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거기서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은 그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삼고 너희는 뿔나팔을 불며 솔로몬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하고 그를 따라 올라오라 그가 와서 내 왕위에 앉아 나를 대신하여 왕이 되리라 내가 그를 세워 이스라엘과 유다의 통치자로 지명하였느니라
왕상 1:34-35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내가 여호와께 그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존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
시 7:11, 17
아도니야가 군대장관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과 도모하여 왕위를 찬탈하고 스스로들 즉위식을 거행한다. 나단 선지자가 이를 듣고 솔로몬의 모친 밧세바를 앞세우고 늙은 다윗에게 이를 알린다. 솔로몬의 왕위 계승은 이미 정해진 하나님의 계시였다. “다윗이 그의 아내 밧세바를 위로하고 그에게 들어가 그와 동침하였더니 그가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선지자 나단을 보내 그의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이더라(삼하 12:24-25).”
나단은 하나님의 언약을 기초하여 늙은 다윗의 귀를 연다. 다윗은 솔로몬의 왕위 계승을 재가한다. 나단이 주저하였거나 스스로 목숨을 도모하려 하였다면 그와 같이 행동하지 못했을 것이다. 저는 하나님의 뜻을 우선하였고, 이를 선포하는데 목숨을 주저하지 않았다. 앞서 밧세바와 동침하여 그의 남편 우리야를 죽음으로 몰고 이내 왕후로 삼을 때도 나단은 선지자로서 주의 뜻을 전하는 데 있어 주저하지 않았다. 개인의 안녕과 판단이 우선이었으면 저는 참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다하지 못했을 것이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전하는 데 있어 전심이었다.
말씀은 선포지 쟁론이나 서로의 의견을 묻는 게 아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믿는 자들이 넘어지는 것은 실제 말씀을 듣지 못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소리만 듣고자 하는 데 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1-5).” 믿는다고 하면서 나름 교회도 다니고 신앙도 가졌다 하는 자들이 그러는 것은 말씀은 배우고, 논하고, 나누는 데는 열심인데, 이것을 선포하는 것에는 귀를 닫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영혼이 온전한 사람이 없다. 의인은 하나도 없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그런데 서로들 성경을 연구하고 이를 지적허영을 추구하고 삶의 질을 높이는 것에 ‘좋은 말씀’으로 여겨 나누고, 교제하고, 적용하려는 데는 익숙하다. 그러다보니 정작 아비아달과 같이 때를 따라 자신들이 추구하는 선호에 따라 아도니야를 왕으로 지목하고 저를 따른다. 장적 하나님의 뜻은 아랑곳하지 않은 설교와 교제와 헌신이 교회를 사교의 장으로 만든다.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엡 3:8-9).”
하나님의 비밀의 경륜은 선포되고 전파되는 것이지 이해나 설득을 위해 토론과 합의가 필요한 게 아니다. 나단의 용기는 범사에 하나님의 뜻을 우선하여 기준하였기 때문이다. 앞서 다윗의 죄를 낱낱이 고하는 것에서도, 오늘 솔로몬을 왕으로 세워야 하는 것에도 저는 결코 사심을 두고 자신의 생각으로 이를 판단하지 않았다. 이는 우리 모두의 기준이 된다.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사 57:15).” 이에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약 4:15).”
이는 결연한 각오로 이행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안의 믿음도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고,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우리가 이뤄가는 신앙의 성장도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4:7).” 전적인 성령의 선물로써 이루어진다. 하면 이를 인정하는 것은 ‘주의 뜻이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는 것’이 우리의 숙명이다. 한데 이를 곧이곧대로 받기는 쉽지가 않다. 요즘 같이 개성을 강조하고 자신들의 취향과 개인의 행복권을 우선하는 시대에 일방적인 말씀 선포는 우리를 때로 어렵게 한다. 그러나,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
(시 40:8).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119:9).
