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다윗이 백성을 치는 천사를 보고 곧 여호와께 아뢰어 이르되 나는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거니와 이 양 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하건대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을 치소서 하니라
삼하 24:17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시 6:4
다윗 통치 말기의 일로 인구조사를 하였다. 인구조사를 한 것이 하나님을 격노하게 하는 것은 저가 유사시 군사력이 얼마나 되는가를 알고자 하고, 이를 또한 과시하고자 하는 마음에서다. 표면적으로는 이것이 그리 큰 죄인가 싶지만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자기 의지를 갖는다는 데서 문제다. 미약한 군사력으로도 오늘까지 하나님이 함께 하셨고 승리하게 하셨음을 여러 번 경험하고서도 혹시나, 하는 불신앙의 처사였다.
하여 다윗은 인구 조사를 벌인다. 이는 군사로 동원할 수 있는 인원이 20세 이상으로 이스라엘이 80만, 유다가 50만이었다고 하니 인구 6백만이라 하면 그 가운데 25%가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 막강한 군사력과 당시 주변국들을 평정하고 있던 터라, 그 의미는 여러 문제를 안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곧 우리가 안이할 때는 적당하게 부요함을 누릴 때이다. 이로 사탄이 다윗의 마음을 흔들었고, 이에 자신들의 군사력과 힘을 과신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복선으로 깔린 것이 하나님께 범죄 한 이스라엘을 징계하시고자 다윗으로 하여금 인구조사를 하도록 하신 것을 볼 수 있다.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그들을 치시려고 다윗을 격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1).” 저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죄를 범했는가는 알 수 없다. 추측컨대 비대해진 국력으로 해이한 삶과 자기 과시가 다윗뿐 아니라 그 백성들의 삶도 나태하고 무기력하게 하여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방종과 교만이 간음과 우상숭배로 이어져 자신들의 본분을 잊게 한 것은 아닐까? 앞서 저들은 압살롬의 편에 섰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였던 처사다. 또한 교만이 저들로 오늘의 태평성대를 자신들의 노고로 마땅히 여긴 게 아닐까? 교만은 본래 감사를 앗아간다.
노아 홍수 당시에도 사람들은 그 풍요로움에 ‘인간 실격’을 가져왔다.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창 6:11-12).” 결국 우리는 자기 죄악으로 낮아짐을 당한다.
여호와께서 여러 번
그들을 건지시나
그들은 교묘하게 거역하며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낮아짐을 당하였도다
(시 106:43).
성경은 이를 폭로한다. “여러 민족은 이스라엘 족속이 그 죄악으로 말미암아 사로잡혀 갔던 줄을 알지라 그들이 내게 범죄하였으므로 내 얼굴을 그들에게 가리고 그들을 그 원수의 손에 넘겨 다 칼에 엎드러지게 하였으되 내가 그들의 더러움과 그들의 범죄한 대로 행하여 그들에게 내 얼굴을 가리었었느니라(겔 39:23-24).”
어제 주일에도 우리가 말씀을 나눌 때 우리에게 어떤 환난이 임하는 것은 우리로 거룩하게 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섭리다. 자신을 돌아보고 죄를 뉘우치는 것은 결국 고난으로 알게 된다. “주께서 기쁘게 공의를 행하는 자와 주의 길에서 주를 기억하는 자를 선대하시거늘 우리가 범죄하므로 주께서 진노하셨사오며 이 현상이 이미 오래 되었사오니 우리가 어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사 64:5).”
비로소 주의 이름을 부르고 자신의 잘못을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 하여 주를 인정하는 자리가 고난이다.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6).” 이때 “너는 오직 네 죄를 자복하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하고 네 길로 달려 이방인들에게로 나아가 모든 푸른 나무 아래로 가서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3).”
나는 그래서 램브란트의 유화 <돌아온 탕자>를 가끔씩 본다. 저가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아버지 집을 떠올린 곳은 돼지우리에서였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눅 15:17-18).” 저의 그림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아버지의 품에 안긴 아들의 머리가 죄수처럼 깎여 있다. 머리털은 앞서 압살롬의 교만을 상징할 때에 그의 풍성함과 윤택함이었고, 결국 그 머리가 상수리나무에 걸려 죽임을 당하였던 것을 보았다. 램브란트의 그림 우편으로는 사람들이 둘러 서 있는데 누구의 표정은 환하고 누구의 표정은 어둡다. 아버지 뒤편으로 거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그림자 같은 이가 하나 보이는데, 저는 돌아온 동생을 시샘하며 아버지를 부당하다고 한 첫째 아들이 아닐까 싶다.
