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다윗이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
대상 21:8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마련하셨으며 주께서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주께서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나이다
시 74:16-17
역대상의 3부로 1부는 인류의 기원 아담에서부터 포로귀환까지 선민의 계보를 다룬다(1-9장). 2부는 다윗 왕조 중심으로 통치와 정복 사업을 다룬다(10-20장). 그리고 오늘 제 3부에 해당하는 21장부터 29장까지는, 다윗이 인구 조사를 하여 하나님을 노하시게 한다(21). 이어 성전건축 준비와 종교, 행정 조직을 정비한다(22-27). 또한 다윗이 유훈을 남긴다(28). 마지막으로 솔로몬에게 즉위를 물려준다(29).
그런데 1절에 보면 “사탄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하고 시작한다. 군대장관 요압이 나서 이를 반대하지만 다윗은 요압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구조사를 실시한다. 이는 사무엘하 24장 1-9절 내용과 병행한다. 다만 사무엘서는 인구조사를 하게 한 주체가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오늘은 사탄이 주체가 된 것과 요압이 보고할 때 불만을 품고 레위와 베냐민을 뺀 것을 달리한다. 여기서 이 같은 사실을 사무엘서와 역대기서가 달리 기록한 것은 모순 같지만 의도하는 바가 다르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사무엘서는 모든 일의 주권자가 하나님이시라는 의식과 범죄 한 이스라엘을 징계하기 위해 다윗을 격동하여 인구조사를 하게 한 사탄을 제지하지 않은 것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음을 알게 한다.
그런데 역대기서는 이를 직접적으로 표기하며 그 장본인이 사탄인 것과 하나님을 향한 신앙으로 선민의 영광을 회복하게 할 과업이 본인들에게 있음을 알게 하려는 의도에서 이를 상술하였다. 그동안 역대기서는 포로 생활에서 귀환한 백성을 대상으로 하여 다윗 왕의 치부와 가문의 치부를 과감하게 생략해왔는데 이 부분을 통해서 다윗의 치부를 드러내어, 실제 이를 회개할 때 성전건축의 터가 될 장소와 이후 하나님의 용서와 더욱 높은 신앙의 경지를 알려준다고 하겠다.
곧 우리는 누구도 의로울 수 없는 인간으로 ‘의인은 한 사람도 없다.’는 전제를 알게 된다. 그럼에도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대상 18:6, 13).” 하는 궁극적인 주의 은혜를 알게 한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겸손한 사람이었고 주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행 13:22).” 저는 하나님을 의뢰하고 경외하는 신앙으로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있었다. 그럼에도 저는 하나님의 뜻에 반하여 인구조사를 하였고, 성적으로 밧세바를 범하면서 간음과 살인교사와 이를 은폐, 외면하는 죄의 자리에 들기도 하였다.
곧 아브라함도 야곱도 모세도… 누구라도 하나님 앞에 죄인 아닌 사람이 없었으나 저는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저는 이스라엘이 되었으며, 저는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다. 즉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그러니까 우린 누구라도 구원 받아야 할 대상이다. 이를 위해 예수께서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셨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10).” 이를 오늘 역대상은 되돌아보게 한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5:6).”
이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3-24).” 하면 우리는 사탄의 교묘한 충동을 분별하고 이를 방어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첫 번째로는 용서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너희가 무슨 일에든지 누구를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고후 2:10-11).”
두 번째로는 유혹을 이길 힘을 길러야 한다.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11:3).” 마지막으로 하나 더, 우리는 이를 위해서 하나님의 전신갑주가 필요하다.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엡 6:11).”
물론 사탄의 모든 활동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탄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욥 1:12).” 즉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에 악한 영을 보내시매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하였으니(삿 9:23).” 그렇듯 하나님은 악한 날을 위해 악인을 사용하신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잠 16:4).”
이는 모두 우리로 거룩하게 하려 하심이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어둠에 속했을 땐 빛을 싫어한다. 구원이 누구에게는 망하는 것이만 누구에게는 그리스도의 향기다.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고후 2:15-16).” 곧 이를 감당할 수 있는 것이 능력이고 은혜이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17).”
그러므로 회개는 더 큰 기회다. 은혜의 골이 깊어지게 한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눅 19:8).” 이와 같은 반응을 누가 저에게 줄 수 있었겠나? 저가 죄인임을 깨닫고 주 앞에 고할 때 은혜의 능력은 발휘된다.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 순교하면서도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 7:60).” 곧 자신을 죽이는 자들을 위해 빈다. 중보의 최고봉이라 하겠다.
오늘 본문에서 또 하나 주목하게 되는 것은 오난의 타작마당이다. 이를 주의 성전의 터전으로 삼으시는 데 있어 앞서 다윗의 범죄와 회개와 번제를 드리는 일이 전개되었다. 하고 다윗은 그곳을 공식화한다. “다윗이 이르되 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이요 이는 이스라엘의 번제단이라 하였더라(대상 22:1).” 곧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사함을 받는 일에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방법으로다. 스스로 반성하고 뉘우쳐 찔림을 감당하지 못해 자기 마음 편하자고 하는 게 회개가 아니다. “여호와의 천사가 갓에게 명령하여 다윗에게 이르시기를 다윗은 올라가서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21:18).” 오늘 본문의 주권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다.
