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그 때에 성령이 삼십 명의 우두머리 아마새를 감싸시니 이르되 다윗이여 우리가 당신에게 속하겠고 이새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함께 있으리니 원하건대 평안하소서 당신도 평안하고 당신을 돕는 자에게도 평안이 있을지니 이는 당신의 하나님이 당신을 도우심이니이다 한지라 다윗이 그들을 받아들여 군대 지휘관을 삼았더라
대상 12:18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시 65:4
다윗이 사울을 피해 블레셋 땅 시글락에서 망명생활을 할 때이다. 베냐민 지파 23명의 용사가 소개되고(1-7절), 광야 도피 생활 당시에 나아온 용사들의 명단이 기록되고 있다(8-18절). 갓 지파가 11명(8-15절), 나머지는 베냐민과 유다 지파의 용사들이었다(16-18절). 다윗이 블레셋과 함께 사울을 치러가려는 시늉을 하다 블레셋 방백들의 반대로 시글락으로 돌아올 때 그에게 나온 시므온의 므낫세 지파의 용사 7명이 마지막에 기록되었다(19-22절).
23절부터는 다윗이 왕으로 즉위할 때 헤브론에 집결한 유다지파 6800명, 시므온지파 7100명, 레위지파 8322명, 베냐민지파 3000명, 에브라임지파 20800명, 므낫세 반 지파 1800명, 잇사갈 지파에서 지휘관 200명과 그 부하들, 잇사갈 지파에서 50000명, 납달리지파에서 37000명, 단지파에서 28600명, 아셀지파에서 40000명, 요단 동편의 두 지파 반에서 120000명이 참가하고 있다. 즉위식에 참석한 군대 수는 33만 명으로 정리된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다윗의 지지 기반인 유다, 시므온, 베냐민의 수가 적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7장에서는 언급되지 않은 최북방 두 민족 단과 스블론에서도 군대를 파견하였음을 본다. 온 이스라엘이 다윗의 즉위를 축하하고 기뻐하였던 것을 알 게 한다.
작은 일에서나 큰일에서 하나님을 중심으로 모일 때 하나님으로 인한 열매를 맺는다. 광야 생활을 할 때 모여든 수가 그때는 겨우 600명 정도에 불과했다. “다윗과 그의 사람 육백 명 가량이 일어나 그일라를 떠나서 갈 수 있는 곳으로 갔더니 다윗이 그일라에서 피한 것을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말하매 사울이 가기를 그치니라(삼상 23:13).” 그때도 하나님은 저를 지키시고 ‘그를 그의 손에 넘치기 아니하셨다!’ “다윗이 광야의 요새에도 있었고 또 십 광야 산골에도 머물렀으므로 사울이 매일 찾되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넘기지 아니하시니라(14).” 이러한 때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의 도우심으로 산다는 일은 귀하다.
이와 같이 말씀을 들고 주 앞에 앉을 때는 알겠다. 주를 생각하고 주를 의지하면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런데 어제는 필리핀 동생의 일이 점점 더 어려운 국면을 마주하면서, 솔직히 나는 그 결과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는다. 그래봐야 무슨 일이 있겠나? 어찌돼든 그뿐이고, 우리가 주를 바라면 그것으로 전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내가 왜 이처럼 속이 타고 가슴이 답답한가? 했더니, 내 안의 분노 때문이었다. 어떤 화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생각 같아서는 똑같이 되갚아 주고 싶고, 이참에 아주 단단히 혼쭐을 내주고 싶은 마음이 강하다. 한 마디로 억울한 것이다. 그런데 통화하다보면 오히려 동생은 그 아이와 아이엄마를 걱정하고 있는데, 특히 그 아이의 장래를 두고 안타까워하는 소리에 나는 자꾸 화가나는 모양이었다. 물론 목사로서, 또 공들여 건사하였던 아이니까 그러는 게 맞겠지만.
