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의 영광이 땅과 하늘 위에 뛰어나심이로다

전봉석 2022. 6. 26. 05:23

 

그 때에 아히도벨이 베푸는 계략은 사람이 하나님께 물어서 받은 말씀과 같은 것이라 아히도벨의 모든 계략은 다윗에게나 압살롬에게나 그와 같이 여겨졌더라

삼하 16:23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지어다 그의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그의 영광이 땅과 하늘 위에 뛰어나심이로다

시 148:13

 

 

말씀을 전하는 자로, 실은 저가 가라지일 때 그 피해는 어떠할까, 하는 생각을 아히도벨을 보며 느낀다.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마 13:29-30).” 지상의 교회는 언제나 불완전하였다. 이는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25).” 기도가 멈추고 주의 말씀이 힘을 잃을 때 사탄은 가라지를 덧뿌리고 간다. 저는 평생을 교회 안에서 분란을 일으킨다. 목사와 척을 두거나 성도와 성도 사이를 이간질한다. 사사건건 말썽으로 교회에 해가 된다. 직분 맡은 자로 교회에 오래된 만큼 그 활동반경은 더욱 거침이 없다. 한데 저가 만일 목사이면….

 

오늘 말씀이 두려움으로 읽힌다. “그 때에 아히도벨이 베푸는 계략은 사람이 하나님께 물어서 받은 말씀과 같은 것이라 아히도벨의 모든 계략은 다윗에게나 압살롬에게나 그와 같이 여겨졌더라(삼하 16:23).” 그런 자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할 끔찍한 죄악을 책동한다. 아버지 다윗 왕을 몰아내고 왕좌를 차지한 압살롬은 어찌할지 다음 행보를 아히도벨에게 묻는다. “압살롬이 아히도벨에게 이르되 너는 어떻게 행할 계략을 우리에게 가르치라 하니(20).” 한데 아히도벨의 계책이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 이르되 왕의 아버지가 남겨 두어 왕궁을 지키게 한 후궁들과 더불어 동침하소서 그리하면 왕께서 왕의 아버지가 미워하는 바 됨을 온 이스라엘이 들으리니 왕과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의 힘이 더욱 강하여지리이다 하니라(21).”

 

이를 책동하는 것도 모자라 보란 듯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자리를 깐다. “이에 사람들이 압살롬을 위하여 옥상에 장막을 치니 압살롬이 온 이스라엘 무리의 눈앞에서 그 아버지의 후궁들과 더불어 동침하니라(22).” 누구의 잘잘못을 차치하고 주의 일을 맡은 자로서 아히도벨의 이와 같은 선동이 나는 두렵다. 이때 예수님의 냉정하신 판단에 오금이 저린다.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일련의 교회 사건이나 상황을 나는 어려서 일찍이 보고 느끼며 체감하고 살았다. 입안의 혀처럼 굴던 이가 졸지에 앞장서서 공격하는 경우도 있었고, 그렇듯 주의 종을 갈아치우고 멋대로 교회를 쥐락펴락하는 소위 개척의 주역이란 장로가 또는 집사가 그런 경우도 있었다. 어릴 때 나의 부친은 담임하던 교회에서 쫓겨나 인천으로 와 개척을 하게 된 계기도, 그리고 시간이 흘러 같이 개척 멤버로 나왔던 장로가 등을 돌리며 헌금하였던 돈을 돌려 달라 하였던 일도, 어렵게 교회 건축을 하며 그 모든 일을 맡아 건축을 책임지던 집사의 사기로 졸지에 빚더미에 앉게 된 교회와, 그 일로 우수수 교회를 등지고 떠난 성도들과….

 

이루 말할 수 없는 상황을 보고 자라면서 나는 어릴 때 가졌던 순수하였던 믿음, 나도 목사가 되겠다던 생각을 버리고 교회에서 교회를 멀리하는 사람이 되어 살았다. 어느 통계에 보니 개신교 교인들의 신뢰도가 가톨릭이나 불교에 비해 현저히 낮은 것을 보고 나 역시 공감하였다. 교회 사람이라면 치가 떨려서 더는 저들과 어울리지 않고자 살았던 날들도 꽤나 길었다. 그냥 두라, 하시며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마 13:30).” 하시는 말씀을 그때는 그렇게 심각하게 읽지를 못했다.

