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아합이 왕궁 맡은 자 오바댜를 불렀으니 이 오바댜는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자라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때에 오바댜가 선지자 백 명을 가지고 오십 명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먹였더라
왕상 18:3-4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시 24:1
엘리야와 바알을 섬기는 거짓 선지자 간의 한 판 승부가 벌어지는, 그 유명한 갈멜산 사건이다. 앞서 주목하게 되는 인물이 오바댜이다. 오바댜는 아합의 궁내대신으로 아합과 함께 긴 가뭄으로 인해 꼴을 찾아 나선 길이었다. 한편 오바댜는 아합의 폭정과 이세벨의 손아귀에서 백 명의 주의 선지자들을 굴에 숨기고 음식을 제공하였던 자이다. 이를 성경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 소개한다. 3절 중반에 “이 오바댜는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자라.” 이와 같은 찬사를 받는 것으로 영예롭다.
저가 이사야를 만나고 아합 앞으로 이끌어, 갈멜산에서 바알을 섬기는 450명의 선지자들과 맞서 저들은 바알에게 이사야는 여호와께 아뢰어 기근을 멈추게 할 비를 구한다. 일련의 사건으로 먼저는 다 때가 있음을 알 수 있고, 아무리 세상이 어지러워도 온전히 주를 경외하는 자가 있음을 알 수 있고, 주의 권능은 아무도 기대하지 못하는 상황을 초월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장의 행복과 안위에 결탁함은 ‘터진 웅덩이’에 물을 저장하는 일과 같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 2:13).” 곧 구멍 난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일과 같다.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학 1:6).”
나는 누구의 강박적인 열심과 어려서부터 자신을 몰아세운 이유에 대해 궁금하였다. 첫 글을 떼지 못하는 이에게 그토록 절박한가? 하는 것을 물었다. 그 절박함을 두고 가면 뒤에 얼굴을 감추려니까 정작 쓸거리가 없다고 말해주었다.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골 2:3).” 분명히 나는 주의 영이 함께 하심으로 저로 여기까지 오게 하셨고, 매 주 두어 번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글을 쓰게 하신 것이라 믿는다. 단지 글쓰기를 배우려는 그 이상의 숨은 뜻이 계심을 나는 확신한다. 은연중에 자신을 덧대는 것을 벗겨내지 않고는 본래의 자신과 직면할 수 없다. 그러는 동안 쓸거리도 없고 쓰는 글 또한 수박겉핥기와 다르지 않다.
하물며 주의 일을 감당하는 것이야,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 1:16-17).” 주를 인정하는 것에서 우리의 이야기도 의미가 있다. 단지 ‘나의 이야기’를 하고자 함이 전부가 아니다. 그 가운데는 반드시 ‘하나님의 이야기’가 있다. 하여 누구를 대하는 일이나 어떤 일을 맡는 데 있는데, 주가 함께 하심을 강하게 붙드는 것이 믿음이고,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롬 14:23).” 고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고로 우리의 게으름은 단순한 정신 상태나 생활 태도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 이상으로 믿음의 유무를 점검하게 하는 계기다. 결국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다.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살후 3:6).” 여기서 두 가지, 하나는 게으르게 행함과 다른 하나는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 자를 우린 떠나야 한다. 앞서 믿음에 관하여는 환경이나 여건이 문제가 아니다 오바댜는 일반인으로 주를 경외함으로 주의 선지자 100명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시대가 어떠하든지 믿음으로 행하는 자는 있다.
내가 누구를 대하는 데 있어서는 주의 뜻이 있음을 믿기 때문이다. 어제는 그 하나의 접근으로 왜 굳이 글을 쓰려하는가? 하는 원론적인 질문으로 저의 민낯을 보고자 했다. 곧 스스로 자신을 직면하지 않으면 글쓰기는 물론 그 영혼의 허기가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다. 아직 만난 지 한 달이 되었을 뿐인데 저의 미적거림에 제동을 건 것이다. 굳이 맞닥뜨릴 용기를 주지 않으시고, 저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돌아보게 하지 않으신다면 애써 것도 일주일 두 번씩이나 저를 위해 아침 시간을 내야 할 이유가 없다. 저의 길어지는 이야기에 나는 주의 이름을 되뇌며 용기를 내어 찌른 것이다. 분명 저를 붙이시고 오게 하신 이유가 있다면 주가 저의 마음을 움직이실 것을 믿기 때문이다. 단지 저의 지적허영을 채우는 데 일조를 할 생각은 없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 믿음이 없이는 천성적인 게으름도 혹은 주의 말씀을 경홀히 하는 마음도 이겨낼 수 없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1-2).”
