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복되도다 당신의 사람들이여 복되도다 당신의 이 신하들이여 항상 당신 앞에 서서 당신의 지혜를 들음이로다
왕상 10:8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시 16:1-2
솔로몬에게 주신 지혜가 어떠한가, 하는 것을 오늘 스바 여왕의 방문과 저의 선물로 짐작할 수 있다. 일찍이 “사람들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러 왔으니 이는 그의 지혜의 소문을 들은 천하 모든 왕들이 보낸 자들이더라(4:34).” 저들이 놀라워하며 기꺼운 마음으로 헌물하였다. 스바는 오늘의 에티오피아나 예멘을 가리킨다고 한다. 성경에서 스바는 남방의 땅 끝에 위치하며,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마 12:42).” 이로 미뤄 상당히 먼 거리였음에도 솔로몬의 지혜가 널리 퍼져 모르는 국가가 없을 정도였다.
수많은 수행원을 이끈 스바 여왕이 여러 질문을 하고 이에 솔로몬은 막힘이 없었다(1-3). 이에 하나님을 찬송하고 많은 예물을 바친다(4-10). 더욱이 스바 여왕이 조달한 교역으로 솔로몬궁의 화려함은 넘쳐난다(11-13). 솔로몬으로 인해 각국의 조세와 조공이 엄청났고(14-15), 금을 입힌 방패와 상아 보좌를 두었음을 기록하고 있다(16-22). 당연히 솔로몬 왕의 재산이 지혜로 버금갈 정도였고 솔로몬은 모든 영화의 극치를 누리며 살았음을 알린다(23-25). 뿐만 아니라 마병과 병거를 둔 저의 왕국은 부강하였다(26-29).
이를 정리해보는 것은 다들 인생의 목표로 삼는 부와 명예와 즐거움의 뿌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인생을 누가 알겠나? 욥의 표현과 같이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또한 다니엘도 고백하기를 “다니엘이 말하여 이르되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할 것은 지혜와 능력이 그에게 있음이로다(단 2:20).” 곧 바울도 “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골 2:2-3).”
이를 보면서 우리가 추구하는 삶의 행복이란 게 하나님께 있음을 알 수 있다. 누가 밤새 문자를 두었고, 새벽에 일어나 읽으니 이런저런 일로 저녁이 되면 불안과 신경쇠약으로 힘에 부친다는 내용이었다. 새벽에 자신을 위해 기도해주기를 바랐고, 나는 저의 글을 여러 본 읽으며 안타까움으로 주의 이름을 부른다. 우리 인생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시다. 나는 저에게 예배를 권하는데, 저는 행여 자신이 드러날까 하여 불안해서 그러는지 함께 주일 예배를 드릴 마음은 어려운가보다. 주의 영이 아니시면 그 마음을 누가 돌리겠나, 싶어 나는 더 이상 강요하지는 않았다. 다만 오늘 1절의 표현처럼 솔로몬이 솔로몬일 수 있는 것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솔로몬의 명성”이란 것을 주목해야 한다.
오늘 우리 삶의 이런저런 우여곡절이 어쩌다 생긴, 운이나 재수에 따른 게 아님을. 다들 그러려니 할 문제도 아니어서, 같은 상황이라 해도 누구는 주의 도우심을 찬송하고 누구는 사느라 고단하여 주를 바랄 수가 없다. 바른 영광을 돌리지 못하는 것은 곧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다.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행 12:23).” 이는 그저 이 땅에서의 죽고 사는 문제로 그치는 게 아니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고전 4:7).”
그러므로 우리 삶의 확실한 뿌리는 주를 경외하고 저를 인정하는 일이다. 이에 솔로몬은 “지혜를 얻는 것이 금을 얻는 것보다 얼마나 나은고 명철을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더욱 나으니라(잠 16:16).” 지혜는 주를 알고 그를 인정하는 데서 시작한다. 그러니 다들 열심을 다해 산다고 사는데 그 삶이 어쩜 그리도 고달프기만 한지, 누구를 사랑하는 일에서나 사랑을 받고자 하는 일에까지,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마르다는 열심을 다해 여인으로서의 일을 하였고, 어떤 점에서는 주를 집에 모신 자로서의 당연한 수고였는지도 모른다. 상대적으로 마리아는 그렇지 않음으로 주께 하소연하자,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눅 10:41-42).”
이런저런 삶의 형편이 무엇을 우선하는가, 하는 데 있다. 하여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근데 그게 그렇게 어려운 것이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15-16).”
안 믿는 자들이야 믿어지지 않는 마음으로 그러려니 하지만 믿는다고 하고 주를 섬긴다고 하면서도 그 삶이 피폐되는 까닭을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를 통해 ‘메마른 심령에 생수를 얻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신다(요 4:7-26). 그러므로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24).” 곧 여인은 다섯 번이나 이혼과 재혼을 반복하면서도 없는 듯 저들로는 참 사랑을 얻지 못한 것이다.
