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에 있으리라

전봉석 2022. 9. 25. 04:52

 

이제 이 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 이는 내가 이미 이 성전을 택하고 거룩하게 하여 내 이름을 여기에 영원히 있게 하였음이라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에 있으리라

대하 7:15-16

 

즐겁게 소리칠 줄 아는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여 그들이 주의 얼굴 빛 안에서 다니리로다

시 89:15

 

 

 

성전 봉헌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불의 응답과 임재의 영광이 온 성전 안에 가득하였다. 백성들은 주를 찬양하고 경배한다. 이와 같은 낙성제사에서 솔로몬은 번제물과 소제물을 드렸다(4-7, 왕상 8:62-64). 레위인들이 찬양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었다. 이는 장막절이 시작되기 전 7일 동안 7월 8일-14일에 진행된 것이다. 장막절을 마치는 그 다음 날에 온 백성이 성회로 모여 8일간 이를 지켰으며 이에 23일 동안 백성들이 주를 찬양하고 경배하였다. 이는 열왕기상 8:62-66절에도 상술하고 있다.

 

곧 성전 낙성식은 솔로몬 11년 7월 8일부터 일주일간 행해졌고, 끝나자 바로 다음 날부터 장막절로 14일의 축제를 더하였다. 이는 은혜에 대한 감사로 감사는 신앙고백의 기초가 된다. 섬김으로 표현된다. 왕상 8장 62절에 “이에 왕과 및 왕과 함께 한 이스라엘이 다 여호와 앞에 희생제물을 드리니라.” 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성실하심에 대한 그 은혜의 감격이 찬양으로 드려지는 것을 본다. “서서 큰 소리로 이스라엘의 온 회중을 위하여 축복하며 이르되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그가 말씀하신 대로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태평을 주셨으니 그 종 모세를 통하여 무릇 말씀하신 그 모든 좋은 약속이 하나도 이루어지지 아니함이 없도다(55-56).”

 

곧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골 1:12).” 이를 감사할 수 있게 하신 이에게 감사한다. 어제도 친구와 통화하다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것과 믿음의 사람들이 남긴 주옥 같은 글들이 있음을 감사하였다. 이를 알게 하는 지침들 같은 앞선 이의 글이 없었다면, 또한 이와 같은 기록이 없었다면 저들이 온 몸으로 부딪치며 부대끼고 여러 번 시행착오를 거듭하여 얻은 그것을 우리 또한 감내해야 했을 것이다. 이를 우린 글로 읽고 묵상하고 미리 안내를 받을 수 있는 게 무엇보다 은혜였다. 즉 앞선 이가 곳곳에 세워둔 위험을 알리는 표지판과 그와 함께 ‘속도를 줄이시오.’ ‘급경사에 주의하시오.’ 하는 따위의 경고문에 주의하는 것이 지혜였다. 이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까(살전 3:9).”

 

나는 여기서도 이와 같은 놀라운 체험을 고백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나는 소설과 시를 좋아했고, 여느 철학자나 몽사가의 글을 읽고 나름의 지적허영을 채우는 것을 즐겼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마치 아이의 입맛이 순간 바뀐 것처럼 소위 말하는 ‘종교서적’에 사로잡혔다. 전에는 그와 같이 빤한 내용들을 혐오하였는데, 주를 알면 알수록,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그에 대한 저들의 묵상과 체험으로 나의 책장은 채워지기 시작했다. 나의 독법 가운데 조금 남다른 점은 한 작가에 매료되면 저의 모든 서적을 골라서 섭렵한다. 마치 읽고 또 읽고 듣고 또 듣고 해도 좋은 것이다.

 

이를 오늘 저들이 함께 나누고 즐거워하는 낙성식과 장막절의 절기에 감사와 찬양과 경배로 즐거워하였던 23일의 여정과 같을까? 나아가 우리가 누릴 영원한 나라의 즐거움과 그 영광의 것이 이와 같을까? 그런 뒤 소설이 읽히지 않고 어떤 철학자나 몽상가의 글이 이상할 정도로 집중이 안 되는 것이다. 나름 균형을 잡으려고(?) 억지로라도 읽는다고 하면 너무 거만한 소리로 들릴 테지만… 물론 여전히 나는 김훈의 소설과 그의 문체를 사랑한다. 여러 시들은 고집처럼 손이 잘 닿는 곳에 두고 자주 꺼내 읽고는 한다. 이러한 성향이나 기질이 본래부터 있었다고 하며 거짓이다. 가끔 숨기지 않고 밝혔듯이 나는 어려서 지진아에 둔재였다. 6학년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구구단도 못 외우고 철자법도 잘 모르는 그야말로 특수아동에 분류될 정도였다.

