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인자와 정의를 노래하겠나이다
그런즉 너희는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삼가 행하라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불의함도 없으시고 치우침도 없으시고 뇌물을 받는 일도 없으시니라 하니라
대하 19:7
내가 인자와 정의를 노래하겠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찬양하리이다
시 101:1
남유다 여호사밧이 북이스라엘 아합과 동맹하여 아람의 길르앗 라못에서 전쟁을 벌이고 돌아왔다. 앞서 미가야 선지자는 거짓 선지자 400명과 맞서 주의 뜻을 전하다 옥에 갇히었다. 아람군이 여호사밧을 아합으로 오해하여 저를 집중 공격하였으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위기를 모면하였다. 오늘 본문은 여호사밧은 무사히 돌아오고, 선견자 예후의 질타를 듣는다(대하18:28-19:3). 이러한 본문 내용은 열왕기상 22:29-40절의 내용과 병행구조인데 두 본문에서 세 가지 차이가 난다.
첫째, 열왕기상에서는 여호사밧이 자신이 아합으로 오인되어 집중 공격을 받았을 소리질러, 아람군이 저가 아합이 아닌 것을 알고 추격을 멈추었다고 기록하는 반면 오늘 본문에서는 저가 소리 지르자 여호와께서 도우심으로 아람군이 추격을 중지하였다고 한다. 곧 그 관점이 서로 다른 것이다. 열왕기서는 객관적인 서술이라면 역대기서는 다윗과의 언약을 근간으로 하나님이 저를 보호하셨음을 알린다.
둘째, 남북연합군의 패전과 아합의 전사 소식을 열왕기서에서는 기록하고 있는데 역대기서에서는 이를 생략하고 아합의 죽음과 여호사밧의 무사 귀환을 상대적으로 드러낸다. 남유다 왕조에 대한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하심을 강조하며 주의 인도와 보호하심을 강조하는 것이다.
셋째, 열왕기서에서는 아합의 죽음에 따른 장사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역대기서는 이를 생략함으로 오히려 살아돌아온 여호사밧을 주의 종 예후가 꾸짖고 저를 바로 세운다.
곧 열왕기서는 남북 이스라엘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다루는 반면 역대기서는 오직 다윗 언약의 계승과 그 정통이 남유다에 있음을 집중하게 한다. 결국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일, 악한 일에 대하여 우리로 경계하고 저와 함께 하면 안 되는 것을 알게 한다. 오늘 본문 2절, “하나니의 아들 선견자 예후가 나가서 여호사밧 왕을 맞아 이르되 왕이 악한 자를 돕고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들을 사랑하는 것이 옳으니이까 그러므로 여호와께로부터 진노하심이 왕에게 임하리이다.” 하고 가감없이 주의 뜻을 아뢴다. 여기서 악한 자는 당연히 북이스라엘의 왕 아합과 예후 이세벨이다. 저들은 여로보암에 이어 우상을 숭배하고 시돈의 공주 이세벨 왕후의 바알과 아세라를 숭상하였다. 의당 여호와의 옳은 선지자들을 박해하였고 죽이기도 하였다.
성경은 우리에게 누누이 강조하시는 바, “너는 스스로 삼가 네가 들어가는 땅의 주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라 그것이 너희에게 올무가 될까 하노라(출 34:12).” 우리로 죄를 경계하고 악을 멀리하게 한다. 시편의 서두 부분에서도,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1:1-2).
이는 우리의 기본자세이다. 우리로 주의 자녀로 사는 데 있어 복의 근원이 되는 길을 제시한다. 바울도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고전 5:11).” 곧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은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섬기는 일이다. 자신들을 위하여 이를 만들거나 섬기는 것에 엄히 경고하셨다. 이는 음행과 탐욕과 후욕과 술 취함과 토색함이 우상 숭배의 하나인 것을 알린다. 곧 우리 스스로 예외적으로 두는 것에 이미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우상이 있다.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살전 5:14).”
