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행하며
여호람이 삼십이 세에 즉위하고 예루살렘에서 팔 년 동안 다스리다가 아끼는 자 없이 세상을 떠났으며 무리가 그를 다윗 성에 장사하였으나 열왕의 묘실에는 두지 아니하였더라
대하 21:20
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행하며 그의 말씀의 소리를 듣는 여호와의 천사들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시 103:20
여호사밧을 이어 요호람(B. C. 848-841)이 남유다의 제 5대 왕이 되었다. 저는 서른둘에 즉위하여 8년을 통치하고 죽었다. 저의 행적은 여호사밧과 달랐다. 형제와 신하를 죽이고 북이스라엘 아합의 딸과 결혼하였다. 저의 악행에도 하나님은 다윗과의 언약을 기억하셨다. “여호와께서 다윗의 집을 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셨음은 이전에 다윗과 더불어 언약을 세우시고 또 다윗과 그의 자손에게 항상 등불을 주겠다고 말씀하셨음이더라(7).”
여호람은 저의 죄로 죽었다. 우상숭배 정책을 실시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죄를 범하게 하였고 가장 악한 이스라엘의 왕 아합의 딸과 결혼함으로 동맹을 맺었다.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저는 타락하여 하나님과 사람 앞에 죄를 범하였다. 이를 한 구절로, 저의 최후에 대한 진술이 말해준다. “여호람이 삼십이 세에 즉위하고 예루살렘에서 팔 년 동안 다스리다가 아끼는 자 없이 세상을 떠났으며 무리가 그를 다윗 성에 장사하였으나 열왕의 묘실에는 두지 아니하였더라(20).”
이를 역설적으로 오늘 시편으로 대신 이해한다면,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103:12-14)
만일 이와 같은 주의 긍휼하심이 아니라면 오늘 우리는 어떠할까? 나 자신은 어떠했을까? 엄연히 성경은 우리에게 일러 “너는 스스로 삼가 네가 들어가는 땅의 주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라 그것이 너희에게 올무가 될까 하노라(출 34:12).” 하고 우리가 세상 문화를 접하고 이를 수용하여 신앙을 어지럽힐 것을 우려하였다. 그 결국은 전적으로 자신의 몫이다. 하여 “사악한 자의 길에 들어가지 말며 악인의 길로 다니지 말지어다(잠 4:14).” 이는 당장의 성공과 마치 먼 곳의 미래를 보장하는 것 같지만, 그래봐야 고작 8년이었다. 여호함는 그리 통치하자고 그처럼 악을 무서워할 줄 몰랐다.
우리의 안팎으로 여호람이 여럿이다. 저들은 우릴 공격하고 공략하여 어떻게든 무너뜨리려 한다. 때론 자신 속에 내재된 무의식의 감정이고 때론 가족이며 때론 가장 가까운 이웃이며 또는 선을 베풀던 손길이다. 어쩌면 우리에게 가장 무거운 성경의 요구는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1-12).” 하신 예수님의 명령이 아닐까? 여기서 주목할 것은 ‘나로 말미암아’ 즉 예수님 때문에, 교회 때문에 당하는 다양한 어려움을 뜻한다. 이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는 게 오히려 복이라 하신다. 그러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말씀이다.
이를 삶으로 적용하여 구체적으로 묵상한다면 이보다 비현실적인 말씀도 없는 듯하다. 내 삶에 적용이 안 되는 말씀이란 얼마나 허무한가? 성경은 결코 ‘그림의 떡’이다 아니다. 루브르박물관에 전시된 희귀한 고문서나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게 아니다. 다소 성급한 언급이지만 ‘여호람’은 오늘도 여전하여 내 안에 또는 나를 둘러싸고 언제든지 ‘주를 향한 나의 마음’을 공격한다. 나의 자존심이나 자격지심에서부터 가장 믿고 의지하였던 사람으로부터의 실망이나 저에 대한 낙심에까지… 나아가 대놓고 욕하고 박해하고 모욕하고 능멸하는 일에 이르는 모든 공격적인 것들을 마주할 때 우리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하신다! 이는 그야말로 초자연적인 능력이 아니고는 감당하기 어려운 명령이다.
한데 그 이어지는 말씀은 “하늘에서 너의 상이 큼이라.” 하시는 대목이다. 이와 같은 명령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나로 말미암아”라는 전제를 앞서 10절에서는 결론처럼 이미 부여하였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곧 ‘의를 위하여’는 ‘나로 말미암아’와 같은 의미다. '의'와 '나'는 예수시다.
