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와 함께 베냐민 땅 셀라에서 그의 아버지 기스의 묘에 장사하되 모두 왕의 명령을 따라 행하니라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니라
삼하 21:14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시 3:5-6
우리에게 오는 환난은 우리로 죄를 뉘우치게 한다. C. S. 루이스의 표현처럼 ‘고통은 하나님의 확성기’다. 고난을 통해 크고 다급하게 우리를 부르신다. 이를 허투루 듣거나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기면 허사다. 일찍이 예수님은 일러 오늘 우리의 현상을 주의주신 바 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마 24:4-8).”
여기서 보면 먼저는 미혹하는 사람들이다. 스스로를 예수라 하고 또는 하나님이 보내신 자로 내세우는 사이비나 이단이 득세한다. 다음은 난리와 난리 소문이 돈다. 요즘처럼 SNS가 내남없이 전파를 타는 가운데 유튜브니 개인방송이 난무하다. 보수나 진보나 서로의 진영논리에 빠져 정치를 ‘까대고’, 온갖 지식과 얕은 무용담이 사람들의 마음을 현혹한다. 또한 나라와 나라가 전쟁을 일삼고 수많은 자연재해로 동식물들은 물론 제3 세계의 사람들이 고통 받고 있다. 한데 이게 끝이 아니라, 이제 시작이라는 것이다.
오늘 본문도 다윗 왕 통치 때에 시련이 닥친다. 기근이 임하고 이를 기브온 사람들과의 맹세를 어긴 죄의 문제로 풀어가고 있다. 기브온 사람들은 이방 민족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니다. 한데 사울이 저들과의 약속을 깨고 공격을 했던 것이다. 이를 다윗의 때에 바로 잡으신다. 분명히 성경은 앞서 가나안에 들어갈 때 이방 민족들과 어떤 언약도 맺지 말라고 경고한 바 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차지할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센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넘겨 네게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어떤 언약도 하지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신 7:1-2).”
여기서 오늘 본문 2절에 보면 “기브온 사람은 이스라엘 족속이 아니요 그들은 아모리 사람 중에서 남은 자라 이스라엘 족속들이 전에 그들에게 맹세하였거늘 사울이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위하여 열심이 있으므로 그들을 죽이고자 하였더라.” 즉 허투루 맹세한 대가는 고스란히 자신들의 몫이다. 이처럼 고난이 우리 삶에 닥치면 이를 가벼이 여길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진 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솔로몬은 단순하면서도 온전한 삶의 태도로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4).”
곧 우리 삶이 어떤 일도 우연히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없다. 어제도 처음 누구와 만나 서로를 탐색하듯 대화를 나누고 글쓰기에 대해 설명하는데, 지나온 날들의 모든 족적이 허튼 게 없었다. 그땐 그 일이 우연인 줄 알고, 어쩌다 그리 된 것쯤으로 여겼는데 실은 다 이유가 있었고 목적을 가졌다. 이를 또 솔로몬은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6).” 모든 일에서 주의 뜻을 살피라고 하는 것이다. 더욱이 한 사람을 새로 만나게 되는 일이란, 단순히 그 대상을 전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저의 온 우주를 마주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서로를 이해하고 그 세계를 알아간다는 일은 스스로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어느 순간 가운데 역사하셨던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는 일이다. 다윗은 이를 시로 지어서,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 앞에 있사오며
나의 탄식이
주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
내 심장이 뛰고 내 기력이 쇠하여
내 눈의 빛도 나를 떠났나이다
내가 사랑하는 자와 내 친구들이
내 상처를 멀리하고
내 친척들도 멀리 섰나이다
(38:9-11).
하며 인생의 고단함을 표현한다. 곧 우리는 저마다 평안을 원하고 자기만족을 추구하며 사는데, 이때 작동하는 방어기제가 망각이라는 것이다. 마치 없었던 일처럼 잊어버리고 사는 게 상책인 줄 알고, 좋은 것만 생각한다는 식인데, “너는 어찌하여 네 상처 때문에 부르짖느냐 네 고통이 심하도다 네 악행이 많고 네 죄가 허다하므로 내가 이 일을 너에게 행하였느니라(렘 30:15).” 곧 하나님의 확성기는 우리를 큰 소리로 불러 세우고 그릇된 길로 가지 못하게 붙드신다. 마치 부모가 자식의 위험 앞에서 큰 소리로 이름을 부르며 저지하는 것과 같다. 어떤 만남 또는 누구의 이야기는 나를 돌아보게 하는 간접조명과도 같다. 나 역시 슬그머니 카펫 밑으로 밀어두고 다 치워진 것처럼 카펫을 밟고 시치미 떼고 사는 일들에 대하여,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심판할지라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 그리한즉 그것이 너희에게 죄악의 걸림돌이 되지 아니하리라(겔 18:30).”