오늘 솔로몬의 부귀영화로 표현되는 축복은 단지 표면적인 저의 영화를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다. 이사야의 표현대로라면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와 그의 찬송을 말하며 그의 사랑을 따라, 그의 많은 자비를 따라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큰 은총을 말하리라(사 63:7).” 곧 주의 사랑은 상황을 초월한다. 여건에 따른 마음이 아니다. 이를 누구보다 잘 알던 바울은 한 마디로 ‘주의 말씀의 순전함’으로 정의하였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 2:17).” 이런저런 이유로 교회를 떠나고 하나님을 등진 사람들을 본다. 저들은 무심하거나 완고한 마음으로 주 없이 산다.
더러는 사람에게 치이고, 더러는 그 마음의 슬픔으로 이를 주체할 수 없어서인데,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나는 누구의 오늘 고통도 그러하다고 말해줄 것이다. 단지 고달프고 시달림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주를 바라고 주께 간구하는 우리의 간구가 결코 헛되지 않은 것은,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사 65:17).” 이를 마음에 품은 믿음으로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그것으로 우린 하나님께로 나아간다. 저가 누구신지, 나로 어찌 위로와 축복을 더하실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13).”
곧 우리는 오늘을 보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저마다의 어려움이 더 나은 삶을 꿈꾸게 하듯이 일련의 어려움과 곤란함이 우리로 주를 더욱 갈망하게 한다. 이때 드는 생각이, 그럼 우린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는 의문인데,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마 5:13-15).” 곧 우리로 소금과 빛이 되게 하려 하심이었다. 이는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롬 15:2).” 저들에게 보이지 않는 목자의 뒤를 우리를 보고 좇아오게 해야 한다. 아가서의 고백으로 다시 보면,
여인 중에 어여쁜 자야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양 떼의 발자취를 따라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일지니라
(아 1:8).
이는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고전 10:33).” 그와 같이 일관되고 한결같은 모습으로 누군가의 표준이 되고 좌표가 되어 주를 향해 가는 길에 표지가 될 수 있다면, ‘광야에서 외치의 자의 소리’로 족한 것이다. 신호등이 고장 났을 때 경찰의 수신호를 따라 진행할 방향으로 나아가듯이… 그렇다고 경찰을 따라 그곳에 머물거나 저가 가는 곳으로 가는 게 아니었다. 목사로 교사로 산다는 일이 더러 두려운 것은 나를 보고 주를 바라고 주님께로 나아가게 해야 하는데, 정작 주께로 가는 길을 가로막고 자신 앞에 정체되게 하는 경우가 빈번하게 있는 것 같다.
오늘 본문에서 스바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로 하나님을 찬미하였다. 주께 예물을 드렸고, 그와의 교역은 주의 나라이기 때문이었다. 누군가의 본이 된다는 것은 이와 같이 두려운 일이다. 예수님 당시 예수가 계신데도 저들의 삶은 헤롯과 같이 부패하였고, 그 영혼은 흑암에 갇혀 있었다.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마 4:16).” 그러니 예수께서 함께 하시는데도 이를 알지 못하면 허사다. 그 많은 금은보화가 하나님께 영광으로 드려지는 것이 아니면 헛되다. 오히려 솔로몬의 노년처럼 방종과 그릇됨으로 혼합한 술을 마시는 꼴이 된다. 이에 저는 알았다.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은 술 취한 자가 손에 든 가시나무 같으니라(잠 26:9).”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시 33:12).
무엇이 진정한 복인가를 알기에는 우리의 사욕이 너무 과하다. 있을 때는 있는 것으로 감사할 줄 모르고 없을 때는 없어서 원망뿐이니, 여호수아는 지쳐서 비명처럼 외친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 24:15).” 아무리 보여주고 들려주고 함께 하여도 이를 원하지 않는 데는 별 수 없는 노릇이다. 예수님과 함께 하였던 수많은 사람들과 그 시대의 백성들도 별 수 없었다. 기어이 저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고 당장의 정치적 논리와 그릇된 지도자들의 술수에 빠지는 것이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 1:13-14).”
이를 듣고 돌이켜 주의 은혜를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럼에도 하나님은 묵묵히 일하신다. 이에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롬 4:20-22).” 그러므로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히 6:17-18).”