곧 말씀이 우선이고 전부이고 최종적인 것이어야 한다. 이는 “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남쪽에게 이르기를 가두어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며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사 43:6-7).” 다시 보면 우리의 존재의 이유는 분명한 것이다. 곧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노하기를 더디 할 것이며 내 영광을 위하여 내가 참고 너를 멸절하지 아니하리라(48:9).” 곧 “나는 나를 위하며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11).” 이는 창조주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로 행복하고 평안하기를 바라는 것만이 주의 뜻이 아니다. 그것은 온전히 주의 뜻 안에서 말씀으로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누구도 그 영혼이 깨지지 않고 어그러지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보다 앞서 만물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지음 받은 것이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 개인적으로 나는 이 구절의 말씀을 자주 음미한다. 내가 사는 이유와 살아야 하는 목적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누구보다 철저하게 이를 강조한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6-17).” 곧 우리가 만들어지고 오늘을 사는 까닭은 그 이유가 하나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6).”
오늘 또 한 번 위기를 맞을 위기에서 나단의 기지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그의 말씀으로 ‘사나 죽으나 주의 것’으로서의 사명을 다하는 데서 새삼 ‘바른 말’의 위력을 묵상하게 된다. 우리가 아름다움을 구가하고 어떤 아드레날린을 더하고자 찬양과 경배를 행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1-3).” 아무리 고상하고 아름답고 가치 있고 귀하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곧 ‘하나님의 뜻’이 배제되면 이는 모두가 허사다. 하면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딛 2:8).” 그럼 우리의 바른 말은 무엇이 될까?
이제 말씀을 전하는 자로 살면서 나는 늘 나의 양심과 싸운다. 설교를 할 때도 말씀을 말씀으로 ‘선포하고 전파하는 일’에 전념하려 기를 쓴다. 여담이나 개인적인 견해, 또는 시대적인 풍조를 운운하며 서로의 의견을 묻고 이해를 도모하여 설득하려고 설교하지 않는다. 듣거나 말거나, 이를 받아들이거나 말거나, 나는 전하는 자로 성경의 권위를 벗어나지 않으려 선포한다. 선포는 일방적이다. 어려운 말이면 풀어주려 애쓰지만 개인적인 생각이나 교리를 주장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더하여 누구를 이해하고 돕는 일에 있어서도, 특히 나의 성향상 감정이입이 심한편인데, 지극히 감성적인 인물이라는 것을 앎으로 더욱 주의하려 한다. 그래서도 자꾸 주의 이름을 되뇐다. 저를 주께 먼저 아뢴다. 내가 나서 무얼 어찌 하려는 마음을 누른다. 이는 옷을 입어도, 말을 해도, 소비와 지출에서도, 심지어는 생각하고 느끼는 일에서도 주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으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 성도의 사명이다.
오늘 본문에서 구체적인 그 마음은 언급하지 않지만 나단이라고 당시 대세가 기울었음을 알지 못했을까? 다윗은 심히 늙어 제 몸 하나 추스를 수 없는 노인이 되었다. 다음 왕으로 젊은 왕자 아도니야가 대를 이어 왕위를 계승하는 것은 당연하다. 거기에 다윗의 오른팔이라 할 군대장관 요압도 합세하였다. 자칫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다 제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렵다. 그럴 때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는 말씀은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하다. '무엇을 하든지 [다 ]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실은 어제 좀 망설이던 일이 있었다. 전날에 아내와 둘이 어디 중식당에서 점심을 같이 먹었다. 새로 핸드폰에 깔고 사용한 무슨 페이로 음식값을 결제했다. 핸드폰을 건네면 저가 계산대에서 이를 기계에 대면 계산이 되는 방식이다. 저가 됐다가 돌려주어 나는 그런 줄 알고 나왔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결제가 되었다는 알림이 없었다. 이상하다 싶었는데, 어제는 빵을 사고 다시 핸드폰 무슨 페이로 결제를 하려 전날과 동일하게 핸드폰을 건네자 종업원이 받고 기계에 댔다. 그런데 승인이 안 된다는 것이다. 전날에도 됐는데… 하면서 다시 재시도를 하였는데도 안 되었다. 어쩌면 나는 은연중에 알고 있었다. 어쩐지 전날에 결제 알림이 울리지 않아 나중에 청구되어 나오나, 하는 생각과 함께 미심쩍은 마음도 있었다. 그럼 전날 점심값으로 15000원이 결제가 안 됐다는 소린데, 어찌해야 할지 귀찮기도 하고 시치미를 떼고 모르는 척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검색을 하고, 가게로 전화를 걸어 전날의 상황을 설명하였다. 결제가 되지 않은 것 같으니 이체를 해주겠다고 알렸다. 저는 미처 생각도 못했다며 고맙다는 말을 여러 번 반복했다. 괜히 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일련의 해프닝은 단순히 양심의 문제가 아니다. 설교원고 초안을 작성하는데 자꾸 신경이 쓰인 것이다. 안 됐을 걸 은연중에 알면서도 나는 ‘내 잘못이 아니야!’ 하는 무의식적인 합리화로 무마하려 했던 것도 있다. 이런 아주 사소한 이야기, 그러나 실제 이는 내가 사는 일상이고 하루하루가 주 앞에 기록될 내용이었다. 나단도 갈등하였을지 모른다. 주저하고 망설였을수도 있다. 두려웠을 것이다. 왕이 이를 인정하지 못하고 이내 아도니야가 왕권을 쥐면 저는 죽은 목숨이다. 모르는 척 가만히만 있어도 될 것인데, 저는 그럴 수 없었다. 우리의 내적갈등은 하나님의 말씀 때문일 때 건강하다.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 하여 하나님으로 하는 근심은 유익하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고후 7:10-11)."
