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음이로다
아사가 노하여 선견자를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그의 말에 크게 노하였음이며 그 때에 아사가 또 백성 중에서 몇 사람을 학대하였더라
대하 16:10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그는 기이한 일을 행하사 그의 오른손과 거룩한 팔로 자기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음이로다
시 98:1
1, 2차 종교개혁과 함께 하나님을 경외하였던 아사였다. 그가 순종함으로 35년간 유다 땅에는 전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노년에 이르러 저의 두 가지 큰 죄악을 범한다. 하나는 북이스라엘의 바아사 왕이 침공하자 하나님께 의지하기보다 아람 왕 벤하닷에게 예물을 보내고 저들에게 지원을 요청한다. 또 하나는 이와 같은 사실이 옳지 못함을 하나님의 사람 하나니가 지적하자, “그 때에 선견자 하나니가 유다 왕 아사에게 나와서 그에게 이르되 왕이 아람 왕을 의지하고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아람 왕의 군대가 왕의 손에서 벗어났나이다(7).” 하고 직고 하니 저의 말에 회개하기보다 이를 가두고 학대한다. 결국은 아사 왕 39년에 질병을 얻어 고통 중에 죽어가면서 저는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의원들만 의지하다 죽음에 이른다.
저는 종교개혁을 실시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세웠다. 온갖 우상과 그 형상을 불태웠고 이에 하나님의 평안의 축복을 받았다. 그런데 허무하게도 저의 종말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고 쓸쓸히 최후를 맞았다. 우리 신앙의 방심이 순간 얼마나 허무한 결말로 이끄는가를 알 게 된다. 그래서 주님은 이루시되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 26:41).” 곧 우리의 마음과 달리 육신이 약하다. 이를 지키는 길은 기도뿐이다.
생의 어두움은 훈련장소가 된다. 믿음의 단련이 늘 우리로 깨어 있게 한다. 솔로몬의 평안과 아사의 평안이 저들의 노년을 휘저은 셈이다. 이때 우리의 기도는 우리로 항상 주를 바라게 하는데,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민 14:28).” 과연 우린 어떤 말로 주께 아뢰고 있는지.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갚으시되
그의 목전에서 내 손이 깨끗한 만큼
내게 갚으셨도다
자비로운 자에게는
주의 자비로우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악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르심을 보이시리니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시리이다
(시 18:24-27).
시인의 진술과 같이 우린 항상 곤고한 마음으로 주 앞에 세워져야 한다. 그런데 적당하다 여길 때에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잠깐의 부주의로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야기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고전 15:34).” 우리 믿음의 가장 큰 난제는 회의와 갈등이 아니라 무감각한 것이다. 우리의 본질은 내남없이 ‘설마’ 하는 방심에서 죄를 끌어들인다. 마침 사탄은 그 때를 노리고 있는 것이다. 성적으로 물질적으로 스스로 깨어있지 않으면 순간 우리의 약함을 파고 든다. 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베드로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설마’ 하고 자신을 놓아둘 때 영락없다.
하여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9).” 우린 믿음으로 이를 대적해야 하고, 왜 나만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들 때는 허다한 믿음의 사람들도 그러하였음을 되새겨야 한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히 12:1).” 앞서 간 우리의 믿음의 사람들도 다르지 않았다. 저들은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11:39).” 그럼에도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40).” 곧 우리 안에 주신 소망을 붙들고,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12:2).”
이와 같은 말씀이 없었더라면 어땠을까? 믿음은 값없이 주신 선물이나 이를 연마하여 단련하는 일은 우리의 남은 삶에 승패가 달렸다. 오늘 본문에서 아사는 이를 무시하였고, 심지어 자신을 향한 주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아사가 노하여 선견자를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그의 말에 크게 노하였음이며 그 때에 아사가 또 백성 중에서 몇 사람을 학대하였더라(10).” 곧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행하지 않는 모든 것은 그 끝이 불행하다. 오늘의 이 놀라운 은혜와 구원을 감사하는 데 있어 무뎌지면 안 된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이에,
우리가 주를 의지하여
우리 대적을 누르고
우리를 치러 일어나는 자를
주의 이름으로 밟으리이다
(44:5).
