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그가 잠언 삼천 가지를 말하였고 그의 노래는 천다섯 편이며, 사람들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러 왔으니 이는 그의 지혜의 소문을 들은 천하 모든 왕들이 보낸 자들이더라
왕상 4:32, 34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주는 재앙과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이시니이다
시 10:14
솔로몬의 탁월한 지혜가 온 사방에 퍼졌다. 저는 각 기관의 장을 세우고 열두 행정구역과 관장들의 명단을 공개한다. 중앙정부와 각 지방간의 유기적인 관계가 이뤄진다(1-19). 이스라엘의 영토가 유프라테스 강에서부터 애굽에까지 미쳤고 저들은 조공을 바쳤으며, 그것으로 풍요로운 소비가 솔로몬 왕실에 있었다(22-23). 막강한 군사력과 주변국을 기반으로 강성하여졌다(24-28). 곧 하나님께서 솔로몬과 약속하신 지혜와 총명이 모든 사람들보다 뛰어났으며(29-31), 탁월한 지혜가 만방에 알려진다(32-34). 이러한 저의 풍성함이 과연 저의 인생을 어찌 다루어갈지….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지혜와 총명을 심히 많이 주시고 또 넓은 마음을 주시되 바닷가의 모래 같이 하시니… 그가 잠언 삼천 가지를 말하였고 그의 노래는 천다섯 편이며… 사람들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러 왔으니 이는 그의 지혜의 소문을 들은 천하 모든 왕들이 보낸 자들이더라(29, 32, 34).”
곧 우린 이 세상 문화에 휩쓸리는 무리가 아니다. 솔로몬의 탁월함은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데 따른 지식과 감성과 학문을 두루 건실하게 한다. 이는 처음 사람 아담에게 이르신 하나님의 명령이기도 하였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창 2:19-20).” 우리 또한 이를 다스리고 관리하고 정복해야 한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28).”
그런데 죄가 들어오면서 모든 크리스천들은 세계화라는 문화 앞에 묶인 셈이 된다. 교회를 어지럽히고 사람들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 문화라는 이름의 기습이다. 사탄은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와 신앙을 어지럽힌다. 곧 우리가 감당해야 할 사명을 잃으면 사느라 사는 데 급급하여 안 믿는 자와 다를 게 없는 문화로 흡수된다. 분명 성경은 일러,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
천지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바다와 그 중의
모든 생물도 그리할지로다
(8:6, 69:34).
곧 우리와 함께 모든 피조물도 허무한 데 복종하는 것을 비탄스러워한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롬 8:19-21).”
매번 그 시대마다 의인의 수는 희박하게 적지만 저들로 인하여 문화 혁명을 비롯 각종 부패와 부조리가 정화된다. 이는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 12:3).” 우리가 어디 있든, 어떤 역할을 수행하며 살든지 ‘나’로 인하여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나는 주의 자녀로 주를 경외하는 자이다. 누구와의 시간에서 왜 저를 교회로 보내셨는지, 이런저런 이야기와 글 가운데서 ‘어떤 문제’를 직감하게 되었다. 본인도 인정하는 바, 먼저는 딸과의 문제로 아이의 이런저런 모습이 우려를 낳게 한다. 그러는 데는 본인의 어떤 부분이 원인일 것을 안다. 곧 나는 서로가 기도로 마주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어제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를 통로로 전달이 되는 것이다.
그의 이름이 영구함이여
그의 이름이 해와 같이 장구하리로다
사람들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니
모든 민족이 다 그를 복되다 하리로다
(72:17).
