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94편 / 복수하시는 하나님
220612 주일
시편 94편
복수하시는 하나님
들어가는 말
“세계를 심판하시는 주여 일어나사 교만한 자들에게 마땅한 벌을 주소서(94:2).”
‘이웃을 사랑하라’ 하시는 말씀에는 항상 ‘네 몸(자신)을 사랑하는 것 같이’라는 전제가 붙는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마 19:19).” 더하여,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22:37-39).” 바울도 덧붙여,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롬 13:9).”
곧 누군가를 사랑한다 할 때 이는 ‘자기 몸’, 곧 ‘자신을 사랑하라’는 것 같이 하는 일이다. 악의 본질은 ‘자기 판단’으로 정의 된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는 그런 전제가 없으면서, 사람을 사랑하는 데는 왜 ‘자기 사랑’을 먼저 그 전제로 두시는 것일까? 가령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누구보다 자기를 사랑함으로 돈을 사랑한 자들이다. 그래서 저들은 세리나 창녀, 죄인들과는 격이 떨어져 어울리지 않았다. 이를 두고 예수님은 심히 노하셨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마 12:34).”
여기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잃으면, 자신을 향한 사랑도 잃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가령 처음 사람의 경우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 3:6).” 앞서 저들은 일체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사탄이 말하길,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5).” 하고 말하였다. 유추해보면 하나님으로 만족할 수 없는 마음을 일으키면서 자신들로 하나님처럼 되게 하였다. 이미 충만하였던 것에 하나님 같이 되고자 하는, 자기 사랑을 앞세우게 한 것이다. 이것이 모든 죄의 정의다.
이를 성경은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 2:13).” 하고 죄악의 특징을 설교하였다. 먼저는 ‘생수의 근원 되신 하나님을 버린 것’이고, 다른 하나는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이다. 정리하면 하나님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심리가 스스로 하나님을 자처하는 마음을 갖게 한 것이다. 고로 죄는 ‘하나님의 사랑을 버린 것’이다.
하면 우리가 누구를 사랑할 때 자기를 사랑하듯 해야 하는데, 그 자신은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8복의 소유자로서 자신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안 그러면 모든 선행과 의로움과 악행은 동일해진다. 곧 하나님 사랑을 거절하는 모든 사랑은 미움이고 저주가 된다. 이를 ‘터진 웅덩이’라 하였다. 애쓴다고 애쓰지만 그 모든 게 허사라는 소린데, 경고는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계 2:4).” 이에 오늘 시편은 복수하시는 하나님으로 이를 회복하지 못할 때 그에 따른 심판의 경고다.
본문 이해
시편 94편은 복수하시는 하나님으로, 1연은 1-7절: 하나님의 보응을 호소한다. 저들은 하나님이 하나도 모르는 것처럼 행세하며 믿는 자들을 공격한다. 2연은 8-11절: 악에 대한 하나님의 엄중하신 경고다. 3연은 12-15절: 의인도 악인과 같이 징계를 받지만 결코 버림을 당하지는 않는다는 진술이다. 4연은 16-19절: 하나님은 반드시 의인을 위로하고 구원하신다는 확신이다. 마지막 5연은 20-23절: 악한 재판장으로 표현되는 자들에 대해 하나님이 복수하실 것임을 선언한다.
1. 하나님의 사랑을 저버린 사람들에 대하여
“여호와여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빛을 비추어 주소서(시 94:1).”
악한 일에 참들 ‘열일’한다. 퇴임한 대통령 사저 앞에서 저주의 데모로 밥벌이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특히 개인방송을 하며 온 힘을 다해 남을 판단하고 비난하는 자들도 있다. 결국은 돈이다. 바리새인들의 악독도 근본은 돈이었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눅 16:14).” 옳고 그름의 판단에 따른 게 아니다. 믿기지 않는 액수의 돈이 저들에게 후원된다. 모 인사는 국회의원에 출마하며 수억 원의 돈을 벌었다. 저들의 밥줄은 까대는 것이다.