 

이를 다시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전방위적인 역사하심이다. 마치 어떤 일, 그 하나의 일을 말하기 위해서는 주변의 여러 상황과 사실들을 빼놓을 수 없는 것처럼… 중학교에 올라가기 전 큰 수술을 하느라 3개월을 병원에 있었고, 3개월은 족히 그곳에서 살았다. 여수 애양원에 있는 그 병원들은 나환자들을 위해 지어진 시설이었고, 손양원 목사로 유명한 애양원교회가 있는 나환자 촌이었다. 소경 장로들과의 만남-저들은 한센병으로 인해 몸이 뒤틀리고 눈알이 빠진 채 맹인으로 살아가는 자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성경 66권을 통으로 암송하였고, 그 가운데 한 장로님이 유독 나를 가까이 하며, 그때마다 찾아오면 성경을 읽어달라고 하였다. 어린 나이에 나는 저가 앞을 볼 수 없으니 ‘불쌍하다’는 생각으로 처음 저가 원하는 부분의 성경을 읽어주곤 하였는데, 며칠이 지나고서야 알았다. 저는 내가 읽을 때 어느 부분을 틀렸는지 다시 읽게 하였고, 나는 그걸 어찌 아는가 했더니 성경 66권을 아예 다 암송하던 것이다. 그 모든 사실을 알고, 어느 부분은 같이 소리 내어 합독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뒤이어 퇴원을 하고 돌아갔을 때 맥락도 없이 우리의 새로운 거처는 나환자 촌 교회였다. 목사로 그곳에 부임한 아버지는 원래 우리가 살던 집처럼 나를 데리고 들어갔다. 그곳에서 만난 또래 여자아이의 관심은 또 남달랐다. 학생회에서 천사게임-마니또게임을 하였는데 저가 나의 천사였다. 두 달 동안 나는 발신인이 누군지 모르면서 편지를 받았다. 그때 어린 나의 눈에도 글이란 참 놀라운 세계를 담아낼 수 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책으로는 그러려니 했던 세계가 손수 글자를 또박또박 쓰고 그 안에 내 이름까지 불러가며 담아내는 이런저런 세계가 차츰 나의 모자란 이해와 상식을 깨우쳤다. 두 달간 이어졌던 저의 편지는 거짓말처럼 내가 누구로 연상하며 읽은 바로 그 소녀였다. 나는 읽고 또 읽고, 읽고 또 읽고 하면서 알 수 없는 체험을 하였다. 나와 동갑인 소녀는 어쩜 그렇게 단아한 문장 안에 온 세상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었을까?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는 것은 그 애가 불쑥, ‘밀린 답장을 줘.’ 하고 손을 내밀 때 그 아찔함이란!

 

그렇게 시작한 우리의 편지쓰기는 많게는 하루에 두 통, 적게는 이틀에 한 통씩 3년을 계속 지속하였다. 당시로는 그 수단이 전부였다. 심지어 전화도 마을에 교환을 거쳐야 해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만남은 아주 은밀하였다. 당시에는 남녀 학생이 같이 만나다 걸리면, 학교에서도 문제가 되던 시절이었다. 새삼 구구절절 이런 생각이 느닷없이 떠오르는 것은 오늘 본문에서 저들이 함께 하였을 칠일간의 낙성식과 십사일 간의 장막절까지 이어지는 근 한 달 가까운 축제가 지겹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과 동시에 결코 그럴 수 없었을 것이란 확신 때문이다. 내 인생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나는 소년와의 편지쓰기를 지금도 그리워한다. 구구한 사연은 많지만, 우린 서로 한참 여리고 예민하였던 시절이다. 나는 소녀를 만나는 동안 한 번의 자살 기도와 두 번의 가출이 있었다. 사는 게 참 고단하였던 시간이다. 그때 ‘그 소녀’가 없었다면? 그 아이의 편지가 없었다면? 나는 살면서 그때마다 하나님이 함께 하게 하신 천사들이 수도 없이 많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놀라우신, 전방위적인 역사가 오늘도 다를 게 없다. 우리로 주를 사랑하는 만큼 나의 모든 것보다 더욱 주가 나를 사랑하시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곧 나의 시간, 나의 생각하는 내용들, 누구와의 대화나 어떤 만남, 앞으로의 이야기… 그 모든 관심의 여부가 오늘 우리의 인격이고 숙명이 될 것이다. 그럴 때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마 26:7-9).” 이 한 사건에서 같은 일을 두고 한쪽은 이러한데 다른 쪽은 저러하다. 저들의 지적은 지극히 옳고 틀린 말이 아니다. 저의 전부라 할 수 있는 것을 예수께 부어 소진하느니, 이를 더 유용하게 쓸 수 있을 텐데….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요 12:3-5).” 이 차이를 우리가 어찌 합할 수 있을까? 바울은 숱한 고통을 당하였으면서도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빌 1:17-18).” 곧 저는 자신이 당하는 괴롭힘으로도 주가 전파되는 것을 기뻐하였다!

