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
다윗이 에돔에 수비대를 두되 온 에돔에 수비대를 두니 에돔 사람이 다 다윗의 종이 되니라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
삼하 8:14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는 고난 당하는 자를 변호해 주시며 궁핍한 자에게 정의를 베푸시리이다 진실로 의인들이 주의 이름에 감사하며 정직한 자들이 주의 앞에서 살리이다
시 140:12-13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6, 14).” 하시는 말씀 앞에서 잠시 멈추게 된다. 다윗의 정복과 공의로운 하나님의 통치를 하나로 놓고 글의 전개가 이루러진다. 먼저 블레셋을 쳐 가드와 주변 도시들을 평정한다(1-2). 그리고 소바와 다메섹 아람을 정복하여 조공을 바치게 한다(3-8). 이에 하맛 왕 도이가 화친의 의미로 은금 그릇을 선물하고 조공을 친다(9-10). 이때마다 다윗은 조공과 획득물을 여호와 앞에 바친다(11-12). 끝으로 에돔을 쳐서 조공국으로 삼았다(13-14). 그리하여 다윗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을 모두 회복하고 정복하여 다스렸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창 15:18).”
다시금 여기서 주목하게 되는 것이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탁월한 군사력과 막강한 전투력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승리를 더하신 것에 대하여 다윗은 찬송하였다(시 24, 27, 46편). 곧 하나님은 주의 뜻을 이어가신다. 그런데 다윗의 전투와 사울의 전투는 서로 다른 측면이 있다. “사울이 이스라엘 왕위에 오른 후에 사방에 있는 모든 대적 곧 모압과 암몬 자손과 에돔과 소바의 왕들과 블레셋 사람들을 쳤는데 향하는 곳마다 이겼고 용감하게 아말렉 사람들을 치고 이스라엘을 그 약탈하는 자들의 손에서 건졌더라(삼상 14:47-48).” 저는 자신의 힘으로 그 공정을 이어갔다.
특히 블레셋은 ‘할례 없는 이방 민족’으로 당시 이스라엘의 출애굽 때 갑돌을 차지하고 살았는데, 저들이 가나안까지 일주일이면 지날 수 있는 지중해 해변 길을 블레셋으로 인해 시내 광야로 돌아가게 하셨다.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출 13:17).” 또한 여호수아 당시에 저들을 정복하지 않아 두고두고 문젯거리로 따랐다. “여호수아가 나이가 많아 늙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얻을 땅이 매우 많이 남아 있도다. 이 남은 땅은 이러하니 블레셋 사람의 모든 지역과 … 블레셋 사람의 다섯 통치자들의 땅 곧 가사 족속과 아스돗 족속과 아스글론 족속과 가드 족속과 에그론 족속과 또 남쪽 아위 족속의 땅과…(수 13:1-3). 뿐만 아니라 사사시대 이후에도 줄곧 이스라엘에게 고통을 안겨준 나라였으며(삿 3:31, 10:6-11, 13:1-5), 심지어 엘리 선지자 시절 하나님의 언약궤를 빼앗기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삼상 4:1-17). 결국 초대왕 사울은 세 명의 아들들과 함께 저들과의 전투에서 죽음을 당하기도 하였다.
오늘도 여전히 교회를 공격하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괴롭게 하는 대상으로 저들은 사탄의 세력을 의미한다. 이에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 오늘 날 우리가 처한 현실로 놓고 보면 ‘세계화된 문화’가 그 의미를 이어간다. 우리의 모든 유행과 가치와 필요와 그 생활반경이 다른 여느 국가들과 다를 게 없이 하루가 멀다 하고 세계화를 이룬다. 엊그제 파리에서 유행하던 것이 오늘 새벽이면 동대문 의류 상가에 퍼져 있고, 어떠한 문화적 가치는 순식간에 동양과 서양을 하나로 묶어버린다. 도적적 가치관은 물론 종교관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미혹의 시대를 살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 반기독교적인 사상이 얼마나 급물살을 타고 우리 믿음의 사람들의 의식을 잠식시키고 있는지 모른다.
여기서 문득 사데교회에 대한 주님의 무서운 경고를 떠올리게 된다.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계 3:1).” 주목하게 되는 것은 저들 행위가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었다’는 것이다. 일곱 교회는 오늘 날 모든 교회를 두고 하시는 말씀으로 하나님의 일곱 영, 곧 완전하신 성령께서 우리 행위를 아신다! 사데교회는 단 하나도 칭찬이 없고 무서운 경고의 말씀만 전달되었다. 그럼에도 아직 남은 게 있으니 그 수가 비록 적을지라도 하나님은 다수가 아닌 소수의 이 인원에게 소망을 두고 계심을 짐작할 수 있다.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2).” 어쩌면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행위의 온전한 것을 하나도 찾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3).” 우리가 이 소명을 어떻게 받았는지,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회개해야 한다. 여기서는 일체 믿음을 보시지 않고 행위를 보시며, 양적으로 평가하시는 게 아니라 질적으로 다루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떻게 받고 어떻게 들었는지’ 이를 늘 유념하지 않으면, 믿음은 있을지 모르나 행위가 이를 따르지 못한다.
