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

전봉석 2022. 9. 26. 04:27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과 자기의 궁궐을 이십 년 동안에 건축하기를 마치고 후람이 솔로몬에게 되돌려 준 성읍들을 솔로몬이 건축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거기에 거주하게 하니라
대하 8:1-2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내리게 하사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
시 90:17


솔로몬은 성전 건축을 마치고 주요 도시정비를 다룬다. 이에 동원한 인력과 조직편성을 언급하고 있다. 바로의 딸을 다윗성에 두지 않고 따로 별궁에 둔다. 솔로몬이 건축을 도운 후람에게 북쪽 20성읍을 준 것에 대해 열왕기상 9장에서 언급하고 이를 비판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반면 본서에서는 이 부분이 언급되지 않고 있다(왕상 9:10-24). 물론 신의를 위한 것으로 보지만 하나님의 언약적인 측면에서는 옳지 않은 일이다. 또 보면 애굽 왕 바로가 가나안 족속이 차지하고 있던 게셀을 쳐서 취하고, 이를 솔로몬에게 딸을 시집보내면서 예물로 준 내용도 부분적으로 빠져 있다. 이는 솔로몬 당시까지 약속의 땅에서 미정복지로 남아 있던 땅이 있고 이를 애굽 왕이 정복하여 바로에게 준 것이 되는데, 솔로몬의 나태함을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성전 건축에 동원된 인력과 그 도움에 답례로 준 것일 테지만 북쪽 갈릴리 성읍 20개를 준 것도 옳지 않다. 오히려 히람은 이를 돌려주고 솔로몬은 성읍들을 재건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이를 가만히 생각하면 솔로몬의 신앙이 나태해져가는 것을 암시한다. 약속의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 순간 본분을 잊으면 이는 작은 균열 같으나 금세 틈이 벌어진다. 우리도 흔히 ‘그럴 수 있지’ 하고 수용하는 작은 일이 어느새 온전한 신앙을 이루는데 걸림이 되기 십상이다.

겉으로 보이는 것이 아닌 그 이면의 것으로 주 앞에 바로 서는 게 필요하겠다. 이에 바울의 고백처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즉 우리가 서로 잘 지내는 것도 중요하나 그 이전에 하나님을 우선하는 마음이 그 중심에 서야 한다. 곧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 이 말을 전하는 바울은 지금 노인의 몸으로 로마 감옥에 있는 중이다. 그럼에도 저는 자신을 바로 하는 데 그 마음가짐부터 온전히 하고 있다.

솔로몬을 생각하면 저의 넘치는 풍족함이 저로 주체하지 못하게 한 것 같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 임의로 처분하거나 살 수 없다. 그래서도 주님은 말씀하시길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곧 우선순위가 분명해야 한다. 이것이 애매하거나 그 마음이 앞설 때 마르다와 같이 열심을 다하면서도 그 안에 만족함이 없다.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눅 10:40).” 그때 주님은 명확히 하신다.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41-42).”

분주하게 열심을 다하는 게 능사가 아니다. 위대한 업적을 남기고 공헌하는 일이 우선인 것도 아니다. 이 땅에 그 무엇도 영원하지 않고 그것으로 얻을 것은 없다. 솔로몬은 뒤늦게 이를 정의하기를,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 그야말로 인생 그 자체로는 모든 게 헛되고 헛될 뿐이다. 이에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4).” 이는 곧 우리 육체도 그뿐이어서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벧전 1:24).” 결국 우리에게 남을 것은 말씀뿐이다.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25).”

우리의 신앙이 흔들리는 증상은 타협이다. ‘그럴 수 있지’ 하고 허용하는 순간 저 축복의 대명사 솔로몬의 신앙도 균열이 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미 앞서 저들로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게 하심은 아담에게도 우선하는 명령이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8).” 저들은 이에 실패하였고, 기어이 “그들이 네 땅에 머무르지 못할 것은 그들이 너를 내게 범죄하게 할까 두려움이라 네가 그 신들을 섬기면 그것이 너의 올무가 되리라(출 23:33).”

