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전봉석 2022. 6. 11. 05:13

 

다윗이 이 슬픈 노래로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을 조상하고

삼하 1:17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 133:1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조상한다. 이어지는 다윗의 조가(弔歌) ‘활 노래’로 야살의 책에 기록한다. “죽은 자의 피에서, 용사의 기름에서 요나단의 활이 뒤로 물러가지 아니하였으며 사울의 칼이 헛되이 돌아오지 아니하였도다(22).” 이어 저들의 죽음을 슬퍼하고 강조한다. 다윗은 원수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며 비난과 원망이 아닌 ‘이스라엘의 영광’으로 칭송한다.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에 대한 예의다. 이를 알지 못해 아말렉 소년이 저들의 소식을 알리며 그 영광을 취하려 하다 죽임을 당하였다(1-16).

 

여기서 다윗의 영성을 새삼 목격한다. 원수의 죽음에도 그 불행을 안타까워하고 애도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일러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눅 6:35-36).” 우리가 우리를 괴롭히는 자를 어찌 대하여야 하는지를 알리셨다. 곧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롬 12:20).” 하고 바울은 덧붙여 설명하였다. ‘숯불을 그 머리에 쌓는다’는 것은 팔레스타인지역서 불씨를 중시여기는 것으로 비유됨이다. 베드로도 일러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3:9).”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하면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가능하다. 저 또한 주가 지우신 사람으로 저의 소행이 어떠하였든지 주의 섭리를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인정하는 일이다. 하면 오늘의 이런저런 개인방송에서 서로를 비난하고 헐뜯고 이를 조롱하는 행위는 모두 옳지 않다. 우리는 주의 영광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다윗은 이 일을 가드에 알리지 않았고, 아스글론 거리에도 전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것은 저들이 즐거워하며 개가를 부를까 염려했던 것이다(20). 이를 보면 우리가 무얼 하든지 주의 영광을 먼저 생각하게 하려는 데 오늘 말씀은 초점을 맞추는 것 같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먹고 사는 일, 자신의 건강을 돌보고 그 즐거움을 위하는 것 모두는 이에 속한다. 하여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벧전 4:11).”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는 마음이 다 숙연해진다. 나는 과연 그러한가? 하고 돌아보게 된다.

 

주를 가까이 하면서 감사한 것은 더는 예전의 일로 자책하거나 누구를 원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나의 나 됨을 두고 누구를 탓하거나 신세한탄을 하지 않는다. 이는 모두 주가 돌보신 일이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물론 어떤 기억은 여전하여 슬픔을 또는 그리움을 더할 때도 있지만 그것으로 얽매이지 않음은,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시 76:10).

 

나는 개인적으로도 이 시편을 사랑한다. 우리 안에 노여움이 없이 사는 사람이 누가 있겠나? 부모로 인한 것이든지 자식으로 인한 것이든지, 원수로 인한 것이든지 자신으로 인한 것이든지… 한도 끝도 없는 노여움의 출처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것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찬송이 되게 하신다. 후에는 감사하는 계기가 된다.

어느 선교사 사모님의 끔찍한 인생과 그의 감사가 한동안 나의 마음에 무거운 돌처럼 여겨졌었는데, 저는 일찍이 결혼하여 선교사의 아내가 되었다. 동방의 어느 오지에서 사역을 같이 감당하다 세 아들이 모두 10대도 안 되어 죽고 남편인 선교사조차 풍토병으로 죽었다. 저들을 파송한 본국에서는 사모님을 귀국하라 권하였으나 남은 사역을 감당하며 30여 년을 저들과 생활하며 선교를 하였다. 그러던 중 10대 불량배들에게 끌려가 집단 성폭행을 당하고 여러 날을 감금당하였다가 풀려났다. 오랜 시간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돌아와 저는 주일을 지키며 하나님께 영광을 올렸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126:5-6).

 

우리가 주를 경외한다는 것은 우리의 상식이나 이성을 초월하는 역사가 있다. 도리어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잠 17:9).” 나는 저와 같은 이야기를 들으면 숨이 막힐 것처럼 힘에 겨운데, 저 또한 저의 신앙과 의지로만 그 일을 감당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말씀이 저를 붙드셨고 소망이 환난이 숨기고 있는 소망을 저는 알고 있었다. 이는 오직 주만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만으로 감격하고 감사하는 것이다.

 