오늘 여호람의 이야기를 읽다가 어제 오후에 읽었던 내용이 연관되어 같이 묵상하게 되었다. 우리가 믿는다는 것, 곧 신앙을 가지고 산다는 일에는 언제 어디서나 ‘여호람’을 마주하고 저의 공격을 받는 알이다. 어쩌면 신앙을 가지고 살면서 당연한 일이다. 할 때,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요 16:2).” 곧 우리가 예수를 믿으며 그저 평온하다면 그것이 오히려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그렇다면 ‘하늘에서의 상을 위하여’도 이를 기꺼이 견디고 이겨내야 한다는 말씀인데, 물론 그에 따른 능력은 주가 더하실 테지만….
먼저 그에 따른 어려움은 어떤 게 있을까? 산상수훈의 8복에서 그 실체의 어려움을 찾을 수 있었다. 또한 그 약속의 상급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었다. 첫째는 우리 생활을 에워싸는 여러 환경과 여건이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여기서 애통한다는 것은 지금 당장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들로, 함께 할 수 없는 외로움으로부터 이를 반대하는 괴로움에까지를 말한다. 또는 실질적인 삶의 문제로 건강상의 이유, 돈의 궁핍, 자식이나 가족들이 겪는 고통, 하는 일에 번번이 좌절하는 일들… 이러한 것들이 술술 잘 풀리면 이를 복이라 하겠는데, 예수님은 이상하게 애통하는 것을 복이라고 하신다. 왜 그러신 것일까?
먼저 바울은 우리에게 이를 서로 같이 하라고 하였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 이를 위하여 소망 없는 우리에게도 주신 능력이 있다.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살전 1:5).” 그러므로 우리는 같은 고통에 참여하는 자로 ‘우는 자와 함께 울어야 하는’ 책임이 있다. 하여 내가 울 때 누가 곁에서 같이 운다. 슬픔과 기쁨은 같이 오거나 어느 게 먼저 오고 나중에 온다. 어찌 됐든,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하는 말씀이 역으로 우리 어깨를 친다. 곧 우리가 우리의 슬픔, 애통함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서로가 같이 함에서인데,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30:5).
그러므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126:5-6).
이것이 우선의 위로다. 천국이 저의 것이라는 이 엄청난 복, <우리의 결말>에 대하여,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하시는 말씀과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하시는 말씀이 공통적으로 알게 하신다(마 5:3, 10). 좀 더 속시원하게 읽어보면, 오늘 당장 ‘의를 위하여’ 또는 ‘예수로 말미암아’ 죽는다면 우리에게 어떤 복에 복보다 귀한 것은 천국이 나의 것이 된다는 것이다. 하면 그 상급의 실체가 드러난다.
① 우리는 하나님을 볼 것이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8).
② 우리는 천국에서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7).
③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이 된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9).”
④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를 얻는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4).”
⑤ 우리는 이 모든 세상의 공동소유자가 된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5).”
⑥ 우리는 지극히 개인적으로 의의 맛을 보고 만족함을 얻는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6).”
그런데 이 상을 받기위해 참아야 하고, 그래서 견뎌야 하는 시련은 당장 있어 보이는 세상 문화를 대적해야 하는 데 있다. 교회의 가르침과 성경이 하나이다. 말씀은 세상을 거스르고 세상은 말씀을 거스른다. 이때 우리가 세상을 사는 비결은 말씀으로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삼는 일이다. 이를 입에 물고 씹고 뜯고 삼켜서, 오늘을 사는 데 필요한 영양분을 공급 받아야 한다. 고상하고 우아하게 살기 위해 ‘종교 하나쯤’으로 교회를 다니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생활과 교회가 말씀과 조화를 이룰 때, 이에 겪는 어려움은 우리로 주를 기뻐할 수 있게 한다. 그래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2).” 이를 당연하게 여기셨다.
바울은 이 상을 깨닫고 자처하였다.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고전 4:11-13).” 곧 저는 하늘의 상이 어떠한지 알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4).” 왜 그처럼 죽기 살기로 주를 위하여 살았는지,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이에 하나 더, 나의 삶에 이와 같은 길을 가는데 장애물이 되는 것을 꼽으라면 아예 말씀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시선과 괄시와 능멸이다. 들으려 하지 않고 되레 나를 조롱하고 한심하게 여기며 ‘여호람’과 같이 나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 저들은 영혼을 잃어버린 자들이다. 마치 헤롯과 같이 또는 빌라도와 같이, 아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 같이 예수를 앞에 두고도 저를 알아보지 못하는 영적인 소경들. 예수님은 저들을 두고 우셨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눅 19:41-42).” 불신과 과욕이 저들의 영혼을 사로잡은 것이다.
