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02편 / 고난이 주는 유익
220814 주일
시편 102편
고난이 주는 유익
시 102:25 주께서 옛적에 땅의 기초를 놓으셨사오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니이다
시 102:26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시 102:27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시 102:28 주의 종들의 자손은 항상 안전히 거주하고 그의 후손은 주 앞에 굳게 서리이다 하였도다
들어가는 말
고난의 의미는 기독교의 핵심적인 진리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히 5:8-9).” 즉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도 ‘고난으로 순종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다.’ 여기서 온전함이란 죄의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셔서 육신의 질고를 겪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구원을 이루셨다. 이에 우리 또한 순종으로 영원한 구원을 이루게 하셨는데, 순종은 자발적인 것이라면 복종은 ‘억지로라도’ 순종하는 것이다. 바울의 솔직한 고백에도,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하고 육신의 어쩔 수 없음을 인정하였다(고전 9:27). 저는 이를 설명하는데 있어 우리로 군사 또는 달음질하는 운동선수로 비유한 바도 있다.
서기 430년 북아프리카 히포 주교로 있던 아우구스티누스의 후임으로 라클라우스가 설교를 하면서 이런 표현을 했다. “귀뚜라미는 울어대지만 백조는 침묵한다.” 이후 1415년 7월 6일 얀 후스는 로마 가톨릭에서 ‘면제부’를 판매하는 것을 비판하다 화형을 당한다. 그의 이름 ‘후스’는 체코어로 거위를 뜻하는데, “오늘 당신들은 거위 한 마리를 불태워 죽이지만 백 년 후에 당신들은 백조 한 마리의 노랫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당신들은 그 백조 한 마리를 불태워 죽이지 못할 것이며, 그 백조의 노랫소리를 잠자코 듣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1531년 마르틴 루터는 자신의 손으로 이 일이 성취되었음을 설교하며, “얀 후스가 한 말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백조의 노래’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존 파이퍼, <고난의 영웅들> 참고).
아우구스티누스를 위시하여 종교개혁자 루터와 칼빈, 그리고 국교회에 맞서 설교를 하였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혀 <천로역정>과 다수의 묵상, 설교 글을 쓴 존 번연. 우울증과 자살충동에 시달리면서 수백 편의 찬송 시를 지은 윌리엄 쿠퍼. 인디언 선교지에서 채 5년의 사역을 감당하다 폐렴에 걸려 죽은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그리고 1725년부터 1807년까지 살면서 노예무역선 선장으로 살았던 존 뉴턴이 목사가 된 후 지은 찬송, <놀라운 은혜(Amazing Grace)>. 또는 복음주의 영국 국교회 목사로 진리만을 설교한다는 이유로 12년 동안 교인들이 예배를 거부하는 가운데 묵묵히 54년을 목회에 전념하였던 찰스 시미언. 1807년부터 아프리카 노예무역에 대한 반대 법안을 놓고 30년간 국회에서 싸웠고, 결국 노예제도를 불법으로 선언하기까지 또 26년을 싸웠던 윌리엄 윌버포스……(<영적거장들 시리즈>, 부흥과 개혁사).
이 외에도 수많은 믿음의 영웅들은 하나 같이 고난을 견디며 하나같이 평화를 누렸는데,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이와 같은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도 이루어지길 바란다. 곧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는 것은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3-4).” 하신 말씀을 몸소 증명하는 셈이다.
본문이해
오늘 시편의 표제는 <고난당한 자가 마음이 상하여 그의 근심을 여호와 앞에 토로하는 기도>다. 작가 미정으로 시인은 알 수 없으나 바벨론 포로를 직접 체험하며, 민족적 수난을 탄식하고 죄를 고백하고, 선민으로의 지위를 회복해주시기를 간절히 열망하는 시로 구성되었다. 이에 시적배경은 “이 모든 땅이 폐허가 되어 놀랄 일이 될 것이며, 이 민족들은 칠십 년 동안 바벨론의 왕을 섬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칠십 년이 끝나면 내가 바벨론의 왕과 그의 나라와 갈대아인의 땅을 그 죄악으로 말미암아 벌하여 영원히 폐허가 되게 하되 내가 그 땅을 향하여 선언한 바 곧 예레미야가 모든 민족을 향하여 예언하고 이 책에 기록한 나의 모든 말을 그 땅에 임하게 하리라(렘 25:11-13).” 하신 말씀을 이루어 가고 계심을 볼 수 있다.
