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가 이르되 내가 보니 온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 같이 산에 흩어졌는데 여호와의 말씀이 이 무리가 주인이 없으니 각각 평안히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하는지라
대하 18:6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시 100:3
남유다 4대 왕 여호사밧이 북이스라엘 아합과 동맹하였다. 아합은 길르앗 라못과의 전쟁에 저와 연합하여 싸울 것을 제안한다. 이를 선지자들에게 묻기로 하고 북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을 모은다. 한데 저들 선지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남북 연합 전선에서 승리를 거둘 것이라 예언한다(1-5). 한데 여호사밧은 다른 선지자를 찾고, 마침 바른 말 하는 미가야에게 청한다(6-8). 그때도 거짓 선지자 시드기야가 철로 만든 뿔을 들고 와 거짓 선지자들의 주장을 동조한다(9-11). 그때 아합의 명령으로 미가야가 불려오고 저는 모두가 길하다 하는 주장에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예언한다(12-17). 곧 모든 선지자들이 거짓으로 승리할 것을 예언하나 미가야는 저들이 거짓의 영에 의해 예언하였음을 알리고(18-22), 이를 들은 시드기야는 미가야의 뺨을 때리고 투옥한다(23-27).
400명의 선지자들이 한 목소리를 낼 때 단 한 사람 미가야만이 하나님의 참 뜻을 말한다. 10명의 정탐꾼이 가나안 정복을 부정할 때 단 두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하나님의 언약을 주장하며 전진할 것을 예언하였던 때를 연상한다. 진리는 다수결의 원칙에 의한 게 아니다. 오늘 본문은 열왕기상 22장 1-12절 말씀에도 수록되어 있다. 남유다의 왕 여호사밧이 북이스라엘과 연합하여 아합에게로 가서 이 사달이 난다. 아합이 누군가? 악명 높은 왕후 이세벨과 같이 치리하던 자였다. 400명의 선지자들은 저들에게 길들여져 한결같이 아합의 승리를 장담한다. 하나님의 뜻을 허울뿐이다. 하지만 미가야만이 저들에게 거짓말하는 영이 그 입술을 주장한다고 하다 뺨까지 맞고 옥에 갇힌다.
은혜의 때에 이를 감사하지 못하면 잃는다. 주신 사명도 적당함으로 잃을 수 있다. 그리고 멸망의 길로 간다. 때가 되면 오늘 본문과 같이 하나님의 참 뜻이 무시되고 조롱당하는 것을 본다. 이는 노아의 때에도 그러했다.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마 24:38-39).” 하면 오늘과 같이 평화롭고 화평하던 때가 얼마나 있었을까? 은혜의 때에 감사할 줄 모르면 이를 잃는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후 6:1).” 이는 실제 무서운 경고다. 평안하고 괜찮은 때에 이를 온전히 받고 주의 쓰임에 바로 사용되어야 한다. 바울의 이어지는 말씀이 의미심장하다.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22).” 아니면 곧 잃는다.
지금이 구원의 날인 것이다. 한데 오늘 본문에서 여호사밧이 그러했듯 아합과 화해의 손을 잡으면서 이를 방심하였다. 왕상 22:2절에 보면 “셋째 해에 유다의 여호사밧 왕이 이스라엘의 왕에게 내려가매” 하고 상술하고 있다. 앞서 “아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전쟁이 없이 삼 년을 지냈더라(1).” 하고 소개하고 난 뒤의 일이다. 앗수르나 아람을 견제하기 위해 남북 이스라엘이 연합하고 있을 때이다.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은 아합의 딸 아달랴와 결혼한다. 한 민족의 두 나라가 모처럼 화평스러운 것 같다. 그러나 “여호람이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삼십이 세라 예루살렘에서 팔 년 동안 통치하니라 그가 이스라엘 왕들의 길을 가서 아합의 집과 같이 하였으니 이는 아합의 딸이 그의 아내가 되었음이라 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왕하 8:18-19).” 하고 이어지는 말씀은 이후의 생활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아합은 본래 “예로부터 아합과 같이 그 자신을 팔아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한 자가 없음은 그를 그의 아내 이세벨이 충동하였음이라(왕상 21:25).” 어떠한 자이었나를 우리는 알고 있다. 여호사밧은 결국 미가야의 예언의 말씀을 무시하고 출전하였다가 여호사밧은 죽을 뻔하고, “병거의 지휘관들이 여호사밧을 보고 이르되 이가 이스라엘 왕이라 하고 돌아서서 그와 싸우려 한즉 여호사밧이 소리를 지르매 여호와께서 그를 도우시며 하나님이 그들을 감동시키사 그를 떠나가게 하신지라(대하 18:31).” 하나님께 심한 책망을 듣는다. “하나니의 아들 선견자 예후가 나가서 여호사밧 왕을 맞아 이르되 왕이 악한 자를 돕고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들을 사랑하는 것이 옳으니이까 그러므로 여호와께로부터 진노하심이 왕에게 임하리이다(19:2).”
