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대상 4:10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시 57:7-8
선민으로 계보를 살핀다면 1-3장, 다윗의 가문과 4-8장, 이스라엘의 직계 아들들과 9장으로 이어지는 바벨론 포로 귀환자들의 계보로 이을 수 있겠다. 오늘의 이스라엘의 유다지파를 다룬다. 그 이름을 일일이 나열하는 데는 하나님이 그 충성스러운 성도의 이름을 영원히 기념하시기 때문이다. 솔로몬은 “의인을 기념할 때에는 칭찬하거니와 악인의 이름은 썩게 되느니라(잠 10:7).” 이에 우린 서로 말하고 하나님은 이를 들으신다.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말 3:16).”
나는 뭐라 다그치듯 말하면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 저이가 짊어지고 가는 생의 무게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어디에 안주하고 회피하고 타협하려 드는 데서 나는 어깨를 흔들듯 보챘다. 우리가 누구인가, 하는 데서 그 마음이 굳건하기를 바랐다.
기도하는 사람은 존귀하다. 존귀하여 기도하는지 기도함으로 존귀한 것인지 나는 분간하지 못한다. 그런데 늘 작심삼일이란 말에 나는 그게 전부인가? 하고 물었다. 오늘 나를 붙드는 구절도 야베스의 기도이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대상 4:10).” 저는 기도하고 하나님은 들으셨다.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는 기도는 우리로 사는 동안에 주께 바라는 가장 근본적인 것이다.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빌 2:16-18).” 우리가 서로 기뻐함은 좋은 일을 두고서만은 아니다.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기뻐하고 기뻐한다는 말은 무엇인가?
전제란 붓다, 부어지다 하는 뜻으로 포도주나 독주를 희생제물 위에 부어드리는 것이다. 이를 기뻐한다는 말에서 세례요한의 말, 자신을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로 표현한 것에 주목한다. 전제의 제물로 드려지면 그만인 것처럼, 광야의 소리와 같이 울리다 사라지면 그만이라 해도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빌 2:15).” 우리는 누군가로 주 앞에 바로 세워지는 데 있어 부어지고 흩어지는 소리이거나 부어지는 포도주이면 되었다.
나는 저이의 마음속에 주셨을 부르심의 소망이 다시 춤을 추기를 원한다. 그 일념으로 신학을 하고 사역의 길을 김당하였을 그 어리고 순수하였던 기쁨을 다시 회복하기를 바랐다. 이제 마흔 남짓, 서로 부부가 하나가 되어 주의 일을 감당한다면 세계도 들어다 놓을 정도로 할 일이 많을 터인데… 하나는 자포자기하듯 게임에 몰두하고 자신을 방치한 삶으로, 하나는 이에 살아보겠다고 애쓰며 수고하나 몸과 마음이 지쳐 심신의 피로감을 호소하는 데 이른 것은 우리의 구부러진 소망이 우리 안에 두신 산 소망을 짓누르기 때문이었다. 저는 울었고 나의 말은 속절없었다.
‘그리스도의 날’에 우리가 자랑할 게 무엇이겠나?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않기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전 9:25).” 노인이 되어 그야말로 쉼을 바라야 할 나이인데도,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26).” 바울의 이와 같은 마음은 열정이 아니다. 물론 객지가 강박적인 희생도 아니다. 오히려 억지로라도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27).”
부어지고 말 전제에 불과하다 해도, 흩어지고 말 광야의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지금 그 자리에서 주가 두신 자신의 역할로 그 사명을 이루어가는 일에 대하여… 나는 포기하지 않기를 독려하고 독촉하였다. 나는 저이의 삶을 알 수 없어 뭐라 나무라듯 다그치면서 그 말의 정도를 알 수 없어 아득하였다. 언제까지 ‘그 지경으로’ 살아야 하는 것일까? 뭔가 새로운 구도나 환경이 주어지면 달라질까 하여 회피하려는 저에게 나는 무슨 연애하는 심정으로 붙들고 달래었다.
오늘 야베스는 기도한다. ‘나의 지경을 넓히소서.’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우리에게 주밖에 누가 더 계시겠나? 낙담과 절망이 우리 삶을 에우듯 하는 현실에서 전제로 부어짐은 무엇이고, 광야의 소리로 흩어짐은 무슨 의미가 있겠나? 나 역시 그 부분은 알 수 없어 뭐라 격려해야 할지 그 말의 시작과 끝을 알 수 없어 아득하였다. 다만 그 이후에 대하여는 주의 것이라! 우리의 몫이 아니다. 우리에겐 오늘이라 일컫는 이 한 날의 특정이 귀한 것이다. 그럴 때 힘에 지쳐 쓰러질 때,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 7:7-8).” 우리 주님의 당부다.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91:15).