상대를 비난하고 저주하는 것은 물론 설령 그 일로 고소라도 당하면 돈은 그 이상으로 모여든다. 그러니 ‘상대 까기’, ‘모두 까기’, ‘돌려 까기’로 시청자들의 가려운 데를 긁어주는 게 일이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만 구독자 수가 수만 명이고, 방송 중에 격한 욕설이나 막말이 나오면 사람들이 만원, 오만 원, 십만 원… 적지 않은 돈을 쏜다. 그때마다 대화창에는 폭죽이 터진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다를 게 없다. 이제 더는 같은 편은 없다. 닥치면 깐다. 까대면 돈이다.
그런데 이게 오늘에 벌어지는 일이 아니란 소리다. 바울은 경고하기를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고전 15:34).” 결국 이와 같은 짓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늘 시인은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여” 하고 연거푸 부르고 “빛을 비추어 주소서” 하고 아뢴다. 곧 이 모든 게 어둠의 일이기 때문이다.
복수는 되갚음이다. 우리 속에 그와 같은 본심이 있다는 소리다. 하나님은 이를 허용하지 않으신다. 속이 터져 살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래도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 12:19).” 이는 상당히 중요한 사실로 옳은 말들도 때론 저주보다 무겁다. 가령 욥기서에 나오는 욥과 욥의 세 친구들의 말이 그런 것이다. 모두가 옳은 말로 서로를 정죄한다. 훗날 하나님은 이 모두를 악하다고 판단하셨다. 우리의 옳고 그름은 하나님 외에 판단하실 이가 없다.
“세계를 심판하시는 주여 일어나사 교만한 자들에게 마땅한 벌을 주소서(2).” 오늘 시인은 그래서 주께 아뢴다. “여호와여 악인이 언제까지, 악인이 언제까지 개가를 부르리이까(3).” 우리가 이 말을 서로에게 하면 죄다. 그러나 주께 아뢰면 탄원이다. 기도가 된다. 그런데 지혜자의 말처럼 “악한 일에 관한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아니하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는 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전 8:11).” 그러다 보니 스스로들 맞서서 비난하고 정죄한다.
오늘 시편 4-7절까지는 저들이 마구 지껄이고, 오만하게 떠드는 것에 대해 주 앞에 고하고 있다. 주의 백성을 짓밟는다. 그것도 과부나 나그네, 고아와 같이 자신들보다 약한 자들에게 더 잔혹하게 군다. 심지어 같은 국민을 개, 돼지로 비유하는 인사도 있다. 저들은 “말하기를 여호와가 보지 못하며 야곱의 하나님이 알아차리지 못하리라 하나이다(7).” 즉 하나님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것이다. 한데 이를 덩달아서 방송하는 목사도 있다. 모 인사는 곧 목사고시를 앞두고 공공연히 저들 대열에 합류하기도 한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롬 2:4).” 바울 사도의 경고가 저에게는 들릴 리가 없겠다.
그래서 시인은 절규한다. “백성 중의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는 생각하라 무지한 자들아 너희가 언제나 지혜로울까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8-9).” 백성이라면 우리가 같이 주의 자녀이어야 하지 않겠나? 그런데 “뭇 백성을 징벌하시는 이 곧 지식으로 사람을 교훈하시는 이가 징벌하지 아니하시랴(10).” 하는 말씀에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으니…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느니라(11).” 우리의 이 어리석음과 자기 멋대로 구는 일에 대하여, “여호와여 주로부터 징벌을 받으며 주의 법으로 교훈하심을 받는 자가 복이 있나니 이런 사람에게는 환난의 날을 피하게 하사 악인을 위하여 구덩이를 팔 때까지 평안을 주시리이다(12-13).” 우리는 하나님께 아뢰고 바랄 뿐이다.
