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이스라엘의 아들은 이러하니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스불론과 단과 요셉과 베냐민과 납달리와 갓과 아셀이더라
대상 2:1-2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시 55:22
다윗 가문을 중심으로 선민들의 계보를 정리하고 있다. 야곱의 열두 아들과 유다에서 다윗까지로 이어진다. 하나님의 역사는 다채롭다. 사람의 평가로 이를 속단할 수 없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우린 다 이해할 수 없다.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 3:9).” 곧 어떻게 저런 사람이 주의 반열에 올라 그 이름을 더할까? 의아한 인물도 있다. 하지만 바울이 설명하는 것은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29).”
곧 오늘 나의 약함과 우리의 부족함이 주의 일에 걸림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자신됨을 인정할 때,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하여 우리의 고백은 하나로 모인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12:9).”
곧 오늘의 나로 족함은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을 붙들기 때문이다. 나의 실패로 주의 신실하심이 증명된다. 그러므로 시인의 찬송은 아름답다.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는 인자하시고 진실하시므로
주의 이름에만 영광을 돌리소서
(115:1).
곧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루시는 구원은 우리의 영혼의 구원만이 아니다. 우리의 영과, 혼과, 몸이 모두 온전하게 거룩하게 보존되는 것이다. 이는 전인적인 구원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그의 강림과 함께 우리의 영과 혼과 몸이 다 하나 같이 온전하고 거룩하게 보존되길 바라신다. 그러려면 흠과 티가 없는 그리스도와 연합해야 한다. 그럴 때 온전하신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갈 수 있다. 이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10).”
곧 우리가 같이 상대하며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는 것은 주의 영광을 위해서다. 그날에 우리의 영은 물론 혼과 몸이 흠 없이 보존되기를 원하신다는 것,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살전 1:10).” 그러므로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2:19-20).”
곧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계 7:9-10).” 오늘 우리가 바라는 한 가지, 이 땅에서의 일로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신 것이지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를 기초로 한다. 이를 성경은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롬 11:6).”
그러므로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 곧 유다는 다말에게서 얻은 아들로 다윗의 계보을 이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섭리를 알고 이에 순응할 때 복이 된다. 말이 안 되는데,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마 4:19-20).”
이를 오늘 시편으로 연결하면,
하나님이여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구할 때에 숨지 마소서
내게 굽히사 응답하소서
내가 근심으로
편하지 못하여 탄식하오니
이는 원수의 소리와 악인의 압제 때문이라
그들이 죄악을 내게 더하며 노하여
나를 핍박하나이다
(55:1-3).
사는 날 동안 우리의 어려움은 끝이 없다. 그럴 때 다윗과 같이 탄식과 간구와 찬양이 이어져, 아들 압살롬과 친구 아비도벨의 배신이란 뼈아픈 현실 앞에서 주를 부르다 올바른 의뢰와 신앙 고백이 찬양으로 드려지는 것은 값지다. 마라의 쓴 물이 없었다면 하나님이 더하시는 단물을 맛보지 못했을 것이고, 뜨겁게 내리쬐는 광얏길의 뙤약볕이 아니었다면 하나님의 구름기둥을, 밤 기온의 추위가 아니었다면 하나님의 불기둥을, 가로 놓인 요단강이 없었다면 이를 가르고 마른 땅으로 건너게 하심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한 역경과 어려움으로 주의 인자하심과 자비하심을 세심하게 누린다. 그럴 때면,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13:1).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마시고 떠나지 마소서
(27:9).
곧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 28:15).” 이와 같은 말씀이 피부로, 현실적으로 느껴지고 다가오는 때는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사 43:2-3).” 이 놀라운 체험으로 우리 영혼은 물론 혼과 몸이 모두 주 앞에서 온전하여지는 것이었다.
이때도 우리의 모든 감정, 특히 분노와 슬픔을 오늘 시인과 같이 하나님 앞에 쏟아내는 것이 지혜였다. 사람보고 할 일이 아니다. 어떤 단체나 기관으로부터 보호 받을 수 있는 그런 문제도 아니다. 다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즉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 곧 어떤 어려움으로 우린 주의 살아계심을 더욱 현실적으로 체험한다. 가장 어렵고 힘든 순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온전하게 누릴 수 있는 때이다. 하여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 3:18).” 어떤 결과가 아니라 그 모든 과정으로 주를 인정하게 된다.
가족들을 모두 먼저 돌려보내고 혼자 남은 동생과 같이 주일예배를 드렸다. 안쓰러움과 답답한 마음이 나의 말문을 막았다. 수시로 딸애와 아내에게 연락해보고, 아들들에게 근황을 묻는 것을 보면서 우리가 왜 이런 일을 당하고 있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말도 안 되는 고초를 통해 오히려 주를 인정하고 주께 모두 맡김의 원리를 배우게 된다. 어떤 두려움과 공포가 우리를 쥐고 흔들지라도,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고
공포가 나를 덮었도다
(5).