저녁상을 물리고 가정예배를 드리는데 찬송가 338장,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을 부르는데 갑자기 눈물이 핑, 도는 것이다. 괜히 서럽고 화도 나고 속상한 것이다.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을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
천성에 가는 길 험하여도
생명 길 되나니 은혜로다
천사 날 부르니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
당시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던 미국 대통령 맥킨니가 암살 당할 때, 저는 1901년 미국의 제25대 대통령으로 암살당해 죽었다. 임종을 지켜본 담당 의사는 이렇게 말하였다. “대통령께서는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이게 나의 평생 기도였다오. 하고 말한 후 조용히 눈을 감으셨습니다.”고 전하였다.
이 찬송은 본래 5절까지 있는데 우리 찬송가에서 4절까지만 수록 되었다. 5절의 가사는,
내 생명 끝난 후 천국 가서
주 앞에 나아가 찬양하리
영원히 영원히 늘 찬송하면서
주님을 섬기기 원합니다
이 아침, 나는 솔직히 내가 힘든 이유가 일의 경중이나 그 결과에 대한 염려 때문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즉 나는 솔직히 화가 나고 속상한 것이다. 나름 15년의 필리핀 사역이었다. ‘문제 있는(?) 아이들’을 받아 홈스테이를 하고 교회를 이루면서 현지인들과 우리나라 성도들의 가정을 연결하고, 단기사역을 돕던 일이 오늘에 이르러 이런 국면을 맞으니까, 이 화는 고스란히 하나님께 향한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어떻게 이러실 수 있나요? 하고 반감도 있고, 말도 안 되는 소리에 같이 맞서 시시비비를 가린다고 하면 오히려 ‘그 아이’로 인한 손해배상과 정신적 피해를 요구해야 하는 쪽은 우리였다.
가령 우리 집으로 오는 공부방 아이 중에 자폐성 분노조절장애가 있는 아이의 경우, 오후께는 집에 있으면서 수업하는 것을 보는데 그야말로 가관이라. 나는 덕이 없고 경솔한 사람이라 수업 중인데 아이를 제지하고 돌려보내라며 면박을 주기도 했다. 그럴 때면 아내도 속상해서 나더러 그냥 들어가 있으라고만 한다. 어제도 길게 동생의 상황을 듣고 뭐라 격려는 했으나 속은 들끓어서 화딱지가 나는 것이다. 그야말로 이러려고 목사로 세우셨나? 하고. 목사는 무슨 호구인가? 싶은. 나는 속상하고 화가 나서 주께 입을 삐쭉거리며 성질을 낸다.
오전 일찍 누구 문자를 받는데, 저는 매일 같은 일을 당하면서 기도를 부탁한다. 나는 그때마다 말로 기도로 말씀으로 위로하고 다독인다. 그러고 나면 속상한 것이다. 아니, 하나님 앞에 화가 나는 것이다. 어찌 모른 체 하시는가? 그처럼 기도를 부탁하고 도움을 구하는데 왜 들을 척도 안 하시는가? 하고. 같은 내용의 일로 여전히 고통당하면서 힘에 겨워 기도를 부탁하는 저의 심정은 오죽하겠나? 내가 조금만 힘이 있다면 어떻게든 도와주겠는데… 하나님은 뭘 하고 계시는 것일까? 하는.
오늘 말씀의 계수와 그 인원을 찾아 적다가 문득 든 부분이 “그 때에 성령이 삼십 명의 우두머리 아마새를 감싸시니 이르되 다윗이여 우리가 당신에게 속하겠고 이새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함께 있으리니 원하건대 평안하소서 당신도 평안하고 당신을 돕는 자에게도 평안이 있을지니 이는 당신의 하나님이 당신을 도우심이니이다 한지라 다윗이 그들을 받아들여 군대 지휘관을 삼았더라(대상 12:18).”
