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06편 / 할렐루야
220925 주일
시편 106편
할렐루야
시 106:1 할렐루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06:47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원하사 여러 나라로부터 모으시고 우리가 주의 거룩하신 이름을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찬양하게 하소서
시 106:48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양할지어다 모든 백성들아 아멘 할지어다 할렐루야
들어가는 말
부르심은 택정하심을 받은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롬 1:1).” 하고 자신에 대해 자신한다. 이는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5).” 그러니까 우리를 부르심은 ‘경우의 수’가 아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딤후 2:21).” 곧 이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우리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삶’으로 살도록 조성하신다. 누구도 인생을 장담할 수 없다.
이에 우리의 정당성은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시 137:4).” 즉 저들과 같이 유흥을 즐기듯 주를 찬송할 수 있을까? 이는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온 선민으로 이방인의 땅에서 돈의 노예로, 욕망과 아집에 이끌려 살면서 말이다. 이에 시인은 애가(哀歌)를 지어 부르기를,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1).” 슬픔은 정당하다.
그런데 성경은 역설적으로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들이 마땅히 할 바로다(33:1).” 하면서 우리의 고통이 마땅함을 알린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더하시는 희락과 평안은 물론 슬픔과 노여움도 주의 뜻으로는 정당하다. 그런 슬픔과 고통으로 일그러져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엡 5:4).” 곧 우리의 불평과 한탄은 온당하지 못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하고 성경은 일갈한다(살전 5:16-18).” 결국 고통은 하나님의 통제 가운데 있는 것으로 그러한 고통까지도 선을 이루시고자 하는 데 유용함을 우리로 알게 한다.
오늘 시편은 그와 같은 고통의 의미와 목적을 일깨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째서 우리에게 고통을 허용하시는 것일까? 먼저 언급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슬픔과 고통을 바라지 않으신다. 이를 위해 계명도 주시고 주의 긍휼하심으로 우리를 돌보셨다. 그럼에도 인생은 고통의 연속이고, 여러 슬픔이 우리에게 고난을 끼친다. 가령 질병의 총체라 할 수 있는 각종 암으로 고통당하며 사망하는 경우가 가히 놀라울 정도다. 지금 우리가 들숨, 날숨을 쉴 때마다 네 명 각종 암으로 죽는다고 한다. 매분마다 아흔다섯 명이 죽고, 매시간 오천칠백칠 명이 죽는다. 그 외에도 교통사고, 전쟁과 기근, 자연자해로도 사람들의 목숨은 볼모잡힌 듯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
한데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이와 같은 모든 고통을 통제하신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죄의 값으로 죽는 것이라 하나님도 이를 통제하실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성경은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시면서 저 작은 미물까지도 하나님의 통치 아래 팔리고 죽는다는 것을 증거 한다(마 10:29). 심지어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30-31).” 그러니까 하나님은 결코 모르실 리 없다.
이 말씀을 하신 이는 예수이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다. 저는 능히 죽음을 이길 수 있었고, 죄도 없으신 분이셨다. 바람과 풍랑도 잠잠하게 통제하실 수 있었다. “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8:27).” 하물며 자신의 고통과 십자가의 죽음을 미연에 방지하실 수 없었을까? 예수님은 바로 어떤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즉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의 고통을 받고 죽으심으로 예수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다.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면 누가 이것을 능히 말하여 이루게 할 수 있으랴(애 3:37).” 우리에게 주어지는 고통도 의미 없는 것은 없다.
우리는 고통까지도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 이를 믿음으로 욥은 그 끔찍한 고통 중에도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하고 하나님을 신뢰하였다. 하나님은 빛이시다.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요일 1:5).” 고통은 어둠이고, 어둠은 죽음을 내포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고통과 죽음을 허용하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신가? 우리는 오늘 시편의 역사 시를 통해 선민들에게 고통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고, 신앙을 지키는 데 있어 하나님의 선하신 뜻 가운데서 통제됨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의로우시다. 고통을 우리에게 허용하시는 것도 그의 선하신 뜻을 이루려는 데 목적이 있다. 오늘 본문은 이를 확인시켜준다.