이것이 주의 일을 하다 그런 것이면 더더욱 주를 바라볼밖에. 하여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잠 16:1).” 하는 이와 같은 원리는 단순하면서도 고단하다. 내 의지로는 어렵고 온전히 주께 맡김으로는 간단한데, 그러하기까지 우리 안의 쓸림과 엮임이 고달픈 것이다. 쓸림은 사람으로 마음이 그러하고, 엮임은 싫든 좋든 주가 원하시면 또한 이를 마다할 수 없는 것으로,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렘 10:23).” 하여,
나는 말하기를
만일 내게 비둘기 같이 날개가 있다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
내가 멀리 날아가서
광야에 머무르리로다 (셀라)
(6-7).
회피하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어디 한두 번이었겠나? 그러나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10:22).” 우리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받는 이 모든 어려움이 실은 우리로 참 고백과 감사로 연결시킨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 1:7).” 이에
나를 책망하는 자는 원수가 아니라
원수일진대 내가 참았으리라
나를 대하여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나를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
미워하는 자일진대
내가 그를 피하여 숨었으리라
(12).
생각 같으면 피하고 도망쳐 나와 상관없는 일처럼 여기며 살고 싶으나 이 또한 주가 더하신 일, 주의 뜻이 무엇인가 헤아리는 것이 지혜이겠다. 그럴 때,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4:8).
이런 상황도 달게 받을 수 있는 것은 주가 더하시는 평안으로 가능하였다. 분명히 어렵고 화나고 답답한데, 오히려 그런 상황이 우리로 주 앞에서 평안히 눕기도 하고 안전히 살기도 하게 한다. 이는 누구에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다. 기껏 애써 마음을 다하고 힘써 돌보았던 아이라, 더는 이런 일을 당하고 싶지 않아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더 클 수 있다. 신기한 건 더 마음 주고, 더 신경 쓰고, 더 애써 수고하였다고 여겼는데 돌연 예상치 못한 결과를 마주해야 할 때가 있다.
그는 곧 너로다 나의 동료,
나의 친구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
우리가 같이 재미있게 의논하며
무리와 함께 하여
하나님의 집 안에서 다녔도다
(13-14).
그러니 기껏 정을 준만큼 마음도 어려운 것이다. 이는 교회를 이루어가면서 흔히 체험하게 되는 슬픔이다. 좀 세워졌다 싶으면 도망치듯 떠나가고, 어찌 마음을 더했던 사람이라, 이제 좀 성장하여 무엇을 바랄 수 있겠다 하고 기대하면 사라지는… 나는 종종 이와 같은 심정을 ‘뻐꾸기 둥지를 날아간 새’로 비유한다. 결국 하나님은 우리로 우리가 하는 게 아님을 알게 하신다. 때론 그 과정이 잔인하시다. 우리로는 오직 주만 바라보며 하게 하려 하심임을. 하여 “오직 내 말을 듣는 자는 평안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안전하리라(잠 1:33).” 이를 삶으로 체험하고 간직하게 하신다.
나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로다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
(16-17).
탄식할 때 주가 들으심을 안다. 간절함이란 주 아니면 안 되겠는, 다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절대적인 어떤 나락 끝에서이다. 이에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히 12:7-8).” 곧 오늘의 이런 어려움이 우리로 주의 길을 바로 가고 있다는 걸 알게 한다. 이에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렘 17:5).” 사람을 믿지 않고 바라지도 않는다.
목사가 되고 순간 함께 했던 아이들과 가까웠던 이들이 증발한 것처럼 사라지는 체험을 했다. 마치 서로가 연락이라도 하고, 약속한 것처럼 어쩜 그렇게 일순간에 나만 두고 사라지는 것인지! 나는 그때 그야말로 몹시 당황하였다. 이게 뭐지? 하나님은 대체 무슨 꿍꿍이로 이러시는 걸까? 하는. 그와 같은 당혹스러움이 있어서야 주만 바란다는 게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인천으로 옮겨 오면서도 누구누구를 염두에 두고 그 가정들을 생각하며 시작하였는데, 이건 웬걸? 내 생각은 주님의 뜻을 따라가지 못한다. 이와 같은 실패가 나로 더욱 주를 바라게 한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골 2:3-4).”
앞서도 표현한 것처럼 마라의 쓴물이 없었다면 하나님이 더하시는 단물을 맛볼 수 있었을까? 그 추위와 더위의 고초가 없었더라면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심을 알기나 하였을까? 곧 오늘의 역설은 언제나 우리의 예측을 불허하면서 하나님은 일하신다는 것이다. 누구에 대해 내 의지나 노력으로가 아닌 주의 사랑으로만, 주의 마음으로만 다가가게 하시려고…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22).
이와 같은 참 고백과 체험의 자리는 아무나의 것이 아니었다. 나는 동생과 함께 어디 낚시라도 갈 생각이다. 큰 용기를 내서 어디 멀리까지도… 우리에게 허락하신 이 길이 얼마나 값지고 소망이 있는 것인지는 아는 사람만 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이를 그저 고백이 아니라 삶으로 살면서 걸어간다는 것,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37:5-6).
그러므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오늘 시편은 이를 나로 알게 하신다.
…
나는 주를 의지하리이다
(2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