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시로다
그가 자기 마음대로 정한 달 곧 여덟째 달 열다섯째 날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절기로 정하고 벧엘에 쌓은 제단에 올라가서 분향하였더라
왕상 12:33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순수하니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시로다
시 18:30
얼핏 들으면 그럼 된 것 같다. 그가 주께 예배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가까이 벧엘에 단을 쌓고 분향하였다 하니 그 마음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주를 섬기며 사는 듯하다. 한데 그게 안 믿는 자보다 악하고, 내심 하나님보다 사람을 두려워하고 의식하는 것이었으니,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 하고,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28-29).”
이는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성전에 제사를 드리고자 하여 올라가면 이 백성의 마음이 유다 왕 된 그들의 주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서 나를 죽이고 유다의 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리로다(27).” 하는 자기 판단에 따른 결정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가 또 산당들을 짓고 레위 자손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고, 여덟째 달 곧 그 달 열다섯째 날로 절기를 정하여 유다의 절기와 비슷하게 하고 제단에 올라가되 벧엘에서 그와 같이 행하여 그가 만든 송아지에게 제사를 드렸으며 그가 지은 산당의 제사장을 벧엘에서 세웠더라(31-32).” 악으로 악을 덮는 형국이다.
성경은 이에 대해 “이 일이 죄가 되었으니 이는 백성들이 단까지 가서 그 하나에게 경배함이더라(30).” 무늬만 그럴듯하고 정작 속이 다른, 외식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는 엄격하셨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마 23:13).” 오늘 저의 행태와 그 선택을 보면서 ‘한 사람으로 인해 죄가 들어오고, 한 사람으로 인해 구원도 들어온다’는 것을 되돌아보게 된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여전히 우리 안에는 처음 사람 아담이 있다.
결국 솔로몬이 죽고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을 왕으로 세우고 남유다는 르호보암을 왕으로 세우면서 분열된다. 이 분열은 르호보암의 그릇된 판단으로 비롯된다. 솔로몬의 화려했던 삶 뒤에는 백성들의 고역이 있었다. 많은 세금과 노역에 따른 고역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눌린 감정은 이어 왕이 된 르호보암에게 기울었다. 부디 선왕과 같이 강제 노역과 세금의 굴레를 완화해줄 것을 바랐다(1-5). 르호보암은 이 문제를 놓고 원로들의 자문을 구하고(6-7), 또래 소장파 대신들에게도 물었다(9-11). 고약하게도 소장파의 의견대로 더욱 모질게 할 것을 선포하자(12-15), 북쪽의 열 지파 이스라엘은 분열을 작정하고 르호보암을 버린다.
서로가 하나 되지 못함은 이처럼 그 둘러싼 무리의 속성에 따른 것이다. 앞서 과도한 세금정책과 건축사업과 유다 지파의 차별적인 통치행위와 이와 같은 결과를 초래한 것이었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작정 가운데 이루어진 일이지만 사람의 속성은 예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결국 언제쯤 이 끝이 이를지, 예수님은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마 24:6-8).” 그러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4).” 주의하는 수밖에 없다. 같이 부화뇌동하여 진영논리에 취해버리면 저들과 자신은 다른 줄 아나 같다.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10-12).”
마치 오늘을 묘사하고 있는 듯하다. 이미 오래 전, 도끼가 나무에 닿았다. 곧 끝이날 것이다. 그런데 더러는 더디다고 하나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더딤이 아니라 주의 오래 참으심이다. 단 한 영혼이라도 회개하고 돌아기까지.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기까지.
이와 같은 약속을 어찌 받을 것인지.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사 55:11).” 반드시 성경의 말씀은 임한다. 스스로 높이면 낮추시고, 그릇된 길로 행하면 징계도 따른다. 사도들은 이를 전하여 “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너희에게 전파하노니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행 13:32-33).” 하여 오늘의 우리 현상은 그대로 말세의 수순을 밟고 있는 셈이다.
누가 급히 기도를 부탁하느라 전화를 했다. 저는 나름의 소명으로 어디에 취직을 하든 투철한 믿음(?)과 강인한 정신(?)으로 자신이 소임을 다한다고 여겼다. 그러던 그가 뜬금없이 공황과 우울을 호소하고 패닉에 가까운 상태가 되었다. 요는 이번에 들어간 모 기업에서 자기 뜻을 펼칠 수 없기 때문이다. 늘 상위 1%의 높은 연봉으로 스카우트되어, 대기업은 물론 중견기업으로 옮겨 저는 ‘소방관’과 같이 급한 불을 끄고 ‘문제를 해결하는 자’로 쓰임을 받았다. 그러다 이번엔 다들 꿈의 직장이라 하는 국내 선호도 1위 포털사이트 모 기업으로 옮겼고, 생각과 달리 저는 들어간 지 석 달 만에 멘붕이 온 것이다. 남들이 들으면 가당치도 않을 소린데 저는 그곳에서 자신의 역할에 대한 회의가 온 것이다.
