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이름을 찬양하라
이 날에야 온 백성과 온 이스라엘이 넬의 아들 아브넬을 죽인 것이 왕이 한 것이 아닌 줄을 아니라
삼하 3:37
할렐루야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라 여호와의 종들아 찬송하라 여호와의 집 우리 여호와의 성전 곧 우리 하나님의 성전 뜰에 서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찬송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며 그의 이름이 아름다우니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
시 135:1-3
진정성에 대해 생각한다. 서로의 반목과 불신으로 나뉜 북 이스라엘과 유다를 하나로 이어주었던 다윗의 진정어린 눈물이 마음에 와 닿는다. 앞서 헤브론을 기점으로 유다의 왕이 된 다윗은 북쪽 이스라엘의 정권을 잡은 아브넬과 화친하려 한다. 이에 다윗의 신복이자 요압이 저를 살해하고, 이를 뒤늦게 알고 울며 금식하는 다윗의 모습이 유다는 물론 북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도 누그러뜨린다. “온 백성이 보고 기뻐하며 왕이 무슨 일을 하든지 무리가 다 기뻐하므로 이 날에야 온 백성과 온 이스라엘이 넬의 아들 아브넬을 죽인 것이 왕이 한 것이 아닌 줄을 아니라(36-37).”
서로의 얽히고설킨 그간이 감정이 앙금으로 남았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은 생각하는 것보다 복잡하다. 서로 남이면 남이어서 그렇고 가족이면 가족이서도 그렇다. 그런 가운데 우리의 필요는 인내다. 다윗은 이를 시로 지어,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37:7).
곧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눅 21:19).”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게 한다. 한 영혼을 얻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사연과 우여곡절이 따르고는 하는지. 이를 극복하는 길은 주를 의뢰하며 참고 견디는 것뿐이다.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히 10:36).” 곧 우리가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번영하는 것은 기정사실로 주의 약속이시다.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반드시 너를 돌보시고 네 의로운 처소를 평안하게 하실 것이라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 8:6-7).” 곧,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을 막론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곧
너희와 너희의 자손을 더욱
번창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너희는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 복을 받는 자로다
(115:13-15).
이는 보장된 것으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이와 같은 믿음과 의뢰가 우리로 견디게 하고 또한 기다릴 수 있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장된 사람들이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33-34).” 한데 이를 스스로 참지 못해 죄악을 서슴지 않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그러할 때에 “정직한 자를 악한 길로 유인하는 자는 스스로 자기 함정에 빠져도 성실한 자는 복을 받느니라(잠 28:20).” 이와 같은 말씀이 우리로 진정하게 한다.
말씀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그러므로 의인은 그 길을 꾸준히 가고 손이 깨끗한 자는 점점 힘을 얻느니라(욥 17:9).” 우리는 그 길을 꾸준히 가고 손을 깨끗하게 함으로 새 힘을 얻는다. 요압은 그 마음에 저를 용서할 수 없었다. 저는 동생을 죽인 원수였다. 왕이 저를 용서한다 해도 자신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러는 동안 저의 속은 또 오죽했을까? “의인의 길은 돋는 햇살 같아서 크게 빛나 한낮의 광명에 이르거니와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걸려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잠 4:18-19).” 이 확연한 구분과 차이를 안다면 성도로 주께 맡기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를 알 수 있다.
주일 아침, 누구의 이런저런 사연이 기도부탁과 함께 문자로 들어왔다. 나는 저의 생을 듣다보면 항상 마음이 어렵다. 뭐라 할 수 있는 위로나 격려의 말이 없어 가만히 저가 문자를 이어 말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다 늘 같은 위로의 말이지만 주를 의지함으로 주의 평안이 함께 하시기를.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빌 1:9-11).” 하는 마음으로 기도한다.