내용분해
본문은 4연으로 나눌 수 있는데, 1연은 1-2절로 ‘하나님께 절규하며 자신의 부르짖음에 신속하게 응답하시기를 호소한다.’ 2연은 3-11절로 특히 3-5절에 ‘자신의 처지와 고통을 호소하면서 이를 민족적인 아픔으로 승화시키고, 이를 ‘주께서 들었다 던졌다’고 표현하고 있다(10).’ 3연은 12-22절로 ‘선민으로의 회복에 대해 예언자적으로 노래한다.’ 끝으로 4연은 23-28절로 ‘짧고 유한한 우리 인생을 밝히면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간구한다.’
오늘 시편을 통해 ‘고난의 때’와 ‘고난의 주체’, 그리고 ‘고난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목적’을 찾아가면서 <고난이 주는 유익>을 확인하고자 한다. 의미 없는 고난은 없다. 단순한 예로 나의 부친의 사업 실패와 사역으로의 길, 나 또한 주의 강권하심으로 불러 세우시기까지 고난이 주었던 유익을 회상한다. 곧 저마다 겪는 고난은 이유가 있다. 물론 다들 이를 회피하거나 방어하려 세상과 결탁하고, 자아도취에 빠져 사는 경우들도 허다하다. 반면 인생의 성공여부도 고난을 통해 승패가 갈리는 것을 본다. 곧 우리는 고난을 통해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놀라운 구원 사역과 우리가 영원히 누릴 구원의 안식을 발맞춘다. 오늘 시편은 이를 확인시킨다. 이에 ‘고난의 때’와 ‘고난의 주체’ 그리고 ‘고난의 목적’과 ‘모든 고난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알아보겠다.
⒈ 고난의 때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부르짖음을 주께 상달하게 하소서 나의 괴로운 날에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내가 부르짖는 날에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1-2).”
고난은 먼저 우리로 주께로 집중하게 한다. 나의 구주로 주께 부르짖게 하는 것이 고난이다. C. S. 루이스의 표현처럼 <고난은 하나님의 확성기>다. 우리는 ‘나의 괴로운 날에 주께 부르짖는다.’ 그 고난은 네 가지로,
⑴ 육신적인 고난
“내 날이 연기 같이 소멸하며 내 뼈가 숯 같이 탔음이니이다 내가 음식 먹기도 잊었으므로 내 마음이 풀 같이 시들고 말라 버렸사오며, 나의 탄식 소리로 말미암아 나의 살이 뼈에 붙었나이다(3-5).”
고난을 겪기 전에는 고통 자체가 막연하다. 한데 뼈가 숱 같이 타고, 음식도 먹지 못하고, 마음은 강퍅하여 풀 같이 시들고, 탄식 소리가 저절로 나오면서 살이 뼈에 붙은 것처럼 괴로울 때 비로소 실감한다. 모든 고난은 상대적 이해가 불가하다. 이를 시편에서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119:92).” 하고 주의 말씀으로 견디지만 욥은 오히려 “어찌하여 고난 당하는 자에게 빛을 주셨으며 마음이 아픈 자에게 생명을 주셨는고(욥 3:20).” 하며 비탄한다. 그와 같은 고통이 우리 영혼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 바울은,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 4:17).” 곧 환난, 고난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살펴보게 한다.
인생은 얼마나 짧고 부족한가? 오늘 시편은, “그가 내 힘을 중도에 쇠약하게 하시며 내 날을 짧게 하셨도다 나의 말이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중년에 나를 데려가지 마옵소서 주의 연대는 대대에 무궁하니이다(23-24).” 하며 육신의 고통뿐 아니라 이에 따른 심리적인 고통도 호소한다.