이는 절박함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다른 무엇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던 바울과 같이 굳이 주와 상관없는 일이면 우리의 만남도 의미 없다는 데 방점을 찍을 것이다. 그만큼 들었으면 됐다. 왜 글을 쓰려 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진 것은 무엇으로 그 영혼이 허기져 있는가? 하고 묻고 싶었던 속내가 있다. 저의 영혼에 주의 작은 불씨라도 있다면 이에 따른 근심이 주말동안에 있을 것이라 믿는다. 월요일에 올 때 그 답을 가져오시라 한 것도 그 때문이다. 나 역시 늘 주저하고 망설이고 두려워하여, 나는 비로소 내가 안정제를 먹어야 한다는 나약한 존재임을 밝혔다. 주 앞에 늘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를 모든 말을 너는 마음으로 받으며 귀로 듣고 사로잡힌 네 민족에게로 가서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겔 3:10-11).”
다만 나는 저가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하라, 하심에 따라 전할 뿐인데 그에 따른 강약과 때를 주가 알게 하실 것을 의뢰함이다. 때가 아무리 어떻다 해도 오바댜와 같이 주를 경외하는 자가 그 시대를 연명할 수 있게 한다. “이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올라왔으니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음으로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자이더니(스 7:6).” 저는 주께 아뢰기를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사 50:4).” 이와 같은 심정이 오늘의 나를 이끎이다. 절박함이란 주를 높일 줄 아는 데서 시작한다. 하면,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그가 아름다운 관을 네 머리에 두겠고 영화로운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하셨느니라(잠 4:8-9).”
내가 어찌 해보려 하는 것을 멈추는 일, 나는 저의 열심을 그리 염두에 두었다. 운동도 몇 개씩, 배움의 모임도 여러 개, 거기에 가정주부로 또한 영어학원 원장으로 하루 24시간을 쪼개 사는 일이 실은 어릴 적부터 있던 것이라… 단지 부지런함이나 올곧은 생활습관으로 보기엔 뭔가 미심쩍었던 것이다. 뭘까? 무엇보다 왜 교회를 떠나고 하나님을 등진 것일까? 친정엄마는 또 어떤 이유가 있었길래 평생을 믿던 주를 버린 것일까? 하는 의문점에서, 그 영혼이 주를 다시 찾고자 하는 마음인 것을 나는 확신한다. 곧 오늘의 강박적인 열심, 잘 살아야 한다는 어떤. 나는 더 이상 미루지 않기로 했다. 에둘러 갈 길이 아니라 판단했다. 그게 아니면 굳이 계속 더 만나서 무얼 할 수 있겠나?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 1:27).”
특히 나는 이번에 필리핀 동생이 겪는 어려움(?)으로 오히려 주의 세심하신 사랑을 느낀다. 누구의 ‘출국금지’ 덕분(?)에 고질적으로 아파하던 동생 목사의 치통도 낫게 되고, 더욱이 큰 아들애의 발목이 기형적인 이유가 있었음을 발견한 것은 가장 큰 은혜이다. 그동안은 축구하다 겹질렸나, 하는 정도로 여겨 그때마다 침고 진통을 가라앉히는 정도였는데 이번에 내친 길에 엠알아이를 찍고, 한쪽 발목이 기형적으로 심줄이 발바닥을 당겨 발이 약간 돌아가고 그쪽으로 딛고 생활했던 것을 발견했다. 그리 두었으면 더 나이들면서 여러 문제가 발행할 뻔하였다. 그대로 서둘러 필리핀으로 갈 수 없도록 하나님의 돌보심이 아닐 수 없다. 곧 우리의 환난은 단지 어려움이 다가 아니다. 우리로 환난 중에 즐거워한다는 사도의 증거는 진리였다.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사방 곳곳에 스며 있다.
아합의 폭정과 이세벨의 극한 우상숭배 가운데서도 오바댜와 같은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 그곳에 심어 두셨다. 저 한 사람으로 백 명의 참 주의 선지자들의 생명을 보존하셨다. 앞서 애굽에 노예로 팔리게 하셨던 요셉 한 사람으로 온 이스라엘의 생명을 보존하셨던 것처럼, 오늘의 이런저런 우리의 어려운 상황이 오히려 주의 사랑을 실현하는 현장이 된다. 환난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그가 더하시는 소망을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믿는 자의 특권이고 은혜였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 5:2).” 하여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3-4).” 나는 이 말씀을 자주 마음에 새긴다.