우리 주님의 약속이다. 이와 같은 말씀을 의지하지 않으면 우리가 무슨 수로 이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있을까? 정작 내가 회피하려 저를 그만 오라 할까, 당분간 쉬라 할까 하였는데… 모르겠다. 내 마음이 강하게 이끄시는 것은 저로 참고, 기를 쓰고, 할 수 있는 만큼 오라 하였다. “내가 그 삼분의 일을 불 가운데에 던져 은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슥 13:9).”
나는 저이에게 말하기도 문제가 없고 그 어려움이 없다면 그게 더 무서운 일인 것을 말해주었다. 성경 중에 나를 가장 서늘하게 하는 대목은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롬 1:24).” 주가 나를 그냥 내버려두신다는 데서 아찔하다. 이는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22-23).” 스스로 지혜롭다 하는 이상 별 수 없다. 누구 말도 뭐라 이르는 권면도 소용이 없다. 오히려 어리석어 썩어질 것, 오락과 쾌락-식탐과 게으름과 안일함과 나태함으로 스스로를 짐승과 같이 두고 사는 일이다.
어찌 그 지경이 되었을까?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21).” 일찍이 저들이 소망하고 기뻐하였던 ‘처음 사랑’을 잃은 것이다. 성경은 엄히 경고하기를,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계 2:4).” 안다, 저의 수고와 애씀과 몸과 마음이 지쳐 탈진에 이르기까지 수고함을 안다.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3).” 그러나 문제는 잃어버린 처음 사랑이다. 이에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5).” 아! 이를 찾아 회개-기도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부여하신 사명, 그 촛대를 옮겨버리신다는 데서 어찌 아니 두려운가?
그럼에도 살만하다면 별 수 없는 일이겠으나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4).” 저이는 이 말씀에 억울할 것이다. 나름은 왜 구하지 않고, 왜 기도하지 않아겠나? 나름은 눈물로 호소하고 애원함으로 탄식하고 바랐을 텐데, 저의 기도가 무색함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고, 뜻이 이루어지길’ 바라기보다, 남들처럼 혹은 남부럽지 않게 살기를 바랐던 것은 아닐까? 하나님이 아니어도 되는 기도, 안 믿는 자들도 소원하고 바라는 것들을 두고, 과연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시는 덴 다 그 이유가 있겠다.
어제도 와 있는 동안 아이가 돌봄 교실 가기를 싫어하며 떼를 썼다. 학교도 가기 싫어하다 한 시간을 늦게 등교하였다. 그러한 아이의 요구, 기도를 들어주는 부모가 과연 온당하겠나? 오히려 야단치고 일체의 타협이 있을 수 없는 요구다. 게임만 하고 먹고 싶고 자고 싶을 때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둔다면, 이것이 저주이고 재앙이지 어찌 축복이겠나? 나는 저이에게 좋은 말로 좋다, 좋다 할까? 싫은 소리로 뭐라 나무랄까? 물었다. 예수님의 지적은 그것일 거였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이런 말씀 앞에 억울해할 게 없다. 그 구하는 것이 도리어 우리 영혼을 망치는 것인데, 이를 어찌 들어주시겠으며 설령 들어주신다면 그것이 두려운 일 아니겠나? 주님은 이어 말씀하시기를,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이것이 주님의 뜻이다(요 16:24). 오늘 시인이 구한다.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57:1).
저는 사울을 피해 굴에 숨어 있을 때에 이와 같은 기도를 글로 적었다.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우리가 사는 동안 주의 은혜가 아니면 무엇을 사는가? 남편의 사랑? 단란하고 화목한 가정? 자식이 잘 됨으로? 뜻하는 대로 일이 형통하여서? 이 모든 것은 기준이 아니다. 바람이 지나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는 것처럼… 하다못해 귀뚜라미도 기온이 24도로 내려가면 기를 쓰고 운다. 구애를 하는 것이다. 곧 겨울이 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물며 노상 지금의 이 적당함이 축복이라 여기며 안일하게 머물려는 우리에게,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하는 시인의 기도는 함축하는 바가 많다. 곧 나이 많은 부모의 마지막 때를 염두에 두고 대비해야 하고, 자신의 건강이나 그 나이를 평생 갈 것처럼 장담해서는 안 될 문제다.