요즘 같이 그것이 덕인 것처럼 종교적 화합을 칭찬하고, 교회와 세상의 융화를 선히 보는 경우도 많다. 열에 아홉은 이를 나쁘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본래 저들의 악함을 바로 알지 못해서가 아니다. 스스로 언제든지 물들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다. 나약한 자신을 모르기 때문이다. 저들을 일러,
그는 손을 들어
자기와 화목한 자를 치고
그의 언약을 배반하였도다
그의 입은 우유 기름보다 미끄러우나
그의 마음은 전쟁이요
그의 말은 기름보다 유하나
실상은 뽑힌 칼이로다
(55:20-21).
특히 우리가 어떤 어려움, 무거운 짐을 지고 갈 때 세상 누구라도 도우면 저를 선히 여기고 오히려 교회가 저를 따를 때가 많다. 하나 시인은 이어서 진술하기를,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22).
이를 온전히 붙들지 못할 때, 우리는 세상의 호의를 선으로 여긴다. 이를 조심할 것을 성경은 누차 경고하셨다. “그의 맛있는 음식을 탐하지 말라 그것은 속이는 음식이니라(잠 23:3).” 하고 덧붙여 우리도 덩달아서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4).” 하였다. 이로써 “악한 눈이 있는 자의 음식을 먹지 말며 그의 맛있는 음식을 탐하지 말지어다.” 왜 그러시는 것일까?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 그가 네게 먹고 마시라 할지라도 그의 마음은 너와 함께 하지 아니함이라(6, 7).” 자칫 우리가 하나님을 부정하고 거역하는 자의 호의를 선의로 삼다가는 “네가 조금 먹은 것도 토하겠고 네 아름다운 말도 헛된 데로 돌아가리라(8)” 그 결국은 뻔하다. 이에, 시인은 기도하였다.
내 마음이 악한 일에 기울어
죄악을 행하는 자들과 함께
악을 행하지 말게 하시며
그들의 진수성찬을 먹지 말게 하소서
(141:4).
이는 결국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라(엡 5:11-12).” 즉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데서 선을 바랄 수는 없다. 그러므로 자신을 지켜달라고 주께 아뢰는 다윗의 기도와 같이 우리도 자신을 살펴 남을 탓할 것 없다. 저들은 본래 자신들이 하는 짓을 알지 못한다. 이는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함으로 생기는 당연한 것이다. 먼저 자신을 보는 게 그래서 중요하다. 그러니 저들 탓할 것 없다.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2).”
하나님을 그 마음에 모시기 싫어함으로 생기는 마음은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롬 1:28-31).” 이것은 실제 우리 사회에서 너무 흔한 모습이지 않던가? 그만큼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2:1).” 그러니 저들을 판단할 것도 비판할 것도 없이 저들을 보며 자신을 바로 하는 것이 참 지혜이겠다.
하여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 6:1).”
오늘은 누가 오기로 하였다. 너무 맥락 없는 사람이라, 며칠 동안 하나님이 무슨 뜻으로 그러시는가, 하고 생각하고 묻고 마음을 모았다. 물론 올지 안 올지는 모른다. 또한 무슨 일인지도 알 수 없다. 오랜만의 만남이 때론 두려우나 기대되는 것은 주가 원하시는 것에 대한 궁금함 때문이다.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먼저 하나님의 은밀하신 뜻이 무엇인가, 헤아리는 일이다. 앞서 내가 짐작하는 것도 지레 염려가 앞서는 것도 모두 옳지 않다. 오직 주께 맡김이란, 오든지 안 오든지, 어떠한 일로 새로운 만남인지 혹은 지나가는 것인지… 하나님과 하나 된다는 것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하여 우리 주님과 같이 먼저 주와의 시간이 필요하였다. 일찍 눈을 뜨고 시간에 개의치 않고 교회로 나왔다. 말씀을 묵상하면서도 저를 생각하고 주께 아뢴다. 설령 그저 해프닝이라 해도 먼저 주께 묻고 그 뜻을 헤아림이 옳다.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잠 25:2).”
오늘 여호사밧은 400여 명의 선지자들이 모두 하나같은 말로 입바른 소리를 하는 것에 의구심에 생긴 것일까? 또 다른 선지자가 없는가 물었고, 아니나 다를까 미가야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왕의 일에 옳은 소리만 하여 싫어하는 자가 있었다. 우린 서로 듣기 좋은 말로 서로 화목하기보다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헤아려 목숨을 걸고라도 주의 뜻을 전하는 것이 옳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5-6).” 우리가 범사에 주를 인정한다는 것, 어떤 일에서도 사사로이 풀 것이 없음을 아는 것. 곧 자신을 두고 하찮게 여길 수 있으나 하나님은 결코 하찮게 우릴 사용하시지 않으신다. 어제 묵상하였던 말씀이다. 그때마다 떠오르는 인물은 마리아다. 저는 미천하나 하나님은 저의 몸에서 우리의 구세주가 나게 하셨다. 또는 사사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보잘것없는 이들이었으나 귀히 쓰임을 받았다.
