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그와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왕상 17:15-1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시 23:6
시대가 악함으로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내리지 않는 가뭄이 인다. 북이스라엘의 7대 왕 아합의 때에 종교적 타락은 물론 히엘의 여리고 건축과 백성들의 성적인 문란 행위와 악행이 극에 달했다. 이에 하나님은 엘리야를 들어 가뭄을 선포하신다. 이번 17장부터 왕하 2장까지는 엘리야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오늘 저는 아합 왕에게 경고하고, 그릿 시내로 피했다가 사르밧 과부의 집으로 가 기거하는 내용이다.
앞서 하나님은 저를 따로 그릿 시내로 도피시키시고 떡과 고기를 제공하셨다(2-7). 가뭄이 심해져 시내가 마르고는 또한 저를 사르밧 과부의 집에서 은신하게 하신다. 우리로 옳은 길을 가게 하시고 악을 대하는 데 있어 하나님의 절대적인 보호하심이 있다. 참과 거짓이 혼재한 시대를 살며 아닌 것을 아니라 하지 않으면 동조다. 엘리야는 악명 높은 아합 왕 앞에 섰다. 그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건네는 일은 목숨을 건 일이다.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숭배하며 악행과 음란과 거짓을 일삼는다. 그런 저들에게 가뭄을 내린 것은 저들이 숭상하는 바알이 거짓임을 알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어쩌면 우리의 소신이란 그러해야 한다. 단지 자신의 신념에 따른 결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결행으로써 말이다. 사모는 결국 개인과외교습소를 할 자리를 구하고, 자신이 나서 주의 일을 감당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여러 장의 사진과 함께 그 위치를 알리며 어떠한가 물었다. 나는 주께서 가장 선히 인도하실 것을 장담하였다. 늘어져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는 남편 목사를 더는 설득하고 기다릴 수는 없었다. 아이 또한 성장할수록 그 심상찮은 사회성에 더는 미룰 수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본인이다. 대인기피증세 이상으로 공포에 가까운 처지인데도 주의 사역에 대한 열망이 남다른 것이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죽으나 사나, 나의 결행에는 성령의 내주임재하심이 함께 하심을 안다.
주의 일을 감행하는 데 있어 목숨도 아낌없이 바칠 거라면, 다니엘과 세 친구처럼 기꺼이 죽음 앞에서도 굴하지 않는다(단 3:1-18). 일흔다섯의 나이에 안착하고 살던 우르를 떠나는 아브라함의 심정도 그러했을 것이고, 간신히 도망쳐 은신하고 살았던 미디안 광야를 벗어나 애굽으로 가야 했던 모세의 마음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왜 두려움이 앞서지 않았겠으며 그에 따른 고통 또한 버겁지 않았겠나? 그럼에도 우린 이 세대를 따르지 않고, 참과 거짓을 분별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용기가 필요하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가를 분별한다는 것, 이는 또한 그만큼의 고통과 좌절도 감수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결국 죄를 떠난다는 것은 “너희는 너희가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지어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겔 18:31).” 사모가 눈물지으며 남편에 대한 이런저런 사연을 내게 호소한들, 저는 저의 하나님께 맡기고 본인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집중하기를 여러 날 권하고 바랐던 결과다. 물론 또 이 일이 어떻게 좌절될 지 알 수 없지만 우린 일곱 번을 넘어진다 해도 다시 일어나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이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잠 24:16).”
엊그제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벌어졌다. 필리핀 동생이 사역지로 돌아가기 위해 수속을 밟는데 출국금지가 되어 있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라 온 가족은 물론 함께 하는 이들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신경증을 앓는 아이엄마가 ADHD를 가진 아이를 맡겼는데, 아이 말만 듣고 당국에 신고를 한 것이다. 사유는 ‘폭행과 노동착취’인데 그 세부내용이 헛웃음을 짓게 한다. ‘그런 아이’를 어르고 달래다 아이와 약속한 대로 손바닥을 한두 대 때린 것과 하필 이번에 돌아오기 일주일 전 ‘어떤 문제’가 있었다. 실은 녀석이 거실에서 자위를 하는 것이다. 모두 모여 공부하는 장소이면서, 예배 처소이기도 한 곳에서 자꾸 그러니, 그럴 때면 거짓말과 악다구니를 쓰는 일은 예사이고 그 일은 행여 어린 소녀가 볼 수도 있고 하여, 이번에 한국 들어가면 그만오자, 했더니 녀석은 울고불고하다 결국 엉덩이를 한 대 맞은 모양이다.
