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
다 다윗의 아들이요 그들의 누이는 다말이며 이 외에 또 소실의 아들이 있었더라 솔로몬의 아들은 르호보암이요 그의 아들은 아비야요 그의 아들은 아사요 그의 아들은 여호사밧이요
대상 3:9-10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
시 56:3
언약의 당사자 남유다의 왕 다윗의 계보이다. 헤브론에서 낳은 아들 여섯과 이스라엘의 왕으로 있으면서 낳은 열세 명의 아들 명단 그리고 첩의 아들들이 있었음을 언급한다. 후반부에서 포로기 이후 다윗 후손의 명단도 기록하여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스라엘은 망하였으나 다윗 혈통은 이어져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문득 드는 생각이 자녀 교육의 심각성이다. 첫째 암논은 헤브론 생활 이전에 낳은 아들일 것이다. 암논이 이복누이 다말을 강간하는 사건으로 굴욕상쟁의 원인이 된다(삼하 13:1-12). 이어 압살롬은 암논을 죽이고(23-29), 왕 다윗을 반역하여 왕권을 잡고, 백주대낮 아버지의 후궁들을 강간하는 악행을 저지르기도 한다(15-18장). 우리에게 자식은 맡기신 기업으로 가르쳐야 할 의무가 있다. “또 그것을 너희의 자녀에게 가르치며 집에 앉아 있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하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하라(신 11:19-20).”
우리가 겪는 일련의 사건은 자녀로 인한 것이다. 유난히 그런 것인지, 수업하러 오는 아이들이나 곁에 들리는 소식으로 보면 둘에 하나는 병을 앓고 있는 것 같다. 실제 정신과 치료를 받거나 그에 준하는 심각한 상태에 놓였다. 대부분은 게임에 중독됐고 거짓말에 능하다. 자기주장이 강하여 심지어 뭐라 나무라는 부모를 경찰에 고소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하여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22:6).” 한데 우리에게는 가르칠 능력이 없다.
다윗의 경우 암논과 압살롬과 아도니야는 헤브론과 그 이전에 낳은 아들들이다. 곧 다윗은 떠돌이였고 도피생활로 궁벽하였다. 곧 신앙 안에서 자식들을 돌볼 겨를이 없었을 텐데, 지금 동생이 겪는 어려움의 원인도 한 아이의 거짓말로 빚어지고 있는 일이다. 앞서 아이가 필리핀으로 보내지기 전에 벌써 게임에 미쳐 뭐라 야단치는 것을 아이는 같잖게 여겨 엄마를 경찰에 신고했다. 이유는 술 취해서 매일 자신을 때린다는 것으로 말이다. 그런 이력과 상실을 겪으면서 간신히 신앙 안에서 붙들고 있던 것인데, 이번에 한국에 들어와 2년 반의 교육이 허사가 된 셈이다. 지금 저 아이는 옛생활로 돌아가 매일 개임에 빠져 있고, 이를 유지하려 새로운 거짓말을 지어낸다. 본인 또한 분풀이 할 곳이 필요하던 아이엄마는 아이 말만 듣고 맞장구를 치는 꼴이다. 변호사를 다섯을 샀네, 기소가 되면 방송국에 제보도 할 것이라며 여기저기 소문을 내는 모양이다. 난리도 아닌 가운데, 동생은 그저 헛웃음만 나올 뿐이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 6:4).”
부모의 책무 가운데 가장 무거운 것은 신앙으로 자식을 기르는 일이다. 한데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다윗은 헤브론에서 낳은 여섯 명의 아들 가운데 압살롬과 아도니야는 각각 이방 땅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의 소생이고 아도니야는 학깃의 소생이다. 부친 다윗이 아직 왕으로 건재할 때 저들은 왕권을 찬탈하려 하였다(왕상 1:1-10). 불신앙 가운데서 자녀 교육은 그 불행이 불을 본 듯 확연하다. 또한 솔로몬이 왕권을 이어 왕위에 오른 초기에는 참으로 신실하고 온전한 자였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엄청난 축복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저는 통치를 위한 정치적 행보에서 이방 여인들을 숱하게 아내로 받았고, 첩으로 맞은 이들은 말년에 저로 우상숭배의 도탄에 빠뜨리기도 하였다. 이후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는 갈리었고 각각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다.
