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
이것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작은 일이라 여호와께서 모압 사람도 당신의 손에 넘기시리니 당신들이 모든 견고한 성읍과 모든 아름다운 성읍을 치고 모든 좋은 나무를 베고 모든 샘을 메우고 돌로 모든 좋은 밭을 헐리이다 하더니 아침이 되어 소제 드릴 때에 물이 에돔 쪽에서부터 흘러와 그 땅에 가득하였더라
왕하 3:18-20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진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하게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
시 31:23-24
북이스라엘 9대 왕 여호람이 아합이 죽고 그의 아들이 없음으로 왕위를 이어 12년을 통치하였다. 그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아비가 만든 바알 주상을 제거하였다. 그러나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했다. 비록 국시(國是)로 내 건 바알 신상을 없앴지만 여로보암의 금송아지 숭배는 떠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조만간 예후의 손에 죽임을 당한다(9:17-26).
한편 여호람은 아합이 죽자 이스라엘을 배반한 모압을 징벌하는데 남유다와 에돔과 함께 3국이 연합군을 결성한다. 이렇게 결성된 연합군은 7일째 되면서 물이 떨어져 곤경에 처하고, 선지자 엘리사를 찾아 도움을 청한다. 이 일로 골짜기에 개울을 파게 하고 하나님의 권능으로 물이 채워진다. 일련의 과정은 서로 얽히고설킨 정략적인 관계를 볼 수 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기적이 일어나고 연합군은 모합을 크게 이긴다.
식수가 떨어져 진퇴양란에 빠졌을 때, 엘리사는 저들의 부탁을 거절하였다.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의 부친의 선지자들과 당신의 모친의 선지자들에게로 가소서 하니 이스라엘 왕이 그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여호와께서 이 세 왕을 불러 모아 모압의 손에 넘기려 하시나이다 하니라(13).” 엘리사는 여호람을 향해 분노한다. 저는 선지자를 죽이고 바알과 아세라 우상들의 선지자에게서 도움을 청하라고 한다. 이는 하나님을 업신여긴 오므리 왕조에 대한 분노였다. 여호람은 아합과 같이 바알을 숭상하지는 않았다. 그 주상을 제거하기까지 하였다. 그렇다고 여호와를 경외한 것은 아니다.
불의에 대한 분노는 정당하다. 성경은 엄연히 분노를 금하고 있지만(잠 15:18, 19:19, 전 7:9, 마 5:22, 약 1:19), 단 한 가지 이유로 분노를 발해야 하는 것에는 일치한다. 이는 불의에 대한 것으로 주를 업신여기는 데 따른 것이다. 바울은 이 부분에서 자신의 내적갈등에 대해서도 분노하며 서술한 바 있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롬 7:23).” 물론 아테네에 갔을 때 온 성이 우상들로 가득한 것을 보고도 분노하였다.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행 17:16).”
하나님을 금수와 버러지 형상으로 만들어 섬기는 무지에 대해 분노한 것이다.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2-23).” 그 지경으로 만든 것은 사탄이고 저를 두고 우리 또한 분노해야 하는 것이다.
사무엘도 사울의 불의 앞에서 분노하였다.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행하였나이까(삼상 15:19).” 하고 덧붙여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22-23).”
예수님도 유대인들의 완악함에 분노하셨다.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막 3:5).” 곧 우린 사악함에 대해 곧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업신여기는 것에 대해 분노해야 한다. 개인의 허물이나 상대의 실수를 두고 하는 분노가 아니다. 모세의 분노가 그 대표적이다. “진에 가까이 이르러 그 송아지와 그 춤 추는 것들을 보고 크게 노하여 손에서 그 판들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리니라(출 32:19).”
우린 누구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우선해야 한다. 오늘 본문 14절에 “엘리사가 이르되 내가 섬기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만일 유다의 왕 여호사밧의 얼굴을 봄이 아니면 그 앞에서 당신을 향하지도 아니하고 보지도 아니하였으리이다.” 여기서 보면 엘리사는 유다 왕 여호사밧을 보고 저들의 부름에 응한 것을 분명히 한다. 여호사밧은 하나님을 잘 아는 자로 바울의 표현처럼,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갈 4:9).” 하나님을 잘 안다면 더는 죄의 종노릇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남다른 존재임을 명심하게 한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우린 하나님을 안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7).”
