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전봉석 2022. 10. 22. 04:44

 

왕이 율법의 말씀을 듣자 곧 자기 옷을 찢더라

대하 34:19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도다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시 116:5, 12

 

 

남유다 제 14대 왕인 므낫세와 15대 왕 아몬이 죽고 16대 왕 요아스(B. C. 640-609년)가 통치할 때이다. 저는 여덟 살에 왕위에 올랐다. 31년을 다스렸다. 요아스는 히스기야 이상으로 종교개혁과 올바른 신앙을 유지하려 애썼다. 재위 8년에 다윗의 하나님을 찾았고, 12년에서 18년 사이에 본격적으로 종교개혁을 강행하였다. 두 선조로 인한 우상과 산당을 제거하고 예루살렘을 청결하게 하였다. 이후 성전 보수에 최선을 다했다. 이는 열왕기상 22:1-7, 23:4-20절의 내용과 병행한다.

 

저는 남유다의 마지막 선한 왕으로 기록된다. 종교개혁과 성전중수 때에 대제사장 힐기야가 율법책을 발견하고 이를 보고 요시야의 탄식과 백성들을 온전히 세우는 데 주력한다. 요시야는 옷을 찢고 회개하며 말씀을 준행하지 못했던 날들을 한탄한다. 이상은 열왕기하 22:8-13절 내용과 병행한다. 요시야의 종교개혁(왕하 11:17-12:3)은 히스기야의 종교개혁(18:1-8)보다 광범위하게 시행되었다. 이를 통해 하나님에 대한 저의 열심을 알 수 있다.

 

우리를 타락하게 할 수 있는 요소는 생활 곳곳에 있다. 흔히들 ‘어쩔 수 없다’는 말이나 ‘다 그렇지 뭐’ 하는 안일함에서 대수롭지 않은 듯 빠져든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절박하여 물불가리지 않는 경우도 있다. 누구와의 통화에서 전에 미국으로 유학보냈던 아이가 다이빙을 하다 하반신 마비와 함께 합병증이 생겨 위독하다는 소식과 함께 기도를 부탁하였다. 한데 저가 모 선교단체란 곳에 열심을 다하고 자신의 모든 재산을 팔아 그곳에 몰두하며 아이가 낫기를 바란다는 소식을 새로 전해 들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그 마음은 알겠으나… 이처럼 우리의 곁길은 속수무책일 때도 있다.

 

말씀에서 어그러진 모든 주장은 거짓이다. “그런 선지자나 꿈 꾸는 자는 죽이라 이는 그가 너희에게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며 종 되었던 집에서 속량하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하게 하려 하며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행하라 명령하신 도에서 너를 꾀어내려고 말하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신 13:5).” 예수님도 이르시기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마 24:4-5).” 곧 우리의 어떤 절박함이나 안일함은 한통속이다.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마 5:13).”

 

어느 목사는 교회를 유지하는 데 어려워서 다방면의 시도를 한다. 무슨 카페시설로 처음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무슨 영어와 접목하여 학원사업과 교회 일을 접목하였다. 나는 그런 데 주의하여 일부러라도 관심을 피하는데, 종종 저와 마주칠 때면 늘 새로운 무엇을 시도하느라 교회가 늘 부산하다. 나름은 교회를 살리기 위한 노력이라 하는데… 나는 왜 교회를 자신들이 살리려 하는지 묻지 않았다. 교회는 주의 피 값으로 세우신 것이다. 그러니 저는 늘 부산하고 바빠서 목사인지 사업가인지 분간이 어렵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요 10:1-2).”

 

어려움과 어떤 변수는 늘 존재한다. 수시로 우릴 위협하기도 한다.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이래도 계속할래?’ 하고 묻는 것 같다. 결국 누구는 목회를 접고 친구 정육점에서 일하다 늙고 병이 들었다. 저의 처음 변명은 한 푼이라도 벌어서 교회를 세우는 데 보탬이 되고자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자니 말씀을 보거나 가르칠 시간은 줄고, 먹고 사는 일에 급급하다 교회를 잠시 그만둔 것인데 결국은 회복하지 못하였다. 분명히 말하지만 다른 복음은 없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7-8).”

 

나는 자주 되뇌는 말씀이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란 바울의 증거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그렇다면 살리시는 것도 죽이시는 것도 주가 하실 일이다. 다만 나는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 2:15-17).”