이런저런 말이 길어졌으나 결국은 스스로 자기가 지키고 있던 사명감과 우월감이 좌절되면서 이는 일시적인 현상이라 판단된다. 물론 고질적인 문제이겠으나, 뭔가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에서 자신의 역할을 하면서 이를 ‘주가 맡기신 일’로 삼았는데, 여기서는 자기 의도와 달랐던 것이다. 스스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역할’에 대한 자부심을 느낄 수 없게 되자, 순간 ‘쓸모없는 자’로 인식되면서 혼동이 온 것이다. 그렇다고 입사한 지 얼마 안 돼 퇴사하기도 그렇고 당장 그럼 또 끼치는 여파도 있고. 남이 들으면 배부른 소리 같은데, 그래도 우월감이나 스스로 갖고 있는 자존감이라는 게 셌고, 이처럼 무섭다.
왜 나를 이곳에 보내신 것일까? 하는 원론적인 회의는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안고 산다. 나는 조심스럽게 말하길 실은 본인이 문제가 아닐까? 늘 남의 문제, 어느 사회 구성원이나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서 보람과 자부심을 가져왔으나 실은 그것이 허울 좋은 만족감으로 교만은 아니었을까? 자기 우월감이나 만족감은 주가 주시는 기쁨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더욱이 이를 인정받지 못하고, 쓰임 받지 못한다는 자괴감은 자신이 부여했던 사명감은 아니었을까? 이번에 그걸 재정립하시려고 주가 일부러 더하신 고개가 아닐까? 한데 저에게는 이것이 절벽으로 느껴지면서 공황이 온 것이다. 나는 이를 조심스럽게 설명하며, 실상은 우리의 열심이 우리로 영혼을 걸려 넘어지게 한다는 것을 설명하고 싶었다. 그 근거는 평소 남을 섬기고 교회에서 봉사와 헌신을 자처하는 것은 좋은데, 정작 자신은 그러한 섬김의 대상이 되는 것에 어떠했는지? 혹시 자존심 상해하지는 않았는지. 자부하는 일이 실은 늘 가르치는 자리에서 무얼 바랐던, 일종의 자아도취는 아니었는지. 은근히 아내의 결정을 무시하고, 주변인들을 이해할 수 없어하는. 가령 안정제를 먹거나 정신과를 다니는 사람들을 정신력의 문제로 나약함의 증거인 것처럼. 정작 자신의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는지… 교만함으로.
성경은 일러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히 10:36).” 이와 같은 말씀을 스스로는 예외로 친다. 다 알아서 한다는 식이고, 정작 문제는 ‘너 때문이다.’ 어떤 구조적인 문제로 이를 해결하는 해결사로 자신의 소임을 단정 짓고 살았던 것이다. 한데 누누이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4).” 앞서 인내를 요구하는 말씀에는 주의하지 않는다. 자신은 알아서 잘 할 수 있고, 특별히 자신에게는 문제가 없다고 여기는, 우월감의 지배를 받고 살았을지도.
거울을 보듯 성경을 마주하는 이와 창밖을 보듯 성경을 마주하는 이는 다르다. 앞서 거울로 보는 자는 오늘 르호보암이 자신처럼 여겨져 괴로워한다. 솔로몬의 파국이 자기 이야기 같고, 다윗의 범죄에서 자신도 자유롭지 못하다. 돌아보며 주 앞에 고개를 들지 못한다. 하지만 창밖을 보듯 성경을 마주하는 이는 모두 남의 이야기다. 누가 들어야 할 소리고, 이 결과는 누구의 일과 흡사하다고 판단한다. 자신을 돌아보고 비춰볼 능력이 저에게는 없다. 물론 흐릿하니 형체는 비치니까 그렇지 않다고 부인할 테지만 거울과 유리에 비치는 모습은 확실히 차이가 있다. 결정적으로 우리 모두는 자신의 얼굴을 자기 스스로는 보지 못한다. 남이 보고 말해주어야 하는데 그건 싫고, 거울을 보거나 유리에 비친 모습으로 가늠할 따름이지만.