이때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곧 서로의 삶이 가려진 게 없이 사귐이 있다면, 이는 먼저 하나님과의 화목이다.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 5:19).” 이를 위해 말씀을 주셨다. 하나님과 화목할 때,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롬 12:18).”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 2:16-18).”
곧 너와 나,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는 힘을 얻은 것이다. 이에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이는 마치 흑암 중에 보화 같아서 “네게 흑암 중의 보화와 은밀한 곳에 숨은 재물을 주어 네 이름을 부르는 자가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줄을 네가 알게 하리라(사 45:13).” 우리가 주와 함께 한다는 것을 자신보다 남이 먼저 안다. 이는 감출 수가 없는 광채다.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
(139:12).
아사 왕이 이 지경이 된 것은 단순히 저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의 영적인 무지는 우리가 아는 진리에 비해 너무 광범위하다. 곧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어둠의 권세는 빛 가운데서도 그림자처럼 도사리고 있다 순식간에 우리 영혼을 삼켜버릴 태세다. 곧 주가 주시는 평강을 알지 못할 때,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들이 행하는 곳에는 정의가 없으며 굽은 길을 스스로 만드나니 무릇 이 길을 밟는 자는 평강을 알지 못하느니라(사 59:8).”
이를 오늘 아사는 저의 최후를 맞으면서도 돌이킬 능력이 없었다. “아사가 왕이 된 지 삼십구 년에 그의 발이 병들어 매우 위독했으나 병이 있을 때에 그가 여호와께 구하지 아니하고 의원들에게 구하였더라(12).” 결국 저는 “왕위에 있은 지 사십일 년 후에 죽어 그의 조상들과 함께 누”웠다(13). 누구라도 인생의 결말은 하나인데, 저는 그 너머에서 오늘을 어떤 모습으로 지내고 있을까? 나는 가끔 ‘영원한 삶’을 두고 오금이 저린다. 지금의 이런저런 일들이야 다 지나가는 것으로 끝이 있다. 하지만 죽음 너머에서 비로소 살아야 하는 영원한 삶을 두고는 긴장하게 된다. 이를 위해서도 순간의 방심을 주의해야 한다.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엡 4:18).”
가끔 누구를 생각하는데, 저들은 부친과 함께 주의 사역에 한 생을 다 바쳤다. 그런데 노년에 이르러 누구는 그릇된 길로 행하듯 자신이 붙들고 전하였던 복음을 부정하며 무슨 이상한 진리에 사로잡혔다. 또 누구는 교회가 부흥하여 대형화되면서 교회 공금을 횡령하다 교인들에 의해 고발을 당하기도 하였다. 누구는 노년의 생을 연명하느라 여념이 없기도 하고… 내가 어릴 때 서로의 교회가 연합하여 부흥회도 하고 수련회도 같이 갔던 기억도 있는데…. 순간 총명이 어두워지면, 오늘 아사 왕의 말로는 나의 것이 될 수도 있다. “내가 말하기를 이 무리는 비천하고 어리석은 것뿐이라 여호와의 길, 자기 하나님의 법을 알지 못하니(렘 5:4).” 언제든 나 자신도 예외일 수 없다는! 하면 내가 늘 필요한 것은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으로 주를 바라며 그의 도우심을 바라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51:17).
이에,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주는 재앙과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이시니이다
(10:14).
늘 주께 아뢰고 그의 도우심만을 구할 수 있기를, 오늘 시편은 이를 위하여 몇 가지 제안을 담고 있다.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그는 기이한 일을 행하사
그의 오른손과 거룩한 팔로
자기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음이로다
(98:1).
여기서 먼저 주목하게 되는 것은 ‘새 노래’다. 이는 날마다의 은혜로 오늘은 오늘의 은혜가 필요한 것을 되새기게 한다.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아름답게 연주할지어다
(33:3).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40:3).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
(96:1).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새 노래로 노래하며
열 줄 비파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144:9).
할렐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할지어다
(149:1).
이와 같이 ‘새 노래’는 날마다 매순간 예수의 은혜를 찬양하는 감사로 드려진다. 그렇게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계 5:9-10).” 즉 우리의 ‘새 노래’는 날마다 더해지면서 나로 새롭게 한다. 구별된 삶을 일깨운다.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행 17:27).”
