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므낫세가 유다에게 범죄하게 하여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한 것 외에도 또 무죄한 자의 피를 심히 많이 흘려 예루살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가득하게 하였더라
왕하 21:16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시 49:20
남유다 14대 왕 므낫세는 열두 살에 즉위하여 55년을 통치하였다(B. C. 697-642). 부친 히스기야는 기도로 생을 15년 더 연장하면서 낳은 아들이었다. 므낫세는 가장 오래 통치하면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 히스기야가 재건한 성전을 헐고, 부수고 허물었던 산당을 다시 복원하였다. 3-7절에서 저의 우상숭배와 관련한 죄상이 기술되고 있다. 아합의 행위를 본받아 바알과 아세라 신상과 일월성신을 숭배하였다. 하나님의 전에 바알의 제단을 쌓고 아세라 목상을 세웠다. 성전 뜰에 천체 숭배의 단을 쌓았다. 자식을 불에 던지는 몰렉을 숭상하였다. 각종 미신을 권장하고 저들을 섬기는 신하들을 신임하였다.
더는 유다의 축복, 하나님의 은혜를 바랄 수 없게 하였다. 결국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은 남유다의 멸망을 선언하셨다(10-15). 그는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고 예루살렘을 피로 물들였다. 그의 아들 아몬이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16-18). 므낫세의 악행은 유례없이 심각하였다. 악한 왕으로 꼽히는 아달랴나 아하스조차도 하나님의 성전 안에 감히 우상의 제단을 쌓지 않았다. 남유다는 므낫세 사후 60년이 더 유지되었다. 이는 무자비한 시기였으면서 동시에 회개하고 다시 돌이킬 수 있는 여지의 시간으로 충분하다. 하나님이 다윗과 세우신 언약을 끝까지 지키시고 오래 참으심으로 앗수르의 침공과 멸망 후 포로로 잡혀갔다가도 다시 돌아와 회복할 수 있는 시간을 예비하신 것이다(대하 22:14-20).
어제도 묵상하며 생각하였던 것이 우리의 기도가 자칫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 외에 더 큰 악을 유발할 수 있다는 증거이다. 히스기야의 기도를 축복으로 본다면 저의 연장된 15년의 생이 저지르고 간 문제는 너무 끔찍하다. 그러니 다 때가 있고 이를 억지로 더하거나 빼는 것에 더욱 신중해야 한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전 3:1-2, 10).”
예수님은 말씀하시길,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요 9:4).” 우리 인생에 밤이 온다. 오늘 시편을 잠시 덧붙이면,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하지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자들의 길이며
그들의 말을 기뻐하는 자들의
종말이로다 (셀라)
(49:12-13).
하고 묻기를,
그가 영원히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인가
(9).
마치들 그럴 것처럼 산다. 한데 돌아보아 은혜가 아닌 것이 없음을 알 때 자고할 수 없다.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므낫세 이후 60년, 나는 이 시간이 주는 무게에 고개 숙인다. 남유다가 앗수르에 멸망하기 직전 가장 악명 높은 므낫세를 겪으며 저들은 역시 돌아보아 깨닫지 못한 것이다. 이는 엄연한 경고였고 실제의 처절한 현실이었다.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롬 2:9-10).” 악과 선의 경계에는 앞서 거울과 같은 교훈이 있다.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고전 10:11).”
하여 오늘 시인은,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20).
때론 짐승만도 못한 사람의 참상을 본다. 내 안의 그와 같은 본질을 느낀다. 두려움에 치를 떨 줄 아는 게 복이었다. 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무감각하였던 실상을 두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22).” 이를 위하여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19-21).” 성령을 소멸한다는 것은 내 안에 주시는 주의 마음을 그러려니 하고 덮어놓는 것이고, 예언을 소멸한다는 것은 우선하여 자기가 생각하는 기준과 판단을 말씀보다 앞세우는 것이며,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한다는 것은 이에 말씀이 그 기준이 되어 하나님의 뜻을 살피며 산다는 것을 뜻한다. 하여 다시 바울의 논증을 살피면,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18).”
