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궤가 오벧에돔의 집에서 그의 가족과 함께 석 달을 있으니라 여호와께서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내리셨더라
대상 13:14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가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그의 인자하심을 내게서 거두지도 아니하셨도다
시 66:20
주의 인자하심을 구하며 사는 삶이 복되다. 다윗은 예루살렘으로 천도한 후 70년이나 방치하던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오기를 바란다. 왕위에 오른 때에 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오히려 사사시대보다 못한 혼탁한 사회를 바로 잡기 위해서도 하나의 구심점이 필요하였다. 오늘 본문을 볼 때면 늘 눈에 드는 인물이 둘 있는데 하나는 웃사이고 하나는 오벧에돔이다.
우선 웃사는 참 억울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나님의 궤가 “기돈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들었더니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듦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치시매 그가 거기 하나님 앞에서 죽으니라(9-10).” 그런 상황에서 순간 손을 뻗어 자기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궤를 보호하려 붙든 것인데, 하나님의 진노가 다소 어렵다. 그런데 이는 두 가지 잃기 쉬운 우리의 판단을 돌아보게 한다. 하나는 스스로 어찌 해보려 하는 것과 순간적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상실하는 것이다.
스스로 어찌 하려 하는 것에 대하여, “내가 내 마음을 정하게 하였다 내 죄를 깨끗하게 하였다 할 자가 누구냐(잠 20:9).” 우린 누구도 우리 스스로 우리의 연약함을 극복할 수 없다.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주의 인자하심이 아니면 우린 누구도 의롭다 하심을 얻을 길이 없다. 이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의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마침내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렘 17:9-11).”
곧 자기 스스로 어찌 해보려 하는 일보다 어리석고 악한 마음도 없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의는 의롭다고 하신 이의 전적인 인정하심으로 인한 것이지,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3-5).” 그러므로 나는 웃사를 볼 때면 순간적으로 이는 어떤 정의 혹은 스스로 옳다 여기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되새기게 된다.
그리고 다른 부분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하나님이 스스로 이루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끝으로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배웠으니 곧 너희가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살전 4:1).” 이는 곧 “그리하여 너희가 내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행하면 너희의 하나님 앞에 거룩하리라(민 15:40).” 우리로 의롭다 하심도 이를 위해 값을 치르기까지 주의 거룩하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다.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속량하시며
그의 언약을 영원히 세우셨으니
그의 이름이 거룩하고 지존하시도다
(시 111:9).
그러니 우리가 함부로 예단하고 판단할 수 있는 그런 분이 아니시다. 이는 우리 몸에 밴 궁리로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롬 12:9).” 이를 위해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2).” 특히 요즘처럼 정보가 넘쳐나는 때에 몇몇 유명인이나 성공한 강사의 말 한 마디가 성경의 권위보다 앞설 때, 즉 어떤 판단과 기준이 될 때 우리의 이성적인 판단은 마비가 된다. 그러므로 나의 모든 판단을 주께 맡긴다는 것은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욥 23:8-9).”
특히 나는 일련의 상황을 지켜보면서 내 안에 요동치는 수많은 직벽 같은 마음을 마주하고 선다. 이는 바람을 등지고 세차게 밀려드는 파도와 같아서 집채만 한 것도 있고 거친 산세보다 험한 것도 있다. 한데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10).” 하는 신앙이 아니면, 즉 주의 인자와 거룩하심이 아니면 우리가 무엇으로 이를 막아설 수 있을까? 나는 내 안에 이는 마음조차 감당하기 어렵다. 늘 조리돌림을 당하듯 괴로운 까닭도 실은 마음의 일이다. 나는 육신과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살던 진노의 자녀였다. 이를 앎으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위해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잠 17:3).” 곧 나의 마음을 단련하심인데, 오늘 시편에서도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으며
우리를 끌어 그물에 걸리게 하시며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매어 두셨으며
사람들이 우리 머리를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과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
(66:10-12).
