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이 있으리로다
왕과 그의 부하들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 땅 주민 여부스 사람을 치려 하매 그 사람들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결코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맹인과 다리 저는 자라도 너를 물리치리라 하니 그들 생각에는 다윗이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함이나 다윗이 시온 산성을 빼앗았으니 이는 다윗 성이더라 그 날에 다윗이 이르기를 누구든지 여부스 사람을 치거든 물 긷는 데로 올라가서 다윗의 마음에 미워하는 다리 저는 사람과 맹인을 치라 하였으므로 속담이 되어 이르기를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은 집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더라
삼하 5:6-8
네 어린 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 자는 복이 있으리로다
시 137:9
언어의 힘은 대단하다. 아이들과 글쓰기를 할 때 한동안 나는 언어의 3요소인 사전적인 의미, 지시적인 의미, 함축적인 의미에 대해 설명한다. 곧 그 단어의 문자적인 뜻이 있고, 그것이 지시하는 의미의 숨은 뜻이 있고, 그것이 감추고 있는 함축적인 뜻이 있다는 것을… 그러므로 글이나 말이란 단지 읽고, 듣고 그 표면적인 전달로는 오해의 소지가 많다. 가령 ‘주먹이 운다.’ 할 때 주먹이 갖는 사전적인 의미가 있고, 주먹이 지시하는 의미가 있고, 주먹이 감추는 함축적인 의미가 있다.
싫든 좋든 우린 말을 하고 살고, 표현을 하며 산다. 특히 목사로 산다는 일은 설교는 물론 이와 같은 SNS를 통한 의미전달이나 상담이나 그 외에 소소한 것들까지, 말이나 표현을 많이 하며 살 수밖에 없는 위치이다. 이때 우리말의 검열은 성경이고, 성경의 의미를 벗어난 모든 말은 사견이 된다. 여하튼 오늘 본문에서 문맥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 그러나 그것이 함축하고 있는 뜻이 남다른 데 따른 사족으로 앞서 이러한 말들이 필요하였다.
오늘 본문은 비로소 다윗이 하나 된 이스라엘의 왕위에 올라 33년을 다스리는 것을 본다. 모든 지파가 헤브론에 모여 다윗에게 기름 붓고 왕으로 옹립한다. 사울 왕가의 몰락으로 어쩔 수 없는 정치공학적인 판단이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다윗으로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신 데는 다들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사무엘이 살아있을 때 기름 부음을 받은 지 무려 22년이 지나고, 유다에서 왕위에 오른 지 7년 6개월이 지난 후였다. 다윗은 그때마다 맡은 바 최선을 다했고 어디에서 어떤 상황이었든지 하나님을 우러르는 자였다. 곧 성경의 말씀은 응하여 현실이 된다. “너는 마땅히 공의만을 따르라 그리하면 네가 살겠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을 차지하리라(신 16:20).”
그러므로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잠 21:3).” 그 어떤 종교적인 거룩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 앞에 공의롭고 정직한 자로 사는 것이 중요하여,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정의를 지키며 의를 행하라 이는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공의가 나타날 것임이라 하셨도다(사 56:1).”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다소 어려운 부분이 있다. 다윗이 수도를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있어, 당시 예루살렘은 여부스 족속이 점유하고 살았다. 가나안 정복 당시 이를 차지하였으나 여부스 족속에게 빼앗긴 것은 이곳이 고지대로 난공불락이라, 외부의 침입이 쉽지 않았다. 해발 6백 미터로 가팔랐고, 여부스가 이를 정복하고 난 뒤 산성은 그야말로 난공불락이라 소경이나 절름발이가 지켜도 이를 뚫지 못한다고 하여 오늘의 본문 내용이 전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늘 산지나 광야로 도피생활을 하였던 다윗은 이곳이 천혜의 요새인 것을 진즉에 알고 있었다. 하여 왕 위에 오르고 남들은 엄두를 못 내어 그와 같은 소문이 있을 정도의 험준한 이곳을 수도로 하여 다윗 성으로 삼았다.
왜 다윗은 통일 된 이스라엘의 수도로 이곳을 우선적으로 삼은 것일까? 먼저는 모든 지파가 모일 수 있는 중심지였다. 다음은 지형적으로 기혼 샘과 같은 수원이 있는 곳이었고, 앞서도 밝힌 바 천혜의 요새로 수도방위가 수월하였다. 특히 여부스 족속이 차지하고 있던 땅이라 어느 지파에도 소속이 되지 않은 땅이라 그에 따른 잡음도 불식시킬 수 있었다. 이에 “다윗의 마음에 미워하는 다리 저는 사람과 맹인을 치라 하였으므로 속담이 되어 이르기를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은 집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더라.” 하는 것 같이 속담이란 스스로 얼마나 속되고 그릇된 것을 보여준다. 이를 문자적으로나 지시적으로만 읽으면 다윗에 대한 오해는 물론 사람에 대한 비하도 서슴지 않게 된다.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엡 5:4).” 곧 말이란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저희는 경건치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딤후 2:16).” 말이 말을 이끌어 그릇된 자로 삼는 데 순간이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처럼 말의 능력이란 참으로 놀라워서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8).” 말에 실없는 소리가 없는 사람은 복되다.
