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건너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나를 네게서 데려감을 당하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지를 구하라 엘리사가 이르되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 하는지라
왕하 2:9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라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시 30:4-5
북이스라엘의 영적 회복을 감당하던 엘리야가 주의 부르심으로 바람에 싸여 올라간다. 이때 그의 제자 엘리사는 갑절의 영감을 구한다. 바알의 종교와 일생 다투었던 엘리야의 사역은 여호와 신앙이 유일함을 알린다. 그 신앙 유무에 따라 결과가 어떠한지를 1장의 아하시야 왕의 결국과 대조를 보인다. 특히 엘리야의 승천은 에녹 이후 초자연적 사건이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 5:24).”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의 모형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히 4:14).” 곧 우리가 누리게 될 부활과 승천의 예표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고전 5:51).”
이는 우리에 관한 이야기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살전 4:13).” 곧 우리가 죽는다는 일은 소멸이 아니다.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14).” 곧 우리도 예수의 부활과 같이 살 것이다. 곧 때가 이르면 산 자도 죽은 자도 주의 강림과 함께 할 것이다.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15).” 곧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앞서고 오늘 살아 있는 우리들도 그 뒤를 따를 것이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16-17).” 그러므로 죽음은 슬픔이 전부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18).”
오늘 본문에서는 주가 오라 하시는 때까지 우리의 사역은 쉬지 않는다. 지혜자의 말이기도 하다. “네 손이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스올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전 9:10).” 그러므로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요 9:4).” 일할 수 있을 때 주의 일을 성실히 감당하는 것이 복이다. 그러하여 바울은 스스로 일러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전 4:6-7).” 저는 죽기까지 선한 싸움을 위하여 달려갔다. 이는 그저 주어진 삶을 성실히 사는 데 급급하였던 게 아니다. 그 너머 우리의 본래 예비된 삶을 준비하는 것이었는데,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8).” 곧 우리 일생이 리허설이라면 본 공연은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다.
오늘과 같이 혼탁한 때에 나의 다음 생을 준비해야 한다. 부지런히 살펴 신앙을 이어갈 이에게 심혈을 기울야야 한다. 이는 내가 붙들고 선별하여 정하는 게 아니라 주가 내게 이르신, ‘내 양을 먹이라.’ 하실 때, 저가 곧 주의 것임을 아는 일이다. 오늘 1절 본문에 보면, “여호와께서 회오리 바람으로 엘리야를 하늘로 올리고자 하실 때에 엘리야가 엘리사와 더불어 길갈에서 나가더니” 길갈에는 하나님의 선지 학교가 있었다. “엘리사가 다시 길갈에 이르니 그 땅에 흉년이 들었는데 선지자의 제자들이 엘리사의 앞에 앉은지라 엘리사가 자기 사환에게 이르되 큰 솥을 걸고 선지자의 제자들을 위하여 국을 끓이라 하매(4:38).” 엘리야는 선지 학교를 세우고 이와 같은 곳이 길갈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3절에 보면 벧엘에도 있었고, “벧엘에 있는 선지자의 제자들이 엘리사에게로 나아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 당신의 선생을 당신의 머리 위로 데려가실 줄을 아시나이까 하니 이르되 나도 또한 아노니 너희는 잠잠하라 하니라.” 5절에는 여리고에도 있었다. “여리고에 있는 선지자의 제자들이 엘리사에게 나아와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 당신의 선생을 당신의 머리 위로 데려가실 줄을 아시나이까 하니 엘리사가 이르되 나도 아노니 너희는 잠잠하라.” 또한 그 숫자도 적지 않았다. “그 사환이 이르되 내가 어찌 이것을 백 명에게 주겠나이까 하나 엘리사는 또 이르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그들이 먹고 남으리라 하셨느니라(4:43).” 곧 이를 통해 후학들을 양성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선지자의 제자들이 엘리사에게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당신과 함께 거주하는 이 곳이 우리에게는 좁으니 우리가 요단으로 가서 거기서 각각 한 재목을 가져다가 그 곳에 우리가 거주할 처소를 세우사이다 하니 엘리사가 이르되 가라 하는지라(6:1-2).”
이와 같이 주의 일을 감당하는 데 있어 제자 삼는 일은 교회의 사명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9-20).” 이는 서로가 부탁하여 주의 뜻을 이루어감으로 천국을 확장하는 일이다.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딤후 2:2).”
곧 또 주가 원하시면 어디든 가야 한다. 이때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7).” 자기 십자가를 지라 하심은 주신 바 그 삶을 다하며 맡기신 모든 게 주의 뜻임을 알게 하신다. 자녀이든 제자이든 교회에서 얻는 모든 만남은 영광도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하는 사이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7).” 한데 점점 성도 간의 교제가 어려운 것은 각자 자기 일에만 함몰되어 사는 까닭이다. ‘내 문제’에 몰입하여 남의 일에는 관심도 없고, 누구의 간섭도 바라지 않는 시대를 사는 것 같다.
