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96편 / 기이한 행적
220626 주일
시편 96편
기이한 행적
시 96:1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
시 96:2 여호와께 노래하여 그의 이름을 송축하며 그의 구원을 날마다 전파할지어다
시 96:3 그의 영광을 백성들 가운데에, 그의 기이한 행적을 만민 가운데에 선포할지어다
들어가는 말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지어다(시 96:9).”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고 천국 백성이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그러나 천국 백성은 각자의 상급에 차등이 있다. 이를 위해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8).”
곧 저마다의 영광이 다르다.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고전 15:41).” 오늘 우리의 기준으로 생각하면 천국에서도 차등이 있고 격차가 있다는 소리는 부정적인 의미로 들린다. 하나 천국에는 죄가 없다. 곧 질투도 시기가 있을 수 없다. 모두는 서로를 인정한다. 그 누림을 감격하고 같이 기뻐한다. 하지만 엄연한 사실 하나를 더하면, 감격을 같이 기뻐하는 것과 감격을 소유하는 것은 다르다. 바울은 이를 알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4).” 곧 우리가 아는 공평은 무조건 같은 게 아니다. 이는 오히려 불공평하다. 하나님의 공평하심은 오늘 시편에서 다루는 ‘기이한 행적’에 속한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자가 되었다. 이는 일반구원, 기본구원이다. 믿음은 거저 주시는 바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나 신앙은 값없이 거저 소유하고 사는 게 아니다. 신앙은 천국 백성임을 알고,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이를 향해 달려간다.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 그러하기를(딤후 4:8). 성경의 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히 12:1).” 이를 붙들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11:40).” 여기서 몇 가지, 첫째: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렸다. 무엇인가? 돈, 안락함, 세상 즐거움, 이 모든 것. 둘째: 인내로써 경주하였다. 경주의 목적은 우승이다. 무엇을 위한 것인가? 셋째: 예비 된 더 좋은 것이 있다. 하다못해 이 땅에서도 더 나은 삶을 위해 목표를 정하고 스스로 자기 희생을 하는데 하물며! 헌신하고 봉사로 목숨까지 초개와 같이 버리는 선교사들과 주의 길을 달려가는 ‘허다한 무리들’이 있다.
이것이 공평한 것이고, 오늘 시편은 “그의 영광을 백성들 가운데에, 그의 기이한 행적을 만민 가운데에 선포할지어다(시 96:3).” 반드시 그러할 것을 알린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의 ‘기이한 행적’을 아는 사람이면, 바울과 같이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하는 신앙을 지키며 평생을 바쳤다. 이에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으로 말이다. 이에 “그리스도를 얻고(기본구원)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성화구원) …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영화구원)”가 있다는 사실이다(빌 3:8-9). 오늘 우리는 이를 알고자 한다.
곧 이것은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이다. 얼마나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환난과 핍박도 마다하지 않았던가? 그로 인해 우리도 오늘 복음을 받았고 주를 나의 구주로 영접할 수 있었다. 잠시 우리 교회사를 보면, 1884년 알렌 선교사가 미개한 땅 조선에 들어왔다. 이후 40여년 부흥의 물결이 북장로교만 36만 명, 다른 교단까지 합치면 50만 명을 넘겨 주를 믿게 하였다. 한데 1930년에서 45년까지 혹독한 시련이 찾아온다. 신사참배를 하네, 마네… 교계는 극한 위기에 빠졌으나 1945년 해방 이후 40여 년 동안 교회 부흥은 엄청난 기적을 맛보았다. 세계도 놀랄 정도로 한국교회의 부흥은 현대에 이룬 기적과 같았다. 그 사이 6.25전쟁이 있었고, 70년 중반까지 유신 독재의 시절도 있었으나 교회부흥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기록에 보면 1년에 4천개씩 개척교회가 생겨나고 60만 명씩 회개하고 돌아왔다고 한다. 1984년 한국교회 100주년 당시 공식 발표는 당시의 전 인구 4분의 1에 달하는 1200만 명의 사람들이 기독교인이라는 통계도 있다.
