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
다윗 왕이 온 회중에게 이르되 내 아들 솔로몬이 유일하게 하나님께서 택하신 바 되었으나 아직 어리고 미숙하며 이 공사는 크도다 이 성전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요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
대상 29:1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그러나 너희는 사람처럼 죽으며 고관의 하나 같이 넘어지리로다
시 82:6-7
다윗과 백성이 성전건축을 위하여 온 힘을 다한다. 교회를 위한 우리의 헌신과 헌물은 의무다. 다윗은 한 번도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에 소홀한 적 없고 그 사명을 수행하거나 전달하는 데 있어 게으른 바 없다. 저의 이와 같은 노력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솔로몬의 지혜와 백성들의 아낌없는 헌신으로 더해졌다. “너희는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 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롬 16:2).”
이를 우리가 힘을 모아 합력함으로 공동체는 하나가 되고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된다. 이에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고후 1:11).” 곧 우리의 헌신은 희생이 아닌 회생으로 오히려 자기 영혼을 살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낸다.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 하나님께서 택하신 바 되었으나 아직 어리고 미숙하며 이 공사는 크도다.” 하는 다윗이 솔로몬을 향한 마음이 드러난다. 한데 이는 우리 모두를 지칭한다. 우린 어리고 미숙하다. 나이와 상관없이 그러하다. 그런 우리의 사명은 ‘이 공사’ 곧 “이 성전” 건축을 위한 것인데 “이 성전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요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 하는 데 주안점이 있다.
이는 건축물로 교회를 뜻하지만 동시에 모든 성도의 사명으로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위한 우리 생의 과업이다. 하나님께 헌신하려 더 나은 직분을 사모하는 일은 성도의 성숙과 맞물린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 3:16-17).” 내가 이제 확신하는 것은 나의 부친의 헌신과 노력이다. 나의 모친의 모진 세월과 인내를 사랑한다. 어려서 저들을 다 이해하지 못할 때는 가정보다 우선하는 교회 일에 불만이 많았다. 한데 지금에 와서 나의 자산 가운데 가장 큰 유산은 저들의 가난했던 시절과 이해할 수 없는 특수한 헌신이다. 기억이 또렷한 초등학교 때부터는 나의 부친이 목회를 하셨으니까, 저의 가난은 훈장이었고 그 모진 시간은 주의 살아계심을 생생하게 드러낼 수 있는 증거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뚜렷한 목적이 가감없다.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6).” 한데 이를 나는 일찍이 나의 부모로부터 저들의 무모한 선택(?)을 통해 회상하고는 한다. 어쩌면 초등학교 5, 6학년 때로 사택도 없이 성북구 어느 단층 건물 2층에 교회를 세 얻고 사택은 옥상에 가건물로 성기게 하여 어설프게 꾸렸다. 돌아보면 그 또한 아무도 경험할 수 없는 시절이다. 또는 내가 여수 애양원에서 수술을 하고 돌아왔을 때, 난데없이 살게 된 곳이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한 나환자촌 교회였다. 역시 특이하기는 무엇과 비교도 안 된다. 그런데 가만히 그런 일들을 떠올리다 보면 앞서 준비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느낀다. 앞서 애양원에서 수술을 하게 된 것도 실은 그곳이 나환자촌으로 공교롭지만 환우들을 위해 미국인 선교사들이 지은 병원이었다. 그러니 마을은 자연스러웠고, 앞선 가난은 익숙하였다. 혼자 떨어져 있던 생황이 나의 생에 또한 유익이 아닐 수 없다.
그뿐인가? 나환자촌 교회를 떠나 인천으로 왔을 때 뜻하지 않은 시간 차로 남의 건물 옥상에서 몇 개월을 기다려야 했다. 그때도 앞서 경험했던 옥상 가건물살이가 도움이 되었다. 하나님은 느닷없이 무슨 일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기껏 개척자금을 헌금하고 같이 시작했던 이가 돌연 헌금을 돌려달라며 법썩을 떨다 교회를 떠난 경험도 훗날 성전을 건축하다 개척 헌금을 들고 사라진 어느 재정집사의 소행을 앞서 경험하게 하신 백신과 같다. 돌이켜보면 이처럼 늘 예신이 있었다. 싫든 좋든 준비할 시간은 주어졌고, 어린나이에도 이를 수용하고 순응할 수 있을 때 일은 벌어졌다. 앞서 표현한 것처럼 우리의 헌신은 희생이 아니라 회생이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38-39).” 돌아보면 나는 희생한 게 없다. 늘 그럴 때마다 새롭게 회복시킨 바 회생의 기회였다.