성경은 엄히 일러 “또 그들과 혼인하지도 말지니 네 딸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들의 딸도 네 며느리로 삼지 말 것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가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신 7:3-4).” 하여 오늘에 이르러는 나 또한 주 앞에 주의 은혜가 아니었으면 오늘의 두 아이가 이처럼 주 앞에 바로 세워질 수 없었음을 고백한다. “너희가 만일 돌아서서 너희 중에 남아 있는 이 민족들을 가까이 하여 더불어 혼인하며 서로 왕래하면, 확실히 알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민족들을 너희 목전에서 다시는 쫓아내지 아니하시리니 그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며 덫이 되며 너희의 옆구리에 채찍이 되며 너희의 눈에 가시가 되어서 너희가 마침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땅에서 멸하리라(수 23:12-13).”
오늘 우리가 당면한 현실은 생각보다 끔찍하다. 어른들이 한눈팔고 다른 데 신경 쓰며 사는 동안 고스란히 자식들은 신앙을 잃고 세상을 추구하며 산다. 딸애와 가까운 친구 하나도 목회자 가정에서 자랐는데, 저는 공공연하게 가난이 지긋지긋하여 돈 보고 결혼했다며 지금의 자신을 한탄한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후 6:14-16).”
요즘은 이런 말을 믿는 사람끼리도 허투루 듣는다. 자식이 잘 되는 것이 그저 세상적으로 남부럽지 않은 삶으로 평가된다. 누구도 저의 영혼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다. 신앙생활이 그릇돼도 당장 자식의 기분과 행복이 우선인 것이다. 하나님은 외면하고 세상만사가 기준이 되었다. 신앙의 뿌리는 그 부모가 주를 경외하는 정도에서 가지를 뻗고 열매를 맺는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 그러기까지 요셉의 일상이 어떠하였을지, 저의 고초와 역경은 가늠할 수 없어 아득하다.
후에 우리가 주를 인정하는 데는 역시 믿음의 뿌리가 살아있을 때 가능하였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딤전 1:1-16).” 또한 자신을 신앙 안에서 바로 세워나가는 것이 일차적으로는 하나님과 나의 관계이나 그 다음은 빛과 소금으로 자식에게 또는 주변의 같이 하는 이들로 주를 알게 한다. “이뿐 아니라 그는 동일한 주의 영광과 우리의 원을 나타내기 위하여 여러 교회의 택함을 받아 우리가 맡은 은혜의 일로 우리와 동행하는 자라(고후 8:19).”
나는 누가 주의 일을 하는 것에 막연해하면 교습소를 권한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에 중요성을 강조한다. 서로 접촉점을 찾고 신앙 안에서 저를 바로 세워가는 일은 결코 ‘어쩌다 어른’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요즘은 보면 극과 극이다. 공부를 아주 잘하거나 아예 손을 놓고 예체능으로 빠지는 경우 둘 중 하나다. 같은 층의 건물에도 실용음악과 분장학원에는 아이들이 많다. 그 가운데 수학 영어를 가르치는 학원은 크기에 비해 늘 허전하다. 신앙이 없는 아이들은 차치하고 믿는다고 하는 가정의 아이들 또한 시류에 따라 진로를 선택한다. 나는 늘 강조하기를 하나님을 중심에, 말씀을 중심에, 주를 인정하는 것을 그 중심에 놓기를 자주 강조한다. “너는 그들로 하여금 통치자들과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준비하게 하며 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딛 3:1-2).”
우리는 하나님으로 즐거워하는 자녀가 되어야 한다. 하여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엡 5:10).” 한데 다들 그럴 겨를이 없다. 성경은 이론이고 말씀은 좋은 속담과 같아서 그렇다는 것이지 실제 삶에 적용하려 하지 않는다. 하고 스스로 말하기는 다들 그러고 산다는 데서 ‘나만 그런 게 아님’을 안도한다. 요즘은 누구더러 권면하려면 외면을 각오해야 한다. 스승은 사라지고 직업인으로 선생만 늘고 있다. 존경할 이는 없고 부러워할 이는 수두룩하다. 서로의 정의와 의와 선의 구분이 각각이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상실할 때 더는 사는 게 같잖다. 스스로 죽음조차 자신의 선택범주로 생각한다. 자살이 늘어가고 서로에 대한 방기와 방관이 사랑의 헌신을 대신한다. “여름에 거두는 자는 지혜로운 아들이나 추수 때에 자는 자는 부끄러움을 끼치는 아들이니라(잠 10:5).”