 

오늘 아히도벨을 보며 또한 그 외의 인물들…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의 가산을 관리하던 종 시바가 다윗에게 거짓을 고하며 주인을 모략하는 일이나 “시바가 왕께 아뢰되 예루살렘에 있는데 그가 말하기를 이스라엘 족속이 오늘 내 아버지의 나라를 내게 돌리리라 하나이다 하는지라(3).” 이때다 싶어 다윗을 쫓아오며 조롱하는 시므이나 “시므이가 저주하는 가운데 이와 같이 말하니라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7).” 저를 척결하겠다고 나서는 다윗 곁의 아비새나 “아비새가 왕께 여짜오되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하건대 내가 건너가서 그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하니(9).” 하나같이 예수님의 ‘가라지의 비유’로 놓고 볼 때 우리 곁에서 우리를 책동하는 인물들로 연상된다.

 

이때 돋보이는 다윗의 영성은 놀랍다. 가령 시므이의 저주를 두고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10).” 하고 그것까지도 주의 섭리 가운데 두고 인정하는 것이다. 마치 야곱이 죽고 형들에게 보복할 수 있는 위치의 요셉이 전혀 다른 영성의 소유자로 거듭나 있었던 것처럼,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 45:5).” 하고 오히려 위로하여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50:20-21).”

 

어찌 그런 상황에서 저와 같이 냉철할 수 있었을까? 다니엘과 그 친구들처럼 당장 목숨이 걸린 일 앞에서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 3:17-18).” 이와 같은 신앙은 하루 아침에 저절로 뚝딱 생겨난 게 아닐 것이다.

 

먼저는 날마다 자기 안에 같이 자라는 알곡과 가라지를 알고 그 피를 뽑는 일에 게으르지 않은 것이고, 밖으로는 내 곁을 같이하는 이들을 위하고 함께 하는 데 있어 저들의 걸림을 두고 매순간이 씨름이었을 것이다. 가령 예수님도 3년여의 공생애 동안 후에 예수를 판 가룟인 유다가 함께 동고동락하였다. 사사건건 의심하는 도마나 믿지 못하는 빌립도 있었고, 툭 하면 나대며 감정적으로 치받고 들던 요한이나 베드로도 있었다. 저들을 고르고 솎아 다스리며 훈련하시는 동안 예수님의 심정은 어떠셨을까? 더욱이 나중에 자신을 팔아 배교할 자임을 아시면서도 유다를 곁에 두고 함께 하셔야 했던 심정은 또 오죽하셨을까?

 

성경은 일러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잠 16:4).” 오늘 본문에 드러나는 여러 군상을 보고, 지나온 나의 날들 가운데 목회자의 가정에서 목사의 아들로 지근거리에서 지켜보아야 했던 ‘어른들의 세계’가 참으로 추잡하고 역겹기까지 하던 기억도 생생하다. 그때는 몰랐다.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의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마침내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렘 17:10-11).”

 

이는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이를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이면 그럴 수 없다. 이제 아주 작은 교회로 적은 인원을 상대하나, 그 하나의 사연이 엄청난 우주보다 광활하여 얽히고설킨 문제와 같이, 저들을 사랑하되 저들 속으로 흡수되듯 빨려 들어가면 그야말로 우주 미아가 될 지경이다, 주의 사랑으로 사랑하되 양과 같이 순진하게 그러나 뱀과 같이 영특하게 사람을 접해야 할 필요를 자주 느낀다. 병적으로 감정이 앞설 때 나도 나를 주체하지 못하는 것을 잘 안다. 내 안에서도 같이 자라는 가라지가 있다는 것을 또한 잘 안다. 그래서 성경은,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 1:17).” 곧 두려워할 줄 아는 게 신앙이고 그래서 더욱 주를 바라는 게 지혜였다.

 

일련의 끔찍한 현상을 보면서 특히 주의 이를 맡은 자로 아히도벨의 책략을 보면서, 악의 극치를 가늠할 수 없어 두렵다. 이는 단순히 믿음의 문제가 아니다. 누구를 함부로 비판하거나 색안경을 끼고 보아도 안 된다. 하여 더욱 내 속에 자라는 가라지, 날마다 그 피를 뽑아내는 데 농부의 수고가 필요하다. 어제는 우연히 어느 동영상에서 누구의 설교였는지, 동성애에 대한 애매모호한 설교를 들었다. 나름 민감한 사안이라 공적으로 발언하는 것이 조심스러워 그랬겠지만, 저의 말은 모호하였고 성소수자라는 데 주안점을 두어 주의 사랑으로 이를 용납해야 한다는 식으로 얼버무리는 것이다. 순간 우리로 할 말을 하지 못하게 하는 자리, 해야 하나 할 수 없는 신분으로의 삶이 두렵다는 생각을 하였다.

