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

전봉석 2022. 7. 26. 02:09

 

미가야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 하고

왕상 22:14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이시니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

시 28:7

 

 

북이스라엘의 아합 왕이 아람과의 2차 전쟁을 치른 뒤 3년 후인 B. C. 853년에 남유다 왕 여호사밧과 동맹하여 아람의 벤하닷과 다시 전쟁을 벌인다. 당시 아합과 여호사밧은 사돈을 맺고 친밀하게 지냈다. “아하시야가 아합의 집 길로 행하여 아합의 집과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니 그는 아합의 집의 사위가 되었음이러라(왕하 8:27).” 오늘 본문을 보면 여호사밧이 아합에게로 간 것을 볼 수 있다. 이때 아합은 남유다의 왕 여호사밧에게 라못을 치자고 선동한다. 이에 여호사밧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여 선지자들의 예언을 듣기를 원한다. “여호사밧이 또 이스라엘의 왕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먼저 여호와의 말씀이 어떠하신지 물어 보소서(왕상 22:5).”

 

그때 아합의 궁중에는 선지자 400명이 모여 있었다. 저들은 한결같이 아합의 이번 전쟁에서 승리할 것을 장담한다. 이를 성경에서 밝히는 대로 ‘거짓 영이 저들 입에 거짓을 넣어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심지어 저들은 아합의 승전을 예언하며, 철로 만든 뿔을 상징의 표로 내주기도 한다.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는 자기를 위하여 철로 뿔들을 만들어 가지고 말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왕이 이것들로 아람 사람을 찔러 진멸하리라 하셨다 하고 모든 선지자도 그와 같이 예언하여 이르기를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 승리를 얻으소서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넘기시리이다 하더라(11-12).” 저들은 결코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보다, 거짓 영의 뜻대로 행함이었다.

 

그러나 단 한 명, 선지자 미가야는 빠져 있었다. 저는 전쟁에서 아합이 죽을 것을 예언한다. 그러나 수적으로 다수에 밀려 대세를 꺾지 못했다(7-10). 저는 거짓 영으로 저들과 함께 승리를 예언하지만(13-15) 이것은 진실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의지는 조롱하듯 저들의 거짓 예언을 지적하려는 것이었다. 결국 아합은 아람과의 전쟁에서 미가야의 예언대로 죽는다.

 

그때나 지금이나 무서운 것은 ‘거짓 영의 영적인 통치’다. “미가야를 부르러 간 사신이 일러 이르되 선지자들의 말이 하나 같이 왕에게 길하게 하니 청하건대 당신의 말도 그들 중 한 사람의 말처럼 길하게 하소서(13).” 하며 귀띔할 정도로 모두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몰랐다. 그저 술수와 조작이 오늘에도 여전한 것 같이 그때도 다를 바 없었다. 듣기 좋은 말로 권면하고, 비위를 맞추는 일은 당장의 유익을 제공하는 것 같다. 한데 이는 결국 악의 세력이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의 술책이다. 좋은 게 좋은 것처럼 여러 생각이 이를 또 합리화하고 그럴듯하게 꾸민다. 자신마저 속이는 것이다.

 

바울은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3-4).” 곧 저들의 계략은 하나님의 진리와 빛을 가리는 일임을 경고한다. 그래서 어느 순간 청맹과니와 같이 눈 뜬 소경이 되거나 듣기는 들어도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진리에 귀머거리가 되게 한다.

 

예수님 당시 그러한 장애를 갖고 있던 사람들이 많이 예수님 앞으로 나오는 것을 고쳐주셨다. “그 때에 귀신 들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며 보게 된지라(마 12:22).” 병적인 상태보다 실제의 외식하는 자들의 거짓된 영이 문제였다.

 

어제는 마음이 어려웠다. 그럴 수 있겠다, 한 일이 그리 되었다. 누구에 대한 기대나 소망은 쓸모없는 것이다. 그냥 더 두고 ‘좋은 사이’로 시간을 더해볼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몇 주간 서로가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저가 어릴 때 잃어버린 예수를 알게 하고 싶었다. 그런 목적으로 만남을 시작한 것이다. 저는 이상하게(?) 허기진 영혼으로 살고 있었다. 자기 확신이 강한 삶이었다. 심지어 지난주에는 스스로 죽음조차 자신이 선택할 것이란 말을 했다. 그런 그에게 ‘글을 왜 쓰려고 하시는가?’ 하고 물었다. 그 질문과 함께 영혼의 갈급함을 스스로 알기를 원했다. 그러고 나면 둘 중 하나일 거였다. 십중팔구 그만두거나 돌이켜 주 앞에 바로 세워지거나.

