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얼굴의 광채를 우리에게 비추소서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가문의 우두머리와 천부장과 백부장과 왕을 섬기는 관원들이 그들의 숫자대로 반이 나누이니 각 반열이 이만 사천 명씩이라 일 년 동안 달마다 들어가며 나왔으니
대상 27:1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켜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우리에게 비추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시 80:19
열두 반열의 군사편제와 지방행정관 임명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이스라엘 각 지파의 족장과 천부장, 백부장과 왕실 관리를 이만사천 명씩 열두 반열로 나누고 한 해에 한 달씩 교대로 이스라엘을 방비하게 하였다. 여기서 특이한 부분은 레위지파는 특별한 지역을 할당받지 않았는데도 두 명의 행정관을 두었다. “레위 사람의 지도자는 그무엘의 아들 하사뱌요 아론 자손의 지도자는 사독이요(17).” 이는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저들의 비중이 컸다는 것을 반증한다. 다윗의 인구조사는 미완료된 상태로 종결되었다(23-24).
결국 우리가 가장 안전한 때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다. 저들은 이방민족들이 사방을 두르고 있어 언제 어디에서 침투가 이루어질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저들의 이만사천 명의 상비군은 약소하기까지 하다. 다윗은 전쟁에 능하였고 외부 침입의 위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소규모 상비군만을 온전히 주를 의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가령 “그에게서 마병 천칠백 명과 보병 이만 명을 사로잡고 병거 일백 대의 말만 남기고 다윗이 그 외의 병거의 말은 다 발의 힘줄을 끊었더니(삼하 8:6).” 저는 전리품으로 얻은 것에서 말의 힘줄을 끊고 적당한 군사력만을 유지하였다. 이는 저들의 안전이 말과 마병에 있는 게 아님을 다윗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세어도
스스로 구원하지 못하는도다
(시 33:16).
곧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 주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 복이다.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잠 18:10).” 그 이유는 이김이 주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21:31).” 결국 우리가 지키고 살아야 하는 것은 변방의 수비가 아니고, 우리 자신의 주를 의지하는 마음이었다. 충분히 더 많은 군사력으로 국방을 수비할 수 있었지만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늘 날 많은 국가가 국방비로 엄청난 지출을 쏟아 붓고 있지만 늘 상대적인 것이어서 안보딜레마는 다른 대안이 없어 보인다.
이때 우리를 눈동자처럼 지키시는 분은 하나님이신 것을,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신 32:10).” 곧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121:5-8).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하여 우리는 담대함으로 우리의 대책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히 13:6).” 결국 신앙은 균형이다. 사람으로 사는 동안 이런저런 염려와 우려가 우리를 늘 엄습하지만 또한 그런 가운데서 주의 지키심이 선제한다는 것을 분명히 붙들어야 한다.
1절의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 더 느낄 수 있는 게 교회 중심의 생활과 생업을 위한 사회 활동의 조화이다. 다윗은 국방을 위해 이만사천 명의 군사를 조직 개편하였을 하였으나 이도 각각 한 해 한 달씩만 그 책임을 맡고 남은 열한 달의 시간은 자신의 생업을 유지하게 하였다. 곧 생업에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도 국가방위를 책임지게 하는 것이다.
성경은 마지막 때가 가까울수록 모이기에 힘쓸 것을 강조하셨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5).” 이는 때가 악함으로 일정한 기준과 절제가 필요함을 알게 한다. 그러면서도 자기 산업을 떠나 흩어지지 않도록 하고 있다. “군주는 백성의 기업을 빼앗아 그 산업에서 쫓아내지 못할지니 군주가 자기 아들에게 기업으로 줄 것은 자기 산업으로만 할 것임이라 백성이 각각 그 산업을 떠나 흩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겔 46:18).” 왕은 권력을 이용하여 백성의 기업을 빼앗지 말아야 하고, 백성도 자신의 생업을 귀히 여김으로 부정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결코 어디에 따로 모여 모든 생업을 작파하고 기도만 하라고 성경은 가르치지 않는다. 기도는 생활의 균형을 유지하며 또한 믿음을 온전히 보호하는 데 필수적이다. “대답하여 이르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군인들도 물어 이르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눅 3:11, 14).” 곧 천국이 가까웠고 지구 종말이 내일이라 해도 오늘은 오늘의 생업에 충실한 것이 신앙과 삶의 균형인 것이다. “너는 엿새 동안에 네 일을 하고 일곱째 날에는 쉬라 네 소와 나귀가 쉴 것이며 네 여종의 자식과 나그네가 숨을 돌리리라(출 23:12).” 곧 쉼과 일은 하나님이 우리에 규정하신 리듬에 따라야 한다. 이는 “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이는 외인에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살전 4:11-12).”