⑵ 심리적인 고난
“나는 광야의 올빼미 같고 황폐한 곳의 부엉이 같이 되었사오며 내가 밤을 새우니 지붕 위의 외로운 참새 같으니이다(6-7).”
평안히 잠들 수 있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른다. 아니면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실제 사람이 가장 잠들기 어려운 것은 외로움으로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127:2).” 고난이 오면 생각이 많아지고, 근심이 쌓이면 잠 못 이루는 밤이 늘어간다. 실패와 좌절, 낙심에 떨어졌을 때 “맛있는 음식을 먹던 자들이 외롭게 거리 거리에 있으며 이전에는 붉은 옷을 입고 자라난 자들이 이제는 거름더미를 안았도다(애 4:5).”
이는 노숙자를 떠올리면, 거리로 내몰리기까지 하다하다 더는 할 수 없는 외로움의 끝자락이 노숙인으로의 알코올 중독자다. 하여 시인은 기도하기를 “주여 나는 외롭고 괴로우니 내게 돌이키사 나에게 은혜를 베푸소서(25:16).” 하고 호소한다. 모든 죄는 외로움을 동반하는데 이는 기근과 사나운 짐승을 만나는 것과 같다. “내가 기근과 사나운 짐승을 너희에게 보내 외롭게 하고 너희 가운데에 전염병과 살육이 일어나게 하고 또 칼이 너희에게 임하게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겔 5:17).” 도둑이 제 발 절인다는 말처럼 심리적인 고통은 전염병과 살육의 칼과 같이 괴롭다.
⑶ 사람들로 인한 고난
“내 원수들이 종일 나를 비방하며 내게 대항하여 미칠 듯이 날뛰는 자들이 나를 가리켜 맹세하나이다 나는 재를 양식 같이 먹으며 나는 눈물 섞인 물을 마셨나이다(8-9).”
실제 또 견디기 어려운 고통은 사람들의 시선과 비난이다. “나는 제비 같이, 학 같이 지저귀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울며 내 눈이 쇠하도록 앙망하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압제를 받사오니 나의 중보가 되옵소서(사 38:14).” 곧 괴로움을 당할 때 더욱 힘든 것이 가까운 사람들로부터의 외면이다.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시 41:9).” 결국 누구보다 나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것은, “나를 책망하는 자는 원수가 아니라 원수일진대 내가 참았으리라 나를 대하여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나를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 미워하는 자일진대 내가 그를 피하여 숨었으리라(55:12).” 차라리 저들이 원수나 나를 미워하던 사람들이면 낫겠다. 한데 “그는 곧 너로다 나의 동료, 나의 친구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13).” 하여 고난의 대명사인 욥도 “그들이 내 길을 헐고 내 재앙을 재촉하는데도 도울 자가 없구나(욥 30:13).” 친구들이 와서 위로랍시고 충고하고 권면하는데 그게 더 괴로워서, “주께서 돌이켜 내게 잔혹하게 하시고 힘 있는 손으로 나를 대적하시나이다(21).” 하고 그 뒤의 고난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바라본다.
⒉ 고난의 주체
“주의 분노와 진노로 말미암음이라 주께서 나를 들어서 던지셨나이다 내 날이 기울어지는 그림자 같고 내가 풀의 시들어짐 같으니이다(10-11).”
우리 인생이 얼마나 나약한가?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별안간 닥친 일로 우린 속수무책이다. 이를 시인은 ‘하나님이 들어서 던지시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우리 날은 그림자 같고 풀이 시듦 같다. 이때 시인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방법은,
첫째,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다.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고 주에 대한 기억은 대대에 이르리이다(12).” 과연 우리는 어떤 하나님을 기억하는가? 둘째, 하나님은 긍휼과 은혜를 베푸신다. “주께서 일어나사 시온을 긍휼히 여기시리니 지금은 그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라 정한 기한이 다가옴이니이다(13).” 셋째, 그 은혜는 미천하고 보잘것없는 돌이나 티끌도 받는다는 것을 기억한다. “주의 종들이 시온의 돌들을 즐거워하며 그의 티끌도 은혜를 받나이다(14).”