본문 이해
시편 105편에 이어 오늘 106편도 역사 시다. 역사 속에서 저들이 고통을 통해 하나님의 선하심을 직접 체험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죄의 뿌리는 질기고 억새서 저들은 끊임없이 죄를 반복하였고, 이를 돌이킬 수 있게 하시려고 고통을 부여하신 것을 알게 된다. 즉 하나님은 우리가 고통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지만 그 뜻에 합한 자로 삼으시려고 그때마다 허용하신다는 것을 본다. 곧 징계가 따르면 회개가 일어나고, 회개하고 돌이키면 하나님은 용서하신다. 죄는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고통은 필연적인 수단으로 따라온다. 이와 같은 악순환이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거듭 나타난다. 이에 오늘 시편은 서두와 마지막 어절에서 ‘할렐루야’로 이를 받아들인다. 할렐루야는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찬송하고 감사해야 하는 이유가 분명한 것이다. 왜냐하면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 12:11).” 보다 성숙하게 하심은 물론 우리로 세상과 같이 멸망당하지 않게 하시려고,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이것이 실은 우리에게 더해지는 <고통의 의미>다.
시편 78편에서는 선민 이스라엘의 형성과 출애굽 당시를 회상하였고, 105편과 106편은 선민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하나님이 직접 투영되심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이어가고 계심을 찬양한다. 고로 오늘 시인은 ‘할렐루야’를 외치며 고통 중에 우리로 주를 찬양하게 한다. 즉 죽어 마땅한 죄인인데, 몇 번이고 돌이켜 주의 자녀이게 하심이 은총이다.
본문은 모두 3연으로, 1연은 1-6절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상기하며 그 은혜에 참여하라고 촉구한다. 그것은 동시에 은혜에서 벗어나 있는 하나님의 선민들을 돌아오게 하신다. 2연은 7-46절까지 선민들에 대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이 전개되고 있다. 이를 각각 그 시기별로 나누어 보면 첫째는 7-12절, 출애굽 때부터 홍해에 이르기까지 패역함을 그대로 드러내는 선민들의 참상을 폭로한다. 둘째는 13-33절, 광야에서도 저들은 거듭하여 죄를 짓고 패역함을 버리지 못함으로 징계와 회개와 회복이 반복되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셋째는 34-46절, 가나안에 들어가 정착하기까지, 또한 저들이 가나안에 살면서도 끊임없이 우상숭배와 이방문화를 받아들임으로 죄를 범하는 것을 기록한다. 마지막으로 큰 단락 3연은 47-48절, 바벨론 포로 생활을 주께 아뢰며 선민으로서 하나님의 은총을 다시금 촉구하고 간구하는 내용이다.
오늘 우리가 본문을 통해 알고자 하는 핵심은 고통이 언제, 왜, 무슨 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고통의 의미와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바로 알고자 하는 데 있다. 이를 네 가지로 정리하면,
첫째, 모든 고통은 창세전에 계획되었다.
‘그럴 것을 아시고’ 이에 따른 계획을 가지고 하나님은 시작하신 일이다. 이를 모르실 리 없었고, 그때마다 임기웅변으로 대처하신 게 아니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과 같이 완전할 수 없다. 천사들 중에도 하나님을 거역하고 사탄이 되었다. 하물며 오늘 우리의 고통은 그에 따른 치밀하신 계획과 섭리 가운데서 이루어진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 곧 우리의 구원은 죄를 전제로 한다. 거룩한 소명은 부르심을 받은 자로 이를 인정하는 것이다. 곧 자신이 죄인인 것을 고백하고 회개하는 회심에서 시작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택받은 주의 자녀인 것을 아는 첫 번째 증명은 회개다. 한데 누구는 이를 믿고, 누구는 죽어도 이를 믿지 못한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둘째, 고통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허무함을 알게 한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즉 오늘 우리가 고통을 당하는 것은 그 고통으로 인하여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을 알게 하고 이를 준비하게 한다. 이에 앞서 우리가 의지하고 사는 세상이 얼마나 허무한지를 고통은 깨닫게 한다. 즉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느니라(시 94:11).” 한사코 이를 인정할 수 없는 자들에게는 고통만 가중될 뿐이다.
셋째, 고통은 그러므로 예수가 가장 귀하다는 것을 알게 한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빌 3:18).” 그런 가운데서 우리가 ‘출애굽’하고 ‘광야’를 지나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는 길은, 예수의 십자가 외에 없다. 다른 구원은 없다. 우리는 고통으로,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하고 바울은 고통의 의미를 명확히 하였다(빌 2:15-16).
넷째, 세상의 고통으로 예수의 십자가는 완성되었다.
