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01편 / 완전한 길 -거듭남의 길
220807 주일
시편 101편
완전한 길 -거듭남의 길
시 101:1 [다윗의 시] 내가 인자와 정의를 노래하겠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찬양하리이다
시 101:2 내가 완전한 길을 주목하오리니 주께서 어느 때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 내가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 안에서 행하리이다
시 101:3 나는 비천한 것을 내 눈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이요 배교자들의 행위를 내가 미워하오리니 나는 그 어느 것도 붙들지 아니하리이다
들어가는 말
오늘 시편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삶을 제시한다. 세상 누구도 완전할 수 없고, 이를 위해 완전한 마음을 가지고 행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다윗은 그 완전한 길, 인자와 정의의 길을 주목하고 그리하여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 안에서’ 행하겠다고 한다. 순간 우린 저의 과오를 생각한다. 물론 저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 인정하심을 받았다. 그러나 51편에서 저의 참회를 들어보면,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2-3).” 하고 고백한다. 그런 그가 완전한 길을 주목하겠다함은 어떤 의미일까?
완전한 길은 인자와 정의의 길이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의미한다. 저는 그 완전한 길을 주목함으로 완전한 마음으로 행하겠다고 다짐한다. 주어진 상황에서 말이다. 오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 앞서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를 연계하였다.
요한은 니고데모를 바라새파라 소개한다. 율법적으로 완전을 도모하는 사람들이 바리새인이다. 더욱이 저는 유대인의 지도자였다. 그런 자가 남의 눈을 피해 예수님을 찾아왔다(요 3: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밤 시간에 온 것으로 이를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주를 부르길,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고 의외의 말을 한다. 은연중에 ‘우리’라는 표현 가운데 자신을 감추기는 했지만, 추측컨대 저는 유대지도자로 예수님보다 나이도 많았을 것이다. 사회적 위치도 비교가 안 될 정도다. 그런 자가 청년 예수를 찾아온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비로소 그 속셈이 드러난다. 저에게는 ‘이 표적’이 기이하였던 것이다. 눈 먼 자의 눈을 뜨게 하고,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문둥병자를 낫게 하고, 귀신들린 자를 고치고, 성난 파도도 잔잔케 하신다는 소문을 듣거나 목격하였다. 물론 사람이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도 알지만 그런 생각으로 교회를 다니고 예수를 믿는 성도들도 많다. 그래서 간증이 주는 역기능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누가 기도해서 무슨 기적을 얻었다, 하는 데 사람들은 온통 관심이 쏠린다. 정작 하나님이신 예수는 알아보지 못하고 말이다. 그런 그에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 대체 이 무슨 말씀인가? ‘거듭남-중생’은 사람이 나고 죽는 일처럼 자기 임의로 어쩔 수 있는 게 아니다. 거듭남으로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다. 이를 오늘 좀 더 파악하면서, 본문이 표현하는 ‘완전한 길’과 ‘완전한 마음’을 이해하려 한다.
앞서 다윗의 고백처럼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시 51:2-3).” 하는 저의 기도에서, 죄악, 죄, 죄과에 대한 구분이 필요할 것이다. 또한 바울이 증거한 것처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롬 3:10). 먼저 죄과는 의도적인 불신앙으로 육신의 욕구에 끌리는 것이다. 죄악은 이에 따른 행실로 성령의 욕구를 거슬려 육신이 원하는 바를 추구하는 것이다. 죄는 이에 따른 근본적인 우리의 속성이다.
다시 그럼,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왜 거듭나야 한다고 하셨을까? 이어지는 말씀에서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요 3:6-7).” 즉 육과 영을 구분하고, 주님은 영의 문제를 위해 이 땅에 오셨음을 상기시킨다. 한데 니고데모나 우리는 육의 문제, ‘그 표적’을 구하는 데 정신이 없다. 그러나 바울은 분명히 정리하기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
이를 바탕으로 오늘 우린 ‘완전한 길’을 주목하고, ‘완전한 마음’으로 행하려면 어찌해야 하는지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먼저 이를 정의하면 ‘육을 죽이고 영을 살려야 한다.’ 살았다고 하나 죽은 자로 사는 이들이 수두룩하다.