그러므로 오늘 1절의 말씀은 여러 번 곱씹음으로 그 의미가 깊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그에 따른 합당한 열매가 필요하지만 이를 위해서도 어느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삶의 균형이 중요하였다. 푸르고 잎사귀만 무성해도 안 되고,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마 21:19).” 옷술을 크게 달지 말고, 높은 자리를 탐하지 말며, 대접 받기를 좋아해서는 안 된다.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23:5-7).” 이를 주님은 책망하셨다.
곧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7:16-18).” 열매로 나무를 알듯 삶의 균형 잡힌 모습에서 우리의 신앙은 건강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빌 1:11).” 하면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골 1:10-12).”
보면 늘 사탄은 삼킬 자를 찾는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8-9).” 당장의 고난은 우리 영혼을 유익하게도 한다는 사실을 때론 망각한다. 이를 모면하고 없이 하려는 데만 급급할 때가 많다. 이는 사탄도 안다. 목자를 치면 양떼는 흩어지게 돼 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 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슥 13:7).” 우리가 이를 경계할 수 있는 두 가지다.
오늘 본문으로 이해하면 하나는 주의 의지가 주께 있음을 알고, 다른 하나는 이를 믿음으로 주신 바 오늘의 상황을 주 안에서 받아들임으로 순종하는 것이다. 이래저래 마음이 어렵다. 필리핀 동생 일은 여전히 내안에서 어떤 분함과 같이 있고, 곧 장모의 큰 수술과 우리 집으로 모셔야 한다는 부담과 마음 같지 않은 아내의 염려와 엉뚱한 허영으로, 또한 아들의 분가와 내 육신의 고단함에까지… 사탄의 공격은 따로 파괴적이다. 그럼에도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 1:22).”
부디 나도 그러할 수 있기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7-10).” 이에 이와 같은 말씀을 자주 되뇌고 입에 머금는 것은 지금이 전부가 아니다. 눈에 보이는 실상이 다가 아니다.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살전 5:8).”
이를 알았으면 그리하여 다윗은 하나님을 의뢰함으로 국방을 적절하게 각 생업에 지장이 없도록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오늘 내게 필요한 것은 무엇에 대해 골몰하기보다 이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나의 판단과 기준을 주의하는 것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삼하 5:10).”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4:13).” “이 모든 일에 전심 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딤전 4:15).” 이는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벧후 3:18).”
때론 마음이 어렵고 몸은 어려워서 의기소침하고 갑자기 침묵 속으로 빨려드는 것 같지만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눅 22:28-30).” 우리 주의 원대하신 목적이 있음을. 이에 오늘 시편에서 주의 인도하심과 돌보심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이를 알지 못하고 사뭇 가벼이 여길 때 어떤 큰 문제가 있는지를 알게 된다.
요셉을 양 떼 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귀를 기울이소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이여
빛을 비추소서
(80:1).
이를 아는 덴 주가 비추시는 빛 가운데 있어야 한다. 요셉을 지칭하여 부른 것은 북이스라엘의 대표해서이다. 또한 이스라엘의 목자로 주를 지칭한 것은 현재 저들이 망하여 능욕당함을 완곡어법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앞에서
주의 능력을 나타내사
우리를 구원하러 오소서
(2).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요셉의 아들들이다. 요셉과 그의 아들들은 야곱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다. 이들을 위해 주의 능력을 나타내시라 하는 시인은 B. C. 722년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한 북이스라엘을 향해 무엇보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함을 절실하게 간구하고 있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빛을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
(3).
