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땅에 그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
너는 힘을 내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힘을 내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대상 19:13
홀로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
시 72:18-19
암몬 왕 하눈이 다윗의 사신을 모욕하였다. 요압과 아비새가 암몬과 아람 연합군에 맞서 전쟁을 벌인다. 그러나 저들의 병력이 우세함으로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인다. 두 형제는 서로 격려하고 주의 도우심을 확신한다. 하여 암몬과 아람 연합군을 상대로 저들은 승리를 거둔다. 이때 형 요압이 동생 아비새에게 격려하는 내용이다. “너는 힘을 내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힘을 내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대상 19:13).”
이는 신약에서도 보이는데,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롬 16:3-4).” 우리 성도들이 서로 위하고 의지함으로 하나님의 자녀들로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빌 4:3).”
곧 우리에게는 반드시 어려움 뒤에 안식이 오고, 슬픔 뒤에 기쁨이 온다. 슬픔과 기쁨은 요요와 같아서 우리 안에 수시로 들락거린다. 이때,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시 30:5).
곧 우리의 역경과 안식을 모두 주관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이를 인정함으로 고난 중에도 기쁨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10).” 예수님도 이르시길,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요 16:20).” 하고 오늘의 근심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묵상하게 한다.
이는 기이한 것이라,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21).” 어떻게 그런 고통을 겪고도 다시 또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는지 신기한 것처럼,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22).” 곧 오늘 우리로 근심하게 하는 것으로 우리는 참 기쁨을 간구하며 주의 뜻을 살핀다. 이를 시편에서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126:5-6).
하고 ‘성전으로 올라가는 노래’ 가운데 찬송으로 불렀다. 그러므로 우리는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5).” 이는 성경의 기본 지침이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전 3:4).” 모든 게 다 때가 있는데, 오히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7:2).” 슬픔과 고난이 우리로 참 기쁨과 안식을 찾아가게 한다.
그것이 주는 교훈은 더욱 귀하였다. 단순히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3-4).” 그리하여 우리들로 하여금 주의 위로와 참 평안을 알게 한다.
이에 오늘 요압과 아비새 형제의 격려는 서로 힘을 돋우며 용기를 더함으로 주의 뜻에 복종하게 한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 여기서 마귀는 동시에 우리 안에 근심과 염려를 쏟아넣는 일과 같다. 이에 우리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 하나님께 순복할 수 있는 상대가 되어주는 것, 분명 성경은 우리의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고난이 변하여 즐거움이 될 것이라 약속하셨다.
뿐만 아니라 슬픔 중에도 기쁨은 가능하여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하고 바울은 전한다. 그런데 앞에 고백하는 내용을 보면 ‘항상’ 기뻐하라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3:18).” 즉 바울을 슬프게 하는 것은 ‘정말 그리스도인이 맞나?’ 싶을 정도로 교회와 주의 일을 가로막는 경우에서다. 바울은 분명 자신을 본받으라, 하고 먼저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는 모습을 보인다.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17).” 이는 우리의 슬픔까지도 주의 영광을 나타내는 데 있어 산 증거가 되는 것을 알게 한다.
바울은 ‘저들로’ 인해 슬퍼하고 눈물을 흘리면서도 그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여호수아도 “그들의 마음이 완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그들을 진멸하여 바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들을 멸하려 하심이었더라(수 11:20).” 곧 우리가 사는 날 동안 주께 받는 은혜는 능력이다. 다시 말해서 은혜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생한 능력이다. 은혜가 아니면 모든 기쁨도 즐거움도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는다.
바울은 고백하기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자신의 자신됨을 인정하였다. 이는 복된 것이다.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살후 1:11-12).”
