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리라

전봉석 2022. 8. 14. 05:04

 

유다 족속 중에서 피하고 남은 자는 다시 아래로 뿌리를 내리고 위로 열매를 맺을지라 남은 자는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피하는 자는 시온 산에서부터 나오리니 여호와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왕하 19:30-31

 

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지어다 지존하신 여호와는 두려우시고 온 땅에 큰 왕이 되심이로다

시 47:1-2

 

 

앗수르가 남유다를 두 번에 걸쳐 침공하나 실패한다. 이는 히스기야의 기도가 통하였다(8-19). 이는 하나님의 사람 이사야를 통해 당신의 선민을 조롱하고 하나님의 열심을 나타내신 것이다. 마지막 부분(35-37)에서 주의 사자가 앗수르군을 치심에 18만5천이 죽고 산헤립은 퇴각하여 수도 니느웨에 머물다 니스록 신전에서 살해당한다. 사실 이 일은 히스기야가 죽고 5년 뒤(B. C. 681년)에 일어난 일이다. 곧 이사야를 통한 하나님의 예언은 이루어졌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일이 기도로 방패를 삼은 것이다.

 

“히스기야 왕이 듣고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두르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기도하였고,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보내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앗수르 왕 산헤립 때문에 내게 기도하는 것을 내가 들었노라 하셨나이다.” 하는 내용으로 연결된다(1, 20). 즉 기도와 응답은 반드시 연결된다. 곧 우리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여러 증거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사 58:9).” 이는 예수님의 약속이기도 하여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눅 11:9-10).” 구하고 찾고 두드림의 원리는 기도의 핵심이다. 하면,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91:15).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엄격하셔서,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요 9:31).” 맹인이 눈을 뜨고 뒤늦게 고백하는 내용이다. 바울은 ‘쉬지 말고 하라’고 기도에 대해 간결하였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 이는 마치 호흡과 같아서 우리가 작정을 하고 숨을 쉬지는 않는 것과 같다. 아주 특별한 날, 응급을 요할 때 산소 호흡기를 달고 인위적으로 호흡을 요할 때 외에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우린 숨을 쉰다. 작정을 하고 오늘 몇 시간, 어디서, 어떻게 기도할 것을 특정하고 숨을 몰아쉬지는 않는다. 이를 바탕으로 하는 게 감사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하나님의 명령이고 뜻이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18).” 그러할 때 우리 안의 기쁨은 자연발생적이다. “항상 기뻐하라(16).”

 

곧 우리의 호흡, 우리의 기도는 주 안에 있다는 증거다. 주가 내 안에 계심은 그의 말씀이 내 안에 살아 역사하심, 맥박이 뛰고 심장이 멈추지 않았다는 증거다. 곧 주가 내 안에 거하심은 내가 주 안에-말씀 가운데 거함을 증명한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요일 3:22).”

 

이에 반하여 교만한 자의 결과는 패망뿐이다. 오늘 22절, “네가 누구를 꾸짖었으며 비방하였느냐 누구를 향하여 소리를 높였으며 눈을 높이 떴느냐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에게 그리하였도다.” 곧 우리의 존귀함은 주의 자녀이고 백성이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이 온 우주의 주권자이심을 알린다. “네가 듣지 못하였느냐 이 일은 내가 태초부터 행하였고 옛날부터 정한 바라 이제 내가 이루어 너로 견고한 성들을 멸하여 무너진 돌무더기가 되게 함이니라(25).” 앗수르의 남방 정책은 저로 교만하게 하였고 두려워할 줄 모르는 인물로 만들었다(사 14:12-20).

 

교만에 대한 성경의 경고는 여러 곳에 나타난다. “내가 세상의 악과 악인의 죄를 벌하며 교만한 자의 오만을 끊으며 강포한 자의 거만을 낮출 것이며(사 13:11).” 이는 지혜자의 여러 번 강조함으로도 부족하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잠 16:18, 18:12).” 이에,

 

자기의 이웃을

은근히 헐뜯는 자를 내가 멸할 것이요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를

내가 용납하지 아니하리로다

(101:5).

 

곧 교만은 하나님을 능멸하고 멸시하는 것이다.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스올 곧 구덩이 맨 밑에 떨어짐을 당하리로다(사 14:13-15).” 하여 “나는 네 무리가 용사 곧 모든 나라의 무서운 자들의 칼에 엎드러지게 할 것임이여 그들이 애굽의 교만을 폐하며 그 모든 무리를 멸하리로다(겔 32:12).”

