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전봉석 2022. 7. 13. 05:06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기도와 네가 내 앞에서 간구한 바를 내가 들었은즉 나는 네가 건축한 이 성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내 이름을 영원히 그 곳에 두며 내 눈길과 내 마음이 항상 거기에 있으리니

왕상 9:3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시 15:1

 

 

성전 봉헌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듣게 된다. 솔로몬이 기도한 지 13년 후에 그 응답이 이루어진 셈이다. 그 말씀에 대한 순종여부에 따라 축복과 저주를 베풀 것임을 알리신다(3-9). 언약의 말씀을 지켜 행하면 왕위가 영원할 것이고(3-5), 말씀을 불순종하여 우상을 섬기면 이스라엘은 멸망하고 성전도 버리실 것임을 알리신다(6-9). 곧 축복과 저주는 뚜렷하게 그의 앞에 놓여있었다.

 

그러나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갈리고 북이스라엘은 B. C. 722년 앗수르에 의해, 남유다는 B. C.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고 백성들은 이방 땅에 포로로 끌려가고 성전도 파괴된다. 이는 다윗과의 약속을 파기하신 것은 아니다. 이후 이스라엘이 포로에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고, 다윗의 자손으로 예수께서 오심으로 다윗의 왕권이 영원히 지속됨을 안다.

 

곧 솔로몬의 성전과 왕궁이 아무리 견고하고 화려하다 해도 이는 영원할 수 없다. 이를 오늘 말씀은 앞서 두 번씩이나 계시로 경고하신 말씀에 대해, 저를 만나주셨고(3:4-15) 성전을 건축할 때에 계시하셨다(6:11-13). 그때마다 저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은 만나셨고 계시하심으로 자기 삶에 충실한 게 어떤 의미인가를 되새기게 한다. 하나님의 임재와 사명은 우리 삶에서 그 맡은 바 충성을 다할 때 임하신다(출 3:1-8).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다 예수님을 대면한다(요 1:29-34). 베드로는 밤새 고기를 잡고 그물을 걷다 그의 생업의 현장에서 예수를 만난다(눅 5:1-11). 바울은 복음을 증거하는 현장에서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행 18:9-10).” 로마로 압송되다가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27:23-24).” 그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 삶의 현장으로 찾아오신다.

 

비록 포로로 잡혀가 종살이를 하는 중에도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창 39:2-3).” 저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이방나라 군대장관을 보고 알았다. 오늘 본문에서도 살필 수 있듯이 기도 응답은 적절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시기에 이루어진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기도와 네가 내 앞에서 간구한 바를 내가 들었은즉 나는 네가 건축한 이 성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내 이름을 영원히 그 곳에 두며 내 눈길과 내 마음이 항상 거기에 있으리니(왕상 9:3).”

 

곧 아브라함도 축복의 약속을 받고(창 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당시 75세의 노인으로 약속의 땅을 향해 떠났다. 이후 100세가 되어 약속의 아들 이삭을 얻었다(21:1-7). 하나님의 때, 곧 25년이나 지난 후에 아브라함과의 약속은 이루어졌다. 예수님의 시간(요 11:1-44),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데 있어 저가 죽은 지 사흘이 지난 후에나 저로 무덤에서 걸어나오게 하셨다.

 

여호와여 나를 반기시는 때에

내가 주께 기도하오니

하나님이여 많은 인자와 구원의 진리로

내게 응답하소서

(69:13).

 

우리의 찬송은 주를 인정하는 것으로 입술의 열매가 된다.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아뢰기를 모든 불의를 제거하시고 선한 바를 받으소서 우리가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입술의 열매를 주께 드리리이다(호 14:2).” 이는 실제 우리 삶의 표현이고 드려지는 현장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 13:15).”

 

우리 일평생 수고하고 근심하나 슬픔뿐이지만,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전 2:23).” 그런 삶의 현장에서 주께 드려지는 것, 우리는 왜 특별히 그래야 하는지를 성경은 짜임새 있게 조명하고 우리에게 알리신다.

 

첫째는 우리는 그리 예정된 존재이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5-6).”

 

둘째는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시다. “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남쪽에게 이르기를 가두어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며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사 43:6-7).”

 

셋째, 성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으로 인해(눅 2:11-14), 우리들도 반드시 거듭남의 삶으로 살아야 한다.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 3:6-7).”

 

넷째, 대속에 따른 일이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롬 3:25-26).”

 

다섯째, 이로써 우린 구원을 이뤄가는 성화를 산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빌 1:9-11).”

 

여섯째, 이는 곧 이어질 재림을 예비함이다.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그 날에 그가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서 놀랍게 여김을 얻으시리니 이는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살후 1:9-10).”

 

이를 우리가 도식적으로 알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주어진 일에 충실하다 주의 임재와 부르심 앞에 섰을 때 비로소 사명자로 사는 것이다. 이는 임의로 바람이 불듯 성령이 주도하시는 일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

 

이를 알 때 우린 겉만 깨끗하게 하는 외식하는 삶을 살지 않는다.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눅 6:42).” 남을 뭐라 할 것 없다. 스스로의 삶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이를 누구에게 드러내어 보여주려는 마음이 없으면 것은 죽은 믿음이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7).”

 

행여 우리의 함정은 자신은 예수를 알고 믿고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앎으로 구원 받은 성도인 줄 안다. 그러나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막 3:11).” 어쩌면 우리를 속이는 것은 우리의 믿음일 수도 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 2:19).” 이를 두려워하며 스스로를 쳐 복종시켰다 하는 바울의 고백이 생생하게 들리는 듯하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18-21).”