하여,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29).”
이 말씀을 되새길 때면 나는 늘 나의 약함과 미련함까지도 주가 사용하실 것을 묵상한다. 이를 위해 한 가지 마음에 두는 것은 자주 주께 묻는 것이다. “그 후에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아뢰되 내가 유다 한 성읍으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올라가라 다윗이 아뢰되 어디로 가리이까 이르시되 헤브론으로 갈지니라(삼하 2:1).” 곧 다윗은 늘 주께 물었고, 솔로몬은 이에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잠 3:7).” 이는 결국 평소에 몸에 밴 습관과 같아서,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6).” 이를 다시 되새겨도 ‘범사에’다. 범사(凡事) 곧 ‘모든 일’ 아주 ‘평범한 일’에도 주께 묻는 것,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욥 42:4).”
이것이 땅의 그릇됨 가운데서 중심을 잃지 않는 길이다. 보면 너무 선한 길이 많다. 모든 사람의 말이 그럴듯하다. 특히 요즘은 한 사안을 두고 서로의 말이 다른데, 이 사람 말을 들으면 이 사람 말이 옳고 저 사람 말을 들으면 저 사람 말이 옳다. 다들 옳다 하니 정작 옳은 게 무엇인지 갈피를 잡기도 어렵다. 이는 마치 안개 같아서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4).” 손에 쥔 것 없으면서 온통 다 그러한 것 같아, 400명이 그렇다고 하는데 미가야 혼자 아니라고 하다 매 맞고 옥에 갇히기까지 한다. 할 때, “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 가는 안개니 그들을 위하여 캄캄한 어둠이 예비되어 있나니(벧후 2:17).” 결국 이 일로 우리 심령도 상한다.
“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8).” 저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을 두고 하는 말로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 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6-7).” 하고 베드로만 롯을 의인이라 칭하였다. 우린 누구도 저의 행실에서 의로움을 볼 수 없다. 한데 주가 행하신 일로 저를 그리 여길 뿐이다.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고후 4:2).”
우리가 주 앞에 바로 선다는 것, 혹시 미가야 선지자와 같이 억울한 지경에 놓인다 해도,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키랴 그의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욥 23:12-14).” 이와 같은 믿음이 절실하다. 우리는 그러한 사명자로 부르신 것이기 때문이다.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살전 1:6).” 이를 위해서도, 나에게는 말씀이 절실하다.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2).”
이는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 이게 나였다. 더는 진리 앞에서 다수결의 원칙은 없다.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송사에 다수를 따라 부당한 증언을 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해서 편벽되이 두둔하지 말지니라(출 23:2-3).” 하면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이것이 지혜자의 강론이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 14:12, 16:25).”
그러므로 오늘 시편은 은혜에 따른 감사로 주 앞에 나아갈 것을 찬송한다.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
(100:1-2).
곧 우리에게 진정한 예배의 날이란 즐거이, 부르고, 기쁨으로, 노래하고, 감사함으로, 찬송하고, 송축하는, 일이다. 오늘 시편은 이와 같은 시어들로 가득하다. 곧 우리는 잔치에 들어갈 사람들이다.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계 19:9).” 이때에는 울음을 금하고 웃음을 권한다.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 느헤미야가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느 8:9-10).”
요즘 우린 장모와 같이 살고, 아내는 연로함으로 힘겨워하는 어머니를 모시느라 힘에 겹다. 그러면서도 닦달을 하고 뭐라 연신 잔소리를 해대느라 늘 조용하던 집안이 시끌시끌하다. 저녁을 먹으며 어머니께 여쭙길, 요즘 하도 따님 욕 드시느라 배부르시겠어요? 하고 물었더니 늙으신 장모는 허허, 웃으며 다 옳은 소리만 해. 선생님이라 그런지 똑순이 같어! 하고 감싼다. 모녀기간이라 그런가, 서로 뭐라 하면서도 서운할 게 없다. 문득 그 생각이 나는 것은 우리가 주께 묻고 때론 따지기도 하면서 징징거리는데도 하나님은 일체 서운하시지도 않으신가보다. 우리로 ‘우는 것을 금하고 즐거워하라 하신다!
이 날은
여호와께서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118:24).
오늘은 항상 이 날을 위한 것이다. 곧 우리가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 이는,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100:3-4).
오늘을 사는 우리의 단련이다. 이는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사 40:9).” 곧 우리의 하루하루가 함성이 된다. 주의 성일을 지키는 자들과 동행한다. “우리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대상 29:13).” 비록 너무나 사사롭고 보잘것없는 것이라 해도 이를 들어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것이었으니,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 13:15).” 하면,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 2:5).”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
(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