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말씀은 순결함이여

전봉석 2022. 7. 10. 05:20

 

여호와의 언약궤를 두기 위하여 성전 안에 내소를 마련하였는데 내소의 안은 길이가 이십 규빗이요 너비가 이십 규빗이요 높이가 이십 규빗이라 정금으로 입혔고 백향목 제단에도 입혔더라

왕상 6:19-20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시 12:6

 

 

성전 건축을 위한 준비를 마치고, 오늘 본문은 비로소 건축이 이루어진다. 애굽 땅에서 나온 지 480년이다. 솔로몬 통치 4년 되던 B. C. 966년 2월에 착공하였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지 사백팔십 년이요 솔로몬이 이스라엘 왕이 된 지 사 년 시브월 곧 둘째 달에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성전 건축하기를 시작하였더라(1).” 출애굽 시점과 성전건축의 시점을 밝히는 것은 그동안 약속의 땅을 향해 이동하는 여정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약속의 땅에 뿌리를 내리는 항구적인 약속의 성취를 의미한다.

 

성전 건축의 장소는 역대기서에 따르면 모리아 산 오르난의 타작마당이다. 이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던 곳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2).” 오르난의 타작마당은 다윗이 하나님께 회개의 제사를 드렸던 곳이기도 하다(삼하 24:16-25). 당시 성전의 크기는 길이가 27.36m, 너비가 9.12m, 높이가 13.68m로 3층으로 되었고 모두 30개의 골방이 있다(왕상 6:2-10). 이에 성전에 건축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함께 있고 저들을 버리지 않을 것임을 약속하신다. “여호와의 말씀이 솔로몬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네가 지금 이 성전을 건축하니 네가 만일 내 법도를 따르며 내 율례를 행하며 내 모든 계명을 지켜 그대로 행하면 내가 네 아버지 다윗에게 한 말을 네게 확실히 이룰 것이요 내가 또한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에 거하며 내 백성 이스라엘을 버리지 아니하리라 하셨더라(11-13).”

 

한데 두 가지, 화려한 전이 하나님의 임재와 축복의 보증은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순종만이 그것을 보증한다. 결국 480년의 시간은 연단의 긴 과정으로 광야 40년, 가나안 정복 15년, 사시시대 340년, 사울의 통치 40년, 다윗의 통치 40년, 솔로몬 제위 후 4년의 시간이었다. 시련은 과정을 통해 하나님만을 사모하는 모습으로 단련케 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 1:6-7).” 우리 믿음의 확실함이 불로 연다하여 없어질 금보다 귀하다고 하였다. 이는 그리스도 재림의 때까지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5:9-10).” 곧 그의 영광에 들어가기까지 우리의 온전함은 굳건하여야 한다. 앞서 이는 준비가 귀하였다.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딤후 2:20-21).” 여러 형태의 시간들이 나열되고 그 과정이 모두 제각각인 듯하나 그때마다 쓸모가 다르고 쓰임이 구별된다. 우린 자기를 깨끗하게 함으로 거룩하고, 주인의 쓰임에 합당하여 선한 일에 동원된다. 그에 따른 과정이 때론 고되고 헌난하지만 그리하여 주의 귀하신 손길에 쓰인다. 열매 없는 삶은 구차하다. 화려하나 독소를 가진 것도 있다. “또 우리 사람들도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을 준비하는 좋은 일에 힘 쓰기를 배우게 하라(딛 3:14).”

 

좋은 일에 쓰이기를 힘써 배우는 것,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12).” 그저 공허한 고백과 인식이 구원으로 이끄는 게 아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빌 2:13).” 우리 안의 하나님의 일. 누구를 향한 어떤 마음과 그 일을 추구하는 데 따른 열심은 회개와 헌신 위에 세워진다. 오늘 본문에서도 성전 건축의 시작을 알림과 동시에 그 장소가 ‘예루살렘 모리아 산’이라 소개한다. 앞서 다윗이 마음이 동하여 인구조사를 하였다가 주 앞에 징계를 받고 회개하며 제단을 쌓았던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이었던 곳이다(삼하 24:18-25).