곧 우리에게 더하시는 환난은 우리로 거룩하게 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처방이다. 마치 고난은 병원 같다. 치료가 필요한 영혼을 외과적인 수술을 동원하든 내과적인 관찰치료가 이어지든, 사실 조심스러워서 천천히 접근해야 할 일이지만 나는 글쓰기가 그에 따른 고가의 치료 장비와 같은 구실을 한다고 본다. 어떤 이야기를 글로 표현하려 할 때 자신을 마주해야 하고, 그렇게 더듬어 옛 기억을 떠올리다보면 무의식적으로 카펫 밑으로 밀어두고 치우지 않은 여러 문제들이 발견된다. 어떤 것은 썩어 냄새가 나고 그것으로 여러 병원균이 발견되기도 한다. 실은 그것을 마주하기 두려워서 글쓰기를 중도에 포기하는 경우도 많다. 마치 죄의 문제를 다루는 기독교를 멀리하고 떠나게 되는 경우처럼 말이다. 기독교에서 십자가를 빼면 복음은 와해된다.
많은 이들이 부활만 축복하고 기리며,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으로 전하거나 듣기를 원한다. 하지만 우리가 상징으로 지니는 십자가는 실제 로마시대 당시 가장 끔찍한 형틀이었다. 세상 어느 종교가 그런 끔찍한 것을 상징으로 삼겠나? 불교는 아름다운 연꽃을 회교는 초승달을 가톨릭은 성모 마리아를 형상으로 세우거나 몸에 지닌다. 그런데 유독 기독교만은 무시무시한 형틀이었던 십자가를 세우고 몸이 지니며 이를 기념한다. 이를 바울은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곧 저가 전하는 복음은 십자가의 고난을 제외하면 힘을 잃는다. 물론 우리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이나 부활은 앞서 십자가의 죽으심이 먼저이다.
하여 예수님도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에 대한 자기 확신을 신뢰하지 않는 것으로 주를 경외하는 첫 걸음을 뗀다. 어제도 잠시 대화를 나누면서 느낀 일이지만 나의 유년시절을 돌아보면 끔찍하기 짝이 없다. 어떤 서러움과 분함과 억울함이 응어리져 나의 인생에서 상당부분을 이를 분풀이 하는 데서 살았다. 그때 함께 어울리던 이들은 대체로 성공한 사람들이었고, 나름은 훌륭한 이들로 저들 또한 교회를 다녔었거나 다녀도 자기 나름의 신앙으로 성경과 멀어진 삶을 사는 사람들이었다.
우리의 어울림은 거침이 없었고, 추구하는 삶의 가치는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삶의 것이었다. 그때 늘 같이 했던 선생이나 친구나 존경하는 인물들이 돌아보면 모두 저마다의 결핍을 스스로 극복하여 누구는 기자로, 의사로, 교사로, 배운 것도 많고 아는 것도 많고 소유한 것도 많아서 더는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았던 것 같다. 한데 슬그머니 서로를 들추면 저들이 깔고 앉은 카펫 밑에는 온갖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였다. 형제간의 반목으로 원수보다 못한 이들도 있었고, 부모를 등지고 사는 일이나, 누구는 아이 일로 씨름하고, 누구는 각자의 연인으로 돌아누워 살면서도 겉은 멀쩡하였으니.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4:1).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18:6).