이를 사도 요한은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곧 우리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심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4:6).” 전적으로 예수로 인함이다. 다른 방법은 없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곧 교회의 기틀이 되는 다윗 성전도 오난의 타작마당으로 하나님이 미리 예비하신 곳에서 하나님이 이루시는 방법으로 시행되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롬 3:25-26).” 그러므로 우리가 알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 5:18-19).” 이를 위하여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20).”
이를 오늘 시편에서 아삽의 교훈으로 들어보면 죄는 그만큼 치명적이고 하나님과의 단절을 가져온다(74:1-11). 곧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한데 이를 가벼이 여길 때 우리에겐 소망이 없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그리하여 앞서도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우리에게 시련을 허용하신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버리시나이까
어찌하여 주께서 기르시는 양을 향하여
진노의 연기를 뿜으시나이까
(74:1).
이와 같은 부르짖음은 그 고난이 한계치를 넘을 때 비로소 나오는 탄식이다. “성읍에서 나팔이 울리는데 백성이 어찌 두려워하지 아니하겠으며 여호와의 행하심이 없는데 재앙이 어찌 성읍에 임하겠느냐(암 3:6).” 이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 요셉과 그 형들의 관계이서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 45:5).” 요셉이 이와 같은 신앙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숱한 ‘험악한 세월’을 살았는지 우리는 잘 안다.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히 12:10).”
영구히 파멸된 곳을 향하여
주의 발을 옮겨 놓으소서
원수가 성소에서 모든 악을 행하였나이다
(3).
결국 하나님은 완전한 파멸 가운데서 새로운 소망을 틔우신다. 그리하여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103:4).
우리의 죄성은 그냥 하자보수 정도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아예 뼈를 다 발려내듯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겔 37:5-6).” 우린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모든 게 다 죄성을 안고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심을. 사탄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선을 이루시는 데 사용하시는 것임을.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마련하셨으며
주께서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주께서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나이다
(74:16-17).
우리는 다만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 2:7).” 그러므로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9).” 그럴 수 있고 그래야 한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과 직결되었다. “그가 어둠을 일으키시기 전, 너희 발이 어두운 산에 거치기 전, 너희 바라는 빛이 사망의 그늘로 변하여 침침한 어둠이 되게 하시기 전에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라(렘 13:6).”
우리의 지나간 것은 더 이상 값을 물어야 할 죄의 삯은 지불되었으나 이를 자기 안에서 해결하지 않으면, 여전히 그 습성으로 시달림을 당한다. 그러므로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가령 나는 어제 몇 년째 보는 맞은 편 학원 선생의 인사를 받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먼저 말을 건네고 인사를 한 것이다. 요즘은 인사도 흠이 되고 사람에게 부담이 되는 일이라, 서로 고개를 숙이고 외면하며 지내기를 몇 년이 되었는데 느닷없는 저의 인사에 나는 당황하였다. 나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서 먼저 인사하지 못한 것을 사과하고 다음엔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네겠다고 말하며 돌아섰다.
별 것 아닌 아주 사소한 일에서도 나는 주의 긍휼하심을 느낀다. 먼저 다가가지 못하고 인사를 건네지 못하는 것을 되짚어보며 “주의 크신 긍휼로 그들을 아주 멸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도 아니하셨사오니 주는 은혜로우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느 9:31).” 아, 나는 주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가 없구나, 하는 것을 새삼 다시 느꼈다.
추석 당일 날 아침, 우리 가족들은 모두 추석 감사예배를 주일 오후 각자 섬기는 교회에서 주일예배를 마친 뒤에 오후에 드리기로 하였다. 추석이 토요일이라, 주일예배를 우선하는 것인데 그나마 필리핀 가족과 우리 가족은 줌으로 추석 예배에 참석하기로 하였다. 이는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하신 데 따른 것으로, 오난의 타작마당을 주의 성전으로 먼저 예비하심과 같이 우린 모두 주의 주권 아래 있음을 인정하는 일이겠다.
주의 멧비둘기의 생명을
들짐승에게 주지 마시며
주의 가난한 자의 목숨을
영원히 잊지 마소서
(19).
오늘 시인의 간구가 오래 내 입가를 맴도는 것도 그런 이유다.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사 64:6).” 나는 단 한순간이라도 주의 은혜와 긍휼하심이 아니면 참으로 구제불능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한데 이와 같은 부끄러움으로 나로 하여금 주의 은총을 더욱 바라게 한다.
그 언약을 눈여겨 보소서
무릇 땅의 어두운 곳에 포악한 자의 처소가
가득하나이다 학대 받은 자가
부끄러이 돌아가게 하지 마시고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가
주의 이름을 찬송하게 하소서
(20-21).
주께 구하고 또 아뢰는 것은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딤후 1:10).” 주의 은혜로다. 인생의 밤과 어둠이 모두 걷히고 주의 낮고 빛이 비추이는 그날까지, “우리 하나님이여 광대하시고 능하시고 두려우시며 언약과 인자하심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여 … 오늘까지 당한 모든 환난을 이제 작게 여기지 마옵소서(느 9:32).”
하나님이여 일어나 주의 원통함을 푸시고
우매한 자가 종일 주를 비방하는 것을 기억하소서
주의 대적들의 소리를 잊지 마소서
일어나 주께 항거하는 자의 떠드는 소리가
항상 주께 상달되나이다
(22-23).
그러므로
그들을 위하여 그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 크신 인자하심을 따라 뜻을 돌이키사
그들을 사로잡은 모든 자에게서
긍휼히 여김을 받게 하셨도다
(106:45-4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