이 놀라운 진리를 알면 알수록 갈멜산의 기적도, 우리 삶에 여러 체험도,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5-6).” 하는 이 놀라운 사실로 이끈다. 내가 쓸모 있어서가 아니라, 나로 주의 일에 사용하심으로 쓸모 있는 자로 삼으신 주의 선하심이다. 우린 어려움 가운데서 자신의 쓰임을 발견한다. 어제 온 그이에게도 이를 마음껏 전할 날이 오기를 기도한다. 저의 망상과 그 허영의 가면을 벗기시고, 그 영혼의 허기를 알게 하심으로 주의 살아계심을 다시 회복하시기를. 어릴 때 잃어버린 그 신앙의 출처를 회복할 수 있게 하시기를. 그리하여 오늘 저와 나의 만남이 주의 살아 역사하심의 현장인 것을 증거하게 하시기를. 저가 하고 안 하고, 듣고 안 듣고는 내 몫이 아니다.
어떠하다 한들,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사 55:2).” 더는 헛된 만남, 허튼 일로 마음을 쓰며 살지 않겠다. 돈을 벌고자 하는 일이면, 단지 좋은 만남으로 족한 것이라면, 그만하면 됐다. 저 한 영혼, 주의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 맞다면 주께서 돌이켜 주의 자녀로 살게 하실 것을 믿는다. 하여 나는 기꺼이 욕심 내기를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십자가 외에 더는 저에게나 나에게나 자랑할 것이 없다. 나눌 이야기도 없다. 좋은 게 좋은 사이야 모두 헛된 것을 안다.
고로 믿음의 지체를 자랑함이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이 두 말씀(고전 2:2, 갈 6:14)이 하나로 연결되는 것과 오바댜가 그 악독과 폭정 속에서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을 지극히 경외하는 자로 살 수 있었던 것과 주의 영이 오늘 우리와 함께 하심이 모두 하나다. 이 모든 것, 스스로 옳다 여기는 그 모든 가치와 기준과 이상과 판단으로 실천하려는 현실이 거짓임을,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고로 주가 더하실 때 우리는 가능하였다.
모든 것이 죽음으로 죽음에 이르지 않는다.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36).” 하여 예수님은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거듭남은 고쳐 다시 쓰려는 게 아니다. 예전의 나를 정비하여 더 나은 삶을 살고자 하는 노력도 아니다. 전혀 별개의 나이다. 결론은 이를 위해 그리스도 예수를 바라보라는 것,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4:7-10).”
뭐라 전하는 일은 이를 듣게 하는 일과는 별개다. 나는 전하여 알게 할 뿐이지, 우리로 거듭나게 함은 절대적으로 우리의 의지로 하는 일이 아니었다. 믿음도 구원도 그와 같아서 때론 두렵고 때론 참 다행한 일이다. 내 스스로 나를 통제할 없을 때 강한 저항을 느낀다는 소리에 나는 저의 강퍅한 영혼의 정도를 알 수 있었다. 이를 스스로 깨고 나오는 일은 불가능하다. 누구보다 나는 할 수 있을 줄 알았고, 끝까지 내 고집을 꺾지 못해 결국은 하나님이 치심으로 이제는 은혜로 안다. 내 생의 가장 큰 은혜는 더는 옴짝달싹 못하게 하신 나의 연약함이다. 나는 이를 사랑한다. 바울이 우리에게 들려준 복음이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이를 여러 번 되뇌면 오늘의 답답함도 또는 비루함도 억울함도 분함도 실은 다 은혜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건하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 너희에 대하여는 우리가 명한 것을 너희가 행하고 또 행할 줄을 우리가 주 안에서 확신하노니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후 3:3-5).” 고로 오늘을 사는 일은 주의 은혜로 사는 것이고, 주의 일을 행함은 그리스도의 인내로 하는 일이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으로다. 나 같은 죄인을, 쓸모없이 버려져도 아까울 게 없는 자가 무얼 한들? 이를 들어 사용하시는 주가 행하실 것인데,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24:1).
이 놀라운 사실 앞에 나는 아멘, 한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출 19:5).” 이에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행 17:24-25).”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2-4).
주가 세우신 세계에서 주의 소유로 산다는 것의 안전과 평안함에 대하여,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대상 29:14).” 그러므로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4:10).”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수행하는 데 있어 주신 은사대로 함이다. 누가 스스로 여호와의 성산, 인생을 정복하겠다 할 수 있나? 숱한 철학자들의 궤변으로는 그 답을 찾을 길이 없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 7:1).” 하면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약 4:8).” 곧 하나님을 가까이 함은 내 곁에 이루시는 모든 것을 인정하는 일,
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 (셀라)
(5-6).
하여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것,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7).
나는 누구의 마음을 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문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하고 싶은 것이다. 그게 벽이 아니라 실은 닫힌 문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문을 열지 않으면 벽일 뿐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요 14:23).” 부디 어느 때에 우리가 같이 기도하며 주의 이름을 부르는 날이 오기를.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하면,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 (셀라)
(8-10).
이는 저가 지고 가는 그 고단한 삶을 멈추고, 주가 주시는 평안을 받아들이는 일로, 그 닫힌 문을 열어야 한다. 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46:10-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