 

좀 더 거슬러 올라가 역사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바쳤던 바로 그 모리아 산이다(창 22:2). 곧 우리의 회개의 자리에서 주의 교회는 시작된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마 4:17).” 예수님의 복음 전파의 첫 음절도 회개였다. 회개는 우리의 헌신이 이루어지는 터전이다. 곧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그러므로 “성전을 위하여 준비한 이 모든 것 외에도 내 마음이 내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므로 내가 사유한 금, 은으로 내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드렸노니(대상 29:3).” 이어 바울의 설교를 더하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곧 그 장소와 시간은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이는 모든 상황을 아우른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 3:16-17).”

 

곧 교회, 우리의 몸,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임재가 관건이다. 이는 장소가 아닌 상태다. 시간이 아닌 상황이다. 우린 외형적인 것에 집중하나 실은 그 외형이 구사되기까지의 과정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나와 480년이 지나는 동안 그 땅은 여전하였으나 그때마다의 상황은 달랐고 상태도 달랐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사 66:1).” 하나님의 임재는 시간과 장소로 구속당하지 않는다. 점점 화려해지는 외형적인 교회와 사람들의 겉치레로 본질은 무색해지고 공허한 부름과 감탄만이 난무하다. 하나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나는 나의 연약함으로 이를 더욱 알 게 되었다.

 

뭔가 제대로 해야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어떤 외형적인 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 10:34-35).”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상태다. 이는 그 은혜가 모두를 누림으로 인도하시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롬 5:15).” 은혜의 정도는 변화된 삶의 형태와 비례한다. 무엇을 바라고 추구하고 이를 갈구하며 생을 살아가고 있는지,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8-19).” 아, 나는 늘 이 말씀 앞에서 오래 멈추게 된다.

 

우리의 실상이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주의 은혜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의 정도는 그 어떤 것보다 충만하다. 곧 나의 죄가 아무리 주홍 같이 붉을지라도 이를 용서하지 못할 은혜가 아니시다. 다만 480년의 시간은 그 오랜 기다림의 시간을 또한 내포하기도 한다. 그러는 까닭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1-14).” 그러기까지의 길고 긴 시간이었고, 비로소 주의 성전이 건축되어 그 의미를 새롭게 한다.

 

곧 우리의 연합과 질서는 이제부터다.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롬 12:4-5).” 성전 건축 이후 전개되게 될 이스라엘의 역사와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난리와 전쟁은 종말의 때가 아니면 그칠 수 없다. 하면 그 과정에 사는 우리는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전 14:40).” 나의 정체성을 바로 알고 주를 따라 사는 것, “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골 2:2-3).” 이에 오늘 시편으로 이어보면,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지나이다

(12:1).

 

이는 그야말로 성전이 없어서이겠나? 종교적인 탄압으로 인함이겠나? 경건한 자들이 떠나가고 충실한 자들이 사라지고 있다. 세상은 그럴듯하니 평안하여졌고, 저마다의 이상이 나름은 성취되면서 더는 하나님의 필요여부에 관심이 없다. 누구의 말처럼 우리 아이가 종교 하나쯤 가지고 사는 데 자신은 긍정적이라 생각한다는 말에 나는 저의 영혼의 안이함을 들여다본다. 기독교를 종교의 하나쯤으로 여기면서 본인이 잃어버린 영혼의 키워드를 저는 엉뚱한 데서 찾는다. 하여 바울은 “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곧 우리의 환난이 어찌해서 유익한가, 하는 데서 묵상의 자리를 깔아둔다. 결국은 고난이 이르어서야 주의 이름을 부를 것이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히 12:4-5).” 우리의 여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가야할 길이 남았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 이에 우리는 “너희가 행할 일은 이러하니라 너희는 이웃과 더불어 진리를 말하며 너희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베풀고 마음에 서로 해하기를 도모하지 말며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 이 모든 일은 내가 미워하는 것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슥 8:16-17).” 다시 말하지만 천국도 지옥도 장소의 개념이 아닌 상황의 개념으로, 우리 신앙의 가시적인 성과도 이 땅에서의 성취나 결과로써가 아니라 상태로써의 의미이다. 우리는 점점 눈에 보이는 것을 추구하며 더욱 더 대형교회의 가시적 성과에 열광하나 성경은 누누이 강조하시길,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나는 이와 같은 말씀 앞에 우리 교회가 주목해야 할 것과 그 목표를 상기한다. 한 영혼으로 씨름하고 힘에 겨워 주의 이름을 부르며 도우심을 구하는 나의 연약함을 두고 나는 이제 낙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것이 나의 힘이다. 누가 오고, 나는 저이가 오는 것에 대해 심적인 압박을 느낀다. 더하여지는 이야기나 상황으로 두려움마저 떠안는다. 그러나 그저 볼 일 보러 오고 가는 사이가 아닌 까닭은 저를 보내신 이가 주님이심을 인정하는 데서 참고 견디며 눈물로 씨를 뿌린다.