우리는 무엇으로 즐거워하는지.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요삼 1:4).” 우리 모두는 악의 본질로 그 근본을 죄악 중에 산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51:5).
누구도 예외일 수 없고,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이를 인정하는 것이 신앙이고, 받들어 주의 뜻을 분별하며 사는 것이 성도의 길이다. 자식 농사야말로 우리 맘대로 안 되지만 저들 앞에서 우리의 신앙이 관건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5:12).” 우리는 스스로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럼 어찌 해야 할까?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모든 육체를 가진 땅의 모든 생물 사이의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창 9:16).” 주가 더하신 영원한 언약을 붙들고 사는 일, “산들이 떠나며 언덕들은 옮겨질지라도 나의 자비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나의 화평의 언약은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너를 긍휼히 여기시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사 54:10).” 오직 우리에게는 말씀뿐이다. 스스로는 물론 자녀교육이나 다음 세대를 위한 준비로 말씀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 “그러나 내가 너의 어렸을 때에 너와 세운 언약을 기억하고 너와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라(겔 16:60).”
내가 한참 주를 멀리하고 살 때도 어릴 때 믿음 안에서 들었던 말씀이 항상 내 안에 있었다. 어떤 두려움이 찔림이 되고, 마음에 더하시는 고초로 주를 찾게 하심은 약속 때문이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 28:15).” 하여 오늘에 이르러서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이는 내가 세운 약속이 아니다. 하나님은 엄연히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출 13:22).”
오늘 우리가 겪는 일련의 사태가 더 심각한 지경으로 몰려갈 수도 있으나 우리로 이를 통해 하나님이 하시는 하나님 되심의 증인이 되게 하신다. 솔직히 나는 이런저런 우려와 염려로 안절부절 못하다 동생과 통화를 하였는데, 당사자인 저는 허허 웃으며 주가 행하시는 일에 대해 알고 있어, 그리 심각할 게 없었다. 15년의 필리핀 사역이 저로 그만큼 단단하게 하였는가, 나는 동생과 통화하면서도 면구스러워 그런 생각을 하였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원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삼상 2:30).”
내가 주를 존중히 여김은 저의 살아계심과 그에 따른 역사하심을 신뢰하는 것이다. 하면 “너희가 내 길을 지키지 아니하고 율법을 행할 때에 사람에게 치우치게 하였으므로 나도 너희로 하여금 모든 백성 앞에서 멸시와 천대를 당하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말 2:9).” 우리가 주를 믿는다 하고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회개할 줄 모르면 그 대가는 고스란히 자기 인생의 몫이다. 하여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항상 경외하는 자는 복되거니와 마음을 완악하게 하는 자는 재앙에 빠지리라(잠 28:13-14).”
참으로 악한 세상이다. 아이들은 병들어서 악한 것을 악한 줄도 모르고 답습한다. 그러던 아이가 제 엄마를 고발하면서까지 게임에 빠지고, 거짓말에 능하여 그 엄마는 그 말에 놀아나는데 보니 그이의 삶이 정갈하지가 못하였다. 그러니 나름은 산다고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하는데 오늘의 결과는 억울할 따름이라, 분풀이의 대상을 하필 자식을 맡겼던 목사에게 돌리고 있는 것이니. 정말 자기 자식을 모르고 하는 소리일까?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하리라(29:1).” 뭐라 해도 소용없는 덴 뭘 해도 소용없다. 주가 다스리시는 수밖에 우리로서는 감당할 재간이 없다.
하여 보면, 고난이 스승이라. 바른 길잡이가 되어 우리로 주 앞에 앉게 한다. 나는 누구와 만날 때면 늘 주 앞에 앉기를. 자식이고 남편이고, 사역이고 무슨 책임이고 다 내려놓고 제발 좀 주 앞에 자신을 앉히기를. 결국 고난을 당할 때 으악, 소리도 나오는 셈이다.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사람이 나를 삼키려고
종일 치며 압제하나이다
(56:1).