무슨 말 끝에 나는 아이 이름을 물었고 당장은 내가 뭘 어찌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으나 기억하고, 마음에 담고, 숙제처럼 생각하겠노라고 말하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기도라, 나는 아이를 생각하였고 두 모녀 사이의 갈등과 그 골이 깊다는 것에 의아한 마음이 들기도 하였다. 내가 무엇으로 이를 감당하겠나? “또 사람에게 말씀하셨도다 보라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욥 28:28).” 저의 ‘뿌리 깊은 열심’은 어떤 계기로 인한 것이었을지, 그것으로 냉담한 마음과 그의 차가움이 무엇 때문인지… 나는 저의 말을 들으면서 주께 물었고, 급기야 ‘이러다 아이가 자살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는 말에 아찔하였다. 나의 바람은 저로 인하여 그 가정이 구원에 이르는 것인데, 어릴 적 자신이 교회를 등지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 물으려다 참은 것은 자연스럽게 글로 나타나기를 바랐다.
주의 계명들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그것들이 나를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내가 주의 증거들을 늘 읊조리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나으며
주의 법도들을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나으니이다
(119:98-100).
저에게 들려줄 말을 찾아 나는 말씀을 뒤지고, 설교 원고를 작성하다가도 문득문득 어느 대목에도 저이를 생각하였다. 주는 항상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로만 세계를 맡기셨다. 한 사람을 마주하는 일은 단순히 저 하나가 아니라 그와 더불어 함께 하는 가족과 친구와 주변 모든, 하나의 거대한 우주가 다가오는 것과 같다. 나는 오늘 말씀을 읽으며 솔로몬의 지혜가 저의 것만이 아니기를 바란다. 우리 믿는 자의 모든 지혜는 그와 같아서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주가 만드신 모든 우주와 피조물을 다스리고 정복하는 일이다. 끌려 다니는 것이 아니라, 이끌어야 하는데 이는 동시에 개간을 해야 하는 주의 일이었다.
이를 알면서 선뜻 누구를 만나고 깊은 이야기를 듣거나 저의 세계를 아는 일에 주저하였던 것인데,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나는 그때마다 이 말씀을 되새긴다. 오직 하나님이 내게 맡기시는 일, 때론 별 것 아닌 듯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는 사소한 일이겠으나… 그 한 영혼을 어찌 사랑하시는가를 묵상하고, 더욱이 나를 돌이켜 오늘에 이르게 하시기까지 그 긴 기다림과 긍휼하심과 오래 참으심을 생각할 때면 어려워지던 마음도 송구함으로 잠잠하여진다. 나를 향하신 주를 생각하면 풍성하신 은혜밖에는 없었던 것을,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선함이여 찬송하는 일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
(147:1).
나로 이를 알게 하신 것은 저에게도 이와 같은 주의 사랑을 증거 해야 하는 일일 텐데, 나는 아이 이야기에 잠시 숨을 고르듯 우선은 마음에 담아두고 숙제처럼 준비하고 있겠다는 나의 말을 어찌 들었을지… 다소 불쾌할 수도 있었을 텐데, 저는 알지 못하여 누군가의 관심과 기운이 모여 아이에게 좋은 영향을 끼칠 것을 안다고 하는 소리로 응대하니, 우선은 다음 말을 피하였다. 같은 곳을 바라보면서도 안 믿는 자의 시선과 생각은 믿는 자의 그것과는 다르다. 나는 내가 섣불리 나설 일이 아니라, 주가 어찌 다음 행보를 이어가실까 하는 것을 말함인데… 이를 알지 못함은 당연하였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고전 14:15).”
주가 주신 은혜로만 한다. 날마다 매순간의 은혜가 필요하다. 이를 나는 ‘새 노래’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곧 은혜와 평강은 십자가의 모형으로 확장한다. 은혜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수직적인 관계에서 이루어지고, 평강은 그 하나님과 화목하여진 우리가 사람과 사람 사이로 수평적인 관계를 이룬다. 이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빌 1:2).” 그리고 이어지는 숨 가쁜 바울은 증거는,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6).” 곧 우리의 만남도, 저에 대한 마음도, 그리고 쏟아지는 숱한 이야기 속의 사연을 두고 나는 저가 어디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잃은 것인지를 찾는다. 이를 감지하지 못하다 툭, 하고 예상하지 못한 아이 이야기가 나오면서 서로의 감정의 골이 깊어졌고, 그 시간이 오래 되었음을 알고, 이제 초등학교를 지나 중학교로 올라갈 것인데 그야말로 그 끔찍한 질풍노도의 시기를 서로 어찌 감당하려 하는 것인지.