우리가 범사에 감사한다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향하신 주의 마음이다. 하여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딤후 2:19).” 흔히 우리가 ‘정신없다’ 하는 것은 그만큼 두서없이 산다는 것이고 이는 무질서한 삶의 증거다. 굳이 안 해도 될 일에 얽매이느라 정작 주의하고 다스려 주의 뜻을 살펴야 하는 데서는 시간을 낼 형편이 안 된다. 초대는 받았으나 시집가고 장가들고 재산을 불려 이를 건사하느라 이에 응할 수 없는 자들이 너무 많다.
종종 누구와의 대화에서 나는 좀 정리할 것을 요구한다. 마치 어지러운 옷가지들 사이에서 무엇을 입을까 하고 씨름하는 것처럼, 그런 사람들의 특징은 ‘정신이 없다.’ 멀쩡한 정신으로 살아도 사탄은 틈을 노리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 4:27).” 언제든 밀 까부르듯 우리 마음을 쥐락펴락 하려 하는데,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눅 22:31).” 그럼에도 우리가 또 오늘 하루를 더 사는 것은 므낫세 사후 60년의 시간이 더 주어진 남유다의 운명 같다. 결국 우리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일까?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32).”
주가 날 위해 기도하신다. 오늘이 다시 하루 주어진 이유다. 다들 몇 년은 족히 살 것 같은 평균 수명과 기대 수명을 가지고 있겠지만 다시 오늘 시인의 외침을 듣는다면,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20).
나는 종종 어떤 두려움을 느낀다. 그럴 때마다 하나하나 처분하듯 단순화시키려 한다. 그럼 다들 그럴 수 없는 자신들의 형편을 두고 이구동성으로 그럴 수 없는 처지를 운운하지만 그러느라 미뤄지는 것은 실상 회개의 기회다. 주의 뜻을 따라 사명을 다하지 못하는 시간이다. 나라고 왜 이래저래 바쁘게 할 일이 없고,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이 없겠나? 여전하여 내 안의 갈등은 때로 나를 우울하게까지 하지만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지니 조각한 것이나 주상을 세우지 말며 너희 땅에 조각한 석상을 세우고 그에게 경배하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임이니라(레 26:1).”
흔히 놓아두지 못하는 것은 우상이다. 일일이 자식 일에 관여해야 할 것 같은 마음에서부터 그것을 희생이나 사랑으로 여겨 마땅한 줄 알면서 정작 하나님과의 단 몇 분 마주 앉을 시간은 낼 수 없는 신자들이 수두룩하다. 하다못해 심리학에서도 문제 있는 가정의 불화에서 제일로 꼽는 것은 건전한 분리 관계가 이뤄지지 않아서이다. ‘요즘 애들’ 할 것 없다. 우리 때도 같았다. 우리가 언제 부모 말에 그리 순순히 순종하고 저들의 희생을 그리 크게 고마워하며 살았던가? 나이들어 비로소 알지, 그저 부모만 몸이 달아 아등바등 우릴 건사하느라 등골이 휘었는데, 다 그런 것이다. 혼자 크는 줄 안다. 엄마들이 종종 걱정하며 묻기를, 아이가 너무 책을 안 읽는다고 걱정한다. 또는 시간을 너무 계획 없이 무의미하게 허비한다고 걱정이다. 그럴 때 나는 솔직히 ‘너나 잘 하세요!’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것을 도로 삼킨다.
중국의 어느 학자가 있었다. 저는 자식 일과에 너무 등한히 했다. 아내는 보다 못해 자식의 생활태도를 탓하며 좀 붙들고 앉아 뭐라 이르라고 하였다. 그러자 저는 ‘나 사는 것을 보고도 깨닫는 게 없다면 내가 뭘 더 가르칠 수 있겠나?’ 하고 입을 다물었다. 일련의 사태, 히스기야의 기도와 그에 따른 응답으로 얻은 므낫세의 강퍅함을 살펴보면서, 이를 교훈으로 삼지 않으면 존귀하나 짐승 같다는 시인의 말이 그래서이다.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후 6:16).”