주를 더욱 알면 알수록,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무엇보다 내 자신이 위험천만하다는 것을 종종 느낀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그럴 수는 없는 일이지만) 때론 외면하고 싶고, 갈등만하다 이내 결정은 미루고 마는 일이 흔하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목장의 양 떼를 멸하며 흩어지게 하는 목자에게 화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 백성을 기르는 목자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내 양 떼를 흩으며 그것을 몰아내고 돌보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내가 너희의 악행 때문에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23:1-2).” 이는 주어진 삶을 맡은 자로서 심각하게 다가오는 경고의 말씀이다. 목사로서는 물론 부모로서, 교사로서, 부부로서, 한 사회의 일원으로서 우린 저마다 막중한 책무를 가진다.
“너희 목자들아 외쳐 애곡하라 너희 양 떼의 인도자들아 잿더미에서 뒹굴라 이는 너희가 도살 당할 날과 흩음을 당할 기한이 찼음인즉 너희가 귀한 그릇이 떨어짐 같이 될 것이라(25:34).” 맡은 바 그것을 두고 책임을 다한다는 일은 잿더미에서 뒹구는 일 같이 괴로운 심정으로 사명이다. 이것을 마다하려니까 순간 타협을 한다. 내 잘못이 아니야! 하고 스스로를 두둔하려 든다. 계산을 온전히 확인하지 못한 저의 탓이지 난 분명히 결제를 했다. 그러니 내가 잘못한 게 없다고 하면 그만이다. 그리 살아왔고, 굳이 대수롭지 않은 듯 여겼다. 만일 나단이 하나님의 뜻을 우선하지 않았더라면, 하여 아비아달과 같이 저쪽에 서던가, 그만 물러나 남은 생을 스스로 도모하였더라면 어땠을까? 만일 저의 방관과 무관심이 실제로 저를 그냥 두었더라면, 그렇게 다윗이 죽고 아도니야가 왕권을 계승하였더라면…?
그럴 수 없는 것 중에 하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면 하나님의 언약을 그렇게 방관할 수 없게 하신다. 분명히 성경은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사 26:3).” 누구로부터 인정받는 것이 중요한지,
나의 생명이
항상 위기에 있사오나
나는 주의 법을
잊지 아니하나이다
악인들이 나를 해하려고
올무를 놓았사오나
나는 주의 법도들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119:109-110).
그래도 내가 주 앞에 설 때 이와 같은 말씀을 드릴 수 있는 자였으면 좋겠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벧후 3:17).” 하여 우리에게는 겸손이 필요하다.
겸손이란, 상대적인 게 아니다. 지식이나 느낌이 아니다. 하나님께 속한 삶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6).” 겸손이란, 예수님처럼 살려는 몸부림으로 주가 받으신 대접 그 이상을 바라지 않는 것이다.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마 10:25).” 그러므로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 2:23-24).”
겸손이란, 나의 자아를 우월하다 인정받고자 하는 게 아니다. 다만 진리를 위해 나를 위한다.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살후 2:10).” 그러할 때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17:17, 8:32).” 겸손이란, 모든 것이 은혜인 것을 알고 은혜 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다는 데서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다. 현재 나의 믿음도,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현재 이루어가는 구원(성화)도,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2-13).”