다소 지나친 비유겠지만 두 종교 개혁자 루터와 칼빈을 두고 생각할 때, 루터의 공적은 한 마디로 ‘이신칭의’ 곧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의 진리를 기점으로 한 것이다. 그러다보니 믿음을 강조하여 늘 가슴은 뜨거운데 그 행위가 따르지 못해서, 실제 저가 평생을 머물던 독일의 작센안할트 주의 비텐베르크는 처음 95개 반박문을 붙였던 때와 달리 대학과 시민들의 방종이 저의 노년에는 만연했다고 한다. 한데 칼빈의 경우 ‘그리스도인은 그 신앙의 거룩을 입증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값없이 구원을 받았다는 데 안주하는 삶은 그릇된 삶인 것을 재차 강조하여, 저가 머물던 제네바는 저가 죽고 난 뒤에도 70여년이 넘도록 그 어느 도시보다 청렴하고 깨끗한 도시로 대비된다고 한다.
물론 공과 사는 있으나 바울의 설교와 같이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딤후 4:5).” 곧 그 행위를 보고 그를 알 수 있다는 데 성경은 강조점을 찍고 있다. 이를 위해 저는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6).” 자신을 전제와 같이 부어주고 죽을 날을 대비하고 있다고 한다. 전제는 부어진다는 의미로 포도주나 독주를 여호와의 제단에 부어 “번제나 다른 제사로 드리는 제물이 어린 양이면 전제로 포도주 사분의 일 힌을 준비할 것이요(민 15:5).” 그런데 오늘 날 우리는 에스겔의 우려와 같이 세계화된 문화에 속수무책으로 부어지고 있는 꼴이다. “내가 내 손을 들어 그들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였더니, 그들이 모든 높은 산과 모든 무성한 나무를 보고 거기에서 제사를 드리고 분노하게 하는 제물을 올리며 거기서 또 분향하고 전제물을 부어 드린지라(겔 20:28).” 그것을 지으신 이가 아닌, 높은 산과 무성한 나무에 부어지는 삶이라니.
곧 사데교회가 받는 경고의 음성이 오늘 우리 생활에도 속속들이 적용되어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는 모두 부르심을 받은 소명자들이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 4:11-12).” 동시에 소명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면, 보내심을 받아 사명자로 세우심을 입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각자 그 소임은 다르다고 하지만 오늘 날에도 여전한 블레셋과 같은 문화의 여러 현상들이 우리 생활과 교회로 침투하고 있다는 것은 보내심을 받은 사명자가 그 부르심의 소명을 다하고 있지 못하다는 반증이다.
이를 오늘 4절의 어느 부분에서 양적으로 너무 비대해지는 것에 대한 경고로 비춰볼 수 있다. “그에게서 마병 천칠백 명과 보병 이만 명을 사로잡고 병거 일백 대의 말만 남기고 다윗이 그 외의 병거의 말은 다 발의 힘줄을 끊었더니.” 이는 다윗이 모두 더 많이 취하기보다 적당한 선에서 이를 끓어냈다는 것인데, 앞서 모세는 기록하기를 “그는 병마를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병마를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하지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며(신 17:16).” 곧 교회고 성도고 주를 따르고 믿는 자들이란 '말들을 많이 두지 말라'는 것과 같이 너무 양적으로 비대해지는 것에 주의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결국은 '애굽으로 돌아가듯' 세상과 타협할 수밖에 없고 사람들이 듣고 싶은 말로 값싼 복음을 전할 수밖에 없다. 마치 행복이 가득한 교회를 꿈꾸듯.
질적인 것보다 우위에 두는 세상적인 기준이 그러하다. 사람도 다수가 우선이다. 성경 어디에도 다수를 좋다하고 옳게 여긴 부분이 없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지 않는데는 열 명의 의인이면 되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도 열두 제자를 두시고 훈련하심으로 수천 명의 따르는 사람들보다 우선하셨다. 일곱 교회에 대한 계시록의 경고에 어느 교회도 부흥과 성장을 칭찬한 부분은 없다. 결국 하나님 한 영혼, 한 사람, '그 남은 바' 소수의 참 신앙인이 교회를 지키고 사회를 개혁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히 13:6).” 우리가 하는 게 아닌 것이다.