나는 가끔 숨을 쉬기 힘들 정도로 가슴이 억눌리고 불안에 떨 때, 저절로 튀어나오는 말이 주님, 살려주세요! 하는 외마디 비명이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5).” 당장 실현 가능한 무엇을 고집하려니까 돈이 최고라. 언제 하나님이 일하실지 막연하여서 당장 좋은 직장이 또는 든든한 인맥과 집단이 나의 소속인 듯 아등바등 기를 쓰고 모두들 열심히 산다. 돈이 최고인 까닭은 없던 교양도 생기게 한다. 그러나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지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앙모하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나니(사 31:1).” 내남없이 자신의 욕구로 시달린다.
어떤 괴로움이 은혜인 것은,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후 1:9).” 넘어뜨리지 않고 언제 주 앞에 무릎을 꿇겠나? 자식 일로든 자신 일로든 신음하지 않고 언제 주 앞에 눈물을 흘리기나 하겠나? 우리로 몹쓸 병에 들게 하는 것은 적당함이다. 보면 이는 공통적이다. 돈이 적당하고 건강이 적당하고 적당히 잘 살고 하는 일이 잘 되고, 적당히 즐거운데 굳이 하나님께 아뢰고 고할 것도 없는 영혼은 영영 주께로 돌아오기 어렵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살찜으로 그들의 눈이 솟아나며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
그들은 능욕하며 악하게 말하며
높은 데서 거만하게 말하며
그들의 입은 하늘에 두고
그들의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73:4-9).
거들먹거리며 사는 이들을 시인은 이처럼 묘사하고 있다. 좀 더 보면,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그들이 어찌하여 그리 갑자기 황폐되었는가
놀랄 정도로 그들은 전멸하였나이다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는
그들의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16-20).
고로,
내 원수가 종일 나를 삼키려 하며
나를 교만하게 치는 자들이 많사오니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
(56:2-3).
‘내가 두려운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 하는 시인의 고백이 단순하여 명료하다. “아사가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여호와여 힘이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밖에 도와 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을 의탁하옵고 이 많은 무리를 치러 왔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원하건대 사람이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였더니(대하 14:11).” 우리가 주의 이름을 의탁하고 주를 의지하고 주만이 나의 하나님이신 것을 알고 사는 일,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사 12:2).” 비로서 이와 같은 고백을 내 것으로 삼고 사는 일이 복이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혈육을 가진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그들이 종일 내 말을 곡해하며
나를 치는 그들의
모든 생각은 사악이라
(4-5).
우리를 공격하고 어렵게 하는 일, 사람, 환경과 여건이 우리로 오늘을 바로 살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히 13:6).” 오늘의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나는 우리에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선과 의를 본다. 오히려 저들을 주께 아뢰며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분명 주의 마음일 것이다. 저 아이를 어쩌나? 그 엄마를 누가 위로할까? 공격당하면서도 저들의 영혼을 두고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된다.
그들이 내 생명을 엿보았던 것과 같이
또 모여 숨어 내 발자취를 지켜보나이다
그들이 악을 행하고야 안전하오리이까
하나님이여 분노하사 뭇 백성을 낮추소서
(6-7).
이에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롬 14:1).” 그러므로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약 4:11).” 하나님이 행하신다. 우린 주만 의뢰할 따름이다. 주를 믿고 오히려 그 영혼을 주 앞에 고하는 것은,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사 25:8).” 주가 행하시고 이루실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에,
내가 아뢰는 날에
내 원수들이 물러가리니 이것으로
하나님이 내 편이심을 내가 아나이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며
여호와를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리이다
(9-10).
아니면 우리가 무엇으로 견딜까? 어떤 수로 저들을 상대할까? 아이들이 둘에 하나는 정신과적인 질환을 안고 있음에도 ‘어쩌다 어른’이 된 이들은 세상이 그저 만만할 줄 안다. 그러다 어느 날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서 모든 게 다 쓸려가야 비로서 주의 이름을 부를 것인지.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히 11:7).” 세상이 아무리 악하다 해도, 주를 경외함으로 우리는 묵묵할 따름이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서원함이 있사온즉
내가 감사제를 주께 드리리니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11-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