 

삶이 곧 말이고 고백이고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이며 장소이다. 일상 가운데 우리의 충실함은 주를 바라고 의지하는 데서 그 목적이 정립된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4).” 이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6-17).” 이를 보면 말씀으로 시작하고, 성령의 충만함으로 살며, 성령의 밝히심(계시)으로 주의 세계를 알고, 보여주신 것을 또한 봄으로 사모하고 찬송하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영광을 올려드리는 일이 오늘 우리의 삶이다.

 

그럼에도 이런저런 자기 판단과 기준으로 성경 위에 자신의 생각을 놓고 산다는 것은 두려움 없이 경고를 듣고, 감사 없이 선물을 받고, 후회 없는 회개를 하며 그저 모든 게 타성에 젖어가는 것이다. 열정없는 결단보다 공허한 게 있을까?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전 14:26).”

 

오늘 본문에서 나는 하나님의 거듭되는 우려와 당부의 말씀을 듣게 된다. “네가 만일 … 마음을 온전히 하고 바르게 하여 내 앞에서 행하며 내가 네게 명령한 대로 온갖 일에 순종하여 내 법도와 율례를 지키면, …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한 대로 네 이스라엘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려니와(왕상 9:4-5).” 이와 같은 말씀 앞에 오늘의 나를 돌아보고 충심으로 주를 바라며 사는 삶인가를 돌아보게 된다. 우리의 최종적인 삶의 목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그의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 같이, 빈 것 같이 여기시느니라 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무슨 형상을 그에게 비기겠느냐(사 40:17-18).” 이는 “거룩하신 이가 이르시되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교하여 나를 그와 동등하게 하겠느냐 하시니라(25).” 고로,

 

내가 하나님 여호와께서

하실 말씀을 들으리니

무릇 그의 백성, 그의 성도들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이라

그들은 다시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지 말지로다

(85:8).

 

시편은 언제나 나를 향해 직설적이다. 이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창 17:7).” 하여,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양식을 주시며

그의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시리로다

(111:5).

 

우리의 모든 일상은 주로부터 시작되고 이어진다. 하여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과 한 길을 주어 자기들과 자기 후손의 복을 위하여 항상 나를 경외하게 하고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원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 내가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되 분명히 나의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렘 32:39-41).” 그러니 하나님을 잃으면 전부를 잃는 것이다. “너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니 그러므로 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리라(삿 10:13).”

 

그러니 우리 죄가 무엇인가?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 2:13).” 나는 이 말씀을 되새길 때마다 내가 그러했고, 여전히 그러하게 사는 것은 아닌지 두려울 따름이다. 하여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곧 우리의 오해는 그리 간단하지 않고, 삶에 길든 몸에 밴 습성은 여전하여서 두렵다.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 1:17).”

 

다시 되새기지만 오늘 언약의 말씀이 강조하는 바는,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렘 17:13).” 하여 “ 주여 수치가 우리에게 돌아오고 우리의 왕들과 우리의 고관과 조상들에게 돌아온 것은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음이니이다 마는 주 우리 하나님께는 긍휼과 용서하심이 있사오니 이는 우리가 주께 패역하였음이오며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여호와께서 그의 종 선지자들에게 부탁하여 우리 앞에 세우신 율법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단 9:8-10).” 돌아보아 자신을 주께 아뢰는 일,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15:1).

 

오늘 시편이 반문하는 듯하다. 우린 그럼 어떤 자이어야 할까? 하고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 저들 같이 외식하는 자로 살아서는 안 되지만 못지않게 저들보다 나은 삶을 또한 살아야 한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살후 1:5).”

 

할 때 우리 마음을 자주 어지럽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이를 주의 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 오늘 시인은 이를 열거하고 있다.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 주지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아니하는 자이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

(2-5).

 

아, 어느 것 하나 나는 자신할 수 없다. 이에 “오직 너는 스스로 삼가며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 그리하여 네가 눈으로 본 그 일을 잊어버리지 말라 네가 생존하는 날 동안에 그 일들이 네 마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조심하라 너는 그 일들을 네 아들들과 네 손자들에게 알게 하라(신 4:9).” 이 또한 삶으로 살아서 증거하는 삶이다. 결국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 이에 주를 바람은 세상을 하나님의 시선으로 보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예수의 시간으로 살아가는 것,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혹은 성도들의 발을 씻으며 혹은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행한 자라야 할 것이요 젊은 과부는 올리지 말지니 이는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에 시집 가고자 함이니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정죄를 받느니라(딤전 5:10-12).”

 

실제이고 실천이 요구되는 현장이다. 그렇게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벧전 2:12).” 곧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느냐 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으로 살기 위함이었다. 하여 솔로몬은 “네 입으로 네 육체가 범죄하게 하지 말라 천사 앞에서 내가 서원한 것이 실수라고 말하지 말라 어찌 하나님께서 네 목소리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네 손으로 한 것을 멸하시게 하랴(전 5:6).” 자기 삶을 걸고 격언으로 주를 섬기는 길을 열어둔다. 우리 삶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하는 것은, “너희가 두어 움큼 보리와 두어 조각 떡을 위하여 나를 내 백성 가운데에서 욕되게 하여 거짓말을 곧이 듣는 내 백성에게 너희가 거짓말을 지어내어 죽지 아니할 영혼을 죽이고 살지 못할 영혼을 살리는도다(겔 13:19).”

 

이에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에게 일러,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사 6: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