곧 우리 하나님은 끝까지 책임지신다!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사람들이 스룹바벨의 손에 다림줄이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다니는 여호와의 눈이라 하니라(슥 4:10).” 나는 동생을 만나 위로 하고 같이 낚시라도 가고 싶은데, 덩달아 빌빌하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공연히 하나님 앞에 화를 토하는 것이다. 오히려 그곳에서 생활하였던 아이들이 장성하여 무고로 고소하겠다는 둥 누구는 앞서 대응을 해서 정신을 차리게 해야 한다는 둥 이런저런 말이 오가는데… 사모는 자꾸 눈물을 흘리고 잠을 이루지 못한다. 동생은 태연한 척 굴지만 가족들까지 2차 고소인 명단에 올렸다고 하니 황당하기도 하고, 그 속이 오죽하겠나?
분간 없는 아이 말만 듣고 아이엄마 또한 그간 인생의 분풀이를 여기에 쏟으려는지, 자식을 빤히 알면서도 방조하고 동조하고 묵인하는 것은 오히려 그 부모이다. 그 지경인 것을… 한데 찬송은,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하는데 왜 가슴이 답답하고 오히려 서글픈 것일까?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마 13:31-32).”
비록 우리가 가는 길이 어리석어보여도 주의 뜻을 구하고 따르는 게 복이었다. 머리로는 입으로도 알겠는데, 마음 안 쪽 어딘가의 슬픔이 또 화가 내 안에는 응어리처럼 여태 남아 있던 것이다. 나는 이 지긋지긋한 견딤이 싫어서 죽어도 목사는 안 한다고 했던 것인데, 그럴 자격도 인격도 안 되는 자를 이처럼 끌어다 이런 꼴을 당하게 하시니까… 생각 같아서는! 나는 욕도 잘 하고 누굴 응징하고 미워하고 그 이상으로 갚아주는 데는 자신 있다. 누굴 대할 때 믿고 신뢰하고 좋으면 간 쓸개도 다 빼주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상종도 않고 오히려 재 뿌리며 살았다. 한데 이제 성경은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롬 4:20-22).”
도대체 믿음이 아니고는 이 길을 갈 수가 없다. 눈으로 볼 수도 손으로 만질 수도 없는 하나님을 오직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 11:26).” 과연 저들처럼 살 수 있을까?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마 10:37-38).”
오늘 시편은 그러한 나의 심정을 아시는지,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
(65:2).
궁극적으로 오늘 이 모든 상황으로 나는 주 앞에 이처럼 엎드린다. 주께 그 억울함을 호소한다. 내 안에 여전한 미움과 싫음, 저주와 거부를 인정한다. 나는 누굴 사랑하고 싶지 않다. 저들이 어떻든지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나는 어릴 때 겪은 여러 날의 가난과 억울함과 부친의 무모한(?) 사역의 길을 혐오하며 자랐다. 한데 성경은,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100:4).
과연 나는 그럴 수 있을까?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 13:5).” 이제는 어엿한 목사가 되어 이와 같은 묵상글도 쓰고 누구를 권면하기도 하고 성경공부도 가르치고 설교도 하고 주의 영광을 위해 산다고 하면서, 과연 나는 정말 그러한가? 내 안에 여전히 어떤 서러움과 미움이 있었다. 딸애가 어제는 회사에서의 일을 퇴근하고 돌아와 말하는데, 앞서 생각으로는 주의 뜻에 맞게 말해주어야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은 온데간데없어졌다. ‘너도 되받아버려! 참지 말고 엿 먹으라 그러고 때려 쳐!’ 하며 오랜만에(?) 본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다들 자기 쪼대로 사는 것이다. 뭐라 할 것도 참고 견딜 것도 잘 지내볼 일도 없다. 나는 본심이 악하다.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도 믿지도 않는다. 좋을 때야 뭔들 못할까? 그러다 다 그런 것이다.
