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의인들이 나를 두르리이다

전봉석 2022. 6. 20. 05:36

 

너는 담대하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삼하 10:12

 

내 영혼을 옥에서 이끌어 내사 주의 이름을 감사하게 하소서 주께서 나에게 갚아 주시리니 의인들이 나를 두르리이다

시 142:7

 

 

암몬 왕이 죽자 다윗은 조문을 보낸다. 이를 저들은 정탐꾼으로 여겨 수염을 절반 자르고 의복을 중동볼기까지 자르고 모욕적으로 돌려보낸다. 다윗은 이를 듣고 저들의 수염이 자랄 때까지 하눈에 머물게 한다. 암몬이 아람과 연합하여 이스라엘로 온다. 결국 아람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승리한다.

 

세상은 선의로 행한 일이 곡해를 당하고 호의를 권리인양 여길 때가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7-58).” 이럴 때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것, 그 중심을 하나님께 두고 있음이 귀하였다. 누구를 위하고 생각하는 일이 주의 사랑을 실천하는 일로 여겨질 때 가능하다. 내가 어찌 잘해보려 하면 영락없다. 그래서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

 

그 때, 때를 기다리며 주의 말씀만을 붙드는 게 신앙이었다. 소명자는 사명자로 행할 의무가 있다. 부르심에는 보내심을 전제로 한다. 요즘 누구를 생각하며 또는 저와 통화에서 나는 이를 자주 언급하게 된다. 실제 소명은 받았으나 사명으로 나아가기를 꺼려하여 제자리걸음을 하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나의 삶이 그러했었고, 그러는 동안의 모진 삶은 전적으로 하나님으로 향한 생활이 아니었다. 교회에 발을 두고 세상을 또한 놓지 못하고 살았던 일이기도 하였다. 그럴 때 대부분은 선을 행하려다 낙심하는 경우에서다.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살후 3:13).” 하려다 막히면 멈칫하기 마련이다.

 

이 또한 사명자로 나아가는 과정이라 여긴다. 누가 말하길 정신과 약이 늘었다. 사역이 점점 어렵고 사람을 대하는 일에서 주춤거릴 때도 있다. 수염이 반쯤 잘리고 입고 있는 옷이 중동볼기까지 잘리고 나면 정신이 번쩍 든다. 모욕감은 수치심 가운데 가장 은밀한 곳까지 침투한다. 흔히 자존심이 상한다고 말하는데, 남에게 굽히지 않고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으려는 마음은 사람의 가장 기본감정이기도 하다. 더욱이 모욕감을 일찍이 어려서 경험한 적이 있다면 이를 기억 속에 가두고 방어기제를 발휘하고 산다. 정신적으로나 육신적으로 이 일은 우리를 위축시킨다.

 

특히 주의 일을 하다 이와 같은 경우를 자주 겪는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상처 없이 좋은 사이를 유지하기란 불가능하다. 하면 이를 어찌 극복할 수 있을까? 죽기 전까지 해결은 없다. 거듭 또 다른 것들로 파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마다 극복할 수는 있다. 이를 축복으로 생각하면 된다. 선수들처럼 또 하나의 대회를 치른 경우라 여기는 것이다. 가령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이스라엘로 돌아온 모압 땅의 룻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룻이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그에게 이르되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 하니(룻 2:10).” 저는 자신에게 임하는 어떤 수치감이나 자존심을 앞세우지 않았다. 훗날 어찌 될지 저가 알았겠나? 다만 어머니의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삼으면서 저는 알았다.

 

사울이었던 바울은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후 6:1).” 은혜와 감사로 받으면 버릴 게 없다.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2).” 나는 누구에게 권면할 때 나의 생활이 도움이 된다. 나에게 어떤 대단한 능력과 남다른 재주가 있어서가 아니다. 죽어도 살아도 주를 바라보면서 행하는 일, 사명자로 주의 길이란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6-27).” 이 말씀은 여러 번 읽을수록 어렵다. 마음이 어려워지고 더욱 의기소침하게 된다.