책을 읽거나 글을 쓸 때도 말을 고르고 그 언어의 뜻을 바로 하는 데 있어 수차례 살피고 또 살펴도 모자람이 없다. 본의 아니게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하고 또는 말해야 하는 사람을 살면서, 우리 영혼을 범람하는 막말의 정도가 그 수위를 넘은 지 오래다. 더욱이 요즘과 같이 개인방송이나 SNS가 활성화 되면서, 댓글이야 즉흥적이라 그러려니 한다 해도 우리는 너무 쉽게 ‘말(言)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래저래 등록된 언론사만 2만개가 넘고 개인적인 방송도 수천 개에 이른다고 하니 더는 통제를 넘어선 셈이다. 이런 때에 오늘 본문을 읽고, 그 지리적 시대적 배경을 살피고, 저들의 속담을 관심 있게 읽는 능력이 우리에게는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 우리는 조롱이나 비하, 폄훼하는 말을 쓰는 사람들이 아니다. 여부스 족속은 ‘맹인이나 절름발이도 너를 물리친다’고 하며 다윗의 공격을 가소로이 여겼다. 실제 이 땅은 300년이 넘도록 미정복의 땅으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오지라 섣불리 이 성을 공격할 수 없었다.
비하나 비아냥거리는 말은 상당히 상대를 업신여길 때 쓴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9).” 곧 당시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천대하였고 멸시하였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면 이를 무시하고 허황된 말로 들었다.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행 17:18).”
곧 자신들이 아는 것을 우월하다 여기고 그 삶을 스스로 높일 때,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32).” 저들에게 예수의 부활은 말도 안 되는 허황된 말일 뿐이었다. 우리가 선의로 대하면 저들은 악의적으로 받는다.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도 조롱과 멸시를 당하셨다.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마 27:41-42).” 복음을 전하고 다니실 때도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13:57-58).”
기어이 주의 능력을 행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가벼운 말 때문이다.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하지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하였나니 이 사람들은 분열을 일으키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이 없는 자니라(유 1:18-19).” 이는 때가 악할수록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벧후 3:3-4).” 문제는 그와 같은 막말 잔치에 개의치 않고 끼어들어 덩달아 말장난에 휩쓸리는 일이다. 예수님은 오히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1-12).”
이는 역으로 저들이 옳은 소리에 놀람이다.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행 2:12-13).” 이에 우리는 다르다. 뭔가 달라야 한다.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16).” 그러므로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15-16).”
이에 오늘 시편의 언어도 함의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을 본다. 마지막 9절의 말씀,
네 어린 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 자는
복이 있으리로다
(9).
이는 저주의 의미로 잔인하고 끔찍하기 이를 데 없다. 곧 민족의 멸망과 그에 따른 약탈과 살인 등으로 빚어진 슬픔을 고통을 이와 같은 끔찍한 표현으로, 혐오의 극치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니 실은 우리가 바벨론 곧 이방의 땅에서 행할 수 있는 최선으로 자신의 귀하고 소중한 것에 대한 미련을 버려야 함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엄히 말씀하시길, “그들이 실족할 그 때에 내가 보복하리라 그들의 환난날이 가까우니 그들에게 닥칠 그 일이 속히 오리로다(신 32:35).” 곧 복수는 하나님의 것이다. 우린 우리 스스로 귀히 여기는 것에 대해 오히려 주의할 것을 극적으로 당부하는 것이다. 오늘 시인은 역설적인 의미로 은혜를 드러낸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1).
사로 잡혀간 처연한 처지에서 시온을 기억하며 운다. 곧 우리가 엉망진창 같은 이 시대를 살면서 아무렇지도 않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막말과 저주의 사회를 살면서 그러려니 하고 대수롭지 않다면 이보다 아이러니한 성도도 없지 않을까? 심지어 덩달아 모 개인방송에 출현하여 갑론을박하고 있는 어느 목사의 말질에 소름이 돋을 정도이다. 어쩌자는 것인지.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애 5:21).” 주께 아뢰고 필요 이상의 말은 삼가며, 굳이 어울리지 않아도 되는 이들과는 거리를 두는 것도 상책이겠다. 너무 겁 없는 세상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합 3:2).”