곧 오늘의 이런저런 어려운 사연이 주를 바라는 발판이 되기를. 하여 못났으나 그래도 친구가 목사라고 속에 감춘 말들을 그리 토하여 내고 기도로 부탁할 수 있게 하시는 이의 은총이 부디 저로 하여금 주의 인자하심을 알게 하여 주시기를. 한 생을 돌아볼 때 나도 내가 살았던 게 참 이러저러하였다 하고 서러운 것이 많았는데, 저의 이야기로 견주면 아무 것도 아닌 게 된다. 차마 저의 이야기를 글로 옮겨 올 수는 없다. 다만 “그들이 울며 돌아오리니 나의 인도함을 받고 간구할 때에 내가 그들을 넘어지지 아니하고 물 있는 계곡의 곧은길로 가게 하리라 나는 이스라엘의 아버지요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렘 31:9).” 하시는 약속의 말씀이 저의 것으로 들려지기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9).” 이것이 오늘 우리에 대한 정의다. 하면 주가 누구보다 더 잘 아신다. 다 아시는 주 앞에 내려놓는다는 것, 이는 우리 안에 만족함이 없는 허기진 영혼을 달랜다. 우리로 주 앞에 돌이켜 회개하게 하시려고, 나아가 주의 살아계심으로 찬송하게 하시려고…. 나는 저에게 해줄 말이 많으나 참는다. 입자 굵고 단단한 소금이 오기까지 한 여름 땡볕에서 염전을 쓸고 다녀야 하는 이의 수고가 따른다. 대나무는 싹을 튀우기까지 4년이 걸리고, 모든 농작물은 농부의 부지런한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
곧 오늘 내게 두신 일이라. 나는 저의 문자가 들어오면 하던 일을 멈추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고, 듣는 마음으로 주께 아뢴다. 그리고 적절한 성경구절을 떠올리고 저에게 일일이 답을 하고 주의 위로를 빈다.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빌 2:29-30).”
말씀처럼 이는 도리어 나의 부족함을 채우게 하심인 것을 이제는 안다. 왜 늘 ‘저런 자들’인가, 하고 마음이 어려울 때도 있었다. 누가 말하기는 네 곁엔 왜 늘 그러냐? 하는 반문도 들었다. 그런데 솔직히 인정하면 저의 이야기에서 나의 이야기를 듣는다. 더도 덜도 말고 딱 나 같은 자들로 하나님은 내 곁에 두시는 것 같다. 나는 처음에 목사로서 저들에게 어떤 위로와 격려의 말로 위로하고 주의 사랑을 전해야 할까 고민했는데, 이제는 저를 채움이 나로 주의 사랑이 채워져 가는 일인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히 13:17).”
곧 누군가에게 나 또한 그러하였고, 저로 인하여 오늘의 내가 건재할 수 있었다는 데 주께 감사한다. 남모르는 기도가 있었고, 아낌없는 마음과 후원이 오늘의 교회를 이루는 데 발판이었다. 내가 한 게 아니었다. 오늘 다윗을 중심으로 일련의 사태, 북 이스라엘의 아브네의 죽음과 이를 애도하는 다윗의 진정성이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 되게 하는 것을 보면서 생각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악을 선으로 갚으시는 이시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 45:5).”
오늘 시편에서도 우리로 찬양을 촉구하는 것과(1-3), 공히 그 이유와(19-21), 직접적으로 우리가 왜 찬양을 해야 하는지를 알게 하는(13-14), 시편의 구절을 두고 묵상하게 된다. 곧 정리하면 하나는 내가 싫든 좋든 나는 주의 자녀라는 사실과(4) 다른 하나는 그 특수관계, 하나님의 소유됨을 알게 한다(8-12). 결론적으로 이는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역사다(5-7). 아무 것으로도 이에 마맞설 수 없고(15-18), 그러므로 우리의 마지막에는 찬송뿐이다(19-21). 곧 우리 안에 두신 주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
할렐루야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라
여호와의 종들아 찬송하라
(1).
이는 의무이며 방어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 13:15).” 나는 누가 기도를 함께 부탁하며 저의 이야기를 하는 일에 대해 주의 영이 저와 함께 하신다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면 나는 무던히 염전을 갈아엎듯 여름 내내 물을 쓰로 다니는 일에서 소금이 오는 것을 목격하고 이를 들였다 놓았다 하는 주의 종인 것을 새삼 인식하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 17:10).” 왜냐하면 저들은 주가 값으로 사는 것이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롬 6:20).”
그 잃어버린 한 영혼을 얻기 위해 주가 행하신 놀라운 십자가의 사역을 우리는 잘 안다. 앎으로 이를 따른다. 우리의 예배란 곧 우리가 서로 주의 이름으로 함께 하는 것이었다. 주께 모여 찬송하는 것이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5:23-24).” 다들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나, 우리는 무던히 맡기신 바 그 사명을 준행하는 일이었다.