나는 그 무엇도 내 힘으로 이룰 수 없고, 그것이 완전할 수는 없다. 겸손이란, 실수나 죄를 인정하고 비판도 비난도 달게 받는 것이다.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어졌으니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어지기를 바라노라(고후 5:11).” 누구보다 나는 더욱 깨어진 영혼이라, “너는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누구에게서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딛 2:15).” 고로 양심에 찔린다는 것, 내 안에 선한 이가 나로 인하여 괴로워하신다는 증거로,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이에 오늘 시편은,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쫓아오는 모든 자들에게서
나를 구원하여 내소서
건져낼 자가 없으면
그들이 사자 같이 나를 찢고
뜯을까 하나이다
(7:1-2).
결론은 주께로 숨는 것이다. 나는 이제 안다. 하나님께로 숨으면 수모를 당하지 않는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 29:25).” 하지만 평생을 따라다닌 나의 자격지심과 열등의식은 번번이 나를 허물어뜨린다. 혼자 좌절하게도 한다. 남을 의식하고 경계하느라 예민하게 한다. 보면 주를 사랑하는 자로 산다는 일은 늘 그와 같은 싸움의 연속이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런 일을 행하였거나
내 손에 죄악이 있거나
화친한 자를 악으로 갚았거나
내 대적에게서 까닭 없이 빼앗았거든
원수가 나의 영혼을 쫓아 잡아
내 생명을 땅에 짓밟게 하고
내 영광을 먼지 속에 살게 하소서 (셀라)
(3-5).
주 앞에 정직한 자로 산다는 일은 때로 세상에서 바보 같은 짓이다. 남들로 호구 잡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욱, 하고 자존심이 먼저 일어나 화를 낼 때가 늘 그런 때이다. 그럴 때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 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렘 20:7).” 주께 아뢰고 주께로 숨는다.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10:22).” 내가 나의 결백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은 그만큼 남들보다 나은 게 있어서가 아니라, 그 모든 허물과 죄라도 주께서 씻으시고 감추시고 내 편이 되실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만민에게
심판을 행하시오니
여호와여 나의 의와
나의 성실함을 따라
나를 심판하소서
(8).
이와 같은 기도가 가능한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절대 저들보다 나은 게 있고, 훌륭하게 살아서가 아니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전 7:1).” 곧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5:10).” 그러므로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계 22:12).” 하나님은 내가 어떠해도 내 편이시다.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10-11).
그러므로 내가 당당히 정직하다 할 수 있는 것은 주께 고하고 아룀으로 주의 도우심을 확신하는 것이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 어려움이 자랑이 되고,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 1:12).” 고난이 그날에 훈장이 될 것이다.
어릴 때 나는 아버지를 몹시 싫어하곤 하였는데, 가장으로서 한 남자로서 너무 무책임한 것이다. 가난을 마치 훈장처럼, 남에게 듣는 욕을 무슨 칭찬처럼 여기는 것도 아니고, 그와 같은 전투적인 목회가 실은 말씀을 근간으로 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아버지로서의 책임보다, 때론 가장으로서의 무게보다, 심지어 자신의 목숨보다 복음을 더 사랑하는 것인데, “오직 만군의 여호와는 정의로우시므로 높임을 받으시며 거룩하신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므로 거룩하다 일컬음을 받으시리니 그 때에는 어린 양들이 자기 초장에 있는 것 같이 풀을 먹을 것이요 유리하는 자들이 부자의 버려진 밭에서 먹으리라(사 5:16-17).” 가끔은 그와 같은 싸늘한 시선을 내 아들에게 또는 아내에게서 받을 때 나는 한편으로 안도한다. “공의로 판단하시며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원통함을 주께 아뢰었사오니 그들에게 대한 주의 보복을 내가 보리이다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아나돗 사람들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그들이 네 생명을 빼앗으려고 찾아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말라 두렵건대 우리 손에 죽을까 하노라 하도다(렘 11:20-21).” 그러므로,
사람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가 그의 칼을 가심이여
그의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12).
우리 삶이 더러는 얼마나 허망한지, “그들이 바람을 심고 광풍을 거둘 것이라 심은 것이 줄기가 없으며 이삭은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요 혹시 맺을지라도 이방 사람이 삼키리라(호 8:7).” 그러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벧후 3:7).” 그러므로,
내가 여호와께 그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존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
(1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