이를 바울의 증언으로 다시 되새기면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8).” 이는 저뿐 아니라 모든 믿는 사람들의 성경적인 공통점이다. 곧 저들은 결국 죽음 너머의 나라를 사모하는 삶으로 이 땅의 것으로 소망을 삼지 않았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히 11:39-40)." 곧 우리를 위해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다는 바울의 소망을 염두에 두고 오늘 시편을 읽으면,
여호와여 악인에게서 나를 건지시며
포악한 자에게서 나를 보전하소서
(140:1).
오늘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기도가 아닐까? 믿는 자로 산다고 하면서 안 믿는 자와 다를 게 없는, 믿음은 있다고 하지만 행위는 안 믿는-할례 받지 못한 이방나라 사람들과 다를 게 없는, 교회 안에서의 모습과 일상에서의 모습이 전혀 다른 삶이 얼마나 흔한지. 목사라고 예외는 아니다. 돈 좋아하고 교인들 숫자로 서로가 우위를 점하고 점점 사회화 되어 그 생활을 아무렇지 않게 하면서도 가슴만 뜨거운, 입만 살아 있는. 하다못해 어쩔 수 없다는 말은 애교스럽기까지하다. 대체 우리에게 절박한 심정을 빼고나면 과연 그 신앙이 온전할 수 있을까? 예수님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 6:13).” 우리에게 이와 같은 기도를 가르치셨는데, 이는 그만큼 오늘에도 여전히 블레셋과 같은 애굽과 다를 게 없는 세상 문화가 우리 영혼을 위협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때,
나로 하여금
주의 계명들의 길로 행하게 하소서
내가 이를 즐거워함이니이다
내 마음을
주의 증거들에게 향하게 하시고
탐욕으로 향하지 말게 하소서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길에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119:35-37).
이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마 26:41).” 곧 우린 또 이러고 일어서도 어느 순간 흐지부지 흩어지고 쓰러지기 일쑤다. 다윗이 가는 곳마다 하나님이 이기게 하셨던 것처럼, 주의 권능이 아니면 하루도, 단 한 순간도 바로 설 수 없다는 데서 주를 바란다. 정말이지 얼마나 그럴듯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세상 문화가 우리 믿는 자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지 모른다.낙태 찬성과 동성애나 성소수자에 대한 지지선언이 공공연하게 교회에서 일어난다. 우리는 어쩌면 회개할 능력을 상실했다. 언제부턴가 눈물이 나질 않는다. 울어도 신세한탄으로면 모를까, 버젓이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고 교회에 와서도 자신의 그릇됨을 용서 빌지 않는다. 문화나 관행을 운운하며 음행을 저지르고 교회와서도 다 그럴 수밖에 없는 사회 탓으로 돌리며 대수롭지 않게 아멘, 하고 외친다. 포르노를 보고, 사역을 절실하게 감당하지 않으면서도 무릎 꿇고 회개할 생각을 안 한다. 해산해야 할 산모가 아이를 힘주어 낳을 능력을 상실한 채 사생아를 품고 사는 것 같다.
그들이 마음속으로 악을 꾀하고
싸우기 위하여 매일 모이오며
뱀 같이 그 혀를 날카롭게 하니
그 입술 아래에는 독사의 독이 있나이다 (셀라)
(2-3).
오늘 시편은 우리 현실을 직시하게 한다. 자신을 바로 판단하게 한다. 사탄의 주도면밀한 침투는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틈을 노린다. 그러므로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고후 10:4-6).” 하는 말씀도 귀에 들어오지 않고,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게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다. 곧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5).” 그러므로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엡 6:11).” 성경의 이와 같은 다급한 증거가 밍밍하여 늘 듣던 소리 같아 싱겁다.
여호와여 나를 지키사
악인의 손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
나를 보전하사
포악한 자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
그들은 나의 걸음을 밀치려 하나이다
교만한 자가 나를 해하려고
올무와 줄을 놓으며 길 곁에 그물을 치며
함정을 두었나이다 (셀라)
(4-5).
이때 “그들이 실족할 그 때에 내가 보복하리라 그들의 환난날이 가까우니 그들에게 닥칠 그 일이 속히 오리로다(신 32:35).” 두려운 마음을 갖게 하신다. 우리에게는 성령이 계시다. 출산할 힘이 없을 때 이를 도울 우리의 의사, 성령이 계시다.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
내가 여호와께 말하기를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여호와여
나의 간구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하였나이다
내 구원의 능력이신 주 여호와여
전쟁의 날에 주께서
내 머리를 가려 주셨나이다
여호와여 악인의 소원을 허락하지 마시며
그의 악한 꾀를 이루지 못하게 하소서
그들이 스스로 높일까 하나이다 (셀라)
(6-8).