내가 왜 속이 답답하고 가슴이 눌리는가 했더니, 머리에 쓰고 있는 면류관이 너무 무거워서인가? 한데 주님은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하시는 말씀 앞에서 나는 공연히 속상하다. 화도 난다. 누가 기도 부탁을 할 때면 내가 오히려 민망하다. 주는 대체 뭘 하고 계시는 것일까? 저 친구는 구체적으로 누구 실명도 말하면서 내가 알지도 못하는 누가 어떻게 괴롭히는지, 소상히 말한다. 그게 어디 내가 알으라고 하는 소리겠나? 주께 기도를 부탁하며 구체적으로 말하는 것인데, 무슨 일로 회사 사람들 누구 누가 어떠한지 구체적으로 말하는 것을 들을 때면 왜 내가 속상하고 답답한 것일까? 나름 위로 하고 격려하고 말씀을 적어 보내며 그럴수록 주를 바라자고 다독인다. 그리고는 돌아앉아 하나님 앞에서 투덜거리는 것은 나다. 주님 보시죠? 다 아시죠? 하고 저가 보낸 이름을 들이댄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죄악이 나를 이겼사오니
우리의 허물을 주께서 사하시리이다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3-4).
주를 바라며 주의 말씀으로 산다는 일은 이중적인가? 나는 내 마음이 온전할 수 없는 것으로 주 앞에 송구하면서 또 화도 난다. 다른 분들은 어떠하신가 모르겠으나 나는 솔직히 그리 경건하지 않다. 지금도 여전히 인간에 대한 사랑도 애정도 없다. 어디 절로 들어가 속세와 등지고 자신의 신과만 함께 하고 사는 중들의 삶이 부럽다. 예전처럼 수도원이 활성화되어 혼자 고립된 생활을 자처하며 인간들 등살을 피해 살 수 있다면 나는 그곳에서 살고 싶다.
한데 바울의 갈등처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롬 7:18).” 나야말로 지겹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19).” 이를 숨기듯 속으로 삼키고 사는 꼴이라, 때론 사기꾼 같다. 나는 내가 늘 가식적이다. 가끔 아낸 '당신 목사님이세요!' '쫌!' 하고 일갈한다. 욱, 하고 치밀 땐 내 자신이 인간 같지 않다. 그러다보니 속은 끓고 마음은 답답하여 견딜 수가 없는 것인지.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20).” 아, 내 안의 이 죄를 어쩌면 좋을까? 나의 본심은 실제의 나와 다른가, 보이는 나와 다른가.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21).” 그러니 내가 나 하나 이길 수 없는 것인데, 누가 누굴 위해 기도하며 어찌 저 한 영혼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을까?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22-23).” 그러니 바울의 절규와 같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 나는 죽을 때까지 이런 나 자신과 다투어야 할 것이다. 누구처럼 의연할 수도 없다. 한데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땅의 모든 끝과 먼 바다에 있는 자가
의지할 주께서 의를 따라
엄위하신 일로 우리에게 응답하시리이다
주는 주의 힘으로 산을 세우시며
권능으로 띠를 띠시며
바다의 설렘과 물결의 흔들림과
만민의 소요까지 진정하시나이다
(6-7).
누구에게 이런 말을 속 시원하게 털어놓을 수 있을까? 아마도 내 속을 다 안다면 저들은 실망하여 치를 떨고 멀리할 것이다. 그럼에도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 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느 9:6).” 그러므로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또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을 주시나이다
주의 은택으로 한 해를 관 씌우시니
주의 길에는 기름 방울이 떨어지며
들의 초장에도 떨어지니
작은 산들이 기쁨으로 띠를 띠었나이다
초장은 양 떼로 옷 입었고
골짜기는 곡식으로 덮였으매
그들이 다 즐거이 외치고
또 노래하나이다
(11-13).
부디 나의 날들도 그러하기를. 주의 사랑으로 충만하여 내 안에 이는 갈등조차 잠잠하여지기를. 할 때에 “그들이 주리거나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며 더위와 볕이 그들을 상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이가 그들을 이끌되 샘물 근원으로 인도할 것임이라(사 49:10).” 말씀 앞에 눈물을 글썽거리며,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121:5-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