주는 나를 살리기 위해 나의 헌신도 요구하셨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서 나환자촌에서의 3년여 시간은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그때의 경험은 자살 충동과 누군가를 크게 사랑하였던 것으로 이와 같은 감정은 평생을 앓는 사람으로부터의 백신이었다. 중학교 시절로 기억되는데, 한참 예민하고 감수성도 어린 것들이 뭘 안다고, 주께 대한 헌신의 열망으로 서원하고 함께 세례를 받을 때는 또 얼마나 꺼이꺼이 울어댔는지 모른다. 서로가 민망할 정도로 은혜로운 울음이었다. 내가 죄인인 것을 그때처럼 절실하게 인정하였던 것 같다. 일곱 명의 아이들 가운데 반 이상이 서원을 하였고 그 가운데 둘이 목사가 되고 하나가 선교사가 되고 하나가 사모가 되었다. 당시 자살시도가 주었던 교훈은 살아야 하는 이유가 주께 있음을 알게 하였다. 아차, 했으면 버려질 수도 있는 목숨이었다는 하나님은 그리 내버려두지 않으셨다. 그때도 보면 백신 같은 또래들이 있었고, 처음으로 깊은 사랑의 감정을 느꼈던 소녀의 기도와 오랜 편지가 있었다.
돌아보면 은혜 아닌 게 없다는 말, 나는 이를 나보다 더 실감할 사람은 없을 것 같다. 매순간 하나님은 살아계셨다. 곁에서 나로 알게 하셨다. 어려서 미처 다 알지 못하는 순간에도 저는 하나님 되심을 숨기지 않으셨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 3:30).” 하는 세례 요한의 고백을 내가 사랑한다. 어쩌다 그리 나온 말이 아니다. 나는 저의 전적인, 알 수 없는 느낌,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확신을 이해할 것 같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사 40:3, 막 1:3).” 곧 우리는 이와 같이 흩어져 사라지는 소리 같아도 존재하였던 것만으로 실제이고 실체가 된다.
오늘 시인의 표현처럼 우리는 신이라. 하나님의 자녀로 신과 같은 존재로 일컫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로서의 소임이 분명해서다.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82:6).
이를 알면 알수록 “이 날에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자기 백성의 양 떼 같이 구원하시리니 그들이 왕관의 보석 같이 여호와의 땅에 빛나리로다 그의 형통함과 그의 아름다움이 어찌 그리 큰지 곡식은 청년을, 새 포도주는 처녀를 강건하게 하리라(슥 9:16-17).” 곧 우리에게 향하신 주의 섭리와 인도하심은 그 당사자만이 안다. 어찌 나의 경험만이 특이하고 기이할까? 이는 모든 성도의 공통된 고백으로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땅이 싹을 내며 동산이 거기 뿌린 것을 움돋게 함 같이 주 여호와께서 공의와 찬송을 모든 나라 앞에 솟아나게 하시리라(사 6:10-11).”
곧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왜 여기에 살다 가는지, 어디로 가서 어떤 삶에 동참하게 될 것인지… 성경은 수시로 암시하고 증거하고 예언하고 계신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나는 일련의 사건을 두고 그 상황에서 오는 나의 육의 생각과 영의 생각이 다름으로 신음하는 것인데, 어제는 문득 ‘그렇게까지 하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인자하심을 인정하게 되었다. 물론 우울하였고 기분이 가라앉아 어두웠다지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누가 나로 이와 같은 싸움에서 이겨내게 할 수 있을까?
아는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22-23).” 그러니 내 안에 볶이고 애끓는 마음 또한 당연하게 여겨졌다. 그러다 어린시절을 떠올리고 있었고, 나의 부모가 겪었을 그 세월의 인고에 저절로 감탄하는 마음도 들었다. 주의 살아계심은 이처럼 삶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25).” 바울의 고뇌와 고투를 어찌 남의 이야기로 치부하고 말겠나?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 6:26).”
우린 저 새들보다 귀하다. 우리로 주를 더욱 사랑하게 하시려고 이처럼 여러 형편과 사정을 조성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놀랍다. 두려운 것은 오히려 내버려두실 때이다. 밍밍한 가운데 주의 사역을 감당하거나 하는 둥 마는 둥 하는 일보다 끔찍한 저주는 없다. 감히 누구더러 권하기도 오늘의 그런 어려움이 도리어 주의 사랑을 실감하며 사는 산 증거가 되기를 바라였다. 고충과 슬픔이 없기를 다들 바라지만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이와 같은 찬송이 누구의 것이 될까? 우리의 찬송과 누릴 영광은 비례한다. 오늘의 감사는 장차 누릴 면류관의 무게와 같다. 감사가 형통함에서 온다고 여기는 것은 아직 어린아이의 일이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
이에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12).” 바울은 주의 사랑을 감사하면서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2-13).” 아, 이와 같은 고백이 내 것이기를. 하여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10).” 그러므로 저는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11).”