백날 말로 해서 안 되는 건 안 된다. 결국 ‘오른 눈이 뽑히고, 오른 팔을 잃어야 정신 차린다.’ 그래서도 무감각하다면 더는 뭐라 이를 말이 없고, 주의 긍휼하심만을 기대하는 수밖에. 내가 나를 대하는 데 있어서도, 내 곁의 누구를 위하고 주의 마음으로 대하는 데 있어서도, 어쩔 수 없는 건 없는 모양이다. 내가 날 잘 알듯이… 하루 일과를 단순화시켜야 한다. 굳이 안 해도 되고, 안 만나도 되는 사람들과의 어울림은 끊어야 한다. 사방팔방 무슨 모임이 많고, 관계가 다양해서, 서로는 이를 사회성이라 하고 남다른 사교성을 높이 둔다. 그러다 어느 때가 오면, 죽고 못 살 것 같던 사이가 제일 멀어지고 우리로 고통을 더하는 법이다. 이를 성경의 용어로 축약하면, 우상이다. 저들은 사람을 숭배다. 그 관계를 아주 귀히 여긴다. 최소한 그런 만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는 네가 그와 같이 행하지 못할 것이라 그들은 여호와께서 꺼리시며 가증히 여기시는 일을 그들의 신들에게 행하여 심지어 자기들의 자녀를 불살라 그들의 신들에게 드렸느니라(신 12:31).” 곧 그 자식들이 고생이 많다. 일련의 사건을 보며, 나는 아이가 어린 줄 알았는데 고등학생이었다고 하니 그 입에서 나오는 여러 거짓말과 변명과 탓을 곧이곧대로 믿음으로 자신의 허물을 남 탓으로 돌리려 하는… 들은 바로는 뭐라 할 말이 없다. 사람의 일이 아니다. 하나님이 다루셔야지, 그러니 저런 자를 누가 감당할 수 있을까? ‘존귀하나 짐승 같은 사람들’이 늘어나는 세상이다.
므낫세의 이야기가 혹여 우리 이야기는 아닐까? 설마, 하고 무작정 기도하고 바랐던 일이 이루어졌다고 해서 그게 과연 축복이겠나? 하는 문제 앞에서 나는 생각이 많아진다. 여기서 분명히 붙들 것은,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출 19:5-6).” 결국 나는 오늘 누구의 것으로 살고 있는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나는 늘 이 말씀 앞에서 두렵다.
말씀은 엄연히 모두의 것이나,
뭇 백성들아 이를 들으라
세상의 거민들아 모두 귀를 기울이라
귀천 빈부를 막론하고 다 들을지어다
(49:1-2).
오늘 시인은 외쳐부른다. 그러나 들을 수 있는 귀와 볼 수 있는 눈과 생각하고 또 생각하여 깨달을 수 있는 마음은 아무나의 것이 아니었다.
내 입은 지혜를 말하겠고
내 마음은 명철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로다
(3).
결국 성경은 믿는 자의 것으로 말씀은 들을 수 있는 자의 소유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 3:15).” 근데 그게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하루 중 말씀 앞에 앉기가 매일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 그럴 시간이 없다. 시집가고, 장가들고, 새로 산 소 다섯 겨리를 돌봐야 한다. 그게 왜 나빠요? 하고 물으면 우문이고, 중요한 것은 말씀 앞에 자기를 앉혀야 하는데, 나는 고백하지만 때론 기계적으로 움직인다. 늘 같은 시간에 같은 행동반경을 취하면서 같은 시간의 범주를 따르려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자주 느끼지만 한 번 허용하면 또 허용하게 된다. 하나, 하루 정도 ‘그럴 수 있다’고 여기던 것이 언제 보면 내 영혼을 잠식했다. 그래서도 나는 때로 ‘더는 생각하지 않기’를 훈련한다. 그냥 한다!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눅 22:39).” 한 번 두 번 의도적으로 그리하던 것이어도 어느새 보면 습관이 된다. ‘습관은 인격이 되고 인격은 사람의 운명을 바꾼다.’ 예수님도 습관을 따라 기도하러 가셨다. 이는 지혜다.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네가 얻은 모든 것을 가지고 명철을 얻을지니라(잠 4:7).” 나는 가끔 나를 꼼짝 못하게 묶어두시는 것을 느낄 때 서럽기도, 아쉽기도, 슬프기도 하지만 그래서 그릇된 길로 행하지 않는 것이 유익이기도 하다. 내가 살아왔던 젊은 날의 시간을 돌아보면 너무 겁 없이 돌아다니고 어울리고 함부로 행하였던 일들이 내 의지나 결단으로 막을 수 없다는 데 나는 인정한다.