하여튼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8-10).” 우리로 돌이켜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기회가 아직 있다는 데서 오늘 이 땅에서의 삶이 귀한 것이다. 이와 같은 말씀 앞에 순간 멈추어 서서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고 주 앞에 돌아오는 것이 복이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어렵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 22:14).” 하시는 말씀으로도 우리의 됨됨이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순종하지 아니하고 주를 거역하며 주의 율법을 등지고 주께로 돌아오기를 권면하는 선지자들을 죽여 주를 심히 모독하였나이다(느 9:26).” 이것이 실제 현실이고, 나 역시 너무 오랜 세월을 그리 살아왔던 것 같다. 돌아보면 그때마다 여러 번의 기회가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신대원을 다시 하기까지 여러 번 신학을 포기할 때마다 주님은 새로운 사람이나 현실을 동원하심으로 나를 돌이키려 하셨다. 한데 “훈계 받기를 싫어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경히 여김이라 견책을 달게 받는 자는 지식을 얻느니라(잠 15:32).”
더욱이 나로 주의 길을 하게 하시기까지, 전혀 그럴 사이도 사람도 아닌데 나의 등록금 전액을 내게 하기도 하셨다. 누구의 권유는 참으로 끈질겼고, 그때마다 나의 배역은 악한 길을 향할 뿐이었는데도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셨다. 이내 신대원 3년 6학기 동안에도 등록금은 물론 일체의 생활을 내 스스로 감당한 적이 없다. 나야말로 주가 나로 주의 사역을 감당하게 하시려고 어떤 역사를 이루어 오셨는가를 이제는 생생히 기억한다. 이에 오늘 나로 하여금,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3:12-13).” 한 영혼을 두고 씨름하게 하시는 것을 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나는 나의 지난날들을 돌아보면 확인할 수 있다. “땅의 모든 사람들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대에게든지 땅의 사람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고 할 자가 아무도 없도다(단 4:35).” 그리 하시고자 하는 일이면 그 어떤 저항에도 하나님은 포기하심이 없었다. 그때 이미 죽어 마땅하였을 텐데… 하는 나의 죄악 됨을 나는 기억한다. 차마 이를 글로 열거할 수 없는 것은 여전히 고개도 들 수 없는 부끄러움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그때는 그게 뭐? 하는 심정으로 다 그러고 살아! 하는 반감과 더 나쁜 놈도 많은데… 하는 자기 항변이 늘 가득하였었다. 그러한 생각이나 자기 합리화가 결국은 먼 길을 돌아가게 하였고, 인생에서 광야 40년은 굳이 돌아가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는데 이는 순전히 불신앙의 결과였다.
그러는 동안 나 자신은 물론 가족들이 고생이라, 나로 인하여 나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과신은 곧 하나님의 은혜를 상실하게 한다. 은혜를 잊으면 감사는 줄어지고, 감사가 사라지면 그 영혼은 황폐함으로 모든 것을 흡수하고자 한다. 내가 사랑하는 누구에 대하여… 저는 지독하게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부친의 외도로 모친과 같이 나는 유년시절은 그야말로 혹독하여서, 어린 소년은 배고픔을 달래려 학교 운동장을 뛰고 수도꼭지에 입술을 대고 배가 터지도록 물을 마시곤 하였다. 서울대 연고대를 갈 수 있는 실력에도 전액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집 앞에 있는 인하대 영문과를 졸업하였고, 임용고시를 치러 영어 교사를 1년간 하다, 4대 일간지 기자 시험을 치러 15년 동안 모 사회부기자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40대 중반에는 제2의 도약을 위해 한국종합문화를 콘텐츠로 하여 외국인을 상대로 하는 잡지사를 설립, 현재는 국내외 출판부를 거느린 어엿한 CEO의 길을 걷고 있다.