여호와의 집
우리 여호와의 성전 곧
우리 하나님의 성전 뜰에
서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찬송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며
그의 이름이 아름다우니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
(2-3).
이를 알고, 앎으로 나와 같은 하는 한 영혼을 귀히 여기는 데 있어 의무도 방어도 아닌 막중한 책임이었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하여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9:24).” 하면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골 1:10-13).” 이처럼 말씀을 찾고 연관 지어 누구의 일을 두고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야곱 곧 이스라엘을
자기의 특별한 소유로 택하셨음이로다
(4).
내가 뭐라고 나 같은 것을 들어 주의 일을 감당하게 하실까? 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제 굳이 그 답을 찾지 않는다. 나는 이제 나의 약함으로 누구의 사연을 또는 버의 어쩔 수 없음을 이해하고, 저의 형편을 같이하는 마음으로 주를 바란다. 느끼고 그 심정으로 주의 이름을 부른다. 노트에 적고, 생각날 때마다 주께 아뢴다. 고작 하는 게 그게 다라고는 하지만,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께서는 위대하시며
우리 주는 모든 신들보다 위대하시도다
여호와께서 그가 기뻐하시는 모든 일을
천지와 바다와 모든 깊은 데서 다 행하셨도다
(5-6).
주가 하신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날이 궂고 이래저래 몸은 어디가 아프고, 내 코가 석 자라 뒷걸음질 칠 준비가 된 사람처럼 의기소침할 때도 있지만 하나님은 적당하게 또한 감당할 수 있게 나를 보호하고 계신 것을, “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8-29).”
가끔은 내가 잘난 것이 없어서 다행이다. 우리 교회가 너무 보잘것없어서도 감사하다. 누구로도 주목받지 못하는 것이 위로가 된다. 이는 주만 바라게 하기 때문이다. 해서 나는 주목 받는 생이고 싶지 않다. 다만 “그가 목소리를 내신즉 하늘에 많은 물이 생기나니 그는 땅 끝에서 구름이 오르게 하시며 비를 위하여 번개치게 하시며 그 곳간에서 바람을 내시거늘 사람마다 어리석고 무식하도다 은장이마다 자기의 조각한 신상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나니 이는 그가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것이요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렘 10:13-14).” 하나님의 사랑이 사람의 수고로 막힐 때, 그 신음하는 영혼을 돌아보며 가히 참혹하기만 저의 오늘을 두고 주께 함께 선다.
안개를 땅 끝에서 일으키시며
비를 위하여 번개를 만드시며
바람을 그 곳간에서 내시는도다
(7).
그러므로 역사의 주권자는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하신다(8-12). 이사야도 이를 증언하여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사 12:2).” 그러니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고통은 주의 선하심을 인정하게 한다.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산다는 일은,
여호와여 주의 이름이 영원하시니이다
여호와여 주를 기념함이 대대에 이르리이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판단하시며
그의 종들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으시리로다
(13-14).
놀라운 것은 늘 내가 체험하고 누구의 일로 목격하지만, 우리의 노여움으로 찬송이 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1:12).” 하여 거짓되고 헛된 우상을 멀리하는 용기를 얻는 것이었다. 오늘 시인은 이를 열거하고 있었다(15-17).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를 위하여 경배하려고 만들었던 은 우상과 금 우상을 그 날에 두더지와 박쥐에게 던지고 암혈과 험악한 바위 틈에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땅을 진동시키려고 일어나실 때에 그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하리라(사 2:20-21).” 세상이 요지경인 까닭은 주의 영광을 더욱 드러내려 하심이다. 주께 피한다는 것, “열방 중에서 피난한 자들아 너희는 모여 오라 함께 가까이 나아오라 나무 우상을 가지고 다니며 구원하지 못하는 신에게 기도하는 자들은 무지한 자들이니라(45:20).” 저들의 무지함으로 우리는 안다. 앎으로 이를 멀리하고 경계하는 것. 하면,
이스라엘 족속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아론의 족속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레위 족속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19-20).
우리로 주를 송축하게 하시려고, 불가능한 의무와 어려운 환경을 조성하심으로 우리가 누구로 의지하고 무엇을 붙들고 살아야 하는가를 알게 하시는 것이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
(32:11).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150:6).
이것이 우리의 구별됨이었고 장차 도래할 주의 나라에서 우리가 누릴 영광의 거름이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에 계시는 여호와는
시온에서 찬송을 받으실지어다 할렐루야
(135:2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