이는 1884년 알렌을 위시하여 1885년 아팔렌젤러와 1889년 언더우드와 그 외에 수많은 젊은 선교사들의 헌신과 봉사로 이룬 하나님의 ‘기이한 행적’이다. 오늘 시편 8절, “그에게 돌릴… 예물을 들고 그의 궁정에 들어갈지어다(96:8).” 할 때, 저들이 자신의 몸을 산제사로 드린 결과로 주의 궁정에 들어간 것이다. 이것이 오늘 전하고자 하는 복음의 핵심이다. 목숨보다 귀하고, 자신의 자주적인 의지와 행복추구권도 포기하고,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얻은 그 구원의 감격을 알고, 하나님의 이 ‘기이한 행적’을 따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 같이 자신들도 예수님을 따라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던 것을 몸소 증거 한 것이다(롬 5:8). 그러므로 “모든 나라 가운데서” 보란 듯이 “굳게 서고 흔들리지 않으리라.” 어떻게 저들은 그럴 수 있었을까? “그가 만민을 공평하게 심판하”실 것을 알았다. 그에 ‘합당한 영광’을 얻기 위하여 저들은 기꺼이 주의 ‘기이한 행적’에 동참하였다(96:10). 이에 우리는 바로 그 <‘기이한 행적’을 향한 세 가지 실천>을 살펴볼 것이다.
본문 이해
먼저 오늘 시편은 하나님의 신정통치 시(95-100편) 여섯 편 가운데 두 번째 시편이다. 첫 번째 시(95편)는 지난 주일에 나누었던, ‘하나님의 선민으로 여호와를 찬송하라’는 촉구였다. 이제 두 번째 시(96편)로 ‘만물과 열방을 향해 우리는 하나님의 기이한 행적의 통치를 선포하라’는 촉구를 받는다.
오늘 시편은 역대상 16장을 시적배경으로 한다. 엄연히 오늘 말씀은 선민들의 찬송 시다. 안 믿는 자는 들을 귀가 없다. 시적구성은 3연으로, 1연(1-3절)은 ‘온 열방을 향해 하나님의 구원과 영광의 기이한 행적을 선포하라’는 것이다. 2연(4-9절)은 ‘초월자 하나님의 지위를 밝힘으로 열방은 여호와께 찬송과 경배를 올려야 한다.’는 것을 촉구한다. 3연(10-13절)은 ‘여호와의 영원한 통치와 종말론적 심판’을 예언한다. 특히 이 부분은 역대상 16장 23-33절을 인용하듯이 구성되었다. 그럼 이제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구원과 영광의 기이한 행적에 대해, 특별히 구별된 자로 선택받은 백성의 입장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1. 기이한 행적을 만민 가운데 선포하라(1-3, 대상 16:23-27).
“그의 영광을 백성들 가운데에 그의 기이한 행적을 만민 가운데에 선포할지어다(3).”
소명자와 사명자를 구분하였다. 소명은 주의 부르심으로, 믿음으로 구원 받는 기본구원이라 한다면, 사명은 보내심을 받는 것으로 그에 따른 온전한 행함으로의 성화구원을 뜻한다. 성화는 자라고 성장하는 것으로 행함이 없이는 성숙해질 수 없다. 오늘 시편에서 ‘모든 백성’이 아니라, “그의 영광을 백성들 가운데에” 주시는 말씀이다. 모두를 위한 복음이나 특별한 자를 위한 명령이다. 평생을 믿는 자로 산다면서 “그의 기이한 행적을” 경험하지 못하는 자들도 수두룩하다. 나는 저들의 결국은 알지 못한다. 다만 주님의 경고 중에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하신 말씀으로 스스로를 점검하기 바란다.
그럼 그의 ‘기이한 행적’을 경험하는 자들은 무엇이 다른가? 오늘 1, 2절의 시를 보면,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 여호와께 노래하여 그의 이름을 송축하며 그의 구원을 날마다 전파할지어다(1-2).” 이를 역대상에서 진술하고 있는 내용으로 보면, “너희 민족들아 주의 백성과 즐거워하라 주께서 그 종들의 피를 갚으사 그 대적들에게 복수하시고 자기 땅과 자기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시리로다(신 32:43).” 즉 우리가 하나님을 새 노래로 노래한다는 것은, 주의 백성과 즐거워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는 “그의 구원의 날”에 밝혀질 것이다.
2.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4-9, 대상 16:28-29).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예물을 들고 그의 궁정에 들어갈지어다(8).”
우리가 돌릴 ‘합당한 영광’은 무엇일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 아닌 것으로 만족함을 누린다면?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면서 보내심은 꺼려하며 산다면? 오늘 시편은 일갈한다. “예물을 들고 그의 궁정에 들어가라” 곧 우리가 드릴 예물이 무언가? 돈? 봉사와 헌신? 남다른 희생? 이를 바울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이 몸의 비밀은,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전 6:19).” 여기서 답을 찾을 수 있다. 곧 우리가 ‘주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우리 몸은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20).”