이로써 우리가 할 일이 분명해진다. 나만 잘 살고, 적당히 자신만 위하고 사는 일에 대하여도 성경은 주의를 준다. 하여 오늘 여호사밧을 예후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회개하는데 이는 행동으로 옮겨진다. 브엘세바에서 에브라임 산지까지 다니며 백성들로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을 전한다(4). 또한 각 지방의 재판관들에게 일러 공의로 재판을 행하게 한다(5-7). 수도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제사장 레위인들을 바로 세우며 여호와 중심의 임무수해을 강조한다(8-10). 끝으로 아마랴를 대제사장으로 세우고 유다지파의 족장 스바댜를 왕에 속한 최고 책임자로 세운다(11).
이는 17:3-9절에 언급된 1차 종교개혁과 함께 2차 종교개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는 모두 율법에 근거한 것이다(출 18:13-16, 17:8-13). 사법제도를 정비하고 실제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께로 돌아와 옳은 일을 하게 한다. 왕으로서의 책무와 그 역할을 회개하는 심정으로 수행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다한다는 것, 예수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지상명령이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9-20).” 이는 직분에 따라 그 역할이 다르지만 하나로 통한다. 곧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우리의 세상 끝날까지 주가 함께 하시겠다는 것, 이것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예수께) 주셨으니” 곧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로 이 복음을 전하게 하시는 것, 삶으로 말로 어떤 관심과 그 행동으로 이를 실천한다는 일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이는 누구만의 일이 아니다. 가령 아내가 아이를 가르칠 때 안 믿는 그 가정과 아이를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공부를 시킨다. 이때의 글자 하나 숫자 하나는 힘이다. 주의 권능이고 사랑이 된다.
우리가 이 일을 행하는 데 있어 누가 어떤 일을 하는지, 나는 무얼 하는지, 그런 구분으로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목사는 말씀 전하는 일로 그 임무를 수행한다면 저마다의 역할에서 주의 마음으로 행하는 모든 일에 주의 영이 함께 하시게 해야 한다. 이때의 부득이한 마음은 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다. 하면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전 9:16).”
누굴 만나는 일에서부터 듣고 말하고 생각하고 저를 위해 기도하는 모든 일에서 주의 권능이 필요하다. 이것으로 주의 성품을 닮은 자로 산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 1:15-16).” 우리가 이룰 수 있는 거룩은 묵묵한 준행으로다. 누가 왔다. 저를 맞이하고 함께 주의 역사하심을 나눈다는 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요일 3:3).” 이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이보다 더 소중하고 귀한 일이 있을까? 고로 지금 내게 두신 일을 소명으로 알고 사명을 다하는 것,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눅 19:17).” 이때 그 실력이나 일의 고하는 없다. 다만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1-2).”
그러므로 내가 지금 무슨 일을 하는가보다 왜, 무엇을 위해 하는가, 하는 데 그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누구와의 대화에서 오늘의 나를 나는 그리 설명하였다. 애써 이해시키려고도 또는 으쓱하여 좀 나는 체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부끄러울 것도 없다. 곧 우리의 조화로운 삶은 다채로운 직업들만큼이나 그 역할에서 주를 생각하는 데 있겠다. 이때 우리가 당하는 괴로움까지도 실은 복음을 전하는 데 유용한 것이 된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게 없는 거처럼 주의 이름으로 행하면 숨길 게 없다. “내가 너를 그레데에 남겨 둔 이유는 남은 일을 정리하고 내가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딛 1:5).” 이때에 욥의 고백을 적용하면 어떨까?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 그러므로 주를 경외하는 것과 성심으로 주어진 삶을 사는 일은, 하나로 우리의 삶이 곧 주의 자랑이 되고 기쁨이 되는 일이다.
이에,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신 10:12-13).”
그렇다면,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 12:13).”