누구의 기도 부탁을 받을 때 보면 저마다 자기 이야기에 급급하다. 심지어 안부를 묻거나 교회는 어떠한지를 알고자 하지 않는다. 함께 나눠지려 하지는 않고 자기 문제로만 전전긍긍하기 때문이다. 구구절절 누구의 글에 대해 나는 답하면서 먼저는 주일 성수의 중요함과 믿는 자와의 교제가 얼마나 중요한지. 다음은 자기 문제로 온통 기도가 집중하는 것보다 남을 위하는 중보가 얼마나 유용한지를. 최소한 이것으로도 자기 문제에서 놓여날 수 있다. 마치 거기에 코 박고 아무 것도 볼 수 없다고 원망하는 것 같다. 당연하지, 하다못해 숲에 가서 한 나무에 너무 가까이 가서 이마를 대고는 다른 길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과 같다. 저의 문제는 늘 저로 인한 것임을 아무리 강조해도 온통 신경이 거기에만 있다. 그러니 저는 한 번도 나의 안부나 교회의 사정은 묻지도 않는다. 남의 일은 안중에 없고 자기 일에 함몰된 자의 전형이다.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덴 그런 이유로가 아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 그럴 때 우린 비로소 기다림도 익혀간다. 코 박고 자기 문제에 몰두한 자는 할 수 없는 것이 잠잠히 주를 바람이다. 엘리야의 죽음을 걱정하는 선지 생도들에게 엘리사는 그때마다 말한다. ‘잠잠하라.’ “이르되 나도 또한 아노니 너희는 잠잠하라 하니라(3).” 우리가 살며 사랑하며 신앙 가운데 거한다는 것은,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
…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
(62:1, 5).
이는 결코 아무나 저절로 그리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애 3:26).” 잠잠하다는 것은 아무런 동요나 관심도 없다는 게 아니라, 그와 같이 어지러울 때에 주를 바람으로, 곧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라 하신 그 말씀을 삶으로 지켜가는 일이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 3:17).” 이는 마치 도제의 연마와 수련과 같다. 가르침에 복종하고 이를 배우며 익히는 일이다.
실은 애나 어른이나 요즘은 이런 일에 어려움을 겪는다. 뭐라 이르면 자신도 다 안다, 하고 누구의 말도 원치 않는다. 특히 충고나 쓴소리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점점 줄어간다. 아무리 가깝고 오랜 시간을 같이 했다 해도 뭐라 일러 그 문제의 핵심을 저의 그릇됨에서 찾으면 그와 같은 지적이나 충고를 마치 적대감으로 받기 일쑤다. 그저 모두가 자기를 위해주기만을 바란다. 그런 자는 도제가 될 수 없다. 제자의 길을 걸을 수 없다.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함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까닭이니이다
(39:9).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42:5).
단지 지식을 전달하고 기술을 전수하는 일에는 당장의 실용적인 관계로서 서로가 가능한지 모르나 그 삶과 영혼의 문제에 대해서는 일체 원하지 않는다. 거룩한 소망은 열심 있는 간구로 가능하고, 이는 어떤 간섭과 주관도 스스로 원하는 것이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 8:17).” 이 일이 어찌 저절로 혼자 있는데 뚝딱, 생겨나는 것이겠나? 나눔이 없는 삶은 고이고 섞이지 않는 물은 썩는다. 보를 만들고 물을 담아두면 당연히 이끼가 끼고 고인 물은 섞는 게 원칙이다. 물은 흐름으로 생명을 유지하고, 모든 물은 흩어졌다가도 서로 합류하여 바다로 향해 가야 한다. 하물며 우리 신앙일까?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145:18).
가까이 한다는 건 어찌됐든 불편한 일이다. 알게 모르게 섞이고 공유해야 하는 게 는다. 하지만 현대교회는 점점 비대해지고 개척교회를 꺼려하는 것은 ‘친절한 타인’으로 적당한 거리두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친하되 보이는 것만 보고, 더는 알려 하지 않는 게 예의가 되었다. 성도 간의 교제도 저가 무슨 일로 어려움을 겪는지 서로가 내보이길 꺼려한다. 흉이 될까 하는 것인데, 이제는 낭만이 되어버린 교회의 교제다. 어릴 적 교인들 간에 숟가락이 몇 개인지도 다 알 정도로 서로의 살림을 챙기고 나누고 하나 되어 교회가 집보다 가깝고 편했던 시절이 있었다. 비록 가난한 교회였으나 요즘처럼 무더운 날이면 교회 마당 처마 밑에 모기장 하나만 치면 삼삼오오 모여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자기도 했던 것 같다. 그때 내 기억으로 늘 학교 끝나면 교회로 올라와 기도하다 그처럼 교회 의자에서 또는 마당에서 잠들곤 하였던 형님들 서넛이 모두가 목사가 되어 주의 길을 가는 소식을 들었다.