이를 어찌 사진으로 찍어두었을까? 영악하기는, 자신의 엉덩이를 사진으로 찍고 이를 이번에 아이엄마에게 보이니까, 아이 상태를 뻔이 알면서도 아이 말만 듣고 항의하다 출국금지를 걸은 것이다. 노동착취란 것도 '식사 후 행주질시킴', '쓰레기통을 바깥으로 운반하게 함', '마당을 쓸게 함', '식사 때 수저와 젓가락을 놓게 함' 등 경찰도 어처구니없어 하면서도 법이 그렇다며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하였다. 결국 아이엄마를 잘 설득하여 타협으로 푸는 게 좋고, 설령 끝까지 간다 해도 기소유예로 끝날 일이지만 ‘요즘은 부모를 신고해서 감옥에 보내는 세상’이라며 경찰이 한탄을 했다. 문제는 사역지를 오래 비워둘 수 없는 일이어서 그게 문제다. 또한 사모의 마음이 많이 상처를 받아 자꾸 눈물만 흘린다는데. 것도 그럴 것이 나름 먹이고 입히면서 부모조차 건사 못해 보내온 아이를 주의 사랑으로 돌본다고 돌본 일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정신적인 충격이 어찌 말로다 위로가 될까?
그야말로 시대가 악하다. 특히 아이들의 영혼이 황폐하다. 특히 14세 미만 촉법소년들의 겁 없는 행실 앞에 속수무책이다. 한 번은 내게도 초등학생? 그래봐야 중 1, 2 정도 됐을까? 하는 아이가 슬그머니 곁에 다가오더니, 할아버지 담배 한 갑만 사다주세요! 하는 것이다. 것도 버젓이 건물 1층 복도에서 말이다. 순간 어이도 없고 황당하기도 해서 너 몇 살이냐? 하고 물었더니, 갑자기 쌍욕을 해대는데 남이 들으면 마치 내가 애를 해코지나 한 것처럼 여겨졌을 정도이다… 마침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다가오자 녀석은 입에 담지 못할 욕을 내뱉고는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황당하고 슬픈 일이었다.
그때 짐작을 했다. 내가 더는 초등부 아이들 글쓰기를 맡지 않는 것은 처음 이곳으로 와서 여자아이 대여섯 명과 남자아이 서너 명을 받은 적이 있다. 3, 5단지 아이들로 따로 글쓰기를 배울 처지가 아니라, 아내의 연결로 그리 시작한 것인데 반 년 정도 했을까? 어느 날 아내가 가정예배를 드리기에 앞서, 당신! 여자아이 배를 만졌어? 어깨도 쓰다듬고? 하고 묻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했더니, 녀석들과 좀 친해지면서 아이들은 내가 배 나온 것을 보고 툭툭, 건드리며 장난을 걸기도 했다. 그러다 나 역시 어느 여자아이 배를 쿡, 찌른 모양이다. 서로 장난치다 그리 한 거라 나는 생각도 없었다. 어깨 이야기는 또 뭔가 했더니, 한 여자 애가 자꾸 엎드려 졸기에 어깨를 치며 깨우고 지나간 것인데, 그때 그 애가 성추행 어쩌고 하는 농담을 했다. 서로 웃고 말 일이라 나는 아무 생각도 못했다. 그때 아이들이 한 자리에 있었으니 망정이지, 순간 그리 몰리는 건 예삿일도 아니겠다 싶었다. 그런 소릴 아이엄마가 들으면 아동 성추행범으로 몰릴 판이다. 순간 겁도 나고 내가 감당할 수 없어서 나는 아이들이 글방으로 오는 것을 중단했다. 책상도 둘러앉는 형태에서 마주보는 방식으로 고쳤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우리도 맞서 무고죄나 명예훼손으로 걸어야 하나, 별의 별 생각을 다하다 똑같이 그럴 수는 없는 일이라며 동생은 시무룩하게 말했다. 그래도 몇 년을 신앙으로 양육한 게 있는데, 어찌 똑같이 그럴 수 있나, 하고 가만히 있기로 한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선을 행하고 주의 일을 준행한다는 것은 어떤 불의한 일도 감수해야 한다는 소리다. 악행을 알리며 가뭄을 경고한 뒤 왜 엘리야가 왜 그 자리를 피하겠나? 거짓말로 자기를 두른 상대와는 싸움이 무의미하다. 다만 사모로서 제수씨는 이번 일로 정신적 고통이 너무 크고, 심적으로 어려워 하고 있다. 뭐라 할 말을 잇지 못한 채 나름 친자식보다 더 보살피고 돌보고 위했는데, 이 무슨 봉변인가 싶어서 억장이 무너질 판이다. 아,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3:5-6).