그럼에도 주님은 우릴 친구라 표현하시며 친근감을 표현하신다.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15:14-15).”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당연히 불의를 떠나는 게 맞다.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딤후 2:19).”
이에 우린 마음의 평안을 얻고 선한 삶의 열매를 생산한다. 오늘 본문 15-16절, “이제 내게로 거문고 탈 자를 불러오소서 하니라 거문고 타는 자가 거문고를 탈 때에 여호와의 손이 엘리사 위에 있더니 그가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이 골짜기에 개천을 많이 파라 하셨나이다.” 그 와중에 평안이 있고, 평안한 중에 주의 말씀이 임하는 것을 본다. 가령 사울의 악령을 다윗의 수금으로 연주하여 다스리기도 하였다.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이를 때에 다윗이 수금을 들고 와서 손으로 탄즉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령이 그에게서 떠나더라(삼상 16:23).”
훅, 하고 이는 감정이 악한 영이 다스리는 일이다. 여기에 주가 주시는 평안으로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일은 매우 값지다. 한 사람의 생활은 그 사람의 마음의 열매다. 마음이 불안정할 때 불신앙이 일고 불신앙은 탐심과 악독과 분노와 걱정과 근심을 끌어들인다. 이에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1-3).” 곧 우리의 평안은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시는 증거다. 격노해야 할 때가 있으나 우리의 일상은 늘 주 안에서 평안해야 한다. 비록 삶은 요동치고, 격변하는 사회에서 격랑에 휘말리기 십상이나 주를 의뢰함으로 이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125:1).
곧 “입술의 열매를 창조하는 자 여호와가 말하노라 먼 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 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내가 그를 고치리라 하셨느니라(사 57:19).” 오직 주만이 우리로 평강하게 하신다. “그러나 악인은 평온함을 얻지 못하고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구쳐 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20).” 하여 저들에게는 평안이 없다.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21).” 그러므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이를 위하여 성경이 제시하는 방법은 ‘깨어 기도하라’는 것,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딤전 2:8).” 예수님도 이르시기를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마 26:41).” 우린 마음먹는다고 이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말로는 뭔들 못할까?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려면 믿음의 수고와 인내가 필요하다. 오늘 본문 16절에 이어 17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너희가 바람도 보지 못하고 비도 보지 못하되 이 골짜기에 물이 가득하여 너희와 너희 가축과 짐승이 마시리라 하셨나이다.” 곧 주가 행하심은 우리의 믿고 맡김으로 성취된다.
우리가 산골짜기에 개울을 파고 말씀을 따라 그와 같은 수고를 행하나 그 일을 이루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지혜자는 곧 의인의 수고와 악인의 결과가 어찌 다른가를 말해준다. “의인의 수고는 생명에 이르고 악인의 소득은 죄에 이르느니라(잠 10:16).” 바울은 이어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8).”
나는 마음이 심란하여 일찍 설교원고를 작성하였고, 누구의 사연을 두고 씨름하기보다 말씀을 찾고 이를 이어가는 데 열중하게 되었다. 다들 들어보면 어떤 문제에도 그럴 수밖에 없는 사연과 이유는 수만 가지다. 이를 가지고 따지고 묻고 뭐라 한들 저들도 별 수 없는 일이라서, 차라리 말하기를 멈추고 말씀 앞에 앉는다. 누구의 일로 마음 쓰며 공연히 어려워하기보다, 이처럼 나의 일과는 더, 더 일찍 일어나 아무도 없는 새벽 시간에 주 앞에 세운다. 내가 씨름하여 당해낼 수 있는 현실이 아니다. 다들 저마다의 잘난 맛에 산다. 뭐라 이르려다보면 쓸데없이 감정이 소모되고 그런다고 저들 또한 듣고 바뀌는 것도 아니다. 그러느니 나는 ‘아픈 아이’를 다독이고 훈계하여 말씀을 쓰는 일에 우선하기를 강조한다. 그럼 잘난 사람 수십 명보다 저 아이의 순종이 훨씬 마음을 안정시킨다. 우린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뤄야 한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가만보면 안다, 가졌다, 능력이 있다 하는 자들이 주로 완고하다. 저들과 대화하려다 지레 내 속이 타들어가는 것을 느낀다.