저는 곧 금방 입사한 곳을 그만둬야 할 것 같다고 했다. 나는 하나님이 그만두게 하실 때까지 인내해볼 것을 권했다. 그러는 동안 30년은 족히 여기저기서 인정받고 존중받으며, 항상스카우트 대상이었다. 물론 능력자다. 공부도 많이 했다. 자긍할만하다. 한데 자신을 한 번 점검하고 돌아보았으면 해서 일렀다. 쉽지 않을 것이다. 자존심도 상할 것이고, 지금도 자신은 안정제 없이 이겨낼 수 있다고 자신하면서… 대놓고 나는 그 증상(공황)이 조금은 더 심각하게 다가왔으면 좋겠다고 말하였을 정도이다. 우리의 보람과 기쁨은 그런 게 아니다. 세상을 바로 세우고, 리더가 되어 무질서함을 사회를 바로잡는 게 우리 목표가 아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실패자다. 어느 팔레스타인 이름도 없는 갈릴리 나사렛이란 작은 마을에서 짧은 생을 살다 간 젊은 몽상가에 해프닝이다. 다시 말하지만 우린 돈키호테가 아니다.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3).”
어찌 받아들이고 이 상황을 주 앞에서 풀어갈지는 나도 모른다. 르호보암의 어처구니없는 판단과 저의 결정은 우리에게 더하시는 교훈이 크다. 오늘 우리 사회가 딱 그 지경이다. 서로 갈려 저마다의 주장으로 악다구니다. 본질은 감추고 별 것도 아닌 것으로 국민을 호도한다. 이럴 때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행 20:28).” 결국 우리에게 필요하다면 그 입을 좀 다물고 가만히 주께 기도하는 시간이다. 저에게도 그리 일러, 당장 어떤 결정을 내리려고 하지 말고 기도하는 시간을 갖자고 말해주었다. 무서운 건, 특히 젊은 세대일수록 조언이 귀에 들리지 않는다. 이를 참견이나 잔소리로 받고 만다. 막무가내로 자기주장들만 있다. 늙으나 젊으나 요즘은 죄다 별 수 없다.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눅 22:26).”
곧 우리의 겸손은 어떠하든지 하나님께 속한 자로 사는 것이다. 이에 “너는 권고를 들으며 훈계를 받으라 그리하면 네가 필경은 지혜롭게 되리라(잠 19:20).” 들으려 하지 않는데 무슨 소용이겠으며, 굳어진 생각의 틀을 깰 수 없으니 더욱 강퍅할 뿐? 세상 그 무엇도 스스로의 판단으로 옳을 수 없다. 그 어떤 결점도 주가 쓰시면 모자람이 없다. 앞서 솔로몬의 치적이 오늘의 결과를 낳았다. 이를 르호보암은 교훈과 책망을 듣지 않음으로 국가의 분열을 야기했다. 하나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나으니라(전 7:5).” 당장은 보람도 좋고 만족함도 필요하지만 우리의 기쁨은 주의 쓰심에 합당한 일이다. 한데 “우매한 자들의 웃음 소리는 솥 밑에서 가시나무가 타는 소리 같으니 이것도 헛되니라(6).” 일시적인 것에 다들 혈안이 돼 있다. 고집은 스스로를 고립시킬 뿐이다. 탐욕에서 비롯된다. “탐욕이 지혜자를 우매하게 하고 뇌물이 사람의 명철을 망하게 하느니라(7).”
주목 받는 삶으로 어떤 기상과 의미부여는 사탄이 고안한 가장 세련된 기쁨이다. 한데 자신을 왜곡한다. 신앙을 비틀어본다. 이를 감지하고 멈춰야 할 능력을 빼앗는다. 권력의 맛이란 게 그렇듯 우리에게는 멈출 수 있는 제동장치가 없다. 그러니 공황이 오고 건강에 적신호가 켜지고 가정이 파탄날 때까지 외면하고 방기한다. 그러다 아차, 하고 멈추려 하면 늦었다. 스스로의 위로와 몇몇의 동조가 우릴 망친다. 르호보암은 “왕이 노인들이 자문하는 것을 버리고 자기 앞에 모셔 있는 자기와 함께 자라난 어린 사람들과 의논하여… 왕은 대답하기를 내 새끼 손가락이 내 아버지의 허리보다 굵으니,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무거운 멍에를 메게 하였으나 이제 나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지라 내 아버지는 채찍으로 너희를 징계하였으나 나는 전갈 채찍으로 너희를 징계하리라 하소서(8-11).” 하는 말에 우쭐하였다.
이와 같은 것이다. 우리의 자부심이란 다른 면이 문제란 걸 왜곡한다. 오기(傲氣)의 정치와 막무가내식 권력으로 잠깐의 풍월에 도취한다. 능력은 부족한데 지기는 싫고, 인정은 받고 싶은데 여론은 점점 갈리면… 어쩌면 우리는 사회는 곧 군사정권시절보다 더 무서운 권모술수의 ‘법와 원칙, 정의’의 덫에 걸릴 것이다. 그러니 믿는 자들의 우선은 기도다. 덩달아 이리저리 불려 다니는 안개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 5:15-16).” 누굴 탓할 거 없다. 때가 악하니 자중하여 그 입을 다물고 말씀 앞에 주목하시기를. 자칫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히 12:17).”
