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의가 주의 앞에 앞서 가며 주의 길을 닦으리로다

전봉석 2022. 9. 21. 04:44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 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

대하 3:1

 

여호와께서 좋은 것을 주시리니 우리 땅이 그 산물을 내리로다 의가 주의 앞에 앞서 가며 주의 길을 닦으리로다

시 85:12-13

 

 

모리아 산은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이다. ‘여호와 이레’라 불렸던 곳으로 아브라함이 순종하고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던 곳이다(창 22:1-19). 또한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나타나셨던 곳이다. “다윗이 이르되 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이요 이는 이스라엘의 번제단이라 하였더라(대상 22:1).” 다윗이 인구조사를 하여 하나님의 징계 앞에서 제사를 지낸 바로 그곳으로 오르난으로부터 값을 주고 산 곳이고, 일찍이 주의 성전 터로 정해놓은 곳이다. 솔로몬 즉위 4년 2월 2일에 성전건축을 개시하였다.

 

마치 우연 같이 또는 어그러진 길로 간듯하나 훗날 우리 하나님은 이를 곧게도 하시고 굽게도 하신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전 7:13).” 마치 내가 내 임의로 행한 것 같으나 주의 은혜는 나의 죄악보다 깊고, 넓고, 높고, 그 길이가 한량없으시다.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9)”

 

돌아보면 하나님은 항상 내 곁에 계셨고, 용서하셨고, 구해주셨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이 진리는 내가 죄인이란 것을 알면 알수록 그 사랑의 확증이 더욱 선명하여진다.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주할 성읍에 이르게 하셨도다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시 107:7, 9).

 

마치 모리아 산이 자식을 죽여야 했던 비정한 장소인 것 같으나 그곳에서 하나님의 예비하신 손길을 경험하고 나아가 주의 언약을 받는 곳이었다.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창 22:16-17).” 곧 우리의 돌이킴이 우리에게 기업으로 맡기신 자녀들에게도 전가되어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18).” 이는 복의 출처로,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신 28:6).”

 

곧 우리의 복이란, “보라 나는 그들을 북쪽 땅에서 인도하며 땅 끝에서부터 모으리라 그들 중에는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과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이 함께 있으며 큰 무리를 이루어 이 곳으로 돌아오리라(렘 31:8).” 주께 돌아오는 것이다. 그 심령이 지금 어떠하든지, 저가 앞뒤 분간을 못하는 영적인 맹인이든지, 바른 걸음으로 가지 못하는 다리 저는 자이든지, 잉태하여 해산하는 고통과 같은 중에 있는 여인과 같은 이든지 모든 큰 무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이다. “그들이 울며 돌아오리니 나의 인도함을 받고 간구할 때에 내가 그들을 넘어지지 아니하고 물 있는 계곡의 곧은 길로 가게 하리라 나는 이스라엘의 아버지요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9).”

 

그러므로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계 5:12).” 곧 우리를 위하여 고난당하신 우리 주의 놀라우신 사랑과 은혜가 있다. 이를 알기 위하여 주님은 우리에게 고난을 허용하심으로 그 유익이 오늘 우리의 간증이 된다. 성도의 교제는 주를 찬송하게 되는데 서로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이 어찌 함께 하시고 ‘여기까지’ 인도하셨는가를 나누게 된다. 누구의 고백에 같이 마음을 합하는 것이 주의 찬양이 된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는 모두 주께서 우리로 고난당함으로 유익하게 하신 결과이다. 고난이 없었더라면 내가 이를 어찌 알까?

 

첫째, 고난은 우리로 빛과 생명 되시는 나의 구주를 알게 한다.

 

“어찌하여 고난 당하는 자에게 빛을 주셨으며 마음이 아픈 자에게 생명을 주셨는고(욥 3:20).”

 

둘째,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로 기뻐하고 즐거할 수 있게 한다.

 

내가 주의 인자하심을

기뻐하며 즐거워할 것은

주께서 나의 고난을 보시고

환난 중에 있는

내 영혼을 아셨으며

(31:7).

 

셋째, 고난은 우리로 ‘건지시는 하나님’ 곧 구원의 하나님을 만나게 한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34:19).

 

넷째, 고난은 우리로 기도하게 한다.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부르짖음을

주께 상달하게 하소서

-고난 당한 자가 마음이 상하여

그의 근심을

여호와 앞에 토로하는 기도

(102:1).

 

다섯째, 고난의 유익은 우리로 말씀을 가까이 하고 그 필요성을 깨닫게 한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119:67, 71).

 

여섯째, 고난은 우리로 택함 받은 자인 것을 알게 한다.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 불에서 택하였노라(사 48:10).”

 

이 외에도 나는 말씀 가운데서 수도 없이 많은 고난의 유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의 설교와 같이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이 얼마나 감격스럽고 놀라운 발견이고 고백이고 감사인지. 누구와 나란히 서서 지난날을 서로 이야기하다 나는 그 가운데서 주의 크신 은혜를 깨달아 알 수 있었다.

 

일련의 현실은 어렵고 힘에 겨워 고난으로 신음할 수 있으나 그 가운데서 우리는 놀라우신 평안과 기쁨을 누리기도 하는 것이다. 이를 안 믿는 자들로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할 수가 없다. 오히려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누군 내게 ‘팔자 좋다!’ 하고 비아냥거릴 때도 있다. 이런 상황을 나는 저에게 말로다 설명할 수 없어 ‘와 보라!’ 하는 수밖에.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죽음의 산이었던 모리아 산이 ‘여호와 이레’를 외칠 수 있는 찬송의 장소가 될 줄이야. 또한 훗날 그곳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며 회개를 하고, 비로소 그 위에 주의 교회를 세우실 줄이야. 그러므로 우린 누구도 오늘을 속단할 수 없다.