작은 일에 충성한다는 것, 오늘 18-20절을 보면 “이것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작은 일이라 여호와께서 모압 사람도 당신의 손에 넘기시리니 당신들이 모든 견고한 성읍과 모든 아름다운 성읍을 치고 모든 좋은 나무를 베고 모든 샘을 메우고 돌로 모든 좋은 밭을 헐리이다 하더니 아침이 되어 소제 드릴 때에 물이 에돔 쪽에서부터 흘러와 그 땅에 가득하였더라.” 이처럼 가만히 주의 말씀을 따르는 일,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6).” 일찍이 저들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작은 자가 천 명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사 60:22).”
어떤 어려움에 봉착할 때마다 나는 오히려 주를 의뢰하는 훈련을 받는 것 같다. 백 날 같은 소릴 해봐야 소용이 없는 사람 앞에서 진이 빠져 기진하느니, 전하고 들려주는 것으로 나의 기대나 희망은 빼낸다. 전적인 저의 선택이다. 스스로들 옳다 하는 데는 뭐라 한들 들을 리 없다. 그 선택의 몫은 오롯이 저의 것이다. 내가 대신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나 하나 내 스스로 건사 못하는 게 사람이다. 예수님은 비유로 이르시기를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마 13:31-32).”
이 보잘것없는 묵상 글쓰기로 나는 하루의 구심점을 삼는다. 교회로 나아가 다시 교정을 보며 읽는다. 어디 병원이나 누굴 기다리면서 다시 읽는다. 이를 모아 한 주간 정리하여 설교원고로 작성한다. 그러느라 누구와의 약속도 만남도 피한다. 이 시간이 우선이다. 누가 읽는 것도 아니고, 어떤 목적으로 쓰는 것도 아니다. 그저 나는 주를 더 잘 알기를 바란다. 아니, 나의 간절함은 나의 절박함과 비례한다. 어떤 일에 내 속을 내가 다스릴 수 없어 정신과 약을 처방 받아 먹어야 하면서 누가 누굴 걱정하고 위한다고 하는 것인지. 한데 이와 같은 질그릇에 이 귀한 보화를 담으신 이가 이 모든 상황을 아신다. 하면 나의 절박함이나 간절함이나 모두 주의 것이다. 주를 더욱 찾고자 하려 내게 두신 은혜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하신 말씀이 내 것으로도 여겨진다.
사람에게 휘둘리지 않기 위해, 특히 내 자신의 감정으로 소모되는 일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도 나는 주를 바란다.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눅 19:17).” 어느 훗날 주 앞에 섰을 때를 부디 이와 같은 날들이 주 앞에 잘하였다, 칭찬이 되기를 상상하기도 한다. 오늘은 가망이 없다 해도 그 오늘, 이 하루를 또한 성실하게 마주하면서. 누구에게 공들여 애쓴다고 애썼는데, 하고 저에게 실망하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 사이란 참 부질없는 것일 뿐이다. 누구보다 나는 새로 누굴 만나고 또는 저가 돌아가는 일에 있어 익숙해지질 않는다. 한 번 정을 주면 이를 또 고집처럼 붙들고 유지하려 드는 나의 습성이 나로 병들게 하는 것도 안다. 때론 저의 불의에 대해서도 침묵할 정도로 말이다. 나의 이 고질적인, 병적인 성향을 두고서도 나는 절실함으로 이 시간을 사랑한다. 주 앞에 앉히지 않으면 내가 죽겠으니까. 주의 사랑을 잊지 않으려, 어디에 흘리고 잃지 않으려, 무엇과도 바꾸지 않으려, 나는 필사적으로 이 시간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1-3).”
이를 오늘 시편으로 다시 되새기면,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영원히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주의 공의로 나를 건지소서
(31:1).
그렇듯 나의 이 시간은 주께 피하는 것이다. 다른 무엇으로 채우고 더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세상을 피해 어디로 숨을 수 있단 말인가. 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으면…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행 13:22).” 그와 같았던 다윗을 봐도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10:22).” 누구의 불편이 되고 멀리하는 자가 된다 해도 주께로만 가까이 설 수 있다면,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7).” 어떤 어려움, 뜻하지 않는 고난과 비난도 달게 받는 것이니, “아무도 이 여러 환난 중에 흔들리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위하여 세움 받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알리라(살전 3:3).”