 

교만으로 기도가 막힌다. 또는 기도를 한다고 하나 그 응답이 늘 시원찮고 하나마나 한 기도처럼 들으시는 것 같지도 않은 것은 먼저 자기 유익을 위해 구한다. 늘 자기 문제로 요구한다. 언제나 관심은 문제해결과 욕구불만이다. 필요에 의해 바란다. 적당하여 별로 아쉬울 게 없을 땐 기도도 멈춘다. 기도 안 한 지 오래된 성도들도 수두룩하다. 심정지상태로 연명하는 환자 같은데 저는 의식이 없다. 이는 주를 인정하지 않는 데서 오는 동맥경화 같다. 만사가 자기 뜻대로 된다고 여기는 자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혹은 그럴 수 있는 정도로 족해한다.

 

가까운 친구로 저가 안타까운 것은 기도를 의미 없는 일과 다를 게 없다고 여긴다. 그럴 시간에 열심히 사는 게 바른 삶의 자세로 안다. 내가 봐도 저는 참 열심이고 성실하다. 학창시절 때부터 늘 자신의 책임을 다했던 친구이다. 그러는 동안 몇 번의 기회로 주를 영접할 수 있었고, 그때마다 또 실패했던 것은 자신의 열심이 하나님의 열심보다 늘 우선하였다. 지금도 교회는 열심히 다니고 어울려 성경공부도 한다고 하고 남전도회 모임에도 참석한다. 그러나 저의 마음은 밍밍하다. 기쁨이 없다. 저에게는 굳이 기도할 게 없다. 그러느니 열심히 살면 된다. 성실하게 자기 일을 수행하면 된다. 그러니 별로 구체적인 감사도 없다. 포괄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무엇을 두고 기도하고 감사해야 하는지 모른다. 아프면 낫게 해달라, 아들 군대 가는데 잘 갔다 오게 해달라, 그 정도? 그러니 내가 누구 이야기를 하면 시큰둥하다. 별로 관심이 없다. 따로 얼마씩 작성하고 우리 교회로 후원헌금도 보내면서 교회를 이루어가는 데 있어 감격과 감사가 없다. 그러니 참여할 것도 없다.

 

그저 여느 일들처럼, 그럴 수도 있는 일들일 뿐이다. 나는 저와 낚싯대를 드리우고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4).” 우리 인생의 변수는 어떤 맥락도 없이 닥친다고 말하면, 저는 그저 다 그렇지 뭐 하고 뚱하다. 나는 그 가운데 주의 뜻을 살피려 한 말인데, 저는 그럴 수 있는 팔자소관으로 돌린다. 왜 그럴까? 믿는다고 믿고 다닌다고 다니면서도 어찌 그 마음에는 감격이 없다.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15-16).” 한 마디로 저의 ‘허탄한 자랑’ 때문이다. 저는 적당하다. 그만하면 왜 굳이 하나님을 바라고 구할 게 없이 산다. 그러니 굳이 기도가 필요 없다. 나는 저에게 오늘도 이 하루를 허락하신 이가 너로 호흡하게 하심이라 말해도 시큰둥하다.

 

늘 듣는 교회 얘기처럼, 중보가 없을 때 자기 기도도 함정이 된다. 남의 일에 관심도 없고 저들 영혼이 안타까워할 것도 없다. 아니 그런 건 아예 모르고 굳이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누가 은혜를 나누려 간증하면 하품만 난다. 그러나 성경은 일러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5-6).” 우리가 주를 인정한다는 것, 기도하고 살지 않으면, 호흡처럼 산소 공급이 원활하지 하지 않다. 저는 살았으나 죽었다. 죽은 자로 사는 이들이 허다하다. 이느 예수님의 지적이셨다. 바울도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하고 직설적으로 전하였다(딤전 5:6). 

 

모든 역사의 유일한 주권자는 하나님이시다. 오늘 본문은 이를 주목하게 한다. “네 거처와 네 출입과 네가 내게 향한 분노를 내가 다 아노니 네가 내게 향한 분노와 네 교만한 말이 내 귀에 들렸도다 그러므로 내가 갈고리를 네 코에 꿰고 재갈을 네 입에 물려 너를 오던 길로 끌어 돌이키리라 하셨나이다(왕하 19:27-28).” 결국 교만의 결과는 자신이 자초한 일이다.  요셉의 고백도 이를 알았기 때문에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 45:5).” 하나님을 인정하는 일이 온 세상을 덮을 것이다.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합 2:14).” 그러므로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대상 29:11).” 고로 오늘 내가, 나의 모든 것이 주의 목전에서 이루어진다.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삼상 2:3).” 하여 성경은 일러 경고하시길,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렘 23:24).” 이를 안다면 “그는 깊고 은밀한 일을 나타내시고 어두운 데에 있는 것을 아시며 또 빛이 그와 함께 있도다(2:22).” 아무도 모른다 해도, 심지어 나 자신도 잊었다 해도 주는 다 아신다. 그런 이가 우리의 필요를 알지 못하실 리 없다. 하면 기도는 하나님을 흔들어 우리의 사정을 알리는 것이 아니라, 나로 그 뜻이 하나님 안에 있는가를 알게 하려 하심이다.