 

저절로 뚝딱, 그 일이 이르고 그 길을 행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하여 많은 이들이 어느 시점에서 계속 그 광야를 돌듯 가나안으로 들어가기를 꺼려하거나 심지어는 애굽으로 돌아간다. 그때 성경은 일러 “어리석은 자의 퇴보는 자기를 죽이며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키려니와 오직 내 말을 듣는 자는 평안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안전하리라(잠 1:32-33).” ‘내 말을 듣고’ 곧 주의 말씀만을 붙들고! 그래서도 나에게 이 시간은 천금을 주고도 바꾸기 싫은 것이다. 어제도 딸애가 늦게 오고 뭘 또 시켜 먹고 어쩌고 하느라 열한 시가 다 돼 잠이 들었다. 돌아누우며 세 시에는 일어나야 하는데, 하는 부담감이 먼저 들었다. 더 일찍 일어날 때면 좀 더 여유 있게 말씀을 되새김질 할 수 있는데, 세 시 반, 네 시만 돼도 마음이 급해진다. 나는 이를 선한 부담감으로 받아들인다. 뭘 꼭 그렇게 병적으로 그럴 게 뭐 있나? 나처럼 시간적으로 구애받지 않고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이 있겠나? 더 잘 수도 있고, 이따 시간 날 때 해도 되고… 한데 이를 마다하고, 이 시간을 고집하는 까닭은 그와 같은 중심을 잃을까 하여서이다.

 

“네가 평안할 때에 내가 네게 말하였으나 네 말이 나는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나니 네가 어려서부터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함이 네 습관이라(렘 22:21).” 남들은 몰라도 나는 나를 안다. 한 번 허용하면 두 번 세 번,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바라는 게 나다. 우리의 습관이란 처음부터 그리 되는 게 아니다. 그래도 된다고 여기는 아주 작은 허용 하나가 틈이 벌어지면서 걷잡을 수 없는 게 된다. 그러다 결국… 이를 요한의 진술로 들어보면,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0-13).”

 

결국 이스라엘은 예수를 인정하지 않은 채 오늘 날까지도 여전한 것이다. 이를 또한 가만히 생각하면 무서운 생각도 든다. 그랬던 것이 영영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우리가 주춤, 멈칫할 때 과감하게 주만 믿고 돌진해야 한다. 누가 내게 호소하였다. 전엔 안 그랬던 게 점점 더 하려고 하면 힘이 들어서 결국은 정신과 약을 먹고 주일을 수행한다고 말이다. 나는 저의 심정과 그 사정을 이해하였고 안쓰러웠다. 내가 어떠한지는 굳이 말할 것도 없다. 그럼 나는 어쩌는가? 한 영혼을 주님이 사랑하신 것을 생각하며 단 한 사람, 그 한 영혼만을 보고 한다. 누가 오든 안 오든, 몇 명이 예배를 드리든 그게 누구이든, 나에게 주시는 확신은 나중에 주님이 몇 명 모아 교회하다 왔니? 하고 물으시지 않으실 것이다.

 

우리 주님은 아흔아홉 마리를 놓아두고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셨다. 정작 우리가 두려워해야 하는 일은 그래서 못하겠다고 한 그 작고 사소한 일 하나가 나의 영혼을 잠식해버리는 것이다. 이는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 1:20).” 그럼에도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21-23).”

 

저들도 그저 아주 작은 일, 어떤 모욕감이나 수치, 부끄러움으로 공략하는 사탄에게 두 손 드는 것이다. 해결책은 회개뿐이다. 회개는 단지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다.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셀라)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

(32:3-5).

 

다른 수 없다. 있는 그대로, 나의 나 된 그 자리에서 주를 바라는 것, 맡기신 일을 감당하는 것. 그렇듯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9-10).” 하면 이제 선택만 남았다. 그러저러해서 못하겠다고 계속 물러설 것인지, 죽이 되든지 밥이 되든지, 염치없고 송구한 일이지만 나 같은 이를 들어 사용하시고자 하는 주를 인정할 정인지 끝까지 그건 아닌 것 같다고 할 것인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허송세월만 보내다, ‘내 우물쭈물하다 이럴 줄 알았다’는 버나드 쇼의 묘비명처럼 후회로 생을 돌아보다 갈 것인지.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5).” 두려움으로 나는 이 말씀을 되뇐다. 이내 못한다고 하면 별 수 없는 일이다. 영광은 멀고 현실은 늘 목전에서 껄떡댄다. 항상 시편은 우리에게 그와 같을 때 어찌해야 할지를 제시한다.

 

내가 소리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 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

(142:1).