갑자기 등짐 하나가 더 얹히는 느낌이라, 당장 어찌할 수 없어 잠시 마음에 두고 있겠다고 하였던 것이다. 이 아침, 말씀은 재촉하시는 듯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고전 4:7).” 하시는 데서 문득 양심이 찔린다. 저들의 속내를 나는 알 수 없고, 어찌 우리의 만남을 허락하셨는가, 나는 아직 탐색중인데…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고후 2:14-15).” 주의 뜻이 무엇인가, 말씀을 찾아보게 된다. 그러는 나에게 오늘 시편은 어떤 말씀으로 답을 제시하고 계신지.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10:1).
첫 구절의 말씀에 숨이 턱 막히는 것 같다. 가장 끔찍한 괴로움은 하나님을 찾을 수 없을 때, 누구와의 대화에서 저가 아무리 친한 친구였다고 하나 닫힌 문처럼 혹은 높이 쌓은 담처럼 벽이 먼저 가로놓일 때의 느낌은, 숨이 막힐 지경이다.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
(27:5).
이를 잃어버리고 사는 영혼의 고달픔에 대하여는 상상도 하기 싫다. 저는 괜찮다, 괜찮다 하나 나는 대놓고 물었다. 왜 그러고 사셨나요? 저의 강박적인 열심과 너무 많은 수고에 대해 물은 것이다. 나는 얼른 저가 알기를 바란다.
의인들의 구원은
여호와로부터 오나니
그는 환난 때에
그들의 요새이시로다
…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37:39, 50:15).
믿음의 모친에게서 자라다 모친도 동시에 교회를 떠났다고 들었다. 저의 외가에 주의 사역을 감당하는 주의 사람들이 있다는데, 달리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무엇이 가로 막은 것일까? 저에 대한 나의 궁금증의 시작이었다. 거기에 어제 더해진 것이 딸아이와의 갈등인데 이것이 실은 아주 오래된, 아이 서나 살 때부터였다고 하니… 그 골이 깊은 것에서 심각성을 느낀 것이다. 주는 기다리신다.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91:15).
이에 오늘 시편 1절의 암담함은 도리어 옥토가 돼야 할 방치된 농지와 같다. 개간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갈아엎는다는 게 본인의 말처럼 그리 쉽지가 않다. 이제 알았다, 잘 할 수 있다, 하는 저의 말에 그런 느낌이나 각오가 오늘이 처음은 아니지 않은가? 하고 생각을 하게 하였고, 나는 저 스스로 할 수 없음을 간접적으로나마 알게 하고 싶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
하나님이여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구할 때에
숨지 마소서
(22:1, 55:1).
나는 이 절벽을 안다. 뛰어내릴 수도 돌아설 수도 없는, 그럴 때 어떤 구조의 밧줄이 하나 던져진 것인데… 저로 다시 주를 찾고자 하기에는 우선 그 주변정리가 필요한듯하다. 너무 같이 어울리는 ‘존경하는 이’들이 많다. 개중에 철학자도 있고 역사학자도 있고, 저들의 조언은 한결같이 성경과는 배치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굳이 속엣 얘길 나누는 사이까지는 아니라고 하니. 우리가 늘 미적거리며 설마, 하는 동안 “악한 일에 관한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아니하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는 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전 8:11).” 하면 “자기의 계획을 여호와께 깊이 숨기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의 일을 어두운 데에서 행하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보랴 누가 우리를 알랴 하니 너희의 패역함이 심하도다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 같이 여기겠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빚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이 없다 하겠느냐(사 29:15-16).”