주만 바라고 주를 의지하는 것으로 이겨내야 할 텐데,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7).
어제는 동생과 통화하면서 이 또한 뭔가 하나님의 또 다른 섭리가 있으실 터, 어떻게 일이 진행되는가 지켜보는 쪽으로 묵묵히 있기로 했다. 말씀만이 새 힘이 된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주가 이르신다.
하긴 남편 목사를 더는 어쩔 수 없다고 판단하고 사모가 나서서 예배처소로의 첫 발을 내딛는데 있어, 저도 결혼 생활 10년 동안 우울과 불안이 극에 달해 지금은 거의 대인공포를 겪으며 안정제와 진정제를 복용하면서 그나마 간신히 파트 전도사로 사역을 감당했었다. 앞서 교습소를 하며 아이들이니, 아이엄마들을 상대하며 잃어버린 용기를 회복하기를 기도하였다. 그러면서 주가 길을 열어주실 것이라 믿는다. 특히 저는 고대 심학학을 전공하였다. 주가 어찌 이끌어가실 지 우린 알 수 없다. 먼저 앓고 있는 저의 정신적인 고통이 반드시 어느 훗날 이 시대의 고질적인 심리문제를 다루는 데 유용할 것이다. 못하겠다고 울며, 기대할 수 없는 남편에게만 종용하던 길을 비로소 자신이 감당하기로 결단한 것이다.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심정으로 일을 벌이는 셈이니, 주께서 책임지실 것이다. 하나님이 하신다.
“이르되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위하여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내가 피할 나의 반석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그에게 피할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폭력에서 구원하셨도다(삼하 22:2-3).” 어쩌면 우리에겐 이 시대의 이런저런 모든 일이 걸림이 될 뿐이다. 실제 잊을만하면 목사가 성추행으로 뉴스에 오르내리고 각종 범죄에 휘둘리는 시대에서 동시에 묵묵히 주만 바라며 주의 길을 간다는 것은 숱한 거짓 선지자들이 판 치던 때에 이사야가 올곧은 신앙으로 주의 길을 가는 것과 다를 게 없다. 곧 오늘의 문제는 비단 오늘의 문제만은 아닌 것이다. 인류의 시작과 동시에 거듭되는 문제다.
오늘 이사야의 등장은 거짓 주의 종들과 각종 가신들이 판치던 시대에 특이할 정도로 신선하였다. 아합 왕 앞에 그리 선포해놓고 그릿 시내로의 도피하였다가 시돈 땅 사르밧 과부의 집에 은신한다는 게 얼마나 처량하고 한심한 처지인가? 이에 우린 주만 바란다는 거,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잠 18:10).” 결국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말씀 따라 산다는 일은 비루하고 처량하고 한심한 것이다. 세상적인 시선으로는 그렇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3:6).” 이에 우리에게는 순종뿐이다. 주의 사랑이 아니면 ‘그깟 아이’, ‘그런 몰상식한 아이엄마’를 우리가 상대할 이유는 없다. 그릿 시내로 쫓겨 도망칠 일도 없다. 과부의 집에 얹혀 살 일도 없다. 한데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히 11:8).”
그러니 우리 안에 두시는 믿음의 작동이 때론 우리의 판단과 기준을 초월한다. 그럴 때 주의 놀라우신 도우심은 기이하다. 떡과 고기로 먹이시더니, 고작 밀가루 한 줌과 기름 몇 방울로 떡을 만들어 함께 기거하는 동안 마르지 않게 하신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8).” 이와 같은 말씀이 아니면, 뭘 해도 이만큼은 못 살까? 맞춤하니 오늘 시편이 위로가 크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23:1-2).