 

아니나 다를까 저는 어제 아침, 학원 아이들 방학으로 오전에도 수업이 있어 못할 것 같다는 문자와 함께 실은 자신에게 그와 같은 갈급함이 없다고 답이 돌아왔다. 자신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던 것일까? 글방은 원하나 교회는 다들 거부한다. 글방 선생으로는 좋은데 목사로는 부담스러워한다. 현실에서 영혼의 문제로 나아가면 죄로 인한 회피본능이 앞서게 된다. 그래서도 자신을 직면하길 꺼려할 줄은 알았다. 앞서 기도하기를 주의 뜻이면 계속 할 수 있게, 그게 아니면 그만 접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다. 더는 못할 것 같다는 말에 나는 달리 덧붙일 말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보낸 나의 문자는, 어릴 때 잃어버린 주의 은총을 회복하길 바란다는 말이었다. 진심이었다. 저이는 어떻게, 무슨 이유로 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 교회를 떠났던 것을까? 친정엄마나 그 외 가족들은? 더 알고 싶었다. 함께 알아가고 싶었는데 어렵게 되었다. 내 몫이 아니었다. 한편으론 일을 망친 것 같은 자책도 들었다. 미안하고 안쓰러웠다. 마치 연애하던 사람처럼 마음이 어려워지기도 했다.  

 

사탄은 우리 영혼을 붙들면 놓지 않는다.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고후 11:3).” 이는 우리가 이성적인 판단이나 설득으로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12).” 그러므로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11).” 바울은 당부하였던 것이다.

 

본문에서도 당시 400명의 대다수 선지자들이 거짓의 영에 붙들려 그 입에 거짓을 달고 전하였다. 특히 상한 심령을 대하는 데 있어 저들에게 휘둘리면 헤어날 길이 없다. 누구를 대할 때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다. 진리로 저에게 다가가는 것을 사탄은 훼방한다. 그러나 우리의 사명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를 모든 말을 너는 마음으로 받으며 귀로 듣고 사로잡힌 네 민족에게로 가서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겔 3:10-11).” 전해야 한다.

 

특히 단 한 명의 성도가 절실한 교회에서, 나는 저를 인도하는 데 있어 어떤 소망이 있었다. 그리고 한 달여 간 두어 차례씩 마주하면서 저와 함께 기도로 시작하고 주의 사랑을 전하고 싶었다. 저가 왜 하나님을 등지고 사는지 묻고 싶었다. 그러다 행여 일을 그르칠까 하여 하루하루 미뤘던 것이 지난주에는 직설적으로 의문을 던진 것이다. 영혼의 갈급함을 알아채지 못하면 우리의 만남은 허사다. 굳이 만남이 의미가 없다. 그저 자기 허영을 위한 지적 충만을 채우는 데 동조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나님 없는 좋은 사이’는 오히려 무서운 관계로 발전할 수 있다. 하여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롬 1:24-25).” 곧 우리의 무기는 정직이다. 앞서 누가 글쓰기를 문의하면 나는 이를 먼저 강조한다. 더는 글방이 아니다. 그러나 신앙 안에서 글쓰기 만남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물론 대부분이 거절하지만, 저와의 만남도 처음 문자에서 나를 ‘목사님’으로 호칭하고, 어릴 때 믿었다는 것에 나는 혹시나 하는 기대를 걸었다. 뭔가 있겠다 하는 생각도 했던 모양이다.

 

가끔은 이 길이 참 외롭다. 그냥 좋은 게 좋은 사이로 지내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러다 보면 저로 주를 알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유혹도 든다. 그러나 그러기엔 또 우리의 막연함과 자부심이 거짓의 시간만 쌓아가는 셈이다. 더한다고 해서 나아질 것 같지 않으면 애초부터 아니다. 이 또한 겸손히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할 때가 온다. 그때마다 좌절감은 거듭되고, 아무리 거듭돼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늘 생소한 것처럼 마음을 어렵게 한다.

 

의인이 나를 칠지라도

은혜로 여기며

책망할지라도

머리의 기름 같이 여겨서

내 머리가 이를 거절하지 아니할지라

그들의 재난 중에도

내가 항상 기도하리로다

(141:5).

 

이와 같은 마음도 주가 주실 때 가능하다. 억울한 상황에서 맞대응하고 싸울 수 없다. 그래서도 안 되는 것이다. 저는 저의 잘못을 알지 못함이다. 한데 우리 또한 사람이라 그 속이 어찌 끌리고 홀릴 지 알 수 없다. 속이 볶이고 마음이 뒤집어질 때 아, 이건 아니구나! 하는 신호가 온다. 그럴 때 잠잠히 주만 바란다는 일,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

(62:1, 5).