하나님이 이 또한 주도하심이었다. 이는 먼저 주의 거룩하심을 알게 하려 하심이고 또 우리로 주와 같이 거룩하게 하려 하심이다. 이에 “내가 그 삼분의 일을 불 가운데에 던져 은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슥 13:9).” 곧 하나님은 우리로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알게 하려 하신다. 하지만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그러므로 믿음은 이를 증명한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나는 이제 새삼 이와 같은 말씀의 의미를 알 것 같다. 어찌 믿음이 없이는 어려운가했더니, 저마다 자기방식대로 어떤 일을 개선하거나 추진하려 하기 십상이다. 더러는 주의 이름을 앞세우나 실상은 그 안에 자신을 그만큼 자신하는 교만이었던 것이다. 지금 나의 마음의 요동침을 보면서 아, 나야말로 새삼 나의 믿음 없음을 두고 주께 간구하게 하신다.
이를 위해 우리 안에 주가 두신 소망이 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 5:5-6).” 이를 오늘 본문에서 오벧에돔으로 다시 읽는다. “하나님의 궤가 오벧에돔의 집에서 그의 가족과 함께 석 달을 있으니라 여호와께서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내리셨더라(대상 13:14).” 저는 그리 알려진 인물이 아니다. 성경에서도 몇 번 언급되지 않는다. 한데 특징은 저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하나님의 복이 함께 증거된다는 사실이다.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삼하 6:11).”
어떻게 저는 복을 상징하는 인물이 된 것일까?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신 28:2-6).” 이는 결국 무엇을 청종하는지, 곧 말씀을 그 중심에 두고 살 때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이보다 더 신나는 삶이 또 있을까? 그의 말씀에 순종하면 말이다.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잠 4:8).”
이는 매우 어려운 일로 실제 어떤 어려움을 당했을 때 우린 저절로 웃사와 같이 내 손이 먼저 나간다. 본능적으로 내가 어찌 하려 하는 마음이 나를 주도하게 되어 있다. 어제 묵상글을 다시 읽으면서 내가 지금 여느 때보다 불안해하는 것은 실상 분노하는 것이다. 어떤 억울함, 이를 내가 어찌 나서서 응징하지 못하는 마음 때문인 것을 알고 울었다. 나의 마음이 얼마나 ‘바벨론의 강변’ 같은지, 온통 이 땅에서의 이성과 상식으로 접근하려는 나의 마음과 나의 마음에 계신 주의 영이 충돌하는 것이었다. 그로 인하여 나는 괴로워하는 것이다. 나는 동생이나 누나나 누가 그 아이와 아이영혼을 나아가 아이엄마와 저의 영혼을 두고 안타까워할 때 나도 모르게 어떤 반감이 일면서, 지금 우리가 저들 사정을 생각하며 주 앞에 오히려 저들을 향한 긍휼하심을 구할 때인가? 하는 억하심정도 들곤 하는 것이다.
곧 나의 이 이중적인 마음, 죄악 되고 억울하기만 한 마음을 두고 주 앞에 용서를 구하였다. 나의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저질스러움을 두고 송구하였다. 그래서 그런가 요즘은 우연히 부르는 찬송으로도 눈물이 고인다. 가정예배로 부른 찬송이 <겸손히 주를 섬길 때>인데,
겸손히 주를 섬길 때
괴로운 일이 많으나
구주여 내게 힘 주사
잘 감당하게 하소서
인자한 말을 가지고
사람을 감화시키며
갈길을 잃은 무리를
잘 인도하게 하소서
구주의 귀한 인내를
깨달아 알게 하시고
굳건한 믿음 주셔서
늘 승리하게 하소서
장래의 영광 비추사
소망이 되게 하시며
구주와 함게 살면서
참 평강 얻게 하소서
-아멘, (새찬송가 212장)
‘작사자 워싱턴 글래든(Washington Gladden, 1836-1918) 목사는 1836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의 포츠그로브(Pottsgrove)에서 교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882년 제일감독파교회의 초빙을 받아 가서 1914년 은퇴할 때까지 목회하였다. 1891년 런던에 본부가 있는 세계감독파교회총회에서 회장에 당선되었고, 이어서 1902년 미국감독파교회총회의 회장이 되었다. 그는 사회정의 구현을 주장하는 사회개혁가로 널리 알려졌다.’
우리가 주의 일를 한다는 것은 자신을 위해 사는 삶을 포기하는 것이다. 물론 자신을 위하고 돌보는 일도 귀한 사역이라 하면 사역이겠으나, 이는 안 믿는 자들도 그리하고 타종교인들도 그리할 수 있다. 할 때,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곧 부르심과 보내심은 일정한 거리를 둔다. 부르심은 그 자리에서 묵묵히 주를 인정하며 사는 일이라 한다면 보내심은 주를 따름으로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7).”