모든 일은 그 일을 작정하신 이가 그 배후에 계심을 명심해야 한다.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그 앞에서 떨며 지각을 얻어 그를 두려워하리라(욥 23:14-15).” 이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근신하는 것이 상책이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 4:7).” 곧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1-12).” 남을 뭐라 탓할 게 아니다. 내가 문제다.
파국을 맞은 것 같지만 모든 시대는 그러면서 개혁하였다. 이 모든 것으로 주의 살아계심을 나타내실 것이다. 삼가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살전 5:24).”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25).” 그러기 위해서도 우리는
첫째, 거짓을 분별하고 멀리해야 한다. “거짓 일을 멀리 하며 무죄한 자와 의로운 자를 죽이지 말라 나는 악인을 의롭다 하지 아니하겠노라(출 23:7).”
둘째, 아닌 것에 대해 혹시나, 하고 기대하면 안 된다.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에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욥 14:4).”
하나 더, 남의 말에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그들은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롬 3:8).”
일련의 사태와 본문의 파장이 어쩜 그리도 유사한지. 심지어 여로보암은 등지고 돌아선 열 지파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고작 한다는 짓이 더욱 가관이다. “여로보암이 에브라임 산지에 세겜을 건축하고 거기서 살며 또 거기서 나가서 부느엘을 건축하고 그의 마음에 스스로 이르기를 나라가 이제 다윗의 집으로 돌아가리로다(25-26).” 그러니 다들 “그가 자기 마음대로 정한 달 곧 여덟째 달 열다섯째 날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절기로 정하고 벧엘에 쌓은 제단에 올라가서 분향하였더라(33).” 자기들 좋을 대로 해석하고 판단하고 이를 따른다.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하게 말이다.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약 4:15-16).” 어울리는 것들끼리 동조하고 시시덕거리며 꾀를 일삼는 것은 수 천 년 전이나 오늘이나. 이러할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나의 하나님, 나의 구원자’를 바로 붙들고 가는 것이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18:1-2).
나와 상관없는 하나님과 구원과 천국은 무슨 소용이겠나? 이러한 체험과 고백이 필요하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사 12:2).” 그러므로 “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오리니 주는 기사를 옛적에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이라(25:1).” 이와 같은 체험과 고백이 없다면 그 무엇도 헛되고 헛될 뿐이다. 그래서도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4:7-8).”
내가 이제 주의 것이라는 것, 나는 이에 안도한다. 더는 내가 내 것이 아니다! 이것이 주는 자유는 더 이상 내 문제를 내가 떠안고 살 필요가 없다.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 거듭 나를 괴롭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까지도 내가 꼭 해결해야 할 문제는 아니다. 왜?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살전 5:10).” 죽기까지 나를 이미 정리하셨다. 자기의 것으로 삼으셨다. 설마 주가 그런 뒤 나의 오늘을 모르실까?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3).
괴로운 날들은 연속이나,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마 21:22).” 곧 내가 이제 가진 것이라고는 괴로움으로 주께 간구하는 힘이다.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요일 5:14-15).” 그러므로 살리시든지 죽이시든지, 이 모든 것은 주의 것이라는 확실함.
사망의 줄이 나를 얽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스올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5-6).
아무렴 어떻겠나?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6).
이를 알고 믿고 의지함으로 공황이 오든지, 불안이 나를 엄습하여 쥐고 흔들든지, 되는 일이 없고 모든 게 내 뜻 같지 않다 해도….
그가 높은 곳에서 손을 펴사
나를 붙잡아 주심이여
많은 물에서 나를 건져내셨도다
(16).
주가 하신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행 14:22, 벧전 5:9).” 세상 그 무엇도 우리를 당할 수 없는 것은 우리가 더는 내 것이 아니어서이다. 만유의 주, 만군의 여호와의 것으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배짱 좋은 사람이 아니다. 용기 있다는 말도 아니고, 훌륭한 사람이란 소리도 아니다. 오직 이제는 주를 신뢰하는 자라는 사실. 이는,
“너희로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살후 1:6-9).”
이에,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상 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따라 내게 갚으셨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하게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그의 모든 규례가 내 앞에 있고
내게서 그의 율례를 버리지 아니하였음이로다
(20-22).
곧 말씀이 내 곁에 있다. 누구에게 이르기를 말씀과 교회를 중심으로 그 기준만 잃지 말 것. 그럼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이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떠올라 네 어둠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사 58:9-11).” 성경은 변치 않는 약속으로 보중하셨다.
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을 향해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
(28-29).
어떻게 나는 그럴 수 있을까?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순수하니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시로다
(30).
더 무슨 방어가 필요하겠나? 어떤 것도 주의 사랑을 끊을 수 없다. 그러므로 “너희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하고(신 31:6).” 하면,
이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보복해 주시고
민족들이 내게 복종하게 해 주시도다
(4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