어려서는 믿음과 신앙으로 극한 국면을 헤쳐 나오다, 스스로 인구 조사를 벌인 다윗과 같이 자기 나름의 신앙관을 정립하여 더는 하나님이 없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교회를 거부하면서 모든 것에 창조주의 손길이 깃들었다는 다원주의자가 되었다. 어쩌면 저의 자수성가한 그 치열한 삶의 투쟁이 저로 하여금 하나님을 인정할 수 없는 자리로까지 내몰아갔는지도 모른다. 남다른 인연으로 나는 저를 유난히 따르고 좋아했고, 번번이 저는 주의 부르심 앞에서 나의 결정을 거절의 길로 인도하였는지도 모른다. 저의 논리와 설득은 남달랐고 나는 그때마다 주의 부르심을 느끼면서도 한사코 이를 외면하였다. 것은 저의 성공과 성실에 따른 삶의 열정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한데 성경은 일러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전 3:21-23).”
이를 순순히 받아들이기에 현실은 너무 가깝고 말씀은 막연하여 믿음이 없이는 이를 감당할 수가 없다. 나는 오늘 다윗의 노년에 저지른 과오에 대해 이해는 한다. 말년에 불안하기도 했겠지. 스스로 대비하고 준비하려는 마음이 세상적으로는 얼마나 타당하고 당연한 결정인가? 한데 성경은 “내가 너희의 세력으로 말미암은 교만을 꺾고 너희의 하늘을 철과 같게 하며 너희 땅을 놋과 같게 하리니 너희의 수고가 헛될지라 땅은 그 산물을 내지 아니하고 땅의 나무는 그 열매를 맺지 아니하리라(레 26:19-20).” 결국 “그 날에 자고한 자는 굴복되며 교만한 자는 낮아지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실 것이요 우상들은 온전히 없어질 것이며 사람들이 암혈과 토굴로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땅을 진동시키려고 일어나실 때에 그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할 것이라(사 2:17-18).”
말씀 앞에 가만히 나를 앉힘으로 더는 내 힘과 의지로 나의 판단이 하나님을 뜻을 앞서지 않도록… 때론 망설이고 때론 주저하며 미적거리고 뭉개기 일쑤지만 그래서도 주의 말씀이 아니면 더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내딛을 수가 없다. 이에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약 4:6).” 그러므로 나는 누구를 강요하기보다 저를 두고 내가 씨름한다. 주 앞에 아뢰고 내 곁에 두시는 한 나는 주의 이름을 부른다. 솔직히 하는 게 없다.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예전처럼 내가 어찌 해보면 될 줄 아는 생각은 이제 버렸다. 누구에게 주의 사랑을 전한다는 일,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127:1-2).
오늘의 나는 무던함으로 120년간 구원의 방주를 홀로 지었던 노아와 같이 묵묵히 주신 바, 하루의 날을 살아가는 것으로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전 2:11).” 세상을 사랑하며 내 곁에 나의 수고와 노력으로 얻으려 하였던 사람들에 대하여, 생각해보면 모든 게 바람을 잡는 일이었다. 나의 어릴 때는 사람들이 참 많이 싫었다. 특히 믿음이 좋다고 여기던 사람들의 배신과 그 야멸친 끝장은 어려서도 치를 떨게 하였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나이가 들어서는 왜 그처럼 사람들의 인정과 사랑을 추구하며 살았는지 모르겠다. 참 많이 애썼던 것 같다. 저들과 함께 하기 위해 나는 저들보다 배나 마음을 썼고, 열 번을 사랑하면 한 번의 사랑을 얻었던 것 같다.
그러던 것이 오늘에 이르러,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 42:5-6).” 나는 이제 사람을 갈구하지 않고 사랑을 애원하지 않는다. 그것은 모두 쓸려 다니는 안개와 같아서, 잠깐 때나 곁을 같이 할뿐 반짝 하면 사라지는 허무함뿐이다. 이에,
의인이 보고 두려워하며
또 그를 비웃어 말하기를
이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자기의 악으로 스스로
든든하게 하던 자라 하리로다
(52:6-7).
하여,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146:3-4).