죄는 결국 돌아서 자신의 치욕과 모욕으로 가져오게 돼 있다. 특히 자식들 앞에서의 행실과 말은 고스란히 또 다른 인생을 흐트러뜨리는 일이기도 하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2-3).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믿는다는 자들이 누구의 상담을 들으려 돈을 아끼지 않고, 어떤 이의 성공담을 듣고, 입담 좋은 저들의 언설에 놀아나듯 성경보다 이를 더 중점으로 자녀 일을, 자신의 내적인 문제를 살피고 고민한다면… 차마 뭐라 할 말이 없다. 특히 자식들 일로 부모 마음이야 그럴 수 있겠지만 그런다고 그게 내 것이던가? 우린 다만 맡은 자로 자식은 잠시 맡기신 기업일 뿐이다. ‘어머니가 읽어주시던 성경 말씀이 그립다’는 찬송은 흥얼거리면서 정작 자신은 그런 부모가 될 생각도 없으니… 무슨 수로 아이를 책임지려 하는 것일까? 안 믿는 이들과 어울려 저들 가운데 누구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며, ‘그럴 땐 이렇게’ 하는 식으로 접근하고 관여하여 자식을 키우려 한다면 그 영혼의 결국은 어떠할지는…….
“내가 너희를 온전히 잊어버리며 내가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준 이 성읍을 내 앞에서 내버려 너희는 영원한 치욕과 잊지 못할 영구한 수치를 당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렘 23:39-40).” 정작 무서운 건 오늘의 일이 아니다. “주여 수치가 우리에게 돌아오고 우리의 왕들과 우리의 고관과 조상들에게 돌아온 것은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음이니이다 마는 주 우리 하나님께는 긍휼과 용서하심이 있사오니 이는 우리가 주께 패역하였음이오며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여호와께서 그의 종 선지자들에게 부탁하여 우리 앞에 세우신 율법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단 9:8-10).” 어느 때보다 기도가 필요한 시대다.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4).
마치 찬양을 유행가 부르듯 흥얼거리고, CCM은 점점 대중가요를 능가하는 흥미와 감성과 아드레날린을 끌어올려 황홀경에 심취하게 하는 식이니. 심지어는 술잔을 기울이면서도 흥얼거린다고 한다. 결국 신앙의 순수성은 각자의 몫이다. 그리 열심을 다해 교회 일에 나름의 헌신과 기도로 사는가 했더니, 무슨 일을 앞두고 ‘내가 요즘 술을 너무 마셨나?’ 하는 소릴 듣고 나는 뭐라 이를 말이 없었다. 실은 몰랐다. 당연히 피하고 또한 주의할 줄 알았다. 한데 저마다 한 잔 정도는… 하고 허용하는 그 범위에서 우리 신앙의 순수함은 지켜진다. 성욕이나 물욕이나 다 같이 그저 그 하나, 그 한 잔이 시발점이었다. 스스로의 허용, 그 가치의 값어치가 저의 신앙의 순수였다.
것도 이 ‘이방의 낯선 땅’에서 말이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네 아내는 성읍 가운데서 창녀가 될 것이요 네 자녀들은 칼에 엎드러지며 네 땅은 측량하여 나누어질 것이며 너는 더러운 땅에서 죽을 것이요 이스라엘은 반드시 사로잡혀 그의 땅에서 떠나리라 하셨느니라(암 7:17).” 고로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롬 2:7-8).” 하면 우리는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8).”
부디 정신 차리자. 믿음 똑바로 지키자. 신앙생활 바로 하자. 이는 누구에게가 아니라 내게 건네는 말이다. 순수한 신앙은 적당한 선에서 지켜지는 게 아니다.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즐거워하지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
(5-6).
차라리 다리 하나 자르고, 눈 하나 빼고, 입 천장에 붙이고 장애인으로 사는 것이 더 낫다고 하시는 말씀이 오죽하면 그러셨을까?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마 18:8-9).” 함부로 기웃거리며 누구 말에 귀 기울이며 돌아다니는 일에 주의해야 할 터, “너희 중에 남아 있는 이 민족들 중에 들어 가지 말라 그들의 신들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 그것들을 가리켜 맹세하지 말라 또 그것을 섬겨서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라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가까이 하기를 오늘까지 행한 것 같이 하라(수 23:7-8).”
스스로 자신의 믿음과 신앙을 체중계에 올라 체중을 관리하고 점검하듯 해야 한다. 부디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 13:5).” 특히 오늘 날처럼 정보가 넘치고, 말이 넘치고, 좋은 것, 즐거운 것들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한순간으로 아찔하다. 이에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의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마침내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렘 17:10-11).”
어느 순간 ‘여기가 아닌데…’ 하고 당황할 수도 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7-8).” 하면 어째서 이 끔찍한 표현을 한 것인지, 그 의미는 선명해진다.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그들의 말이 헐어 버리라
헐어 버리라 그 기초까지 헐어 버리라
하였나이다
멸망할 딸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복이 있으리로다
(7-8).
이에,
네 어린 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 자는
복이 있으리로다
(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