어제도 나는 저이에게 저들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적당함-내버려두심에 있다고 말해주었다. 왜 그 모양인데도 어찔하고 두려운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일까? 하고, 나는 다그치듯 물었고 저는 이와 같은 압박에 질겁하며 도망치려 하였다. 나는 억지로 붙들 수 없으나 다시 생각하기를 간곡하게 부탁하였다. 우리에게는 주의 은혜가 있지 않는가?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 중에 계시었다.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하여금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의 사랑과 그의 자비로 그들을 구원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사 63:9).” 그런데 우리의 지금 태도는 어떠한가?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였으므로(10).” 이는 용서받지 못하는 죄로 규정하셨다. 하여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
곧 우리가 슬퍼해야 하는 일은 용서함을 받을 수 있는 죄가 있고 더는 용서하심을 받을 수 없는 죄도 있는데,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막 3:29).” 성령을 훼방함은 무엇일까? 그 안에 더는 주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다.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주를 뒷전에 모시고도 아무렇지 않는 데 따른 결국이다. 초대교회 아나니야와 삽비라가 왜 죽었나?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행 5:3).” 저들이 헌금을 떼먹어서가 아니라, 이를 속여 성령을 무시함이다.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히 10:29).”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2).
정말로 하나님을 알고 믿고 두려워하기는 하는가? 하는 나의 질문은 모욕을 주려는 게 아니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지금의 심각성이 무엇인지 정말 모르겠다는 소린가? 이는 누구의 문제나 탓이 아니다. 이 땅에서의 혈연관계는 하나님이 잠시 동안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울타리로 두신 바 그게 전부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 29:25).” 지겹고 몸서리치면서도 그의 사랑을 희구하는 것은 내재된 두려움 때문이다. 주를 더욱 바라고 의뢰하려는 의지가 없어서다. 여자로서 남편의 사랑을 받고 싶고 어머니로서 자식이 잘 되는 것에 기쁨을 누리고자 하는 것인데, 이는 본능이다. 하면,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를 너의 거처로 삼았으므로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91:9-11).
정작 우리 가는 길을 지키시는 이는 하나님 나의 구주시다. 이를 위하여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누가 우릴 이만큼 사랑하고 위하겠나?
땅을 돌보사 물을 대어
심히 윤택하게 하시며
하나님의 강에 물이 가득하게 하시고
이같이 땅을 예비하신 후에
그들에게 곡식을 주시나이다
(65:9).
오늘도 평안히 안고 눕는 것은 주의 은혜뿐이다. 돈이 아니고 사람의 사랑으로가 아니다.
그가 하늘에서 보내사
나를 삼키려는 자의 비방에서
나를 구원하실지라 (셀라)
하나님이 그의 인자와
진리를 보내시리로다
(3).
이를 알았던 다윗은 굴속에 숨어서 주께 구한다. 주를 인정하는 기도다. 주는 늘 그랬던 것처럼 그리하실 것이다. 하여,
내 영혼이 사자들 가운데에서 살며
내가 불사르는 자들 중에 누웠으니
곧 사람의 아들들 중에라
그들의 이는 창과 화살이요
그들의 혀는 날카로운 칼 같도다
(4).
그렇다 해도,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5).
우리가 먼저 주의 나라와 의를 구한다는 것. 오늘 내가 처한 상황을 두고 나의 요구로 가득한 기도만 쏟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저가 나를 이렇게 그냥 죽이신다 해도 나는 주께 아뢰겠다는 것, 주를 신뢰함이었다. 하면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놓으리로다(사 26:19).” 말도 안 될 일이 벌어질 것이다. 다 죽어 더는 소망이 없을 줄 알았던, 저의 영혼과 그 신랑을 영혼을 주께서 붙드시고 살리실 것이다. 아무리 세상이 어떠하다 해도,
그들이 내 걸음을 막으려고
그물을 준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
그들이 내 앞에 웅덩이를 팠으나
자기들이 그 중에 빠졌도다 (셀라)
(6).
이와 같은 주의 돌보심과 인도하심을 앎으로,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7).
오직 나는 주만 바라겠다는 것.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8).
나는 저를 들고 깨우듯 다그치고 몰아세워 정신 차리라고 외쳤다. 우리의 병적인 회피와 안일함에 대하여, 죄성에 따른 합리화와 타협에 대하여,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무릇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
(9).
우리가 주를 바람은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0-11).” 곧 오늘의 이 모든 고초는 주가 먼저 알고 계시던 것이다. 그럼에도 오히려 이를 권장하심은,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부디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두고 주저하며 눌러앉지 않기를. 그렇게 나의 세월은 그럴 때마다 십 년씩 허비되어 흘러갔던 것을 비통하게 여기며, 저들의 지금 그 한참 때를 주께 드려 복에 복을 더할 수 있기를. 하면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사 35:10).”
평소보다 안정제를 더 먹었던 날이어서 나는 저녁을 먹고 가정예배를 드리고는 쓰러지듯 잠에 빠져버렸다. 그리고 다시 이른 새벽에 말씀 앞에 앉히고 주의 이름을 부르며, 누구를 생각하다, 주의 한없는 은혜를 바라고 또 바랄 뿐이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18).” 그리하여,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