이 땅에 만일 고통도 죽음도 없었다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일도 없다. 십자가의 죽으심이 없었다면 결국 우리의 구원도 없었다. 이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즉 죄의 삯은 사망이고, 사망으로 이르는 길은 고통의 연속이다. 타종교와 달리 우리는 우리의 의와 수고와 노력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하지 않는다. 그 어떤 선과 의도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할 수는 없다. 예수님은 ‘헤롯’에게 고통을 당하셨고 ‘빌라도’에 의해 십자가에 달리셨다. 결국 세상의 고통은 예수의 십자가의 고통을 위한 치밀하신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통제된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행 4:27-28).”
결론, <고통의 의미>는 결국 우리의 구원을 이루게 한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우리 신자들의 삶을 반영한다. 저들을 통해 우리는 자신을 돌아볼 수 있다. 이에 성경이 기록되었고, 저들의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우리로 알게 하신다. 이를 중심으로 오늘 본문을 다시 정리하면,
1연 1-6절: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상기하며,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우리들도 참여해야 하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우린 고통 중에도 ‘항상 기뻐하고, 말씀에 순종하여 쉬지 않고 기도한다.’ (살전 5:16-17).
2연 7-46절: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이스라엘의 역사는 곧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압축이다. 우리가 성경 가운데 구약을 무시하거나 가벼히 여기는 것은 옳지 않다. 이스라엘은 지엽적적인 어느 나라가 아니다. 저들이 겪은 이야기는 우리로 주의 자녀임을 알게 한다. 그래서 오늘 날 우리 성도의 교제는, 서로의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이야기를 경험하게 된다. 저를 위한 중보는 자신의 삶에 동질감을 더한다. 이는 각각 그 시대마다 달랐다.
첫째, 7-12절: 출애굽과 홍해 과정에서 저들은 수시로 패역하였고 하나님을 원망하였다.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고 하면서도 수시로 패역한 마음이 들고, 죄를 일삼는 것과 같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고통을 더하시고 우리로 회개하게 하신다.
둘째, 13-33절: 결국 광야 40년의 시간 동안 거듭하여 죄를 범하며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였던 이스라엘 백성은 오늘 우리의 모습과 다를 게 없다. 이에 고통은 주를 바라게 하고 부르짖음으로 자신의 잘못을 고하며 회개하게 한다. 오늘 우리의 일상이 안이하고 무난하다면 오히려 주의할 필요가 있다. 가장 끔찍한 저주는 하나님이 ‘내버려두심’이다.
시편 73편을 보면 ‘저들’은 하나님 밖의 사람들로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5).” 하는데, 이는 절대 축복이 아니었다. 저들은 죽을 때에도 호사를 누렸다. 이를 보면서 시인은 절망하는 가운데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나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도다(13-14).” 하고 실의에 빠지기도 하였다. 믿음을 지키며 신앙 안에서 산다는 일이 때론 억울할 정도로 괴로움이 많다. 그러나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16-17).” 곧 저들의 종말을 알면 부러움은 사라진다. “그들이 어찌하여 그리 갑자기 황폐되었는가 놀랄 정도로 그들은 전멸하였나이다(19).”
셋째, 34-46절: 가나안 정착 이후에도 이스라엘은 우상을 숭배하고 이방국가들의 문화를 받아들여 죄를 범하였다. 우리의 가나안은 중의적인 의미로 하나는 이 땅에서 교인에서 신자로, 신자에서 성도로 살면서, ‘소명자’에서 ‘사명자’로 사는 일이다. 이때부터는 날마다 전쟁이다. 사람을 왕으로 세워 통치함을 받은들 허사였다. 제 아무리 훌륭한 다윗과 솔로몬의 때에도 다를 게 없었다. 또 하나의 의미는 비로소 우리가 들어갈 하나님의 나라를 뜻한다. 영원한 안식의 나라는 도래할 것이다.
3연은 47-48절: 바벨론 포로 생활을 회고하면서 선민으로서 자신들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은총을 간구하며 찬양한다. 여러 시련을 겪고 결국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뿌리치고 우상숭배와 자신의 욕망을 좇은 것을 회개한다.
나오는 말
오늘 우리의 이야기가 이스라엘의 역사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이를 반추하면 우리가 어찌 믿음을 지키며 살아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전 12:1).” 자칫 더는 돌이킬 수 없을 때에 후회가 밀려와도 소용없다. 그러므로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시 119:9).” 오늘 우리에게는 이처럼 말씀이 있다.
그러므로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6).” 이를 바로 알고, 본문에 드러나는 <고통의 의미>를 분명히 한다면 우리의 남은 삶은 ‘할렐루야’로 시작하여 ‘할렐루야’로 끝마칠 수 있을 것이다.
“할렐루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양할지어다 모든 백성들아 아멘 할지어다 할렐루야(시 106:1, 4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