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도다
요압이 일어나 그술로 가서 압살롬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오니 왕이 이르되 그를 그의 집으로 물러가게 하여 내 얼굴을 볼 수 없게 하라 하매 압살롬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왕의 얼굴을 보지 못하니라
삼하 14:23-24
여호와는 천지와 바다와 그 중의 만물을 지으시며 영원히 진실함을 지키시며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며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이시로다 여호와께서는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도다
시 146:6-7
우린 우리의 사랑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때론 알지를 못한다. 다윗도 아들 압살롬을 사랑하나 저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게 서툴다. 암논을 죽이고 그술로로 도주한 압살롬을 그리워하면서도 어찌할지 몰라 하는 다윗의 마음을 알고 요압이 꾀를 내어 압살롬을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한다. 하나 다윗은 내심 그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압살롬을 부르지 않는다. 서로가 어떤 심정일지, 그 속을 알 것도 같다.
이와 같은 모순은 서로 그 죄를 인정하고 자복하지 못해서이다. “너는 오직 네 죄를 자복하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하고 네 길로 달려 이방인들에게로 나아가 모든 푸른 나무 아래로 가서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3).” 이는 참 어려운 것이 그 속에 두 마음이 동시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그리움과 다른 하나는 용서인데, 용서는 주의 마음이고 그리움은 사람의 마음이다. 이에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하여 일심으로 주를 바라는 일이 그처럼 어려운 것은 내 생각도 있고, 하나님을 향한 마음도 있어서 두 마음이 서로 충돌하는 것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염려의 근원이 여기가 아닐까?
오늘 요압의 중재는 선한 듯 하나 또한 그 속에 다음 왕권을 염두에 둔 것으로 순수하지 못하다. 1절에 보면,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로 향하는 줄 알고” 있었다. 곧 저는 눈치껏 그 마음을 읽고 드고아에 사람을 보낸다. 나름 사람의 지혜로 두 사람의 문제를 풀어볼까 해서다. 설령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그 안에 악이 찌끼처럼 끼었다. 순수한 마음이란 없다. 이미 든 생각은 그와 더불어 혹시나, 하는 꿍꿍이도 있기 마련이다. “여러 가지 고운 말로 유혹하며 입술의 호리는 말로 꾀므로(잠 7:21).” 이는 사탄의 재주다. 나의 본심은 그게 아니었다고 하나 그 내면에 순수함을 간직하고 사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도 하나님 앞에 자복과 아룀이 필수다. 하나님이 이루시기를 바라고 기다림이 신앙이다. 곧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엡 4:13-14).” 아닌 듯하나 그러하고 그런 듯하나 아닌 것이 우리 마음이라, 마음은 정작 실체가 없다. 요압이 순수한 마음에서 그러했다 해도 그 내심은 다음 왕권을 염두에 둔 정략적인 선택이었다.
말씀에 비추어 자신을 보는 눈이 필요하다. 다윗은 드고아 여인의 딱한 사정을 듣고 “누구든지 네게 말하는 자를 내게로 데려오라 그가 다시는 너를 건드리지도 못하리라(삼하 14:10).” 하고 저를 붙들어준다. 남의 잘못에 예민하고 자신의 잘못에 둔감한 것이 우리 특징이다. 앞서 우리야의 아내를 범하는 죄를 지었을 때도 나단 선지자가 찾아와 이를 일깨우는 ‘남의 억울한 이야기’에는 민감하였다. “다윗이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노하여 나단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그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12:5).” 그때를 기다렸다가,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7).” 허를 찌르듯 일깨워 그제야 자신의 잘못을 고하는 것을 보았다. 그만큼 무의식적으로 우린 자신에게 관대하고 남에게 엄격하다.
이에 가장 귀한 자세는, “그러므로 이제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니 너희는 너희의 행위를 살필지니라(학 1:5).” 날마다 자신을 돌아보아 주 앞에 세우는 일이다. 누구는 더 회개가 필요없다고 하는데, 이는 실없는 소리이고! 진정으로 주를 믿고 바라는 것은 자꾸 자신을 말씀 앞에 두는 일이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 13:5).” 우리는 죽을 때까지 똑같은 일을 반복하고 실수하고 산다. 때론 무뎌져 이를 죄로 여기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럴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지기 시작하면 끝장이다. 무뎌지면 더는 찔림도 없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 6:1).” 선 줄 알면 넘어질 것은 뻔하다. 말씀대로 사는 게 가장 선하다. 이를 위해 다소 민감하게 자신을 돌아보는 것도 필요하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수 1:8).” 하여 “이러므로 너희는 나의 이 말을 너희의 마음과 뜻에 두고 또 그것을 너희의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너희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며 또 그것을 너희의 자녀에게 가르치며 집에 앉아 있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하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하라(신 11:18-20).”
이런 점에서도 나는 나로 말씀 앞에 앉힌다. 이 시간이 귀하다.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약 1:25).” 설령 또 같은 일을 반복하며 날마다 혐오스럽고 한심하기 짝이 없다 해도 다시 또,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잠 24:16).” 주 앞에 염치가 없다 해도, 송구하고 부끄러울 따름이나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 내 안에 주를 생각하게 하시는 마음을 두신 이가 하시는 일이다. 결코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8).” 그러므로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10).”