 

분명히 동성애는 죄다. 성경은 그리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 각각의 성을 구분하셨다. 이를 서로가 한 몸을 이루는 데 하나님은 만족해하셨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 바울은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 6:9-10).” 하고, 동성애를 음행과 우상숭배와 간음과 도적과 탐욕과 술 취함과 모욕함과 거짓으로 같이 두고 ‘남색하는 자’를 질책하였다. 끌릴 수 있다. 이성애라고 죄로 끌리지 않겠나? 어쩌면 동성이라 더 친밀하고 은밀한 관계로 나아가기도 쉽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2-23).” 하물며 그런 자들이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26-27).” 남자가 여자를, 여자가 남자를 대하는 일에 있어 순리대로, 곧 하나님이 우리에게 정하신각각 그 성의 아름다움을 존중하고 위하고 사랑하는 일은 귀하다. 한데 그 아름답고 순수한 사랑과 육체의 결합이 순리대로가 아닌 역리로 쓰여, 실제 가장 오래된 악습 중 하나가 매음이다. 오늘도 버젓이 광공서 앞에 특히 더 이와 같은 성인업소는 성업중이다. 그만큼 사람들은 사람을 그리워하면서도 주기 좋을대로 쓴다. 끌리는대로 좋아한다.

 

이때 같은 성에게 끌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이를 두고 그리 행함을 정당하다고 여기는 것이 문제다. 이성에 대해서도 마치 이제는 문화처럼 접근하는 경향도 있는데, 그 표현 가운데 '성접대'라니! 그뿐인가? 이 모든 게 실은,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28).” 그 원인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다. 결과로는 오늘 우리 사회에 만연하여 이젠 누구라도 성인이 되면 퇴폐업소를 드나들 수 있고, 암암리에 여기 건물에도 수도 없이 많다. 알면서도 서로 모른 체 하는 것이다. 하물며 섣불리 동성애에 대해 죄라 하였다가는 온갖 비난과 욕이 따르는 시대다. 말할 수 없는 게 그뿐인가? 낙태나 이혼은 예사로운 것이 되었고(법으로 금한다 해도) 심지어는 동물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도 그 지나침을 두고 한탄하지 않는다. "너는 짐승과 교합하여 자기를 더럽히지 말며 여자는 짐승 앞에 서서 그것과 교접하지 말라 이는 문란한 일이니라(레 18:23)." 

 

성애를 느끼는 것을 취행의 범주로 묶으면서 이제 점점 소아성애자도 암묵적으로 허용할 판이다. 이렇듯 취향의 문제로 흡수되는 까닭은 각자의 자유와 개인의 선택이 우선되면서부터이다. 낙태나 혼외임신을 여성의 권리로 주장하거나 아예 버젓이 용기 있는 여성으로 추앙 받으며 방송인으로 활동하는 비혼여성의 임신을 개인의 선택으로 존중하고 지지하는 분위기다. 그럴 수 있는 일로 치부되면 더는 겉잡을 수 없는 성적 혼란이 야기되어 족보는 꼬이고 서로가 좋을 대로, 오늘 압살롬이 어쨌든 아버지의 부인들을 취하는 따위의 행각이 버젓이 남들 다 보는 앞에서 자행되는 일과 같을 것이다. 언제부턴가 이를 악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슬그머니 그럴 수 있은 일로 여겨 아래층 위층에 그런 상가들이 버젓이 영업중이다. 