 

하물며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 6:30-32).” 고로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 이를 알면 알수록 나에 대한 기도는 줄고, 기도할 줄 모르는 상한 심령의 영혼을 두고 주께 기도하게 된다. 중보와 그 신앙은 비례한다. 자기 기도만 수두룩한 경우 저는 어린아이와 같거나 굳이 하나님이 아니어도 상관없는 자이다. 곧 자기 요구만 들어줄 수 있다면, 그리하여 믿는다고 하면서 점을 보고, 술 한 잔에 위로를 찾고 사람을 구하고, 타종교 아무 신이나 상관없다. 저의 신주는 오로지 자신이다. 자기 문제만 해결되면 그뿐이다. 정작 그 문제란 것도 일시적일 뿐인데.

 

“여호와여 주의 손이 높이 들릴지라도 그들이 보지 아니하오나 백성을 위하시는 주의 열성을 보면 부끄러워할 것이라 불이 주의 대적들을 사르리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평강을 베푸시오리니 주께서 우리의 모든 일도 우리를 위하여 이루심이니이다(사 26:11-12).” 그러므로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이에 하나님은 어떠한 세상에서도 주의 남은 자를 성전에 숨기신다.

 

“유다 족속 중에서 피하고 남은 자는 다시 아래로 뿌리를 내리고 위로 열매를 맺을지라(30).” 오늘 본문의 핵심이다. 저들 “남은 자는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피하는 자는 시온 산에서부터 나오리니 여호와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31).” 이는 우리의 열심이 아닌 하나님의 열심이다. 그러므로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약 4:16).” 하여,

 

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지어다

지존하신 여호와는 두려우시고

온 땅에 큰 왕이 되심이로다

(47:1-2).

 

오늘 시편도 앞서의 역사를 축약하고 함축한다.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극진히 찬양할 것이요 모든 신보다 경외할 것임이여 만국의 모든 신은 헛것이나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도다(대상 16:25-26).” 이를 다시 시인은,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위대하심을

측량하지 못하리로다

(145:3).

 

우리가 어찌 주를 알 수 있을까? 다 안다 여기듯 함부로 주 앞에 서는 자는 이단이다. 사이비로 저는 자신이 아는 그 능력으로 하나님을 제한하여 자신을 높일 따름이다. 치유나 은사에 대한 강조는 그래서 위험하다. 단편적으로는 주를 안다 할 수 없다. 우리는 결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7-19).” 그의 충만하심은 우주보다 넓고 높고 크고 위대하시다. 곧 나의 어떤 죄보다 더 크고 넓고 높고 깊으시니 용서하지 못하실 것이 없다. 이를 인정하고 주를 인정하기만 하면,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건하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살후 3:3).”

 

오늘 나의 이 모든 영화는 주의 것이다. “네 화려함으로 말미암아 네 명성이 이방인 중에 퍼졌음은 내가 네게 입힌 영화로 네 화려함이 온전함이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겔 16:14).” 결코 나의 수고와 노력으로 이룬 것은 없다. 주는 이를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엡 5:27).” 우리가 교회를 중히 여기고 이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는 것은,

 

여호와께서 만민을 우리에게,

나라들을 우리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기업을 택하시나니

곧 사랑하신 야곱의 영화로다 (셀라)

(3-4).

 

오늘 시인의 표현대로 이를 증명한다. 그러므로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빌 1:28).” 설령 그것이 나 자신이라 해도,

 

하나님께서 즐거운 함성 중에 올라가심이여

여호와께서 나팔 소리 중에 올라가시도다

찬송하라 하나님을 찬송하라

찬송하라 우리 왕을 찬송하라

하나님은 온 땅의 왕이심이라

지혜의 시로 찬송할지어다

하나님이 뭇 백성을 다스리시며

하나님이 그의 거룩한 보좌에 앉으셨도다

(5-8).

 

시편을 사랑하는 것은 묵상이 주는 즐거움이 있다. 우리로 알게 하시는 하나님의 언어가 있다. 하여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요 14:23).” 주의 사랑의 원리다. 하여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약 1:25).” 곧 우리는 복 있는 자로,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1:1-2).

 

신앙의 기본 원리이면서 최종 선택이다. 하여,

 

뭇 나라의 고관들이 모임이여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다

세상의 모든 방패는 하나님의 것임이여

그는 높임을 받으시리로다

(7).

 

곧 우리로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19-21).” 이것이 우리의 본문이 된다. 오늘 하루도 호흡이 있는 자로 기도로 말씀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6-1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