본문 개요
오늘 시편은 개괄적으로 같이 보면서 풀어갈 것이다. “내가 인자와 정의를 노래하겠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찬양하리이다(1).” 먼저 다윗은 주의 인자와 정의를 노래하겠다고 한다. 노래는 곧 우리 영혼의 표현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는 감정을 축약한다. 한데 아이러니한 것은 좋은 노래일수록 고난을 전제로 나온다. 이를 노래로 서로 화합하고 주 앞에 나아감은 우리로 닥친 고난을 견디고 이길 수 있는 힘이기 때문이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19-21).”
왜 산문이 아니라, ‘시와 노래’일까? 이는 시가 갖는 독특한 세계 때문이다. 시는 함축적이다. 시의 언어는 ‘시어’라 하여 운율과 리듬을 살리는 데 있어 문법적인 제한을 일시 허용한다. 시어는 단어의 뜻을 전달하는 데 목적이 있지 않고 감정과 의미를 전달하는 데 있다. 그 함축의 범위는 그렇게 해서 확장하고 자유롭다. 반면에 산문은 덧붙여 설명하는 구술이 많다. 한 사건을 두고 그 일의 발단에서부터 주변적인 이야기가 나와야 이해된다. 산문은 이야기이다. 그래서 여백이 별로 없다. 시와 노래는 이 모든 것을 생략한다. 구구절절 덧붙이지 않아 여백을 준다. 그 빈 여백은 독자가 채워야 한다.
또 하나, 하나님의 섭리는 자주 맥락이 없다. 우리의 상식과 이해을 뒤집으신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여백은 비었고 우린 알 수가 없다. 결국 생각-묵상의 확장해야 하고, 삶으로 채워져야 시간이 가고 나면 알게 된다. 아,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 요셉은 한참 뒤에야 왜 형들이 자신을 팔았는지, 억울하게 노예로, 또는 옥살이를 할 때 하나님은 답이 없으셨는지! 그러나 요셉도 그렇고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히 11:39).” 그럼에도 그 빈 여백에 대해 저들이 의심하지 않은 것은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40).” 알고 있었다.
이것이 노래의 강점이다. 그리하여 다윗은 “내가 인자와 정의를 노래하겠나이다.” 하고 자신이 아는 주를, “여호와여 내가 주께 찬양하리이다.” 기꺼이 그리 하겠다는 것을 앞서 밝힌다.
하고 이어지는 표현이 다소 머쓱하지만, “내가 완전한 길을 주목하오리니 주께서 어느 때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 내가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 안에서 행하리이다(2).” 이는 주의 인자와 정의를 안다면, 그의 ‘완전한 길’을 주목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를 앞서서 먼저 언급했던 ‘거듭남’으로 연관 지은 이유다. 곧 우리가 거듭나지 않으면 이를 아무리 듣거나 보여줘도 ‘그 표적’만 보려할 뿐이다. 현실적으로 우린 당연하다. 안 믿는 자들의 논리가 훨씬 타당하다. ‘그 표적’이나 좀 체험하거나 목격하면 모를까? 누가 주의 인자와 정의를 주목하겠나? 흔들리는 육의 생각을 다잡기 위해서도 “내가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 안에서 행하리이다.” 곧 주가 주시는 마음으로, 이는 우리 임의로 그리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여기서 두 가지, 첫째는 그가 계신 것과 둘째는 그가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아는 것.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믿음이란 범사에 그렇듯 주를 인정하는 것이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6).” 그리할 때 우리 삶의 태도는 달라진다.
이를 오늘 시편 3절에서 “나는 비천한 것을 내 눈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이요 배교자들의 행위를 내가 미워하오리니 나는 그 어느 것도 붙들지 아니하리이다.” 하고 굳게 다짐한다. 첫째, ‘비천한 자’로 산다는 것은 무언가? 둘째, 또한 ‘배교자’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일인가? 비천함은 세상 욕구에 얽매여 비루하게 저들처럼 살려하기 때문이다. 배교하는 것은 그와 같은 욕구가 충족되지 않을 때 교회를 떠나고 하나님을 버린다. 즉 우리가 생각했던 ‘그 표적’ 같은 것이 없거나 들어주지 않으셨을 때 말이다. 대표적으로 예수님의 제자 가룟인 유다나 베드로를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저들은 3년 반을 같이 하면서 자신들이 생각했던 예수가 아니었다. 이에 하나는 자살하고, 하나는 주를 부인하고 물고기 잡으러 떠났다.