우리의 문제는 기도밖에 풀어낼 게 없다. 이를 돕는 데 있어 글쓰기는 앞서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실체를 마주하고 직면하게 한다. 외면하는 동안은 가망이 없다. 그 영혼은 구천을 떠돌 뿐이다. 살았어도 사는 게 아니다. 한참 이슈로 일가족이 바다에 차를 몰고 들어간 사건을 보면서 그와 같은 결말이 있기 전에 한 번 저들에게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더라면… 하는 막연한 생각도 하였다. 죄가 용인될 때 삶은 양면성을 띈다. 겉으로 보이는 나와 실제의 나는 엄연히 다르다. 글쓰기는 이를 중간자적인 입장에서 첫 삽을 뜨고 서서히 자기 내면으로 들어가는 씨름이다. 흔히 막장이라 할 때, 막장은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막다른 지점인 것 같으나 동시에 새로운 길을 낼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한 것이다. 문제는 다들 그 정도는 아니라고 자부하는 스스로의 착각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곧 자신을 용인하고 스스로를 자신할 때, “공의대로 소송하는 자도 없고 진실하게 판결하는 자도 없으며 허망한 것을 의뢰하며 거짓을 말하며 악행을 잉태하여 죄악을 낳으며 독사의 알을 품으며 거미줄을 짜나니 그 알을 먹는 자는 죽을 것이요 그 알이 밟힌즉 터져서 독사가 나올 것이니라(사 59:4-5).”
나로 돌이켜 주 앞에 다시 세우실 때 하나님은 가혹하셨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하고 살았나? 나름은 산다고 살며 열심으로 주어진 상황을 극복하였던 것 같은데, 실은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눅 17:3).” 나는 누구와의 새로운 만남을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기도하였다. 아직 서로를 아는 게 없으나 느낌은 같아서, 저를 위해 내가 할 일을 두고 기도한다. 나는 상상한다. 어릴 때 주의 이름을 부르며 주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옹알거리듯 주께 아뢰던 소녀를 말이다. 초등학교 때까지 교회를 다녔다는 말에, 나는 우리의 만남이 주의 선하신 뜻의 인도하심이란 걸 눈치챘다. 나는 저에게 교회에 나오라, 예수를 믿으라, 일체 말하지 않는다. 다만 내가 저에게 예수의 모습을 보여야 하는데, 하나님의 거룩하신 사랑이 나의 이야기 가운데서 들려져야 하는데, 하고 기도하였다. 나를 보고 예수가 보이지 않는다면, 나의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들을 수가 없다면 더 무엇을 전할 수 있을까?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3:13).” 이는 내가 나은 사람이라, 이제 뭔가 스스럼없이 떳떳하게 주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서가 아니다. 누구보다 연약하고 부족하여 단박에 보잘것없는 사람인 것을 알겠지만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8-10)." 하여 어찌 나 같은 '질그릇'에 이 귀한 보배를 담으셨는지를,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4:7)." 하여 내가 말하고 보일 것은 주의 살아계심과 선하심과 인자하심뿐인 것을 저로 알게 할 수 있다면. 부디 나에게 들리는 것을 저에게 보여주고, 나에게 보이는 것을 저에게 들려줄 수 있다면.
부디 나의 하루가 그러하기를, 내가 나의 치부를 감추지 않는 것은 나 역시 나 하나 건사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인 것을. 그러나 주의 의뢰함으로 저의 공의를 실현하는 삶, “그 짠 것으로는 옷을 이룰 수 없을 것이요 그 행위로는 자기를 가릴 수 없을 것이며 그 행위는 죄악의 행위라 그 손에는 포악한 행동이 있으며(사 59:6).” 그 전의 삶이 어떠했던가를 돌아보면 나야말로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들이 행하는 곳에는 정의가 없으며 굽은 길을 스스로 만드나니 무릇 이 길을 밟는 자는 평강을 알지 못하느니라(8).” 하여 주께 바라는 한 가지, 우리의 만남이 각자의 삶을 성찰하고 보다 유익한 삶을 추구하는 그 이상의, 영원한 삶을 준비할 수 있기를.
하여 나는 말씀을 기반으로 나를 이해하고 받아들임과 같이 누구를 생각하고 마주하고 함께 하는 일에서도 이를 중심에 두려고 하는 것이다.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사 29:13).” 그러니 주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의미는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요 6:51).” 나의 삶도 또한 누군가에게 먹히고 씹히고 마시움을 당하는 것이어야 한다. 곧 우리의 만남에서 나는 저에게 예수의 형상을 드러내야 하는데, 이는 거짓이 없고 진실하며 그 한 영혼을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서로의 영혼을 사랑할 수 있을까?
먼저는 나다. 내가 주의 말씀 앞에 또한 주어진 삶에 충실함으로, 이를 맡기신 이의 뜻을 따르는 것으이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 10:2-3).” 하면 나의 약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때 더욱 강할 수 있어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5).” 곧 누구를 마주하는 일은 나를 돌아보는 것이었다. 저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함은 나를 사랑하셨던 주의 사랑을 회상하며 감복하는 일이다.