내가 비유에 내 귀를 기울이고
수금으로 나의 오묘한 말을 풀리로다
죄악이 나를 따라다니며
나를 에워싸는 환난의 날을
내가 어찌 두려워하랴
(4-5).
주 안에 산다는 것을 느낄 때는, 내가 지금 여기 있다는 것이다. 아직도 저기 있는 친구나 나의 동료들을 볼 때면 이와 같은 상황은 은혜이고 축복인 것을 고백한다. 그러므로 더 이상,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부유함을 자랑하는 자는
아무도 자기의 형제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를 위한 속전을
하나님께 바치지도 못할 것은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
(6-8).
누구도 자신이 자식을 구원할 수 없다. 나아가 자신을 자신이 구원할 자도 없다. 당장 그걸 안 하면 안 될 것 같으나, “너희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신 31:6).” 성경의 이와 같은 말씀이 보장하신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나는 가끔 하나님이 성경을 말씀으로 주신 데 대해 감사한다. 그림이 아니고, 음악이 아닌 글자로, 이야기로, 구체적인 정황과 역사로 성경을 기록하심을 감사한다. 오늘 이 므낫세의 이야기는 내 이야기다. 내 곁의 이야기다. 히스기야의 기도는 늘 주변을 맴돈다. 나는 무엇을 구할 것인지.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그가 영원히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인가
그러나 그는
지혜 있는 자도 죽고
어리석고 무지한 자도 함께 망하며
그들의 재물은 남에게 남겨 두고
떠나는 것을 보게 되리로다
(9-10).
인생이 다 그런 걸 알면서도 이를 한사코 외면하고 부정하며 갈 데까지 가는 자의 미련함에 대하여는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눅 17:26-30).” 오늘도 여전하다.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하지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자들의 길이며
그들의 말을 기뻐하는 자들의 종말이로다 (셀라)
(12-13).
그리 사는 사람들이나 그걸 보고 같이 그 길을 따라 기뻐하는 삶에 대하여,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1-23).” 그러니,
그들은 양 같이
스올에 두기로 작정되었으니
사망이 그들의 목자일 것이라
정직한 자들이
아침에 그들을 다스리리니
그들의 아름다움은 소멸하고
스올이 그들의 거처가 되리라
(13-14).
이를 되새기다 나는 두려워진다. 나는 어떠한지, 나는 나를 자신할 수 없어 항상 주의 이름을 부른다.
그가 비록 생시에 자기를 축하하며
스스로 좋게 함으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지라도
그들은 그들의 역대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니
영원히 빛을 보지 못하리로다
(18-19).
더는 어쩔 수 없는 순간은 오나니,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스스로 날개를 내어 하늘을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잠 23:5).” 보면 다들 그 끝을 알지 못하는 것 같다.
내가 악인의 큰 세력을 본즉
그 본래의 땅에 서 있는
나무 잎이 무성함과 같으나
내가 지나갈 때에 그는 없어졌나니
내가 찾아도 발견하지 못하였도다
(37:35-36).
하면, 부디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스스로 날개를 내어 하늘을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잠 35:4-5).” 그러니까 그러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 12:20-21).” 이를 깨닫지 못하면 짐승 같다.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2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