정작 현실이 어떠하든지, 우린 누구나 부자로 살면 좀 나을까 하여 기를 쓰고 돈을 벌고. 세상 향락을 즐기며 살면 좀 나을까 하여 기를 쓰고 쾌락을 좇아 살지만… 그 영혼의 평안은 다른 곳에 있었다. “내가 친히 내 양의 목자가 되어 그것들을 누워 있게 할지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겔 34:15).” 이 모든 우주만물과 삼라만상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인정할 때,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요 10:3).”
이에 “내가 기름으로 제사장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며 내 복으로 내 백성을 만족하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14).” 우리는 무엇으로 기쁨을 삼고 사는가?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3:5).” 세상은 요지경이고 사람들은 아귀처럼 그 허기를 달래지 못하는데, 우리에게 두시는 한 영혼은 다 그 이유와 목적이 있다. 가령 공부방으로 오는 아이 중에 두 부부가 재혼하여 각각 성장한 자녀들이 있다. 그러다 늦둥이 낳았는데, 둘 사이에 각각 있는 아이들고 무려 스무 살 차이가 난다. 이 애는 자폐가 있고, ADHD며 참 어려운 아이다. 여기저기 다 쫓겨 결국은 우리에게 온 것이다. 한데 처음 왔을 때와 달리 이제는 아이들과 놀이터에서 놀다 가기도 한다. 벌써 2년여의 시간이 들었다. 처음은 저항의 표시로 바지에 똥을 싸고, 엘리베터에 오줌을 싸고, 복도에 똥을 묻히면서 오던 아이다. 그런 아이가 이제 제 몫을 하며, 어제는 내게도 눈을 마주치고 먼저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도 건네었다.
이처럼 한 영혼을 바로 세우는 일은 한 세계를 바로 잡는 일이다. 뒤틀린 그 가정사를 바로 하는 일이고, 잃어버린 삶의 기쁨을 회복시키는 일이다. 그 일의 주체는 누구인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29).” 그러니 우린 어디로 가는 것이 옳은가?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 10:9).” 그렇게,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3).
하나님은 날 보고 나를 위해 하시는 일이 아니어서, '자기 이름을 위하여!' 하신다. 나는 이 복음의 진리가 얼마나 다행이고 감사하고 소중한지 모른다. 날 위해, 내가 원해서 하는 것이면 가망이 없다. 왜냐하면 난 나를 안다. 내 변덕을 알고 그때마다의 감정기복도 안다. 따라서 그게 아니어서 다행이다. 최소한 내가 아는 나는 내 스스로도 용서할 수 없는, 죄인이다. 한데 주는 나를 붙드시고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우리에게는 이와 같은 보증의 말씀이 궁극적으로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하심이니, 수백평 아파트 등기보다, 수천금의 부귀영화보다 귀하다. 영원한 삶을 담보로 하는 것이다. “옛적에 여호와께서 나에게 나타나사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하였노라(렘 31:3).” 하면,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16:11).
이처럼 시편은 찬송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면, “지혜가 너를 선한 자의 길로 행하게 하며 또 의인의 길을 지키게 하리니 대저 정직한 자는 땅에 거하며 완전한 자는 땅에 남아 있으리라(잠 2:20-21).” 잠언은 이를 확증한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4).
이 놀라운 보호하심을 아는 사람만 아는, 받아 본 사람은 아는,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사 43:2-3).” 주가 책임지신다는 것보다 확실한 게 또 있나? 그것도 주의 이름을 위하여서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히 13:6).”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5).
보란 듯 저들과 우리의 평안이 서로 다른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종종 나더러 누가 참 좋아 보인다, 편안해 보인다 할 때 나는 굳이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는다. 그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비록 가진 것은 없고 남들보다 못한 삶이라 해도,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18).” 그러므로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 12:9-10).” 하시는 이 말씀을 이제 나는 무엇보다 사랑하고 신뢰한다.
하여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이보다 더 귀한 사실을 나는 이제 모른다. 그러므로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