곧 우리의 죄성은 고약해서 찾으려 하면 숨고 인정하려 하면 위장한다. 아, 그래서 주님은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마 9:37-38)." 하여,
그의 길은 언제든지 견고하고
주의 심판은 높아서
그에게 미치지 못하오니
그는 그의 모든 대적들을 멸시하며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나는 흔들리지 아니하며
대대로 환난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나이다
(5-6).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고 여기는 일이다. 분명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그런데 저들의 경험이 저들로 완고하게 하여 주의 마음을 알지 못하게 한다. 하여 나는 두려운 것이다. “가령 내가 악인에게 이르기를 악인아 너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였다 하자 네가 그 악인에게 말로 경고하여 그의 길에서 떠나게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를 네 손에서 찾으리라(겔 33:8).” 하여 오늘 우리의 만남을 이루신 데 따른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이다. 저를 향한 마음이 주의 것이어야 한다. 그 아이를 생각함이 주의 사랑으로여야 한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롬 2:4).” 나는 한동안 저의 완고함을 갈아엎는데 주목해야 할 것이고 그러는 동안 노아가 묵묵히 혼자 앉아 나뭇가지를 다듬고 방주에 쓸 목재를 구하였던 것처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묵상하며 글로 쓰고 누구에게 보내기도 하는 것은, 저의 중보기도가 절실하여서다.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들을 잊지 마옵소서
어찌하여 악인이 하나님을 멸시하여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주는 감찰하지 아니하리라 하나이까
(12-13).
저의 착각과 고착된 마음을 허물지 않으면 땅을 고를 수 없다. 박힌 돌을 걷어내야 하고 뿌리 깊은 엉겅퀴를 뽑아내야 한다. 이는 우리 모두의 일이다. 다스리고 정복하라 하신 말씀은 내 앞에 두신 경지를 주의 말씀이 뿌려져 싹을 띄우고 잘 자랄 수 있도록 맡기신 사명이다. 이때 노아의 무던함과 농부의 묵묵함밖에 달리 길이 없다. 물론 주가 행하신다. 희한한 우연으로 저를 또는 누구를 오게 하셨고, 저로 어찌 자기 말을 하게 하시며… 지금은 여전히 방어적이지만 주가 또한 허무실 것이라 나는 확신한다. 부디 나는 아뢰오니,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아시고 나를 보시며 내 마음이 주를 향하여 어떠함을 감찰하시오니 양을 잡으려고 끌어냄과 같이 그들을 끌어내시되 죽일 날을 위하여 그들을 구별하옵소서(렘 12:3).” 한 알의 밀이 죽어지지 않으면 살 수가 없고 열매도 없다는 것이다.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빌 3:19).” 이를 앞서 걸어온 자로 주 앞에 속죄함은 나와 같은 이에게 주의 길을 제시해야 한다.
악인의 팔을 꺾으소서
악한 자의 악을
더 이상 찾아낼 수 없을 때까지 찾으소서
여호와께서는 영원무궁하도록 왕이시니
이방 나라들이
주의 땅에서 멸망하였나이다
(15-16).
하나님의 공의를 알게 하는 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사 30:18).” 나의 기다림은 단순히 가만있는 게 아니었다. 오늘이라는 새 날에 주가 맡기시는 은혜로 나아간다. 날마다의 은혜로 새 힘을 얻는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롬 2:1-2).” 반드시 언제부턴가 나에게 들리는 것이 저에게 보일 것이고, 나의 보는 것이 또한 저에게 들릴 것을 안다. “이는 내 눈이 그들의 행위를 살펴보므로 그들이 내 얼굴 앞에서 숨기지 못하며 그들의 죄악이 내 목전에서 숨겨지지 못함이라(렘 16:17).”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고아와 압제 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가
다시는 위협하지 못하게 하시리이다
(17-18).
주가 이루어 가실 구원의 역사에 작은 역할을 감당하면서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면 족하다. 돌아가 저는 나의 하나님을 잠시나마 생각하였을까? 분명,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말 3:1).” 하여 저로 하여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4: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