향하여 토해내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었다. 훗날 다윗은 이를 시로 표현하는데,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

(37:8-9).

 

욱, 하고 그럴 수 있는 일이 어디 한둘인가?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으로 서로는 ‘심신미약’을 들어 죄악이 아닌 병약함으로 이를 다스리려고 하는데, 그로 인한 사회적비용이 어마어마하다. 곧 우리의 위기는 우리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온전하게 한다. 그러니 성경은 일러,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호 6:1).” 우리 스스로 해결하려 할 때 악이 악한 것을 알지 못하게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문제로 문제 이상의 것으로 풍성하게 하시고자 하는 응답이 있다. 그래서 일러,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허튼 데 기대고 의지하느라 마음을 빼앗기고 정신이 팔려, 모두가 그러면 그런가보다 하고 부화뇌동해서는 안 된다.

 

특히 민주주의를 어느 때보다 우월한 제도로 여기는 시대를 살면서 우린 얼마나 다수의 의견에 맹목적으로 찬동하며 끌려 다니고는 하는지 모른다. 사역이 우선이다. 사람보다 주의 뜻이 먼저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신 15:7-8).” 오늘 본문 마지막 부분에서 다윗의 처사는 이를 실천하는 본이 된다. 앞서 악의적이고 불량한 자들은 기진하여 남겨진 이백여 명의 동지들에게도 야박하였다. 하지만 다윗은 이를 저지하였고 규례로 세우고 뿐만 아니라 곁에 있는 이들과도 나누었다.

 

이는 성경의 가르침이다.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눅 6:35).” 말이 쉽지 그게 어디 가능한가싶지만,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약 2:8).” 이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 다음으로 중요한 이 땅에서의 과업이었다.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막 12:31).” 그만큼 이웃 사랑하기가 어려운 일이어서, 자신을 사랑하는 것, 것도 자기 몸을 사랑하는 것 같이 하라는 말씀은 매우 실질적이다.

 

어제는 결국 치과에 가서 다음 주에 어금니를 빼기로 하였다. 며칠째 치통으로 시달리다 더는 참을 수 없어 우선은 그리하기로 하였다. 왜 성경은 우리 몸을 딱 짚어서 ‘자기 몸을 사랑하는 것 같이 하라.’ 하셨는지 알겠다. 몸의 통증은 군더더기가 없다. 아프면 고통스러운 곳이고, 고통스러울 때는 아무 생각도, 의미도, 고상한 말도 다 필요 없다. 죽겠으면 으악, 소리 나는 법이다. 몸은 정직하고 단순하다. 치통, 두통, 허리 통증 같은 경우 일상의 흔한 일이나 우리로 꼼짝 못하게 한다. 그렇듯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 이는 고상을 떨며 있는 것 중에 어디 얼마를 기부하고 화사하게 포토라인에 서서 우아를 떠는 그런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고후 8:2).”

 

보면 것도 신기한 것이 없는 가운데 더욱 나누게 되는 일이다. 누가 교회를 후원하고 헌금을 보내는 일에 있어 저의 형편을 모르는 바가 아닌데도 당장 아쉬운 자신의 쓸 것을 먼저 고려하지를 않는다. 주의 교회를 이뤄 가는 데 있어 누구는 먼저 주의 것을 돌리고 누구는 먼저 자신의 것을 챙기고도 아까워서 시늉만 낸다. 그러면서도 주여, 주여 하는 이들의 특징은 또 자신이 한 일은 일일이 다 그 공로로 기억하며 살았다. 내가 어떻게 했는데, 하는 식으로,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 7:22).” 다음 내용은 차마 두렵기도 하여 ….

 

오늘 시편은 이에 따른 결과라고 할까? 우리의 평안이 주를 바라고 의뢰함으로 전부였다는 것을,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131:1).

 

주신 바 자신을 바로 아는 게 지혜롭다. 물론 남을 부러워할 수도 있고, 격세지감도 들고 열등감도 생기고 할 수 있으나 그렇다고 뭐? 스스로 애써 수고하면 된다는 논리는 모순이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나는 개인적으로 이 말씀을 자주 음미한다. 어떠하든지 마음이 요지부동일 수 있는 길은,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 4:10).” 하면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사 57:15).”

 

주의 뜻은 언제나 우리의 생각을 능가하신다. 당한 처지보다 이상적이며, 현실보다 최상을 준비하셨다. 당장의 것에 헉, 하는 분노하는 마음으로는 이를 감당할 수 없다. 곧 능력 밖의 일을 두고 씨름하는 것보다 어리석은 일도 없다. 이를 자존심 상해하면 더는 뭐라 할 게 없다. 다들 높은 이상을 꿈꾸며 살지만 딛고 선 땅은 협소하고 모자라서,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전 9:25).” 곧 오늘 나에게 허락하신 분량으로 충성하는 일, “그러나 우리는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그 범위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고후 10:13).”

 

남 앞에 기죽지 않고 싶은 마음이야 누가 모르나. 누구처럼 뽀대나게 으스대고 살고 싶은 마음이야 누군들 없다 하겠나? 그러나 비루하다 해도 또는 으리으리하다 해도 모든 게 다 지나가는 것으로 헛될 뿐인 것을. 도리어 있다, 괜찮다, 적당하다 하는 것으로 자신이 취하고 누리었던 것들로 인해 그만큼 주를 바로 알지 못하는 것이었으니,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기어이 싫으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고! 한데 우리는, “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골 3:1-3).” 그러니 누구더러 어쩌라 마라 할 수는 없는 것이고,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2).

 

이와 같은 평온을 어찌 설명하고 가르친다고 누가 바라고 구할 수 있겠나? 결국은 제멋대로 살다 가는 게 인생이라며, 그래서 여한이 없다는 데 그럼 어쩌겠는가? 주가 다루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두고, 그게 사람이든 일이든 용 쓸 거 없다. 나는 어제 또 새로 간 치과에서 이런저런 설명을 하며 발치 후 인플란트가 어떻고, 뭐가 어떤데 그 비용이 어쩌고… 하는 말에, 나는 가난한 사람이라 거기까지는 아직 모르겠고, 우선 아픈 것만 치료하고 봅시다, 하고 저의 말을 막았다. 돌아와 나의 설명에 아내는 뭐라 한참 지청구를 퍼부었지만… 그런저런 일에 별로 개의치 않는 것은,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행 26:29).” 이와 같이 나는 주 앞에서 확고하기를,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