 

모든 생업을 뒤로 하고 주의 전에 모여 낙성식을 축복하며 경배하고 지어지는 축일에 모여 그 긴 시간을 함께 하던 이들의 즐거움과 기쁨에 대하여, 이는 동참하지 않는 자에게는 어찌 말로다 설명할 수 있는 그런 성질의 이야기가 아니다. 전날에 나는 성령을 달라고 구하라고 친구에게 말하며, 그 말이 당장은 가 닿지도 않을 소리란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7-9).” 이를 누가 어떤 수로 상대에게 알게 할 수 있을까?

 

우리 안에 서로 같은 영이 함께 하지 않으시면 내가 오스왈드 챔버스의 책 수십 권을 서너 번 이상, 지금도 손에 닿는 데 두어 틈만 나면 꺼내 읽곤 하겠나? 로이드 존스 목사의 저 고리타분하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설교집을 다시 꺼내 읽으며 새로 다시 접하는 사람처럼 공감하고 즐거워할 수 있을까? 존파이퍼 목사의 책을 골라 여러 편의 글을 읽고, 저가 남긴 설교영상을 틈날 때면 찾아보며 곁에 메모를 하고 내 것이기를 갈망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한 영을 받았음이다. “내가 강림하여 거기서 너와 말하고 네게 임한 영을 그들에게도 임하게 하리니 그들이 너와 함께 백성의 짐을 담당하고 너 혼자 담당하지 아니하리라(민 11:17).”

 

나는 어제 친구와 통화를 하면 시간 가는 줄을 모를 정도로 서로의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이야기를 듣는다. 서로 다른 고민과 다른 환경과 다른 상황을 살고 있지만, “또 주의 선한 영을 주사 그들을 가르치시며 주의 만나가 그들의 입에서 끊어지지 않게 하시고 그들의 목마름을 인하여 그들에게 물을 주어 사십 년 동안 들에서 기르시되 부족함이 없게 하시므로 그 옷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사오며…(느 9:20-21).” 이 놀라운 이야기는 어느 훗날 우리가 천국에서 서로 둘러 앉아 영원토록 함께 누릴 즐거움과 기쁨의 잔치다.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

(시 48:14).

 

이에 오늘 시편으로 바로 넘어오면,

 

그가 내게 부르기를

주는 나의 아버지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 하리로다

(89:26).

 

곧 우리는 한 아버지요, 하나님이신 우리를 돕는 이의 손길 가운데서 살아간다. 이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나로 이 작은 깨우침을 얻게 하시기 위해서도 수많은 여러 주변 상황을 앞서 조성하시는 이시다. 그야말로 전우주적인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신실하시고 인자하시다. 하면 이를 알면 알수록

 

내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노래하며

주의 성실하심을 내 입으로

대대에 알게 하리이다

(1).

 

이와 같은 고백이 내 것이 되었다.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그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당장에 보응하여 멸하시나니 여호와는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당장에 그에게 보응하시느니라(신 7:9-10).” 그러니 이제 누구와는 이런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르는데, 누구와는 서로 껄끄럽고 어색하기도 하고 전혀 ‘그의 이야기’를 나눌 수 없을 때의 답답함에 대하여,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이르리니

곧 그의 언약을 지키고

그의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

(103:17-18).

 

이를 차별이라 하고 억지라고 하면 안 된다. 저마다 자기 좋을 대로 좋은 것에 관심을 쏟고 죽어라 하고 살지 않나? 이와 같아서

 

내가 주의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며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아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보다 높게 하셨음이라

(138:2).