그러므로 우리가 받은 은혜로 하나님을 누린다는 것은, 욥의 세 친구 가운데 엘리바스의 말처럼 “네 보화를 티끌로 여기고 오빌의 금을 계곡의 돌로 여기라 그리하면 전능자가 네 보화가 되시며 네게 고귀한 은이 되시리니, 이에 네가 전능자를 기뻐하여 하나님께로 얼굴을 들 것이라(욥 22:24-26).” 참으로 훌륭하고 옳은 지적이다. 한데 이를 “여호와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니라(42:7).” 곧 저의 말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그 말로 욥을 정죄하는 데 사용한 것을 두고 뭐라 하신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전능자가 나의 보화가 되신다.’는 것이다. “그리하면 전능자가 네 보화가 되시며 네게 고귀한 은이 되시리니 이에 네가 전능자를 기뻐하여 하나님께로 얼굴을 들 것이라(22:25-26).”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위 자유의지를 주셨고 이는 서로 인격적인 관계를 바라심인데, 그 선택여부는 전적으로 자신의 몫이다. 한데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하는 절규와 같이 자신의 됨됨이를 알게 곧 나에게 부여하신 자유를 주께 더하여 그것까지도 주의 것으로 내어드리는 일, 그럴 때 진정한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6:22).” 그러므로 나를 해방하는 말씀은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14:8).” 곧 나를 온전히 주의 것으로 내어드리고 사는 일. 그럴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다.

솔로몬의 일련의 처신과 그 선택을 보면서 저의 합리적인 타협과 나태함이 서서히 저의 본래 그 자세를 서서히 어렵게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에 믿음 안에서 서로가 같이 할 수 있는 동역자가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저도 이를 회환으로 되새기는 게 아닐까?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 4:12).” 곧 “그러므로 우리가 이같은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일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라(요삼 1:8).”

이를 오늘 시편으로 정돈하듯 묵상하면,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90:1-2).

이 진리의 대명제는 위대한 지도자 모세의 기도문이다. 오늘 우리가 광야와 같은 이 세상에 살면서 진정한 거처와 피난처로 주를 나의 구주로 삼고 사는 일이란,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4:8-9).

이와 같은 고백이 서로가 같은 것이다. 곧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를 너의 거처로 삼았으므로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91:9-11).

이 놀라운 돌보심과 지키심은 그리 경험한 자의 것이다. 이를 누구에게 말하여 알게 하고, 설명하여 전달할 수 있는 그런 사실이 아니다. 이에 우리의 허무함은 극복된다. 돈이 전부인 줄 알고 사는 사람과 사랑이 영원할 거라 믿고 이를 의지하는 사람과 가족을 우선으로 자식을 전부로 알고 사는 사람의 끝은 모두 같다. 우리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이게 전부가 아닌 그 이상의 것,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롬 5:21).”

하여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 그리하여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102:26-27).

이와 같은 고백을 내 것으로 가지고 사는 자가 복이다. 물론 이는 쉽지 않다. 놓을 수 없고 잡지 않을 수 없는 것으로 우린 괴로워한다. 솔로몬은 이를 나중에야 알았다. 기어이 살아서 살고 난 뒤의 얻은 지혜라, “인생이 당하는 일을 짐승도 당하나니 그들이 당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짐승이 죽음 같이 사람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전 3:19-21).” 이를 가만히 다시 읽고 있자면 오늘 우리의 삶도 다를 게 없는 것이다. 죽어라 하고 열심을 다하였던 것으로 나름 성취하여 얻었다 한들, 애써 얻은 박사학위를 가지고 누군 더 높은 것을 얻고자 내려놓을 수가 없다. 누군 여기저기 묶인 부동산으로 부자거지로 산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90:4-5).

오늘 시편이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모세의 시다. 우리가 이 땅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허무함뿐이었다. 결국 우리의 승리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것으로,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146:5).

그 외 무엇으로 만족함을 얻은들 잠시 지나는 안개와 같을 뿐임을. 그러므로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눅 12:2-3).” 이는 인생으로 말할 것 같으면,

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90:5-7).

그리하여,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9).

돌아보면 그렇지 않은 것이 없다. 그때 그 사람, 어떤 일, 그리도 마음을 두고 전심으로 다하였던 일들이 그처럼 한순간이었을 뿐,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고후 5:1-2).” 그러므로 이제 나는,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우리를 괴롭게 하신 날수대로와
우리가 화를 당한 연수대로
우리를 기쁘게 하소서
(14-15).

주께 바라는 한 가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골 1:5).” 이는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63:3).

곧 나의 생명보다 주의 인자하심을 더욱 귀히 여기며 살기를. 고로 오늘의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렘 29:7).” 그러할 때에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내리게 하사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
(1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