 

문득 어제 들었던 모 방송인의(목사라고 차마 말하기가 민망하여) 설교인지 무엇인지 모를 것을 보다 끄고, 이를 우상 숭배의 문제로 한데 묶어 정리하신 말씀 앞에서 한참을 생각하였다. 그렇겠구나, 사람들이 점점 자기를 사랑하는 데 있어 과감해진다. 나 좋으면 된다. 내가 무슨 옷을 어떻게 입고 다니든, 그야말로 누구랑 교접을 하든 성교를 하든 간섭할 일이 아닌 것이다. 이제 더는 거리낄 것도 없다. 거침이 없다. 죄에 둔감해지는 게 아니라 더욱 과감해진다. 과연 우리 안에 순수한 믿음이 남아있기는 한 것일까? 반드시 이는 회복돼야 할 문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마 17:11).” 곧 엘리야와 같이 올곧은 주의 종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대다. 바른 말씀을 전해야 한다. 설령 교회에서 쫓겨난다 해도, 시대에 맞춰 교회 세력을 확장하는 일에 앞장서서는 안 된다.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막 3:5).” 주가 아니시면 우리로서는 이를 회복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목사로든지 평신도로든지 자기 신앙과 믿음을 지키기기 점점 어려운 시절이다. 죄가 숨었다. 아니 대놓고 선의로 둔갑한다. 선이 의심스럽고 호의가 두렵게 되었다. 아들 압살롬의 반역은 물론 저에게 기생하는 군상들을 보면서, 쫓겨 가는 다윗과 또한 저의 곁을 지키는 가신들을 보면서, 나는 여러 생각을 하게 된다. 아,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그 무엇보다 분별력이 필요한 때이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전 2:13).” 이에 오늘 시편을 펼친다.

 

할렐루야

하늘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며

높은 데서 그를 찬양할지어다

(148:1).

 

‘높은 데’서 멀리 바라본다. 당장 닥친 코 앞의 일에 연연하다가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우리의 가장 위대한 신앙은 어떠하든지 찬양이다. 우리의 찬양이란 주를 선포하는 것이다.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빛을 발하는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이에,

 

여호와를 찬송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며 그의 이름이 아름다우니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

(135:3).

 

다른 무엇을 기대하기에 이리 붙었다 저리 굴렀다 하며 오락가락하는 것일까? 우리에겐 ‘그의 이름이 아름다우니.’

 

그의 모든 천사여 찬양하며

모든 군대여 그를 찬양할지어다

(148:2).

 

이것이 성도로서의 권리이고 행사해야 할 의무이다. 고로,

 

해와 달아 그를 찬양하며

밝은 별들아 다 그를 찬양할지어다

하늘의 하늘도 그를 찬양하며

하늘 위에 있는 물들도

그를 찬양할지어다

(3-4).

 

자연이 오히려 우릴 책망하는 것 같다. 때가 되면 봄이 오고 여름에 들어서면서 장마가 시작되었다. 아침 시간마다 느끼지만 어둠이 서서히 거치면서 아파트 단지에 새소리가 울려 퍼진다. 어김없이 저들의 찬양은 하루도 그치지 않는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19-21).” 이것이 우리에게 두신 지상명령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6-17).” 곧

 

그것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함은

그가 명령하시므로 지음을 받았음이로다

그가 또 그것들을 영원히 세우시고

폐하지 못할 명령을 정하셨도다

너희 용들과 바다여

땅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라

불과 우박과 눈과 안개와

그의 말씀을 따르는 광풍이며

산들과 모든 작은 산과 과수와

모든 백향목이며

짐승과 모든 가축과 기는 것과

나는 새며 세상의 왕들과

모든 백성들과 고관들과

땅의 모든 재판관들이며

총각과 처녀와 노인과 아이들아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지어다

그의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그의 영광이 땅과 하늘 위에

뛰어나심이로다

(5-13).

 

이 모든 구절이 이 땅의 모든 것을 일깨운다.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대상 29:11).” 이를 인정하는 일이 곧 온 세계를 덮을 것이다.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합 2:14).” 곧

 

여호와여 주의 능력으로

높임을 받으소서

우리가 주의 권능을 노래하고

찬송하게 하소서

(21:13).

 

세상이 아무리 요지경이고 저마다 자기가 옳다 하고 살아간다 해도 가라지는 가라지로 생을 마칠 것이고 알곡은 알곡으로의 생을 마칠 것인데,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4-5).” 주님은 우릴 위해 기도하신다. 그러므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벧전 4:11).” 하여,

 

그가 그의 백성의 뿔을 높이셨으니

그는 모든 성도 곧 그를 가까이 하는 백성

이스라엘 자손의 찬양 받을 이시로다

할렐루야

(148:1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