 

이에 더는 누구에게도 강요하지 않는다. 전에는 자식에게 또는 아내에게까지 억지로라도 내가 어찌 이 즐거움을 알게 할까 하여 강요하기도 하였으나 그런들, 성령으로가 아니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내가 말하기를

인자하심을 영원히 세우시며

주의 성실하심을

하늘에서 견고히 하시리라 하였나이다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내가 택한 자와 언약을 맺으며

 

여호와여 주의 기이한 일을

하늘이 찬양할 것이요 주의 성실도

거룩한 자들의 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하리이다

(89:2, 5).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 해도 내가 어찌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앞서 바울처럼 자신이 감옥에 갇히고 고통 중에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그 일로 주가 전파될 수만 있으면 감사하다고 한 것이 어떤 마음인지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 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느 9:6).” 그러하다면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사 40:26).”

 

곧 주가 행하신다. 그러므로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이를 위하여 우리의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 2:13-14).” 서로의 사랑과 그 도리보다 우선하는 사랑이 있음을 안다. 그 사랑을 알면 알수록 오히려 더욱 ‘사랑할 수 없는 사람’도 사랑하게 된다. 이는 주의 사랑으로다. 주의 마음으로 하지 않는 사랑은 모두 거짓되다. 지나고 보니 그러했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딤후 2:13).” 곧 나는 나를 믿지 못하지만 나를 사랑하시는 이의 ‘그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실 것’은 믿는다. 이는 나의 덕이 아니다. 인품도 아니고 인격도 아니다.

 

하늘이 주의 것이요 땅도 주의 것이라

세계와 그 중에 충만한 것을

주께서 건설하셨나이다

(11).

 

나의 이 모든 게 주의 것이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지혜로운 선택은 무엇이겠나? “다시는 네 해가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 것은 여호와가 네 영원한 빛이 되고 네 슬픔의 날이 끝날 것임이라(사 60:20).” 말씀이다. 앞선 이들이 같이 겪었을 이와 같은 말씀의 보증으로,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계 22:5).” 하여 나는 입버릇처럼 누구에게라도 글쓰기를 권한다.

 

묵상을 글로 쓰고 자기 이야기를 글로 쓰시라. 행여 누구를 위해, 누구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이것으로 무얼 어찌 하려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 곧 내 이야기 속에 무수히 많은 하나님의 이야기를 글로 적어서 먼저는 나로 되새길 수 있다. 것도 요즘은 이런 공간이 얼마든지 있어서 언제 어디서든 다시 열어보고 되새김질이 가능하다. 것도 남의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이야기를 바로 읽기 위해서다. 세상에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는 없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그 어떤 시류의 격한 이야기에도 하나님이 들려주시는 이야기를 읽어내는 것, 주의 권능으로다. 하면 이는 다소 훈련이 필요하다.

 

부끄럽지만 누가 종종 나더러 글을 잘 쓴다고 할 때 나는 서운하다. 나는 나의 글쓰기가 아니라 내가 만나고, 뿌리치고, 때론 외면하였다가 도로 주의 은총으로 주의 살아계심을 나타내고자 하는… 나의 이야기는 보잘것없다 해도 나의 치부를 통해서라도 주의 복음이 전파될 수만 있다면! 그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이 행하셨던 하나님의 이야기가 서로의 동질감으로 함께 찬송이 될 수 있다면…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롬 11:22).” 하여 나는 때로, 부끄러운 줄도 모른다. 뭘 이런 이야기까지 하나 싶은 것도, 그리하여 주의 이야기가 그 속에 있었음을. 이는 나와 하나님의 지지고 볶는 사랑 이야기다. 순전히 나 혼자 헛발질 해대는 꼴이지만 그런 나를 그럼에도 한 번도 미워하신 적 없는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다.

 

그가 이스라엘의 집에 베푸신

인자와 성실을 기억하셨으므로

땅 끝까지 이르는 모든 것이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

(98:3).

 

곧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사 35:10).” 나의 이야기는 결국 우리 모두의 이야기였다. 그러므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2).”

 

즐겁게 소리칠 줄 아는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여 그들이

주의 얼굴 빛 안에서 다니리로다

(89:15).

 

아, 이 놀라운 우리의 사실을 어찌 서로 나눌 수 있을까?

 

그들은 종일 주의 이름 때문에

기뻐하며 주의 공의로 말미암아 높아지오니

주는 그들의 힘의 영광이심이라

우리의 뿔이

주의 은총으로 높아지오리니

우리의 방패는 여호와께 속하였고

우리의 왕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에게

속하였기 때문이니이다

(16-18).

 

이를 서로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우리’는 없다. 우리는 주의 우리 안에 함께 거하는 우리다.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라(아 2:15).” 서로의 믿음이 꽃을 피울 때,

 

그가 내게 부르기를

주는 나의 아버지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 하리로다

(26).

 

그러므로

 

여호와를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아멘 아멘

(5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