시편 그 한 구절 한 구절마다 우리로 필요한 기도를 일깨우시는 것 같다. 구해야 하고 구할 수밖에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고 알리시는 것 같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3).” 이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도대체 오늘 우리로 주의 자녀 삼으시기까지 주께서 치르신 값이 엄청나다.
나를 에워싸는 자들이 그들의 머리를 들 때에
그들의 입술의 재난이 그들을 덮게 하소서
뜨거운 숯불이 그들 위에 떨어지게 하시며
불 가운데와 깊은 웅덩이에 그들로 하여금
빠져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소서
악담하는 자는 세상에서 굳게 서지 못하며
포악한 자는 재앙이 따라서 패망하게 하리이다
(10-11).
우린 결코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한다. 어제는 아이가 왔다. 같이 점심을 먹고 이런저런 말을 나눌 때, 나는 종종 하나님께 터무니없는 능력을 구한다. 주의 권능으로 물리칠 때 아이의 저하된 지능이, 정신적인 문제가 말끔이 사라지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손을 얹고 기도하면 그런, 뭔가, 치유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길. 아이가 돌아가고 혼자 걸어오면서 그런 생각으로 입을 삐쭉거리기도 하였다. 집에 오자 아내가 한껏 근심어린 표정으로 따라들어와 어느 아이가 누구 때문에 그만두고 싶다고 한다며, 가뜩이나 이제 몇 명 남지 않았는데, 하고 길게 한숨을 지었다. 자폐성 아이 때문이다. 수업시간마다 울고 소리지르고 하니까 같이 하는 아이가 질겁을 하고 그만두려 하는 것은 당연하다. 나는 퉁명스럽게 말하길, 그러게 그 애 때문에 다른 애들 다 떨어진다니까! 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아내의 반응은, 그래도 그 애는 그만두고 다른 데 갈 수 있지만 이 앤 여기가 마지막이야! 하고 돌아서며 덧붙였다. 못하겠다면 어쩌겠어! 하고 문을 닫았다.
순간 나는 아내의 이해가 주님의 마음이겠다는 생각을 했다. 자폐성 아이는 말 그대로 더는 갈 데가 없다. 애 엄마가 울면서 맡긴 아이로 벌써 3년이 되어간다. 의외로 아내는 그 애가 더 정이 간다고 했었다. 종종 아이의 칭얼거림과 막무가내로 골을 부릴 땐 방에서 듣는 나도 욱, 하고 화가 난다. 전에는 그 일로 소리를 질렀는데, 아내는 대뜸 당신은 목사님이잖아! 하고 내 입을 민망하게 하였다. 믿음으로 산다는 일은 전쟁의 나날이다. 적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내 안에 들어차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마음이다. 그럴 수 있지, 하고 허용하는 작은 것이다. 이젠 무뎌져 아무렇지도 않게 범하는 거짓말이다. 탐욕이고 원망이고 좌절이다. 어쩔 땐 속수무책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히 13:6).” 그럴 때 나는 이 말씀을 여러 번 되뇐다.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다.’ 언제든 주의 이름을 부르면, 나는 죽어도 못하지만 주가 주의 권능으로 나를 도우신다. 오늘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주의 영이 함께 하셨던 것은 그와 같은 승리다. 저의 승리가 아니었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27:3).
하나님이 저들을 상대하실 것이다. “내가 세상의 악과 악인의 죄를 벌하며 교만한 자의 오만을 끊으며 강포한 자의 거만을 낮출 것이며(사 13:11).” 그러므로 점점 세계화되는 문화로 인해 우리의 사고와 생활이 물들지 않도록, 그 가운데 적그리스도가 무엇이고 어떤 것들을 경계해야 하는지 분별해야 한다. 그러할 때 바울이 보여준 진리처럼, 우리는 우리를 위해 예비된 면류관을 소망하며 싸운다. 이는 성경의 이치다. “사람의 행위를 따라 갚으사 각각 그의 행위대로 받게 하시나니 진실로 하나님은 악을 행하지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시느니라(욥 34:11-12).” 행위로 나의 믿음은 점검 돼야 한다. 이에,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는
고난 당하는 자를 변호해 주시며
궁핍한 자에게 정의를 베푸시리이다
진실로 의인들이
주의 이름에 감사하며
정직한 자들이
주의 앞에서 살리이다
(12-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