아이가 저녁께 문자를 했다. 먹고 있는 약의 용량을 좀 더 늘리기로 했다고 한다. 왜 그런가 하고 나는 묻지 않았다. 얼마 전에 정신과 약을 새로 받은 것으로 아는데, 나는 다만 대수롭지 않은 듯 아이를 위로하고, 오늘은 같이 점심을 먹기로 하였다. 어떤 말로 위로를 하거나 내가 무얼 해주려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늘 주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고 싶다. 우리의 거룩은 주를 신뢰함으로 강해진다. 고난의 대명사 욥은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이를 쉬운 성경으로 다시 읽으면, “그분이 나를 죽이신다 해도 나는 그분을 신뢰할 것이네. 그러나 그분 앞에서 내 사정을 밝힐 것이네.” 곧 우리가 주를 바란다는 것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고백처럼, 도와주실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우린 주를 신뢰한다는 소리다. 곧 풀무불에 던져져 죽을 위기에서 저들의 그와 같은 고백이었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 3:17-18).”
이와 같은 마음은 어떠하든지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전제에서다. 사람이 사람을 신뢰하고 믿을 때, 저의 본성을 알고 이를 신뢰한다. 하물며 주가 선하심은 성경의 모든 주의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고백하는 것으로, 오늘 시편도 이에 죄가 우리를 갈라놓는다 해도 주를 사랑한다고 알린다.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3:1).
시적 배경은 아들 압살롬을 피해 도망치며 지은 다윗의 것이다. 이는 엄연히 죄를 다스리지 못한 다윗의 문제로 인함이었다. 다윗의 맏아들 암논이 압살롬 이복 동생의 누이 다말을 강간하였다. 다윗은 이를 알고 분노하였다. 하지만 행동하지 않았다. 이를 묵인함으로 결국 2년 뒤 압살롬이 누이 다말의 수치를 보복하기 위해 암논을 죽였다. 이때도 다윗은 압살롬을 벌하지 않았고, 이 문제를 직면하기 꺼려했다. 친척집으로 도망친 압살롬은 3년을 도모하여 반역을 일으키고, 다윗은 아들에게서 도망치고 쫓겨가는 신세가 되었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사 59:2).” 죄는 오롯이 하나님과 나의 문제다. 사람과 사람의 문제가 아니다. “여러 민족은 이스라엘 족속이 그 죄악으로 말미암아 사로잡혀 갔던 줄을 알지라 그들이 내게 범죄하였으므로 내 얼굴을 그들에게 가리고 그들을 그 원수의 손에 넘겨 다 칼에 엎드러지게 하였으되 내가 그들의 더러움과 그들의 범죄한 대로 행하여 그들에게 내 얼굴을 가리었었느니라(겔 39:23).”
인생에서도 죽음 너머에서도 가장 무서운 벌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얼굴을 가리시는 것이다.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오늘 우리의 마음은 완고하여진다. 자신의 생각이 우선이고 그 주장을 따른다. 주를 경외하지 않으면 자신을 신뢰하게 돼 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잃으면 인생은 물론 영혼까지 잃는 것이다. 이를 참혹하게 생각하지 못하는 지경에까지 말이다. 현세에서 뿐 아니라, 내세에서도 '불법한 자들'의 최후는 하나님이 더는 돌아보지 않는 바깥 어두운 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다. 그럼 우리의 진정한 힘은 무엇일까?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23:4).
이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이와 같은 말씀을 내 것으로 붙들고 사는 자를 당해낼 것은 없다. 세상이 이들을 감당하지 못한다. 곧 우리 주님은 간곡어법으로 이르시기를,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진정한 도움으로 삼고 산다는 것은,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셀라)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셀라)
(2-4).
사람들이 뭐라 하든지, 심지어 세상이 나를 대적한다 하여도,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히 13:5).” 곧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 보라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해어지며 좀이 그들을 먹으리라(사 50:9).” 세상 그 무엇도 무서울 게 없다. 왜?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9-10).”
내가 아는 주님, 성경의 하나님은 애통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고 상한 영혼을 위로하신다.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사 55:7).” 이에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행 8:22).” 그러므로 광풍이 내 삶을 흔들어댄다 해도 우리 안의 평안함은,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5-6).
아무렴!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그러므로 늘 나를 붙드시는 말씀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1).” 그리하여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사 26:3).” 부디 나의 남은 생애는 더 이상 그릇된 길로 걷지 않기를.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
(7-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