그렇다면 ‘완전한 길’로의 행함을 위해 구체적으로 우린 어찌해야 할까? 오늘 시편 4절은 “사악한 마음이 내게서 떠날 것이니 악한 일을 내가 알지 아니하리로다.” 여기서 사악한 마음이란? 각각 다음 구절에서 나온다. 먼저 5절에 “자기의 이웃을 은근히 헐뜯는 자를 내가 멸할 것이요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를 내가 용납하지 아니하리로다.” 첫째, 이웃을 은근히 헐뜯는 것. 둘째, 눈이 높은 것. 셋째, 교만한 것. 그리고 7절에서 “거짓을 행하는 자는 내 집 안에 거주하지 못하며 거짓말하는 자는 내 목전에 서지 못하리로다.” 즉 사악함의 네 번째는 거짓을 행하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 더, 8절에서는 “아침마다 내가 이 땅의 모든 악인을 멸하리니 악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에서 다 끊어지리로다.” 즉 다섯째는 악을 행하는 것이다.
다시 정리하면, ‘완전한 길’을 주목하며 ‘완전한 마음’으로 행할 것인데, 이는 개념적이 아니라 구체적이다. ‘사악한 마음’을 내게 두지 않고 그 길을 떠날 것인데 그럼 어떻게 사악한 길을 떠날 수 있을까? 첫째, 이웃을 은근히 헐뜯는 것. 둘째, 눈이 높은 것. 셋째, 교만한 것. 네 번째, 거짓을 행하고 말하는 것. 다섯째, 악을 행하는 것. 들을 행하지 않는 것이다. 하여 ‘완전한 길’을 주목하고, 완전한 마음으로 행하기 위해 다윗은 ‘충성된 자’로 살기를 간구한다. 6절에 보면,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살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따르리로다(6).” 곧 충성된 자는 앞서 믿음의 선친들처럼 고난 중에도 노래하고 찬송한다. 왜냐하면 더 나은 것으로 예비하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이다. 그런 자들이 ‘완전한 길로 행하는 자’들이다. 이를 위하여 다윗은 “아침마다 내가 이 땅의 모든 악인을 멸하리니, 악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에서 다 끊어지리로다(8).” 곧 자신을 날마다 점검하고, 자기 안의 악의 뿌리를 뽑고 또 뽑으며 살겠다는 것이다.
이를 다시 예수님의 말씀으로 읽으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앞서 거듭나야 한다하시고 뒤이어 ‘물과 성령으로 나야 한다.’고 하신다. ‘물과 성령으로’난다는 말씀은 무슨 의미일까? 이를 세례로 국한지어, 종교적인 행위로 해석하려는 경향들도 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 앞에 와 있는 자는 누구인가? 성결을 도모하는 바리새인으로 율법과 규례를 지키고 가르치는 종교지도자였다. 누구보다 종교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다. 한데 물과 성령으로 난다는 것은 ‘완전한 마음’을 위한 것이고, 거듭남이 곧 우리가 가야 하는 ‘완전한 길’을 제시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 완전한 길: 거듭남에 대하여
다윗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알고 있다. 하나님의 성품을 안다. 이를 의지하는 것만이 ‘완전한 길’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으로, ‘완전한 마음’을 주께서 제공할 것도 알았다. 그러므로 저는 “내가 완전한 길을 주목하오리니 주께서 어느 때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 내가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 안에서 행하리이다(2).” 하는 고백이 가능하였다. 하나님은 누구신가? 거룩한 분이시다. 레위기서에 보면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19:2).” 곧 우리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신다. 우리가 무슨 수로 거룩할 수 있겠나? 그렇다고 이는 그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처럼 거룩해야 한다.
이를 위하여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솔로몬은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하였다. 신앙의 기본 원리는 마음에서 난다. 그런데 우리 마음은 어떤가? 온통 악독과 불의와 탐욕으로 가득하다(롬 1:29). 왜 그런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21-23).” 하지만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건하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살후 3:3).” 어떻게? 곧 거듭난 자로 주를 바랄 때이다.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5).” 곧 우리의 거듭남은 믿음으로 온다.