내가 자주 기억하는 인물 강영우 박사가 있는데 저는 중2 때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축구를 하다 얼굴에 공을 맞고 시력을 잃었다. 이를 치료하느라 2년여의 시간을 병원으로 전전긍긍하다 결국은 맹아학교로 입학하게 되었다. 그러기 위해 또한 긴 시간을 점자책으로 새로 글자를 익혀야 했다. 또래 아이들과는 무려 4, 5년의 차이가 나서야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연대 특수교육학과로 갔다. 주변에서 모두들 저를 불쌍히 여겼고 저 또한 몇 차례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다. 저는 연대 특수교육학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이수하고 하버드대로 국가지원학생으로 입학하였다. 후에 박사학위를 따고 고국에 돌아와 교수가 되는 것이 꿈이었는데,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맹인 교수를 받아줄 대학이 없었다. 결국 저는 유엔세계장애인인권위원으로 취직하고, 당시 미국 부시 정권의 자문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훗날에 저는 이 모든 삶의 질곡을 하나님께 영광으로 올리며 고비 때마다 절망과 낙심이 찾아올 때면 오히려 하나님은 이를 찬송으로 바꾸어 놓으셨다고 간증하였다. 저는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두 아들을 낳았고, 아들 역시 훌륭한 크리스천으로 성장하였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히 10:24).” 또한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잠 17:9).”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먼저다.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약 2:8).” 나는 이번에 설교원고를 작성하면서도, 내가 나를 사랑할 줄 모르면 결코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다는 데 새삼 감동을 주셨다. 나의 연약함, 부끄러움, 노여움이 찬송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을,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이와 같은 능력이 아니면 우리가 자식을 또는 부모를 이웃을 사랑하는 그 모든 사랑은 헛되며 자칫 악으로 치달을 수 있다. 곧 자식을 부모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 다시 말해 하나님의 사랑을 저버리는 모든 것은 하나님과 원수 되는 일이다. 하면 자신을 사랑한다 하는 것은 나를 향하신 주의 사랑과 그 놀라우신 섭리를 바로 아는 것이겠다. 일찍이 나의 부친은 늘 내게 ‘너는 하나님이 특별히 사랑하신다’는 말을 숱하게 듣고 자랐다. 내가 나를 두고 원망하고 좌절할 때면 뭐라 야단치다가도 그처럼 결론을 내리곤 하는 것인데, 그때는 그 말이 그렇게도 싫었다. 한데 오늘에 이르러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마 22:37-39).” 이 두 사랑은 한 통로로 이어져 있었다.

 

오늘 다윗이 사울과 요나단을 조상하며 지은 시는 히브리어로 지어진 시 가운데 가장 걸작으로 꼽힌다고도 한다(삼상 1:19-27). 특히 다윗과 요나단의 교제는 성도 간의 사랑을 나타내는 훌륭한 시청각교재 같다.

 

오호라 두 용사가 전쟁 중에 엎드러졌도다

요나단이 네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도다

(삼하 1:25-26).

 

이는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벧전 1:22).” 오늘처럼 자기 사랑이 강조되는 시대도 없었을 것 같은데, 자기를 사랑하는 것 같이 사랑하라 하심은 자기애나 자존감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이는 모두 허깨비로 몸이 원하는 것은 욕망뿐이다. 죄악이다. 세상이 주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 자기 안의 그 어떤 노여움이라도 이를 사랑하는 것 같이, 곧 주를 인정하는 것 같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었다. 이는 예수님이 정점이시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6).”

 

앞서 어느 선교사 사모님의 일화나 강영우 박사의 일화나… 우리 모두 개개인의 이야기 안에서 하나님이 어찌 함께 하셨는가를 찬송하고 경배하는 것으로, 자신을 사랑함으로 이웃-원수라도 사랑할 수 있고, 그 사랑은 곧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토대로 한다. 오늘 시편은 그리 읽고 이해하였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133:1).

 

모든 만남은 연합이다. 하나님이 우리로 곁을 같이 하게 하신 동료다. 하면 서로 화평하는 것은,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딤후 2:22).” 그러므로 자신을 돌아보아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일로써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약 4:4).”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우러르는 것.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2).

 

서로의 선한 영향력, 곧 주의 사랑이 증거되는 일은 보배로운 기름 같은 것이다. 서로 같이 말씀을 나누고 묵상을 나누며 삶을 나누고 숨김이 없다는 것은, 우리가 모두 기름부음 받은 자로 사는 사명이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서로의 고백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하는 이와 같은 신앙 위에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17-18).”

 

곧 우리의 나눔이 교회이고 이는 서로의 신앙고백 위에 세워진다. 하면 우리는 세상이 줄 수 없는 놀라운 것을 더하여 준다. 헐몬산은 안티 레바논 산맥의 남쪽 돌출부를 이루는 산으로 해발 2770미터에 이르고, 만년설로 덮였다고 한다. 아론을 빗대어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로 상징하는데, 시온의 산들은 그의 옷깃으로 주의 백성 이스라엘 민족을 상징한다. 즉 이는 시적인 대구법으로 교회를 통해 성도의 사랑이 끊이지 않음을 의미한다.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네 성 안에는 평안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함이 있을지어다

내가 내 형제와 친구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네 가운데에 평안이 있을지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너를 위하여 복을 구하리로다

(122:6-9).

 

곧 우리의 사랑이 예수로 말미암아 모두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행 3:16).”

 

주어진 한 날을 살면서,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을 사랑함이란 주가 나를 향하신 그 사랑을 느끼고 인정하고 사랑하며 사는 일인데, 단지 세상이 말하는 자기존중의 의미가 아니라 우리를 지으시고 오늘 여기에 두신 까닭을 알고 어떠하든지 주를 인정하는 것으로 사랑하는 것, 그것은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 곧 나의 이야기가 비천하게 나의 이야기로 그치는 게 아니라, 내 이야기 속에 하나님의 이야기가 나타나게 하는 것,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76:10).

 

하여,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133: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