결국 고난의 근거는 죄다. 베데스다 연못에서 서른여덟 해 누워있던 병자를 고치시고,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요 5:14).” 고난은 우리의 죄를 들춘다. 이때 더욱 무서운 것은,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히 6:4-6).” 곧 다 알면서도 이를 저버리는 것은 돌이킬 수조차 없다. 이때 우리에게 허용하시는 고난의 목적은 무엇일까?
⒊ 고난의 목적
“이에 뭇 나라가 여호와의 이름을 경외하며 이 땅의 모든 왕들이 주의 영광을 경외하리니 여호와께서 시온을 건설하시고 그의 영광 중에 나타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빈궁한 자의 기도를 돌아보시며 그들의 기도를 멸시하지 아니하셨도다 이 일이 장래 세대를 위하여 기록되리니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15-18).”
고난의 진정한 의미는 창조함을 받은 백성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첫째, 주를 경외하게 하시기 위하여. 둘째, 주의 시온에서 영광 중에 나타나게 하시려고. 셋째, 우리 기도를 멸시하지 않으심을 증명하시기 위해. 넷째, 장래 세대를 위하여. 곧 이 기록은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고후 3:3).”
우리가 살면서 경험하고 고백하여 주의 뜻을 나타내게 하시려고, 우리 이야기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편지’가 된다. 나로 내 곁의 사람들에게 읽혀지게 한다. 이는 죽어서도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는 것과 같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 7:38).” 곧 “악인은 그의 환난에 엎드러져도 의인은 그의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잠 14:32).”
⒋ 고난을 다스리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높은 성소에서 굽어보시며 하늘에서 땅을 살펴 보셨으니 이는 갇힌 자의 탄식을 들으시며 죽이기로 정한 자를 해방하사 여호와의 이름을 시온에서, 그 영예를 예루살렘에서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 때에 민족들과 나라들이 함께 모여 여호와를 섬기리로다(20-22).”
고난의 목적이 뚜렷해졌다. 죽어야 마땅한 우리로 다시 살게 하심은 우리로 주의 영광을 선포하게 하심이다. 하여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주의 종들의 자손은 항상 안전히 거주하고 그의 후손은 주 앞에 굳게 서리이다 하였도다(25-28).” 이와 같은 고백이 고난으로 얻는 결과이다. 이에 우리는 죄를 멀리하게 된다.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하지도 아니하리이다 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악한 자와 같이 앉지 아니하리이다(26:4-5).” 왜?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결국 베드로의 이와 같은 경계는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1-32).” 주님의 경고를 저는 들었다.
나오는 말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잠 12:15).”
결론은 주님의 중보시다. 우릴 위해 기도하신다. 우리로는 감당할 수 없으나 우리로도 감당할 수 있게 하신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이와 반대로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가 바른 줄로 알다 끝내 돌이키지 못한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이것이 우리를 향한 고난의 유익이다.
곧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18).” 주가 우리와 함께 하신다. 이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그 사랑으로,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약 3:17-18).”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고난의 때와 그 목적, 고난의 주체와 이를 다스리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았다. 하여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오늘 시편을 통해,
첫째, 고난으로 우린 주께 기도한다.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부르짖음을 주께 상달하게 하소서(1).” 둘째 인생의 허무함을 안다. “내 날이 기울어지는 그림자 같고 내가 풀의 시들어짐 같으니이다(11).” 셋째, 고난으로 참 자유를 알게 된다. “이는 갇힌 자의 탄식을 들으시며 죽이기로 정한 자를 해방하사(20).” 넷째, 고난으로 주의 영광을 선포하게 된다. “여호와의 이름을 시온에서, 그 영예를 예루살렘에서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21).” 다섯째, 고난으로 주의 영존하심과 무궁하심으로 주 앞에 굳건히 세워진다.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26-27).” 여섯째, 하여 우리 후손들이 주 앞에서 안전하다. “주의 종들의 자손은 항상 안전히 거주하고 그의 후손은 주 앞에 굳게 서리이다 하였도다(2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