우리 하나님은 결코 멀리 계시지 않는다. 당장 어떤 문제로 인해 하나님이 멀리 느껴질 때도 있지만 이를 위해서도 ‘새 노래’ 곧 오늘의 감사와 은혜가 필요하다. 어제는 지나갔고 한 날의 괴로움은 그 한 날의 것으로 족하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34).” 다만 오늘, 지금을 살아갈 뿐이다. 지난날을 두고두고 마음에 담고 사는 일도 어리석지만 앞날의 것을 오늘 끌어다 염려하는 것도 어리석을 따름이다. 아사의 지난날이 오늘의 과오를 덮어주지는 않았다. 저는 결국 하나님의 사람을 무시했고 오히려 박해했으며, 자신에게 닥친 질병도 대수롭지 않은 듯 주의 도우심을 구하지 않았다. 그리고 맞이하였을 저의 죽음이 나는 두렵다.
하면 ‘새 노래’는 날마다 내 몸을 주의 전으로 드리는 것일 텐데,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전 6:19).” 무슨 뜻으로 바울은 이를 전하는 것일까? 더는 나의 취향, 나의 선호도, 나의 의지가 내 것이 아님을… 곧 나에 대한 권리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예배이고, 주를 온전히 따르는 자였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 곧 우리의 어떤 명분이나 선한 의지가 헌신이 아니다. 착하고 성실하다고 해서 주의 자녀가 아니다. 하나님 외의 다른 모든 명분은 죄악과 다를 바 없다. 인류와 지구 환경을 위한 그 어떤 공로도,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아무 유익이 없다는 말,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후 4:5).” 자칫 우리가 빠지기 쉬운 함정이 명분과 신념이었다. 그것이 설령 온 인류를 구원하는 일이었다 해도 하나님 외의 명분, 곧 저들 한 영혼을 향한 주의 사랑으로가 아니었다면 아무 유익이 없다.
우린 다만 착하게 살자는 종교를 갖은 게 아니다. 자신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것, ‘새 노래’로 “너는 삼가서 네게 보이는 아무 곳에서나 번제를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의 한 지파 중에 여호와께서 택하실 그 곳에서 번제를 드리고 또 내가 네게 명령하는 모든 것을 거기서 행할지니라(신 12:13-14).” 주가 원하시고 주께서 세우신 그런 방식으로… 그렇지 않으면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논쟁하며 다투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가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의 목소리를 상달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니라(사 58:4).” 애써 버려진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그러할 때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3-24).” 곧 오늘 우리의 ‘새 노래’는 그러하였다. 그러할 때,
여호와께서 그의 구원을 알게 하시며
그의 공의를 뭇 나라의 목전에서
명백히 나타내셨도다
(2).
우리로 알게 하시는 일, 그 하나님의 인자와 진실하심으로,
그를 위하여
나의 인자함을 영원히 지키고
그와 맺은 나의 언약을
굳게 세우며 또 그의 후손을
영구하게 하여 그의 왕위를
하늘의 날과 같게 하리로다
(89:28-29).
이는 엄연한 주의 약속이다. “산들이 떠나며 언덕들은 옮겨질지라도 나의 자비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나의 화평의 언약은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너를 긍휼히 여기시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사 54:10).” 그렇게 믿었던 것들이 떠나고 배신한다 해도 주는 결코 떠나지 않으신다. 이 언약을 옮기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소리칠지어다
소리 내어 즐겁게 노래하며 찬송할지어다
(4).
오늘도 우리의 찬송은 정당하였고 ‘새 노래’는 주를 기쁘시게 하였다. 이에 우리 영혼이 살아있다는 증거는,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150:6).
곧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나는 목적이 있는 존재로 오늘 하루도 허락하신 이의 계획과 섭리 가운데서 채워진다. 그리하여 나의 ‘새 노래’는 주의 강림을 준비하며, 혹은 나의 죽음 너머의 영원한 생을 예비하게 하였다.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 15:49).” 이에 성결하게 하고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계 21:27).” 또한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11).” 이에 나의 오늘의 ‘새 노래’는 오늘의 복과 영생의 복을 살게 한다. 곧 “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 이에,
그가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로다
그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공평으로 그의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
(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