그런 저는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3:8-9).” 아 이 놀라운 고백이 결코 아무나의 것은 아니었다. 오늘 다윗은 묻는다. “오늘 누가 즐거이 손에 채워 여호와께 드리겠느냐(대상 29:5).” 저마다 가장 귀히 삼고 사는 “내 마음이 내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므로 내가 사유한 금, 은으로 내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드렸노니(3).” 곧 우리에게 값진 것은 드릴 수 있는 그 마음이다. 헌물은 물론 드릴 게 없어 이 몸 바친다는 찬송은 결단코 아무나의 것일 수 없는 은혜이고 축복인 것이다. “백성들은 자원하여 드렸으므로 기뻐하였으니 곧 그들이 성심으로 여호와께 자원하여 드렸으므로 다윗 왕도 심히 기뻐하니라(9).” 우리의 드려짐은 이 세상 그 무엇보다 하나님의 영광이 되신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오늘 내가 드릴 수 있는 것, 나의 이 시간과 어떤 슬픔까지도. 드릴 게 없어 슬퍼하고 애통하는 마음뿐이라 해도,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51:17).
하나님께 모자란 게 무엇일까? 우리의 그 어떤 헌물이 주를 감동하게 하실까? 내가 가진 것 중에 얼마쯤 드려야 할까? 정작 주가 바라시는 것은 나의 상한 심령이라! 나의 슬픔과 고통을 세상으로 위로함을 받으려고 하기보다 주의 위로와 평안을 구하는 데 바람이니,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100:3-4).
이는 순종이었다. 내 생각이나 이성적인 판단으로는 부당하기만 한되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켜지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사 1:19-20).” 곧 우리가 칼을 삼킨 것 같이 스스로를 찌르는 까닭은 순종함으로 그의 아름다운 소산을 삼키지 않아서이다. “나의 나 된 것이 주의 은혜로 된 것”이라는 고백이 내 것이 되어 산다는 일은 전혀 새로운 날들이다(고전 15:10). 이로써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하는 놀라운 지점에 이를 것이다.
하여 오늘 다윗은 감사로 주께 영광을 돌린다. “다윗이 온 회중 앞에서 여호와를 송축하여 이르되 우리 조상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을 받으시옵소서(대상 29:10).” 곧 우리 조상 이스라엘의 하나님, “우리 조상들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것을 주의 백성의 심중에 영원히 두어 생각하게 하시고 그 마음을 준비하여 주께로 돌아오게 하시오며 또 내 아들 솔로몬에게 정성된 마음을 주사 주의 계명과 권면과 율례를 지켜 이 모든 일을 행하게 하시고 내가 위하여 준비한 것으로 성전을 건축하게 하옵소서 하였더라(28-29).”
한 생을 살면서 교회를 이루는 데 헌신하는 형태는 여럿일 수 있다. 어떤 이는 문자 그대로 개척교회를 몇 개 세우는 일에 전심을 다하고, 누구는 선교지로 그 사명을 다하는 일에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을 것이나… 주어진 상황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벧후 1:4).”
그리하여 실천은 하나로 나타나는데,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5-7).” 그것이 건물이든지 헌물이든지 산을 옮길 만한 믿음으로 자신을 불사르게 내어주기까지 하는 헌신이든지, 그 목적은 오직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0).” 하여 “이로 말미암아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15-16).” 이 땅의 삶은 단회적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그러나 너희는 사람처럼 죽으며
고관의 하나 같이 넘어지리로다
(82:6-7).
하여,
하나님은 신들의 모임 가운데에 서시며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에서 재판하시느니라
(1).
우리에게 부여된 사명이 얼마나 크고 귀한지를 알게 한다. 그저 사람으로 살다 사람으로 죽는 것이 우리의 숙명이 아니다. 우리는 주의 자녀들로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 하시니라(요 19:11).” 이와 같은 권한은 저가 주신 것이라. 내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는 순전히 현실을 능가한다. 고통 중에도 우리가 크게 기뻐한다는 사도의 고백도 그러하였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이 소망은,
그들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여
흑암 중에 왕래하니
땅의 모든 터가 흔들리도다
(7).
한데 우리는,
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세상을 심판하소서
모든 나라가 주의 소유이기 때문이니이다
(8).
자신 있다. 승리는 이미 주의 것이고 우린 그 승리를 덧입고 산다. 그러므로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롬 15:1-2).” 같이 부화뇌동하여 으르렁거리고 물어뜯고 이긴들? 우리의 이김은 이 땅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사 30:1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