 

오늘 시편은 이를 찬송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방 땅에 포로로 살던 자들이 돌아와 감사하는 찬송 시로 느헤미야, 학개, 말라기가 활동하던 시대에 고라의 자손이 지어 함께 불렀을 찬양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땅에 은혜를 베푸사

야곱의 포로 된 자들이

돌아오게 하셨으며

주의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고

그들의 모든 죄를 덮으셨나이다 (셀라)

(85:1-2).

 

어제도 새삼 지나간 날들을 떠올리며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그땐 참 어떻게 그런 악을 품고 살았을까, 하는 회개와 함께 소름이 다 돋는 나의 실체를 되돌아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러니까 그때 그 순간에 죽어 마땅하였을 죄인인데도 오늘 이처럼 말로다 표현할 수 없는 귀한 사명을 맡기셨으니, 이는 나로 은혜를 입게 하신 것이다.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하여 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사 41:9).”

 

이와 같은 말씀 앞에 오금이 저릴 정도로 벅찬 감사를 느낀다. 나는 송구하여 고개도 들 수 없는데,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49:15).” 오히려 나 같은 자가 무어라고 전능자 만유의 주께서 나를 잊지 않으시는지…. 그뿐이신가? “옛적에 여호와께서 나에게 나타나사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하였노라(렘 31:3).” 나의 이 모든 허물까지도 주께서 선을 위하여 사용하심인데,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사

주의 백성이 주를 기뻐하도록

하지 아니하시겠나이까

(6).

 

나의 감격은 같이 느끼고 누리는 이들이 많다. 이를 성도라 한다. 서로 섬기는 교회가 다르고 각기 그 역할이 다르고 직분이 다르다 해도 주는 하나이심으로 우리가 서로 이야기하다보면 내가 아는 그이가 저가 말하는 그분이시다. 이를 같이 말하며 때론 감격하고 때론 자기 일처럼 놀라 기뻐하는 것은, 천국이 바로 그런 곳이다. 어떤 어려움 또는 고통으로 힘에 겨운 날이라 해도 그 가운데 우리 주가 함께 계심을 알 때 기도와 찬송은 서로에게 매우 익숙하다. 하나님이 우리로 같이 기뻐하게 하시는 것, 이는 “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 우린 거저 받은 것이나 이는 주의 피 값으로 지불된 엄청난 가치의 값어치다. 그리하여,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살후 1:12).”

 

곧 우리가 서로 마주하고 지난날을 얘기하는 것은 세상이 말하는 상담과 다르다. 그저 속엣 얘길 하며 풀어내고 다소 위안으로 삼고자 하는 정도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결국 우리가 얼마나 큰 주의 기쁨이고 영광인지, 이를 위하여 이미 창세전에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예정하셨던 하나님의 뜻을 만족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보이시며

주의 구원을 우리에게 주소서

내가 하나님 여호와께서

하실 말씀을 들으리니

무릇 그의 백성, 그의 성도들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이라

그들은 다시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지 말지로다

(7-8).

 

나는 감히 말하건대 지금이 가장 감사하다. 돌이켜 주의 은혜를 알게 하신 지난 십년의 시간이 그 이전의 어떤 시간들보다 감격스럽고 감사한 증거가 된다. 곧 오늘은 나의 들음을 증거하고, 주의 이룸을 확증한다. 주의 뜻이 서고 나의 바람이 이뤄진다. 이에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합 2:1-2).”

 

하여 더는 어떤 일보다 이 일이 귀하고, 오늘이 감사한 것이다. 어제도 입원에 앞서 수술 후에 당분간 집에 와 계실 장모의 짐 보따리를 먼저 옮겨다 놓았다. 그러느라 주차장에서 장모를 만나 두 손을 잡고 주의 이름으로 위로하며 기도하였다. 저녁에 아들과 둘이 가정예배를 드리고 다시 장모와 통화하며 두려워하는 그 마음을 두고 주께 함께 기도하였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40:1).

 

우리 하나님은 언제나 옳으시다. 그는 선하시고 인자하시다. 오늘 시인은 이를 알리며 주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구원이 이미 이르렀음을 찬송한다.

 

진실로 그의 구원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가까우니

영광이 우리 땅에 머무르리이다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굽어보도다

여호와께서 좋은 것을 주시리니

우리 땅이 그 산물을 내리로다

(85:9-12).

 

이를 체험하고 감격하며 서로 나누고 기도하고 또는 기도를 부탁하며 살 수 있다는 것은 가까운 훗날에 우린 주의 나라에서 한 식구로 자녀들로 주 앞에서 즐거워할 자들이기 때문이다. “내 공의가 가깝고 내 구원이 나갔은즉 내 팔이 만민을 심판하리니 섬들이 나를 앙망하여 내 팔에 의지하리라(사 51:5).” 그러므로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롬 13:11).” 하여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달리 산다. 저들이 귀하게 여기는 것을 누구는 배설물처럼 여기고, 누구는 그러하였던 자신을 혐오하면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나는 오늘 이와 같은 말씀을 읊조리며 감사와 영광을 주께 돌릴 줄은 몰랐다. 이는 주의 실제 돌보심으로,

 

또 내가 기름진 밀을

그들에게 먹이며

반석에서 나오는 꿀로

너를 만족하게 하리라 하셨도다

(81:16).

 

이와 같은 비현실적인 현실을 산다. 이를 위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그러니 서로의 기도가 서로를 붙든다.

 

의가 주의 앞에 앞서 가며

주의 길을 닦으리로다

(85: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