그러므로 제자의 삶은 일반적인 삶과 다르다. 이는 엄연하여서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2-14).” 바울 사도의 수고도 단지 부르심에서 그친 것이라면 굳이 이럴 것까지 뭐 있겠나? 한데 우리를 부르심은 곧 보내심을 전제로 한다. 믿음은 곧 행함으로 그 전제를 다하듯이 신앙이란 막연한 위로와 위안의 정도가 아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현재의 모든 일을 수정하더라도, 오벧에돔과 같이 주의 궤를 자기 집에 모심으로 그 생활반경은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딛후 2:21).” 하다못해 손님이 집에 온다고 할 때 평소 널브러져 있던 것을 치우고 청소하고 저를 맞을 준비를 하는 것이 예의인데 하물며 주를 모시고 산다면서 나 몰라라 한다면 이는 말도 안 된다. 오죽하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 18:8).”
믿음만으로 즉 부르심만으로 모두가 잔치에 들어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초대함을 받은 사람은 많아도 이에 응하는 사람은 적다. 이는 마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13:24).” 반드시 언젠가는 자신도 초대 받았음을 인식하고 뒤늦게 달려와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들어갈 수 없을 자가 많다고 하셨다. 이는 참 두렵고도 무서운 말씀이다. “롯의 처를 기억하라(17:32).” 하신 말씀과 같이 함축적이다. 우린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 것일까?
온 땅이여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낼지어다
(66:1).
우리가 잃어버리고 사는 소리, 즐거운 소리.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6-17).” 찬송은 감사의 소리다. 늘 수시로 혹은 잠시라도 얼마나 자주 이를 잊고 사는지에 따라 우리 영혼은 황량하다. 푸석하여 모래사막 같은 심령으로 사는 경우도 있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지어다
야곱의 모든 자손이여
그에게 영광을 돌릴지어다
너희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여
그를 경외할지어다
(22:23).
곧 우리의 즐거운 소리는 그리할 수 없는 때에도 주를 찬송하는 것이다. 이는 주를 경외하는 데서 인다.
그의 이름의 영광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찬송할지어다
(66:2).
이것이 우리의 사명이고 살아가는 이유이다. “여호와께 노래하라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가난한 자의 생명을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셨음이니라(렘 20:13).” 오늘 역대상을 읽으며 새삼 오벧에돔을 마주하고 있자니, 저는 모든 생계나 난데없는 삶의 변화에서 이를 영광으로 삼았다. 저의 집에 하나님의 궤가 모셔졌다. 이제 모든 삶의 방식도 생각도 행동거지도 그에 초점을 맞춰 바뀌어야 한다. 그러는 동안 주의 축복의 손길을 저들은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8).”
엄연히 그럴 형편이 아니어서,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17, 19).” 현실은 그렇다 해도 주가 하실 일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삶이란 전형적으로 이런 게 아닐까?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 13:15).”
우리의 찬송은 입술의 열매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절대 실패하심이 없다.
하나님이 바다를 변하여
육지가 되게 하셨으므로
무리가 걸어서 강을 건너고
우리가 거기서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였도다
그가 그의 능력으로 영원히 다스리시며
그의 눈으로 나라들을 살피시나니
거역하는 자들은 교만하지 말지어다 (셀라)
(66:6-7).
오늘 시편이 나로 내 마음을 다스리시게 하심을. 내가 나의 어쩔 수 없음을 주께 고함으로 더는 일희일비(一喜一悲) 하지 않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롬 4:20-22).” 우리의 의는 믿음에서 난다는 것. 나는 비록 약하고 둔하여 “슬프도소이다.” 그러나 “주 여호와여 주께서 큰 능력과 펴신 팔로 천지를 지으셨사오니 주에게는 할 수 없는 일이 없으시니이다(렘 32:17).” 그러므로 나의 남은 모든 날들이 주를 찬송하고 바라고 의뢰하는 데만 쓰여지기를. 여러 삶의 우여곡절이 하루도 쉬지 않고 생활을 위협한다 해도, 그것을 도리어 축복으로 받은 ‘오벧에돔의 복’과 같이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그 어느 것도 우리로 주의 사랑에서, 그의 인자하심에서 끊을 수 없는 것을.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9).” 이에,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가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그의 인자하심을
내게서 거두지도 아니하셨도다
(2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