곧 오늘 우리의 자긍함이 우리로 영혼을 망친다. 스스로 눈을 가리고 귀를 틀어막는다. 하여 나는 예전에 그처럼 좋아하였던 이의 전화가 두 번씩이나 울리는데도 받지 않았다. 또 무슨 말을 하려는가 하는 생각에 한 번. 어떤 말로 저를 돌이켜 주 앞으로 다시 서게 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 한 번. 그렇게 집요하게 울어대는 전화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나는 기어이 내가 다시 전화도 걸지 않았다. 그래놓고는 내내 마음이 어렵다. 주를 인정하지 않는 곳에서 나로서는 더 이상 할 말을 잊는다. 저를 설득할 능력도, 돌이켜 주 앞에 세울 능력도 나에게는 없다. 오히려 저와 통화를 하거나 만나고 나면 기진하여 맥이 풀린다. 예전에는 그처럼 좋아서 많이 따르고 사랑했던 사람이라, 나는 선생을 생각하면 자주 마음이 아프다. 다만 주께 아뢰기를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애 3:22-23).”
이제 더는 말씀이 아니고는 할 수 있는 말도 없다. 부디 주의 성실하심이 저로 돌이켜 그 어릴 적 간절함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던 때로 돌아가게 하시기를. “만일 주께서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셨더라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거늘 자기가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셨느니라(막 13:20).” 아직 우리가 사는 이 땅이 건재한 것은 주가 더디 행하심으로 미루고 또 기다리심이었다. 그러므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51:11-12).
반드시 그 날이 올 것이다. 돌이켜 아버지의 품에 안겨 용서와 자비하심을 구하며 찬양하게 될 것이다. 다시 램브란트의 유화를 언급하면, 무릎 꿇은 <돌아온 탕자>의 등에 얹은 아버지의 손이다. 자세히 그림을 보면 한 손을 거친 남성의 손으로, 한 손은 부드러운 여성의 손으로 그려진 것을 알 수 있다. 곧 우리 주는 오늘 본문의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모습과 같이 거칠고 모진 아버지와 같다가도, 우리를 안고 어르는 어머니의 한없는 인자하심을 동시에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에 우리의 평안은,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131:2).
그와 같은 고요함이 어떤 것인가를 이제는 조금씩 알 것 같다. 그것으로 나는 더 이상,
…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1).
내가 하려 할 때 주를 경외하는 마음은 사라진다. 주를 경외할수록 내 의지와 노력, 나의 수고와 그에 따른 보상이 헛된 것임을 알게 된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삼상 2:7).” 이를 인정하는 것이 지혜였다. 나무들도 이를 알고 두 팔을 벌려 하늘을 향해 주를 경배한다. “들의 모든 나무가 나 여호와는 높은 나무를 낮추고 낮은 나무를 높이며 푸른 나무를 말리고 마른 나무를 무성하게 하는 줄 알리라 나 여호와는 말하고 이루느니라 하라(겔 17:24).”
주가 이루신다. 다만 나는 여기서, 오늘, 나로 감당할 수 있는 그 이상의 것을 바라지 않음으로 평안하다.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사 40:11).” 하여 오늘의 시편을 묵상하면,
여호와여 주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오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6:1).
주를 생각하고 이를 두려워할 줄 아는 마음이 경외함의 바탕이다. 산을 오르는 자는 항시 산을 두려워할 줄 안다. 바다를 매일 가르며 사는 사람은 바람의 위력 앞에 자만하지 않는다. 저절로 저들 속에는 경탄과 경외심이 경거망동함을 주의하게 한다. 곧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잠 3:11-12).”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나의 영혼도 매우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2-3).
죄는 달콤하나 그 영혼은 알고 있다. 평온할 수 없어 정신적으로도 무력해진다. 하여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히 12:6-8).” 이는 우리로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고전 15:34).”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
스올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내 눈이 근심으로 말미암아 쇠하며
내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두워졌나이다
악을 행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울음 소리를 들으셨도다
(4-8).
가장 무서운 일은, “그 때에 그들이 여호와께 부르짖을지라도 응답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행위가 악했던 만큼 그들 앞에 얼굴을 가리시리라(미 3:4).” 더는 듣지 않으시고 심지어 얼굴을 가리실 때이다. 훗날 사람의 가장 큰 형벌은 더 이상 하나님을 뵈올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 3:19).”
곧 우리의 만남이 우연하나 그것으로 그치면 그게 전부일 테고, 이를 통하여 주의 뜻을 알면 그보다 귀한 만남이 어디 있을까!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 보라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해어지며 좀이 그들을 먹으리라(사 50:9).” 이에,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내 모든 원수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갑자기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
(9-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