 

나는 누구와 다음 주간에 만나기로 하고 그때까지 하나님께 묻고 또 묻고 하나님과 격돌하여 결판을 얻어오라 하였다. 내가 강요하고 권하여 이루어질 일도 아니고, 나를 보고도 더는 느끼는 게 없다면 내가 더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나? 나는 주일 아침이면 평소보다 열 배는 긴장한다. 고작 내가 설교하는 청중은 가족을 빼면 아픈 아이 하나다. 물론 줌으로 한두 가정이 함께 예배를 드리지만… 평소보다 긴장감은 고조되고 가슴은 뛰고 숨은 쉴 수 없을 정도이다. 그래서도 아침에 나는 또 수험생처럼 초조하게 설교원고를 읽으며 밑줄을 긋고 해야 할 말을 잊을까 하고 여백 가득 메모를 한다. 빨간색 파란색 여러 색깔의 밑줄과 덧칠이 이어지고, 나만의 씨름은 그러느라 끝이 날 것 같지 않다. 남들이 들으면 웃을 일이라 해도 나는 다시 안정제를 삼키고 강단에 선다. 설교 원고가 너덜너덜 알록달록하다. 할 때,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34:6).

 

앞서 30분 전에 찬송을 여러 곡 부르는 것은 주의 영이 나의 마음을 지정시킬 때까지이다. 그렇게 억지로(?) 때론 과도하게(?) 긴장하고 말씀을 전한다. 전할 때면 또 준비할 때와 달리 새로운 능력을 맛본다. 오늘은 30분만 설교해야지 하는데 늘 한 시간을 넘기면서 자꾸 시간을 보고 안타까워한다. 더 전해야 할 게 아직 많이 남은 것이다! 곧 나의 식힐 수 없는 감정 따위는 주 앞에 내버려두는 것이다.

 

내가 내 원통함을 그의 앞에 토로하며

내 우환을 그의 앞에 진술하는도다

내 영이 내 속에서 상할 때에도

주께서 내 길을 아셨나이다

내가 가는 길에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올무를 숨겼나이다

(142:2-3).

 

나도 안다. 사탄은 죽을 때까지 내게 되물을 것이다. 이래도 할래? 이런데도 할 수 있겠어? 하는 식으로, 나의 약점을 잡고 흔들어댄다. 특히 감정의 문제는 누구에게 말도 하기 어려워서 오롯이 내가 지고 서야 하는 일인데,

 

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나는 주와 함께 있는 나그네이며

나의 모든 조상들처럼 떠도나이다

(39:12).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55:22).

 

그래서도 나에게는 말씀뿐이다. 이와 같은 시편 한 구절이 나의 위로가 되고 나를 격려하며 나의 양식이 되고 나의 생명을 유지하게 하신다. 곧 “내가 맹인들을 그들이 알지 못하는 길로 이끌며 그들이 알지 못하는 지름길로 인도하며 암흑이 그 앞에서 광명이 되게 하며 굽은 데를 곧게 할 것이라 내가 이 일을 행하여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리니 조각한 우상을 의지하며 부어 만든 우상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의 신이라 하는 자는 물리침을 받아 크게 수치를 당하리라(사 42:16-17).” 다른 무엇도 의지의 대상일 수 없고, 그렇다고 내가 어디로 숨은들 주가 찾아내지 못하실 곳이 없다. 더는 물러설 곳이 없으면 오히려 의연해진다. 주가 알아서 하시라! 망하든지 흥하든지, 나로 사용하시든지 버리시든지, 다만 나는 이제 주 앞에 모두 맡김으로,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말씀 믿고 말씀만 붙들고 가는 길이면,

 

오른쪽을 살펴 보소서

나를 아는 이도 없고 나의 피난처도 없고

내 영혼을 돌보는 이도 없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

(4-5).

 

더는 무엇도 도와줄 수 없고 어디로 도망칠 수도 없다는 데서 평안함이 깃들기도 한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73:26).

 

여호와는 나의 분깃이시니

나는 주의 말씀을 지키리라 하였나이다

(119:57).

 

그러므로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애 3:24).” 다른 수가 없다는 데서 오히려 나는 안정감을 얻는다.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소서

나는 심히 비천하니이다

나를 핍박하는 자들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그들은 나보다 강하니이다

내 영혼을 옥에서 이끌어 내사

주의 이름을 감사하게 하소서

주께서 나에게 갚아 주시리니

의인들이 나를 두르리이다

(6-7).

 

나의 신분은 내가 얻은 게 아니다. 맡기신 것이고 그리 불러다 세우신 이의 뜻이다. 하면 내가 아무리 바보멍청이어도 그가 행하실 것을 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 거리니이다

(22:6).

 

그래도 이제 상관없다. 저들이 아무리 뭐라 하든지, “버러지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이니라(사 41:14).” 그것으로 주를 더욱 신뢰하고 의뢰한다는 것, 이보다 더 큰 특혜가 또 있을까?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약 4:5-6).”

 

이 모든 구원의 주인공은 주님 한 분이시다. 하면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사 61:1-3).” 주가 하신다. 나는 다만 그 자리의 증인일 뿐이다.

 

시온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줄 자 누구인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며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53: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