그래서일까? 가령 나는 오늘 이른 새벽에 낚시를 간다. 동생이 필리핀으로 돌아가기 전에 한 번은 시간을 내어 같이 낚시를 하기로 한 것이다. 내가 멀리까지 갈 수가 없어서 동생이 집 근처 가까운 저수지로 오는데, 친구도 추석 연휴를 앞두고 온다고 했다. 그러자니 먼저 묵상할 시간이 없어 나는 일부러도 시간을 내어 그에 앞서 묵상글을 쓴다. 왜 이렇게까지 하고 싶은 것인지 나는 모른다. 다만 내가 받은 은혜 때문이다. 그 은혜가 더하시는 능력으로다. 은혜를 잊어버리지 않기 위한 나의 우선적인 선택이다. 내가 아는 나는 한 번 예외를 두면 번번이 이를 이용하려 든다. 순간 은혜를 잊고 그릇 된 길로 가기 십상이다. 이를 여러 번 경험했다. 나야말로 작심삼일이고, 조석간으로 마음이 달라진다. 하여 나는 우선적으로 묵상글을 쓴다. 필사적으로 이를 지킨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시키는 방법’이다. 기쁨과 슬픔이 요요 같다면, 은혜 가운데 사는 일과 은혜 밖으로 밀려나는 일도 순식간이다. 하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다른 방법을 나는 모른다. 은혜의 능력으로 나는 이 글을 쓴다. 하여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11:26).” 이처럼 말씀을 먼저 가까이함이 복되고 귀한 은혜다. 오늘 솔로몬의 시편도 이를 알게 한다. 솔로몬의 시는 공개적으로 두 편인데 72편과 127편이다. 그런 중에 저자를 솔로몬으로 보지 않고 ‘솔로몬을 위한 시’로 보는 경우도 있다. 어쨌든 그건 중요한 것 같지 않고, 다만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우선적이고 필수적인 것은 분별력이란 사실,
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공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그가 주의 백성을 공의로 재판하며
주의 가난한 자를 정의로 재판하리니
의로 말미암아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리하리로다
(72:1-3).
솔로몬은 자신이 왕이면서 동시에 왕의 아들이었다. 자신을 지칭하여 ‘왕의 아들’로 표현하는 동시에 다윗의 혈통으로 오실 메시아를 가리키는 복합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하고 하나님은 먼저 물으셨다(왕상 3:5). 이에 솔로몬은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9).” 하고 구하였다. ‘듣는 마음’은 곧 ‘분별력’으로 이는 주의 백성을 위함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었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든지라(10).” 그러자 하나님은 그 외에도 더 많은 은혜를 주셨다. “내가 또 네가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왕들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13).” 이처럼 은혜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이를 볼 때 우리의 분별력은 단순한 판단력이 아니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 14:12).” 다시 말해 사람으로 사람을 아는 데도 그 속을 알 수가 없다. 사람은 본래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느니라(13).” 그러니 우리 마음은 은혜가 아니면 순간적으로 슬픔과 즐거움이 동시에 들락거린다. 감사와 기쁨이 노여움 가운데 있다. 하면,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76:10).
위와 같은 고백은 슬픔 가운데 기쁨이 있고, 고난 중에도 은혜의 충만함은 있음을 알게 한다. 이를 주관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네가 얻은 모든 것을 가지고 명철을 얻을지니라(잠 4:7).” 우리 이해나 상식으로는 어렵다. 그러므로 우리가 받은 은혜의 능력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7-19).” 곧 우리가 구할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한다. 반드시,
그의 날에 의인이 흥왕하여
평강의 풍성함이
달이 다할 때까지 이르리로다
(72:7).
곧 우리의 승리는 보장된 것이다. 이는 주가 먼저 이기심이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비록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그 환난이 우리를 굴복시킬 수는 없다. 아무리 세상이 어떻다 해도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21:31).” 승리는 주의 것이다. 하면,
모든 왕이 그의 앞에 부복하며
모든 민족이 다 그를 섬기리로다
(11).
하고 단정하고 이에 따른 부수적인 것들로,
그는 궁핍한 자가 부르짖을 때에 건지며
도움이 없는 가난한 자도 건지며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불쌍히 여기며
궁핍한 자의 생명을 구원하며
그들의 생명을 압박과 강포에서 구원하리니
그들의 피가 그의 눈 앞에서
존귀히 여김을 받으리로다
(12-14).
이것이 은혜의 실체다. 은혜는 능력이다. 그리스도의 승리는 모든 세계를 통치하시고 있다. 세계는 그 앞에 굴복하였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9-11).” 이것이 은혜의 최종 결말이다. 우리의 관심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곧
그의 이름이 영구함이여
그의 이름이 해와 같이 장구하리로다
사람들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니
모든 민족이 다 그를 복되다 하리로다
(17).
곧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요일 1:2).” 다시 말하면 은혜의 증거는 예수시고, 은혜의 결말도 예수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이것이 은혜의 결정체이다. 고로,
홀로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
(18-1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