서로의 어둠이 서로의 밝음을 더해준다. “사람이 여러 해를 살면 항상 즐거워할지로다 그러나 캄캄한 날들이 많으리니 그 날들을 생각할지로다 다가올 일은 다 헛되도다(전 11:8).” 오늘 본문에서 나는 엘리야의 승천도 그에 따른 불가사의한 기적도 놀랍지만 저를 따르는 엘리사나 그 외 많은 제자들의 삶이 복이 있다. 이는 함께 하는 것으로,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약 4:15-16).” 곧 서로가 하나 되는 데 있어 누가 어떠한가, 하는 부분은 어리석을 따름이다.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 2:6).”
아니면 언제 어디서 세상 구습을 좇을지 알 수 없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2-24).” 이를 위해서도 나에게는 너가 필요하고 너와 나에게는 우리가 필요하다. 서로를 위하고 사랑하는 만큼 그 속 이야기는 물론 뭐라 이르는 말에도 신중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럴 때,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약 1:21).” 받는다 함은 내가 쥔 것을 놓음으로 곧 듣고자 하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듣지 않으려는 자의 특징은 하나 같이 자기 말에 빠져 있다. 솔직히 남의 일에 관심이 없는 자는 스스로 잘 사는 것 같으나 누구보다 외롭다. 저의 행복은 허깨비 같다. 그러므로 서로가 하나 될 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아뢴다는 것과 지킨다는 것, 이는 홀로 이루어가는 수도사의 길이 아니다. 부대끼고 다치고 마음이 상하면서도 서로가 서로를 위할 때… 나는 오늘 본문에서 엘리야가 엘리사를 엘리사가 여러 선지생도들을,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음을 주목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 13:7-8). 하여,
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끌어내사 내 원수로 하여금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
(30:1).
시편은 늘 그 중심을 잡아준다. 오늘 우리의 만남이, 서로에게 묻는 안부가, 인사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근원이 된다. “여호와께서 이 일을 행하셨으니 하늘아 노래할지어다 땅의 깊은 곳들아 높이 부를지어다 산들아 숲과 그 가운데의 모든 나무들아 소리내어 노래할지어다 여호와께서 야곱을 구속하셨으니 이스라엘 중에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실 것임이로다(사 44:23).” 산과 숲은 나무 혼자, 바위 하나가 덩그러니 놓인 게 아니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
(2-3).
이는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는 일이다.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 지체하지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단 9:19).” 그러므로 우리,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
(79:9).
우리, 나와 너와 함께 하는 우리가 서로를 위하여 자신의 떡을 나눈다.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왕상 17:13).” 그러할 때에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14).” 곧 덜어주어 나눈 것 같은데 더 차고 넘치는 역사가 있다. 혼자 자기만을 위하는 사람치고 넉넉함을 누리는 사람은 없다. 설령 저가 갑부라 해도 요즘 말로 부자거지가 많다. 가진 것은 많은데 쓸 수 있는 게 없는…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라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4-6).
엊그제도 남의 간증에 시큰둥한 친구에게 저의 메마른 영혼을 위해 기도하겠노라, 하였다. 내가 알기로는 누구보다 간증이 많고 감사할 게 넘치는데 저는 입을 삐쭉거리며 그런 나의 말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이유는 자기 사는 데 급급해서다. 그리 말해주었다. 자신의 행복, 돈벌이, 노후걱정, 그러한 생계유지가 저에게는 늘 우선이다. 그만하면 충분한데 저는 항상 모자람을 두고 채워도 끝이 없다. 이는 곁에 있는 정작 어려운 이에게 마음을 주지 못하는 이유에서다. 간증이 없는 신앙은 황량할 뿐이다. 막연한 감사는 입바른 소리만큼 공허할 따름이다. 해놓고도 스스로 민망한 말이다. 성경은 일러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보일 것도 보려 하는 것도 없이 교회를 다니고 성도 간의 교제를 나누려고 하니, 누구의 간증이 듣기 싫을밖에.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이와 같은 신앙고백 하나쯤 가지지 못하고 사는 사람이면 그 신앙이 밍밍할 따름이다.
여호와여 주의 은혜로
나를 산 같이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7).
이와 같이 주 앞에 예민하고 갈구함이 없는 신앙이면 당연히 고비사막보다 메마른 영혼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과연 나에게 주님은 어떤 분이신지.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과 그 기업에 남은 자의 허물을 사유하시며 인애를 기뻐하시므로 진노를 오래 품지 아니하시나이다(미 7:18).” 자신의 죄와 허물을 마주하면 할수록 주의 은혜와 은총은 한결같으시며 무궁하심을 알 수 있다. “우리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대상 29:13-14).”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고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진토가 어떻게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
여호와여 들으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를 돕는 자가 되소서 하였나이다
(8-10).
오늘 시편은 오늘의 기도로 내가 주께 바라는 것을 알게 한다. 곧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7-8).” 아, 이 신앙의 고백이 내 것이 되기를. 나의 남은 생이 온전히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0-21).” 하면,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이는 잠잠하지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11-12).
세상 돼도 않는 일에 전념하다 인생 다 가고 황혼에 석양을 바라보며 후회한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대하 7:14).” 날마다 주의 이름을 부르며 주 앞에 바로 서기를. 하여 나와 내 곁에 두시는 이가 함께 할 것은,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사 55: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