자주 묵상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은 누구신가?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인데,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출 3:14).” 이를 우리가 어찌 우리의 상식과 지식으로 설명할 수 있겠으며 알아들을 수 있겠나? ‘나는 나다.’ 하는 하나님의 존재는 그 어떤 것과도 비교가 될 수 없는 영원하신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의지하거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있든지 없든지, 믿든지 믿지 않든지, 하나님은 하나님으로서 그의 영광이 되신다. “그의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 같이, 빈 것 같이 여기시느니라(사 40:17).” 곧 오늘 솔로몬의 영광이 들꽃만 못한 것도 그 때문이다.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였느니라(눅 12:27).” 그러니 저의 오늘의 영광이 무슨 소용이겠나? “그런데 여수룬이 기름지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비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업신여겼도다(신 32:15).”
그래서 교회를 다니다 만 사람들이 더 황량하다. 완고하여서 무슨 말로 권하여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저들은 자신들이 알았던 것으로 이미 굳어진 것이다. 이를 성경은 단호하게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히 6:5-6).” 저를 돌이킬 수 있는 길은 주의 긍휼하심으로 성령뿐이다. 내 곁에 그와 같은 자들을 보내실 때면 나는 누구보다 공감하며 저들의 영혼을 안타까워한다. 교회를 멀리하고 하나님을 등지고 살았던 나의 어리석었던 시절에도 천하 누구의 말도 하찮게 들렸다. 나의 부친은 안타까움으로 설교를 녹음하여 주곤 하였는데, 나는 이를 들고 다니다가 낚시터에 버리고 오기도 여러 번 하였다. 그러니 저들이 듣기 싫어하고 ‘그런 권함’을 거절하는 것에 나는 애간장이 탄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사 1:5-6).” 결국은 징계밖에 다른 수가 없는 것인지….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34:9).
그러므로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전 5:4).” 결국 우리가 알 것은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고후 3:5).” 오늘의 건강도, 나름의 적당함도 모두 주의 은혜인 것을. 일찍 눈을 뜨고 책상에 앉아 밤 늦게 들어와 있던 누구의 문자를 읽고, 저의 어려움을 마음에 담고 이와 같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께 아뢰는 것, 부디 저로 하여금 하나님께 마음을 두어 그 마음이 평안할 수 있기를.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 6:7-8).” 이것이 복이었다. 사는 날 동안의 족함이었다. 곧 “네 시대에 평안함이 있으며 구원과 지혜와 지식이 풍성할 것이니 여호와를 경외함이 네 보배니라(사 33:6).”
이에 우리의 진정한 복이 무엇인지, 더해지는 부귀영화로 축복을 가늠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1-2).
이 귀한 고백이 오늘 너와 나의 것이었으면.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그리하면 여호와가 너희의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너희 중에서 병을 제하리니 네 나라에 낙태하는 자가 없고 임신하지 못하는 자가 없을 것이라 내가 너의 날 수를 채우리라(출 23:25-26).” 우리의 생사화복이 모두 주께 있음을. 하여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곧 너와 나의 염려에서 벗어나는 길은,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34).” 오늘 이 한 날의 수고로 족하였다. 이는 내가 주를 인정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10:32).” 곧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 13:15).”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3).
오늘 우리의 즐거움은 그 출처가 명확하다. 금은보화가 아니고, 명예와 권세도 아니며, 적당히 평안하여 살다 가는 것으로도 아니고,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 1:19).” 결코 우리의 어떤 노력으로나 남다른 희생과 결과로 얻은 것이 아니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 9:14).” 그러므로 우리가 주의해야 하는 것은,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그들이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4-5).
덩달아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쫓아다니는 교인들도 많다. 누구 그러든데, 하면서 심지어는 온통 유튜브나 무슨 방송이 성경보다 우월하다. 저들에게 그것이 신이고 우상이 되었다. 목사를 세우고 교회를 위하여 끼리끼리 안위함을 얻고자 하는 모든 노력이 다를 바 없다. 오직 우리의 참 신앙은,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애 3:24).” 이를 앎으로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25-26).” 묵묵히 주신 삶 가운데서 주를 사모함으로 ‘저 한 영혼을’ 마음에 품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일.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6).
오늘의 족함은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이에,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6-10).
날마다 시편을 묵상하는 데는 기도가 있다. 바람이 있고 간구의 모범이 그 안에 있다. 위로가 있고 훈계도 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도의 찬송이 되는 표본이다. 곧 나의 인도자이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히 13:17).” 그래서 말씀 앞에 가만히 앉는 것, 조용히 눈으로 읽고 가슴으로 새기며 내 입술로 읊조릴 때,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빌 2:16).”
이 길이 맞나? 싶을 때,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벧전 2:2-3).” 고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나는 이처럼 말씀을 찾아가며 성경을 되새기는 것으로도 복이다. 아무리 세상이 어지럽고 진리가 혼용되어도,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1).”
하여,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사 66:1).” 이는,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