여기서 주목할 것은 마음으로가 아니다. 생각이나 느낌만으로도 아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다시 말하면 이것으로 우리가 장차 누리고 살 영원한 나라의 삶을 연마하는 것이다. 곧 우리가 주를 경외함이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 일이다. 이를 시인은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지어다(시 96:9).” 두려워할 줄 모르면 멋대로 살게 된다. 젊은이들, 어린아이들이 무서운 것은 겁이 없기 때문이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몸)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시 119:9).” 곧 말씀 앞에 무릎 꿇지 않는 몸은 그 이상과 목표가 아무리 크다 해도, 그가 이룬 업적과 성공이 아무리 위대하다 해도 소용이 없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사 1:3).” 하물며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 9:10).” 곧 우리가 돌릴 합당한 영광은 성경을 펼치는 손, 말씀을 읽는 눈, 이를 생각하는 두뇌,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발, 저에게 주의 ‘기이한 행적’을 증거하는 입… 곧 몸의 실천으로다.
3. 그가 만민을 공평하게 심판하시리라(10-13, 대상 16:30-34).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세계가 굳게 서고 흔들리지 않으리라 그가 만민을 공평하게 심판하시리라 할지로다(10).”
앞서도 밝힌 바, 공평이란 모두에게 전부 무작위로 일정하게 분배하는 것이 아니다.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 49:20).” 무엇을 말인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 곧 하나님은 모든 인류에게 평안을 주시기를 원하신다. 구원 받고 주의 나라에서 복락을 누린다는 것은 “그의 날에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렘 23:6).” 모두가 수긍하고 인정하는 공평,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하신 주의 말씀을 의지하고 사는 사람과 이를 미덥지 않아 자기 수고와 애씀을 우선하며 사는 사람이 같을 수는 없다(요 14:27).
다시 말하지만 ‘주를 경외하지 않으면 자신을 신뢰한다. 자기 뜻, 자기 의, 자신의 바람을 우선하는 사람은 주를 경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은 막연하여 불확실한 것 같은데, 세상적인 결과는 확실하여 있는 자가 누리며 잘 사는 것 같다. 주의 뜻은 나의 뜻을 거스르는데, 세상의 복락은 내가 하기 나름인 것 같다. 그래서 특히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완고한 이유는 자신의 공적이 크기 때문이다. 나이 들면서 노인이 점점 완고한 이유는 자신들이 살았던 세월만이 기구하였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를 갈아엎어야 한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 49:15).”는 것이 보증이다. 하나님이 성경에 기록한 약속이다.
역대상에서 읽으면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지어다 세계가 굳게 서고 흔들리지 아니하는도다.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며 모든 나라 중에서는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통치하신다 할지로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대상 16:32-34).” 한 마디로,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오늘 시편에서도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며 바다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외치고, 밭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즐거워할지로다. 그 때 숲의 모든 나무들이 여호와 앞에서 즐거이 노래하리니, 그가 임하시되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라. 그가 의로 세계를 심판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96:11-13).” 곧 반드시 우리 하나님은 심판의 주로 우리를 그 앞에 세우실 것이다.
나오는 말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마 13:43).”
공평하신 하나님은 그의 기이한 행적을 통해 우리가 돌려야 하는 영광을 알게 하신다. 한 번 더 언급하면, 바울의 표현처럼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고전 15:41).” 그래서 저는 나이 들고 병들어 감옥에 갇혀서도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0-12).” 여기서 세 가지, 첫째: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하여 자신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한다고 외친다. 둘째: 이는 이미 얻은 것도 이룬 것도 아니다. 해서 저는, 셋째: 그리스도 예수께서 잡힌 바 된 그것(예수님도 이를 붙들고 달리신 것과 같이), 바로 그것을 자신도 잡으려고 달려간다고 한다.
그럼 그것이 무엇인가? 바로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이다(8). 그것을 가지고 주의 궁정,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겠다는 것.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예물을 들고 그의 궁정에 들어갈지어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홀로 두지 않으시었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시 121:3-4).” 오늘 우리가 ‘여기까지 지내온 것이 주의 은혜이다.’ 하는 고백도 바로 그것이다. 이를 힘입어 바울은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2).” 우리도 이와 같은 영성으로 달려나가자. “그가 임하시되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라. 그가 의로 세계를 심판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96:11-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