 

그들이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

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혀가 이기리라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니

우리를 주관할 자 누구리요

함이로다

(2-4).

 

나는 이와 같은 싸움에 치를 떤다. 스스로들 가당치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를 굽히지 못하고 사는 것이다. 저의 말마따나 자식 일에 식겁하는 부모의 마음은 당연하다. 스스로 그 영혼의 고독으로 신음하는 일에 비로소 절규할 수 있어야, 그곳이 모리아 산이고, 예루살렘 성전이 된다. 주가 거하시는 지성소로 들어가야 한다. 그 내소에 있는 하나님의 장소에서 자신만의 은밀한 고백으로 주님을 만나야 한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엡 4:25).”

 

하면 어쩔 것인가?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니 입술을 벌린 자를 사귀지 말지니라(잠 20:19).” 가만히 저의 숱한 말 속에서 고요한 주의 음성을 듣는다. 내 안의 시끄러운 소리 가운데서 주의 음성을 듣는다.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하는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언하시느니라(살전 2:5).” 주가 하시고자 하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 “어리석고 지혜 없는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네 아버지시요 너를 지으신 이가 아니시냐 그가 너를 만드시고 너를 세우셨도다(신 32:6).” 어찌 나를 이 중대한 자리에 두시고 이 상황을 지키게 하셨는가, 하는 물음 앞에서 나는 이제 입을 다문다.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의 앞에 있으며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사 40:9-10).” 그리고 주가 행하심을 목격하고 이에 증인이 된다.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들의 눌림과

궁핍한 자들의 탄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제 일어나

그를 그가 원하는

안전한 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

(5).

 

결코 능치 못함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다.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창 18:14).” 불가능하다 여겼던 일을 가지고 하나님은 하나님이 되심을 증명하신다. 우리로 알게 하심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신다. 이는 기한이 있다. 드디어 떠돌던 길을 멈추고 성전이 건축되기까지, “여호와께서 기한을 정하여 이르시되 여호와가 내일 이 땅에서 이 일을 행하리라 하시더니(출 9:5).” 주가 행하신다. 갚으시고 이루신다. “가난한 자는 그의 형제들에게도 미움을 받거든 하물며 친구야 그를 멀리 하지 아니하겠느냐 따라가며 말하려 할지라도 그들이 없어졌으리라(잠 19:7).” 이에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자는 궁핍하지 아니하려니와 못 본 체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크리라(28:27).” 그러므로 “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마 26:11).” 이는 실전이고 매일 요구되는 헌신이다. 할 때에,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6).

 

아, 이 귀한 말씀이 생성되어 완성되기까지. 이 아침, 내가 성경을 읽으며 주의 이름을 되뇌는 순간까지, 숱한 믿음의 사람들이 역사하고 이에 관련하여 기꺼이 목숨까지도 아까워하지 않은 결실이니, 내 안에 이는 부담으로 내가 거절할 수는 없는 마음은 성령이 하시는 일이다. 곧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내가 축복할 것을 받았으니 그가 주신 복을 내가 돌이키지 않으리라(민 23:19-20).” 이에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이를 확신하면서,

 

여호와여 그들을 지키사

이 세대로부터 영원까지 보존하시리이다

비열함이 인생 중에

높임을 받는 때에

악인들이 곳곳에서 날뛰는도다

(7-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