2. 완전한 마음: 물과 성령으로 난다는 것에 대하여
믿는다는 것은 그렇다는 느낌이 아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즉 거듭나야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는데, 물과 성령으로 나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이 차이는 무얼까? 믿음이 전부가 아니라, 물과 성령으로 날마다 자신을 돌아보아 깨끗하게 해야 한다.이 둘은 떨어질 수 없다.
에스겔 선지자는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겔 36:25).” 그리하기 위해 일차적으로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고 우리 죄를 지셨다. 이를 믿음으로 우린 이 땅에 살면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본다. 본다는 것은 바란다는 것인데, 바라는 자는 ‘물과 성령으로’ 날마다 자신을 정결하게 한다. 즉 수시로 자신을 더럽게 하는 우상 숭배, 곧 돈에 대한 추구와 출세와 성공에 대한 기대와 보다 나은 삶을 꿈꾸는 인생의 요구들이 우상이 되지 않도록, 자신을 더럽히지 않는 것이다. 이를 위해 ‘아침마다’ 씻어야 한다.
‘맑은 물’은 구주의 십자가의 보혈이다. 이로써 우리를 정결하게 하셨다. 그런데 또 하루를 살다보면 땀이 나고 온갖 더러운 것들이 묻어서 저녁이 되면 다시 몸을 씻는다. 이를 에스겔은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26).” 즉 우리의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럽게 하시겠다고 전한다. 굳은 마음은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완고함이다. 하나님 없이 살 때의 기질이다.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남을 위하지 못하게 한다. 그러니 우린 무슨 수로 거룩하며, 어떻게 완전한 마음으로 완전한 길을 주목하고 행할 수 있을까?
나오는 말
감사하게도 예수님은 오늘도 우릴 위해 기도하신다. 왜? 우리를 맑은 물과 성령으로 정결하게 하시는 데 있어,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요 17:9).” 곧 우리는 예수에게 주어진 자들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주의 자녀들이기 때문이다. 거듭난 자는 믿는 자로, 믿음은 주의 자녀가 된 것을 확증한다. 이에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딤전 2:5-6).”
그러니 우린 주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가 없다. 심지어 죽음 너머의 심판대 앞에서도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예수님은 우리를 변호하시는 대언자가 되어 심판장되시는 성부 하나님께 우릴 위해 변호하신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히 9:15).”
그러므로 우리의 새 마음은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굳은 마음은 우리의 학습된 죄의 무기력으로부터 벗어나 주 앞에 노래하며 나아가게 한다. 다윗은 오늘 우리에게 이 귀한 복음의 진리를 일깨우는 것이다. 우리가 주의 ‘인자와 정의를 노래하’고 ‘여호와여… 찬양하’게 한다. 이는 우리로 ‘완전한 길을 주목하’여 ‘주께서 어느 때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 하고 주를 갈망하게 함으로 우리가 ‘완전한 마음으로’ 주어진 상황 속에서 행하여 할 것을 알게 한다. 다시 말하지만 이는 결코 개념적인 의미나 추상적인 내용이 아니다.
곧 우리가 ‘완전한 마음’으로 행한다는 것은, ① 비천한 것을 눈 앞에 두지 않는 것이고, ② 배교자들의 행위를 미워하는 것이며, ③ 사악한 마음이 내게서 떠나게 하는 일이고, ④ 악한 일에는 내가 알지도 아니할 것으로, ⑤ 이웃을 은근히 헐뜯지 않고, ⑥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하지 않도록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살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따르리로다(6).” 충성된 자들이 어디 있나? 교회에 있고, 거듭난 자로 믿음 안에서 행하며, 이는 항상 ‘물과 성령’으로 자신을 정결하게 하려는 자들이다. 하여, ⑦ 거짓을 행하는 자와 함께 하지 않고, ⑧ 거짓말하는 자는 아예 내 목전에 서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곧 물과 성령으로 날마다 새로 나는 “아침마다 내가 이 땅의 모든 악인을 멸하리니 악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에서 다 끊어지리로다(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