내 안에 주의 영이 계신지 아니 계신지를 알려면, 죄에 얼마나 민감한지를 보면 된다. 그 일로 씨름하는 자신이 증거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 어딘가 문제가 있다는 소리다. 내가 주를 경외한다는 것은 내가 나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소리다. 나는 나를 신뢰하지 못함으로 주만이 내가 붙들 자인 것을 안다. 이는 내가 주 앞에 의로운 자일 때 넣어주신 마음이 아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5:8).” 죄 중에 있을 때 나를 용서하신 이의 뜻은 무모하지 않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벧전 2:12).”
곧 살면서 주를 증거하는 일은 일심으로 주를 바라는 마음인데, 이는 일정한 삶으로 증명된다. 주가 인도하신다.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후 3:5).” 아니면 나의 그 어떤 수고와 노력도 허사다. 아무리 선을 이루며 산다 해도,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주를 바라는 마음은 다시 또 시작이다. 나의 날들이 날마다 그러는 데서 때론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다. 아무리 애써도 내가 내 마음조차 건사할 수가 없다. 천하의 다윗도 뭘 어찌 해야 할지 몰라서 저러고 있는 것이다. 아들 압살롬을 그리워하나 돌아오게 하지 못하고, 돌아왔으나 용서하지 못하여 부르지를 못한다. 우리의 영성이란 게 얼마나 미약하고 보잘것없는가 하는 것을….
남을 위하거나 비판하기는 자신을 용서하거나 사랑하기보다 쉽다. 가장 어려운 상대가 자신이 아닐까? 이를 오늘 시편으로 다시 되새기면,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146:1).
스스로를 또한 독려하고 격려해야 한다. 돌봐야 하고 다스려야 한다. 우리에게 주신 지상명령의 첫 번째였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이를 바울은 자신에게 먼저 실시하였다. 베드로도 일러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3).” 그러기 위해 우린 얼마나 우리 자신과 필사적으로 겨뤄야 하는 것일까? 예수님이 그토록 경계하신 일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마 23:2-7).”
누구나 칭찬을 바라고 높임을 선호하고 인정받고자 위선을 떨며 사는 게 아니던가. 특히 누구의 말을 듣고 저를 위로할 때 나는 나의 이율배반적인 모습에 치를 떤다. 아침에 곧 시험을 치를 아이와 통화를 하고 말씀으로 위로하고 저를 위해 기도하였다. 앞서 누가 출근에 앞서 회사에서의 이런저런 일을 토로하며 기도를 부탁하여, 적절한 말로 위로하고 말씀으로 권면하였다. 자, 그럴 때 저들에게 비치는 내 모습은 얼마나 복된가. 고맙다는 말을 들을 때 나는 순간 낯이 뜨겁고 마음이 어려워진다. “내 영혼아!” 하고 소리쳐 부르고 싶은 심정이다. 이를 간직하기란,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2).
거듭 또한 지속적이고 일관되게 나를 주 앞에 세워야 하는 이유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19-21).” 아니면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 말에 말을 포개어 드높인다 해도 이는 곧 허물어질 것이어서,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소고 치며 춤 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150:3-4).
나에게 주는 신호, 그 소리에 맞춰 주를 바라고 아뢰고 고하며 나를 주 앞에 세워가야 하는데,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146:3-4).
그게 또 두리번거리게 되고 누구 없나? 하고 도울 자를 찾는다. 심지어 내가 나를 신뢰하고 의지하려 할 때면 어처구니가 없다. 내가 내 말에 확신할 때 나는 쓰러질 게 뻔하다. “이에 세상 만민에게 여호와께서만 하나님이시고 그 외에는 없는 줄을 알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왕상 8:60).” 하나님 외에 다른 무엇도 의지하거나 신뢰하지 않는 것, “땅의 모든 끝이여 내게로 돌이켜 구원을 받으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 45:22).” 이에,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여호와는 천지와 바다와
그 중의 만물을 지으시며
영원히 진실함을 지키시며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며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이시로다
여호와께서는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도다
(5-7).
오직 주만이 나의 도움이심을. “내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며 자복하여 이르기를 크시고 두려워할 주 하나님,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위하여 언약을 지키시고 그에게 인자를 베푸시는 이시여(단 9:4).” 하고 날마다 그 앞에 나오게 하심이 복 중에 복이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20).” 이처럼 화들짝 놀라 아침 일찍 주 앞에 나를 앉히는 일, 그럴 수 있도록 이를 이끄심이 내게는 은혜 중에 은혜였다.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들의 눌림과
궁핍한 자들의 탄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제 일어나
그를 그가 원하는
안전한 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
(12:5).
말씀만이 답이고 말씀만이 위로가 되는 삶으로. “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사 61:1-3).” 읽고 또 되새김으로,
여호와께서 맹인들의 눈을 여시며
여호와께서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며
여호와께서 의인들을 사랑하시며
여호와께서 나그네들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들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
(146:8-9).
주의 위로가 내 안에 있음이었다. 그리하여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잠 16:3).” 그렇게,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37:5-6).
말씀이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나의 나 됨으로는 주 앞에 설 수도 나아갈 수도 없음을. 하여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엡 6:18).” 나는 그저 구하고 또 구할 뿐이다. 그러할 때,
시온아
여호와는 영원히 다스리시고
네 하나님은 대대로
통치하시리로다 할렐루야
(146: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