오늘 나는 여호람의 이야기를 읽으며 ‘또야?’ 하는 마음도 들었다. 죄는 환경과 여건에 의한 게 아니라 그 사람의 결국이다. 단지 의지나 교육의 문제가 아니다. 그저 그다. 그는 그러려고 태어났다. 한데 나는 그럼 다른가? 나의 지난날을 돌아볼 때 아찔하였던 순간이 여럿인데 그때마다 주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한데 여전히 ‘또야?’ 싶은 나의 어쩔 수 없음에 대하여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3-24).” 그러므로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고전 15:34).” 내가 나를 아는데, 어쩔 수 없다.
바울이 자신의 몸을 쳐 복종케 한 것처럼 나 또한 내 몸을 쳐 잠을 깨우고, 더 일찍 주 앞에 올라와 말씀 앞에 앉힌다. 아직 잠이 덜 가셨어도 어쩔 수 없다. 내가 아는 나는 한 번 허용하면 또 원하고 또 원하다 결국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가려 한다. 세상이 좋다. 나태와 태만과 게으름이 익숙하다. 나의 즐거워하던 기호는 여전하다. 머리로는 아닌데, 마음으로는 바랄 때도 있고 몸은 덩달아 언제든 다시 취할 것 같다. 그러 할 때, 바울의 일침은 “깨어 의를 행하고” 이는 예수님이 가르치신 바, “의를 위하여” 곧 “나로 말미암아” 살아야 하는데, 그러자니 시련은 따른다. … 이를 위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5).” 해서 나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 되었다는 데서 안도한다. 최소한 내가 나를 아는 한 나는 어쩔 수 없는 존재인 것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103:1-2).
오늘 시편이 들려주는 말씀은 나의 내면을 향해 끊임없이 주를 찬송하고 송축하고 이를 축하하고 즐기라는 것이다. 이는
내가 여호와께 그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존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
(7:17).
찬송하라 하나님을 찬송하라
찬송하라 우리 왕을 찬송하라
(47:6).
슬퍼하지 않으려면 기뻐하는 것이고, 기뻐하려면 찬송해야 한다. 지금은 힘들고 어려워도, 오늘의 이 여건과 상황이 나를 또 굴복시키려 한다 해도, 받은 은혜를 묵상하며 자신을 쳐 복종하게 하는 것으로, 그러할 때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차지하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차지하게 하사 네게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신 6:11-13).” 한 마디로 족한 줄 알고 주의 은혜를 늘 상기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곧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임하였으나
우리가 주를 잊지 아니하며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아니하였나이다
(44:17).
그러할 때,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103:5).
늘 지치고 쓰러지기 일쑤고 또 다시 ‘여호람’이 되어 하나님을 대적하려 할 때가 수도 없이 반복되지만,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5:21).” 이 놀라운 주의 인자와 자비하심으로 아멘, 할 수 있다는 것,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사 40:31).” 이를 위하여 찬양하자.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나의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나의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하오리니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
(63:5-7).
이에,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103:8).
아니셨으면 내가 어찌 여기까지 왔을 수 있었을까? 그게 다가 아니라, 장차 우리에게 더하실 상까지 있다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2).” 이를 알 수 있는 것은 순전한 은혜로 인함이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6).” 아니었다면 지금도 나는 영혼이 죽은 자로, 눈 먼 자로 살아가고 있을 텐데….
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행하며
그의 말씀의 소리를 듣는
여호와의 천사들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11).
오늘 시편은 일깨우신다. 무궁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내가 주를 의뢰하며 경외하는 자가 되게 하셨다는 것이다.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냐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사 50:10).”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15).
이와 같은 허무함을 알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이르리니
곧 그의 언약을 지키고
그의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
(17-18).
하여 오늘의 나의 이 시간, 이 마음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이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사 2:22).” 고작 8년의 통치를 두고 저처럼 악을 저지르다 죽는 자의 생이 허무하다가도 80년을 두고 인생을 길다 하겠나? 800년을 산들 만족스럽다 하겠나?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은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상을 주시는 이심이다.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그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의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37:25-26).
우리의 이 복된 삶에 대하여,
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행하며
그의 말씀의 소리를 듣는
여호와의 천사들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
여호와의 지으심을 받고
그가 다스리시는 모든 곳에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20, 2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