2. 자기 백성의 억울함을 아시는 하나님의 복수에 대하여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며 자기의 소유를 외면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심판이 의로 돌아가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가 다 따르리로다(14-15).”
우리가 나설 일이 아니다. 저런 자들의 특징은 누가 뭐라 하면 더 극성이다. 하나님도 아신다. 특히 주의 자녀가 당하는 일에 대하여, 하나님은 초미의 관심을 기울이고 지켜보신다. 시편 7편에서 다윗은, “그가 웅덩이를 파 만듦이여 제가 만든 함정에 빠졌도다(7:15).” 하고 원수의 결국을 보았다. 이어서 “그들이 내 걸음을 막으려고 그물을 준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 그들이 내 앞에 웅덩이를 팠으나 자기들이 그 중에 빠졌도다 (셀라)(57:6).” 이는 결국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신다는 결론이다. “나를 지키사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놓은 올무와 악을 행하는 자들의 함정에서 벗어나게 하옵소서 악인은 자기 그물에 걸리게 하시고 나만은 온전히 면하게 하소서(141:9-10).”
우리의 기도가 주께 상당될 때, “누가 나를 위하여 일어나서 행악자들을 치며 누가 나를 위하여 일어나서 악행하는 자들을 칠까?” 하고 오늘 시인은 자문한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내게 도움이 되지 아니하셨더면 내 영혼이 벌써 침묵 속에 잠겼으리로다(16-17).” 주가 도우시고, 주가 모두 담당하시는 것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내 자식이 어디서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근심하고 있을 때 그 부모는 당연히 눈이 돌아간다. 하물며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를 보시면서 가만히 계시겠나? “여호와여 나의 발이 미끄러진다고 말할 때에 주의 인자하심이 나를 붙드셨사오며, 내 속에 근심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18-19).” 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만 아는 고백이다. 곧 “여호와는 나의 요새이시요 나의 하나님은 내가 피할 반석이시라(18:2).” 하는 이 놀라운 사실을 누가 알겠나? 바로 주의 자녀들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대신 갚아주신다. “그들의 죄악을 그들에게로 되돌리시며 그들의 악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끊으시리니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 그들을 끊으시리로다(94:23).” 곧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어려워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는 것을 두고만 보고 계시지는 않는다.
나오는 말
앞서 우리로 이웃을 사랑하라 하실 때 왜 자신을 사랑하는 것 같이 사랑하라 하셨는지를 살펴보았다. 자신을 사랑하는 일의 극과 극은 스스로 우물을 파서 터진 웅덩이에 물을 담으려는 사람과 그와 같은 마음을 주께 아뢰고 맡기려는 사람이 있다. 곧 ‘터진 웅덩이’는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모든 것을 뜻한다. 때론 우리의 돈이 터진 웅덩이다. 가족을 사랑하는 것이 터진 웅덩이다. 성공과 출세를 바라는 노력이 터진 웅덩이다. 이는 모두 사람으로부터 인정 받고자함인데,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눅 16:15).” 대표적인 예가 바라새인들이었고, 오늘 날 이와 같은 자들이 판을 친다. 왜?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14).”
오늘 시편은 비탄시이다. 악인들의 흥왕함이 우리를 괴롭힌다. 사회를 어지럽히고 정의를 짓밟는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시 1:5-6).” 저들의 결론이다. 저들은 “불의한 법령을 만들며, 불의한 말을 기록하며, 가난한 자를 불공평하게 판결하여 가난한 내 백성의 권리를 박탈하며, 과부에게 토색하고 고아의 것을 약탈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 벌하시는 날과 멀리서 오는 환난 때에 너희가 어떻게 하려느냐? 누구에게로 도망하여 도움을 구하겠으며 너희의 영화를 어느 곳에 두려느냐(사 10:1-3)”
이를 반드시 하나님은 복수하실 것이다. “우리 하나님이여 저희를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대하 20:12).” 우리는 다만 주께 아뢰며, “여호와여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빛을 비추어 주소서(시 94: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