 

그러니 돈을 바라는 것도 아니다. 사람을 얻고자 함도 아니다. 한 영혼의 일이다. 내가 나서서 무얼 어떻게 하려던 것이 아니다. 나는 할 수 없는 일을 하시는 게 주의 일이 아니실까? 오직 주가 보내신 이면,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길 바라는 것도 믿음으로다. 하나님은 그것으로 영광을 받으신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애 3:26).” 이게 참 증거다. 내 의지로 감당하지 못한다. 400명의 거짓 선지자들의 거짓된 영의 일을 성령으로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가. 자연스럽고 익숙한 현상이다. 그때에 정직히 왕 앞에 고할 수 있었던 미가야의 용기는 고로 성령이 주신 것이다. 거짓의 영이 저로 현혹시킬 수 없게 막으셨기 때문이다.

 

내 길을 굳게 정하사

주의 율례를 지키게 하소서

내가 주의 모든 계명에

주의할 때에는 부끄럽지 아니하리이다

(119:5-6).

 

결국 나를 붙드시고 흔들리지 않게 하심도 말씀밖에 없다. 사람에게 의지할 수 없다. 사람으로 위로를 얻을 수 없다. 세상이 아무리 그렇다 해도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1-12).” 오늘 미가야는 이를 알게 한다. 주의 뜻을 전하는 데 있어 거짓의 영에 붙들리면 속수무책이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온전히 전해야 한다. 설령 죽음이 닥친다 해도 말이다. “만일 선지자가 유혹을 받고 말을 하면 나 여호와가 그 선지자를 유혹을 받게 하였음이거니와 내가 손을 펴서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그를 멸할 것이라(겔 14:9).” 오늘 시편은 이를 아심으로 나의 마음을 위로하시는가.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다.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저에게 위하여 기도할 것을 약속하였다. 언젠가는 잃어버린 주의 은총을 회복하는 날이 오기를. 더는 어쩔 수 없는 지점에서,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나의 반석이여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까 하나이다

(28:1).

 

가끔은 이와 같은 마음을 누구에게 털어놓고 싶다. 하지만 돌아오는 말은 상처뿐이다. 누구를 붙들고 이야기한들, 구구한 변명도 저의 비판도 안 된다. 이어져 마음만 상한다. 가만히 주께만 고하는 것일 뿐,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이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떠올라 네 어둠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사 58:9-11).”

 

말씀이 약속하시는 바를 바랄 뿐이다. 그러므로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 5:14).” 이번 우리의 만남이 결코 헛되이 그냥 스쳐간 시간은 아닐 것이다. 언제가 주께로 돌아서야 하는 자녀이면 오늘 이 짧았던 시간이 저의 영혼에 작은 불씨가 될 것을 믿는다. 이는,

 

내가 주의 지성소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2).

 

곧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래서도 기도뿐이다. 지금의 이 울적한 심정으로 주를 생각함이 간구다. “그러므로 주께서 그들을 대적의 손에 넘기사 그들이 곤고를 당하게 하시매 그들이 환난을 당하여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하늘에서 들으시고 주의 크신 긍휼로 그들에게 구원자들을 주어 그들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거늘(느 9:27).” 마침 친구가 다 저녁에 연락이 와서, 오늘 새벽에 일찍 낚시를 간다. 앞서 말씀을 먼저 끌어당기고 주께 고한다. 나의 영혼을 위로하심이 부디 저의 영혼에게도 들려지기를. 주의 인자하심을 알게 하시기를. 세상이 온통 이상하다 해도,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딛 1:16).”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약 3:10).” 하면,

 

여호와를 찬송함이여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심이로다

(6).

 

내 안에 두시는 믿음은 주의 것이다. 값없이 주신 선물이다. 저이 또한 일찍이 어릴 때부터 믿고 다녔던 그 시간이 부디 헛되지 않을 것을 믿으며….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 더는 이 믿음 잃지 않고 살기를. 돌이켜 내가 얼마나 오랜 시간을 완고하게 주를 멀리하며 살았었는지를 돌아보며. 이처럼 마음이 어렵고 답답한 것이 나에게는 은총인 것을 확신한다.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 1:12).”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이시니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

여호와는 그들의 힘이시요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의

구원의 요새이시로다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며

주의 산업에 복을 주시고

또 그들의 목자가 되시어 영원토록

그들을 인도하소서

(7-9).

 

그러므로 오늘 시편을 되새기며,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사 26:3).” 이는,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55:2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