주의 얼굴빛, 곧 우리가 이 땅을 살며 항상 대면하고 그에 서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행 11:18).” 우리로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는 기회는 그뿐이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머리로는 이를 알겠고, 마음으로도 이를 인정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실제 삶에서 삶으로 당면한 현실에서 나는 늘 초라하다. 내심 마음이 어렵고 복잡하다. 우울감이 사로잡고 무력감에 치를 떤다. 한데 또 누가 장문의 문자로 오늘에 겪고 있는 일들을 적고 그에 따른 기도를 부탁한다. 나는 심지어 저를 괴롭힌다는 누구누구의 이름을 적어보며 주 앞에 아뢴다. 그런 가운데 놓여 주의 이름을 부르고, 부족한데도 나 같은 자에게 중보를 부탁하는 저의 심정도 헤아려본다. 안 됐고 답답한데 측은지심으로는 내가 감당할 수 없다. 누굴 마음에 두고 위한다는 일은 주의 영이 함께 하지 않으시면 허사다. 모든 게 나를 먼저 쥐고 흔들기 일쑤다. 그러할 때,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백성의 기도에 대하여
어느 때까지 노하시리이까
주께서 그들에게
눈물의 양식을 먹이시며
많은 눈물을 마시게 하셨나이다
(4-5).
한데 나는 어떻게든 저의 오늘의 고충이 저로 더욱 주를 가까이 하고 주 앞에 자신을 내어놓고 맡기는 자리로 나아가기를 바란다. 돌이키지 못하고 사는 죄는 눈물의 창고만 쌓아갈 뿐이다.
우리를 우리 이웃에게
다툼 거리가 되게 하시니
우리 원수들이 서로 비웃나이다
만군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회복하여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
(6-7).
오늘 저의 사정을 흡사 주께 아뢰는 표현으로 적합한데, 원수들의 비웃음을 주가 아시오니 주께서 또한 구원하여 주시기를. 여기서 한 포도나무가 넝쿨을 강까지 뻗어 큰 나라를 이룰 것인데,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나이다
주께서 그 앞서 가꾸셨으므로
그 뿌리가 깊이 박혀서 땅에 가득하며
그 그늘이 산들을 가리고
그 가지는 하나님의 백향목 같으며
그 가지가 바다까지 뻗고
넝쿨이 강까지 미쳤거늘
주께서 어찌하여 그 담을 허시사
길을 지나가는 모든 이들이
그것을 따게 하셨나이까
(8-12).
나는 누구의 사연을 연상하다 오늘 나를 업습하는 염려와 근심을 생각하고, 이 땅을 사는 동안 끊임없이 일어나는 이와 같은 일들에 대하여…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요 15:1-2).” 궁극적으로 열매를 더 맺게 하시려고 농부 되시는 우리 주님은 우리로 이 일 또한 감당하게 하심이었다. 해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빌 1:11).”
숲 속의 멧돼지들이 상해하며
들짐승들이 먹나이다
만군의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돌아오소서 하늘에서 굽어보시고
이 포도나무를 돌보소서
(13-14).
우리는 처한 현실에서 주를 알게 된다. 주를 부르며 찾게 되고 오직 주만이 나의 구주, 나의 생명이 되심을 인정하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아, 나는 가끔 이 말씀을 입에 머금고 감격한다. 참 다행이다, 싶은 마음에 안도하기도 한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면, 주가 알아서 하실 것이고, 그런 일에 나의 조바심은 하등에 도움이 될 게 없다는 사실 앞에서 나의 무능과 무기력이 오히려 무기가 된다. 그러므로 주를 의지하게 한다. 그리하여
주의 오른손으로 심으신 줄기요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가지니이다
(15).
그러므로
주의 오른쪽에 있는 자 곧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인자에게
주의 손을 얹으소서
(17).
이는 이제 당당한 요구다. 나의 간구가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을 안다. 곧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요 15:8).” 우리의 열매는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이 되심으로 주의 이름을 위하여도 그리 행하실 것을 믿는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벧전 4:11).”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에게서 물러가지 아니하오리니
우리를 소생하게 하소서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켜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우리에게 비추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18-1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