나에겐 이를 위한 묵상으로 누굴 위한 글쓰기도 어떤 다른 계획을 가지고 쓰는 글도 아니다. 오직,
내게 귀를 기울여 속히 건지시고
내게 견고한 바위와 구원하는 산성이 되소서
(2).
주만 들으시고 주가 응답하심으로 나의 산성이시면 된다. 다들 분주하게 어떤 모임을 좇아다니고 누구와의 친분을 귀히 여기며, 사회성이 어떻고 현대사회는 어떻고 하지만, 그게 다 부질없었다. 나야말로 사람 참 좋아하던 사람이지 않았던가? 저들과의 관계에서 인정받기 원하고 그 사이에서 존재감을 느끼고 만족감도 더하면서… 그런데 그게 다 헛것이라. 돌아보고 둘러보면 내가 지나온 시간에서나 저들 사이를 봐도 좋을 때나 좋은 것이고, 서로의 짐을 대신 짊어지고 갈 사람은 없다. 바울은 이에 자신의 환난에 대하여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그뿐 아니라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엡 3:13).” 오늘의 환난이 영광이었다. 이는,
주는 나의 반석과 산성이시니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생각하셔서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
그들이 나를 위하여
비밀히 친 그물에서 빼내소서
주는 나의 산성이시니이다
(3-4).
이와 같은 고백을 자신의 것으로 가지고 살 수 있다는 것은,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잠 16:3).” 또한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벧전 4:19).” 그러므로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37:5-6).
이에, 오늘 시편은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속량하셨나이다
내가 허탄한 거짓을 숭상하는 자들을 미워하고
여호와를 의지하나이다
내가 주의 인자하심을 기뻐하며
즐거워할 것은 주께서 나의 고난을 보시고
환난 중에 있는 내 영혼을 아셨으며
나를 원수의 수중에 가두지 아니하셨고
내 발을 넓은 곳에 세우셨음이니이다
(5-8).
이와 같은 고백은 삶의 체험에서 나온다. 날마다의 은총으로 맛본다. 하여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너희 마음을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전 3:12-13).” 하여 나는 주께 토로한다. 아뢰고 고하며 간절히 구한다.
여호와여 내가 고통 중에 있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근심 때문에 눈과 영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
내 일생을 슬픔으로 보내며
나의 연수를 탄식으로 보냄이여
내 기력이 나의 죄악 때문에 약하여지며
나의 뼈가 쇠하도소이다
…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9-10, 14).
삶은 언제나 변덕스러워서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잠 15:13).” 누가 나를 알아주겠나? 오직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그러므로
나의 앞날이 주의 손에 있사오니
내 원수들과 나를 핍박하는 자들의 손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추시고
주의 사랑하심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15-16).
이른 아침, 시편을 소리 내어 읽으면서 그 자체로 기도가 되고 찬성이 되고 나의 신앙고백이 되는 것을 나는 사랑한다. 그리하여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사 2:22).” 별로 사는 데 급급하지 않고, 사람에게 사랑을 구애하는 데 연연하지 않으며, 누구의 관심도 인정에도 크게 동요되지 않는 것은,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8-10).”
감히 인생을 초월하고 산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점점 비례하여 주를 의뢰함으로 초연할 수는 있겠다. 그래서도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18).” 나 역시 그럴 수 있겠다는, 주의 권능을 바라게 되는 것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불렀사오니
나를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악인들을 부끄럽게 하사
스올에서 잠잠하게 하소서
(17).
이는,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주께서 그들을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말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
(19-20).
사는 데 드는 비용이 어디 돈으로만 해결되겠나? 그러느라 건강도 해치고 시간도 허비하면서 나름은 애써 산다고 살지만, 주의 은혜가 아니면 모든 게 다 허사일 뿐인데….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이로써 나는 복 있는 자였다. 고로,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견고한 성에서
그의 놀라운 사랑을 내게 보이셨음이로다
내가 놀라서 말하기를
주의 목전에서 끊어졌다 하였사오나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셨나이다
(21-22).
이는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내 안에 두신 오늘의 이 복을 주가 시작하신 것이면 주가 끝까지 이루실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곧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4:19).” 이에,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진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하게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
(23-2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