나는 내가 살아온 날을 돌아보면 남은 날들이 더욱 귀해진다. 더는 그릇된 길로 가지 않기를. 예전에 즐기던 것으로 시간을 빼앗기지 않기를. 누구를 마주하고 대하는 데 있어 나의 선호가 아니라 주의 마음으로 이를 감당할 수 있기를.
할 때에,
내가 인자와 정의를 노래하겠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찬양하리이다
내가 완전한 길을 주목하오리니
주께서 어느 때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
내가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 안에서 행하리이다
(101:1-2).
역시 다윗의 시다. 저는 하나님의 성품인 인자와 정의를 붙들고 찬송하였다. 이는 예수님의 말씀으로도 알 수 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하면 그 결과는 놀랍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45).” 우리가 주의 자녀로 산다는 일,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눅 6:35).”
곧 예전의 어떤 일, 무의식 속에 내재된 어떤 방어기제로써의 공격적인 언사를 죽이는 것,
여호와께서는 모든 것을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
(145:9).
이것이 우리 하나님의 인자이고 정의다. 이를 찬송하는 것은 주의 완전하심을 따라 살려는 일이다. 아브라함이 99세에 약속을 받아 아들을 낳을 것이라 하실 때,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1).” 우리로 주가 바라신 것,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하시면서 ‘너는 내 앞에서 완전하게 행하라.’ 하셨다. 우리가 어찌 완전-완벽할 수 있을까? 그 수는 하나다. 어떤 일에서든지 주의 마음으로, 주의 사랑으로, 주의 권능을 가지고 행하는 것. 더러는 어색하고 또 때로는 바보 같을지라도, “…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 19:2).”
여호사밧은 아합에 동조하였고 저가 벌이는 전쟁에 같이 동참하고 간신히 살아서 돌아왔다. 예후가 주의 이름으로 저를 책망할 때 저는 왕이었으나 이를 모두 인정하였다. 그리고 즉시 자시의 임무를 수행하며 백성들을 격려하고 주께로 돌아오게 하였다. 나는 저의 일이 자신을 향한 증거임을 느낀다. 누구와 대화를 하며 저에게 일러주는 나의 이런저런 말이 실은 나를 향한 주의 말씀이 되게 해야 한다. 돌이켜 내 안의 감동이 주를 찬송하게 해야 한다. 듣고 있는 누구를 향한 게 아니라, 나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려함에서다. 하면,
나는 비천한 것을
내 눈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이요
배교자들의 행위를 내가 미워하오리니
나는 그 어느 것도 붙들지 아니하리이다
사악한 마음이 내게서 떠날 것이니
악한 일을 내가 알지 아니하리로다
(3-4).
내가 그리 살았던 것을 알면 알수록, 이를 인정함으로 주 앞에서 자신을 다스린다.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행 20:28).” 어떤 역할로 어떤 자리를 다하든지,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곧 이때에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마 15:11).” 행여 무슨 말을 할 때에 그것이 나의 자랑이 되고 나를 돋보이게 하려는 게 아니기를. 고로,
자기의 이웃을 은근히 헐뜯는 자를
내가 멸할 것이요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를
내가 용납하지 아니하리로다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살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따르리로다
(5-6).
삶은 말에 있고 말의 언어는 그 사람의 인격이다. 일련의 ‘대통령의 언어’로 나라 안팎이 시끄러우면서 여러 생각이 있었는데, 앞서 다윗의 표현과 같이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를
내가 용납하지 아니하리로다
…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따르리로다
하는 것으로 하고 싶은 말을 가름한다. 하면
거짓을 행하는 자는
내 집 안에 거주하지 못하며
거짓말하는 자는
내 목전에 서지 못하리로다
(7).
이를 위해서도 ‘근신하는 자’로,
아침마다 내가
이 땅의 모든 악인을 멸하리니
악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에서 다 끊어지리로다
(8).
이를 알 때 두려워하고, 두려워할 때 삶에 대한 주신 이를 경외함이 삶을 주도한다. 곧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고전 5:7).” 그러므로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21-2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