 

비록 내세울 것 없고 보잘것없다 해도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2-3).” 성경은 반드시 실현된다. 우리의 중심은 말씀이다. 어제는 가까운 친구 입에서 너는 한가하고 팔자 좋으니까 그렇지, 우리는 벌어야 산다는 말을 들었다. 무슨 말끝의 말이라 앞뒤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런 마음으로는 저의 신앙도 저가 믿는 하나님도 일개 사는 데 따른 수단일 뿐이다. 전부일 수가 없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작파하고 목사가 되고 말씀 전하는 자로 살라는 소린 아니다. 다만 자신의 그 처한 상황에서 맡기신 모든 건강과 일과 재물과 자식들까지도 주의 것임을, 저에게는 들리지가 않는 모양이었다.

 

“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사 55:10-11).”

 

이에 요하스는 말씀을 발견하고 읽고 옷을 찢고 통회하며 하나님을 향한 열심을 다하였다. “왕이 율법의 말씀을 듣자 곧 자기 옷을 찢더라(대하 34:19).” 이를 오늘 시편에서 찬송하는 구절은,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도다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시 116:5, 12).

 

주의 은혜와 긍휼하심을 알면 알수록 나는 갚을 길이 없어 주신 삶에 충실한다. 곧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합 2:3).” 말씀은 성취되었고 그 끝 날에 모든 게 다 실현될 것을 믿음으로 우린 오늘 주신 상황에서 감사하고 찬송할 수 있다. 정신과에 가서 안정제를 받아왔는데, 저는 스트레스를 받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돌아오면서 그 말이 내내 공허하여 마음이 허했다. 우리가 살면서 어찌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살 수 있겠나? 이래저래 동생 일도 그렇고 장모를 모시고 지내는 일에서도 그렇고… 생활은 수시로 거슬린다.

 

누구의 어떤 사연을 듣고 무슨 일로 어떤 이의 고통을 들으며 기도를 부탁받을 때, 나는 이를 메모지에 써서 옆에 붙이고 수시로 보며 주의 이름을 부른다. 소위 스트레스 없이 저를 위해 기도가 나오겠나? 누구와의 대화 이후 아무렇지도 않다면 내 마음에 안타까움으로 주의 이름을 부를 동력이 생기겠나? 그러려는 의도가 스스로 빚어내는 우상이지 않겠나?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지니 조각한 것이나 주상을 세우지 말며 너희 땅에 조각한 석상을 세우고 그에게 경배하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임이니라(레 26:1).” 이를 주께 아뢰고 맡긴다는 일은 은연중에 스트레스다. 이 꼴 저 꼴 안 보고, 그러든가 말든가 누구의 일에 관여하지 않아서 마음 편할 일이라면 그게 어디 기도로 나올 수 있을까?

 

어제 누가 뜬금없지만 늘 곁에서 같이 기도해줘서 고맙다는 말에 나는 부끄럽고 송구하였다. 물론 신경이 쓰여서 며칠 연락이 없으면 어떻게, 좀 나아졌는가 하고 먼저 연락이라도 해보게 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내 마음이 아니다. 우리가 주를 모시고 산다는 데서 그 마음이 편하다는 것에는 다소 의아한 생각이 든다. 정말로 주를 모시고 삶으로 의연하고 초연한 삶이 가능할까? 그렇다면 바울은 왜 그토록 절규하며 ‘자신의 몸을 쳐 복종시킨다.’고 했을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과연 이러한 고초가 스트레스없이 가능할까? 심지어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나는 오늘 본문에서 요시야가 말씀 앞에 옷을 찢었다는 말에 이것이 정상이지 싶다. 누구의 사연을 듣고 저의 아픔에 같이 숨을 고르며 주의 이름을 부를 수밖에 없는 것도 당연한 일일 테고! 의외와 자신의 안위와 평안을 도모하려는 우상숭배가 팽배하다. 다 잘 될 거야! 하는 주술을 읊어대며 자신을 워워, 하고 떠받드는 일 또한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 20:3).” 하는 말씀과 상충한다. 그러므로 심리학적인 해법은 완전한 처방이 될 수 없다. 신경 쓰이지 않고 누구를 사랑할 수 있겠나? 이런저런 일련의 일들로 마음이 어렵고 답답한 건 당연하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의연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주가 주시는 평안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외면과 회피에서 오는 평안이 아니다.

 

오히려 존 번연과 같이 억울하지만 12년의 감옥 생활에서도 이를 받아들임으로 <천로역정>을 위시하여 여러 권의 신앙서적을 집필할 수 있었던 것처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다른 길은 없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그러므로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7-8).”

 

그래서도 나는 내 앞가림도 못하지만 누구의 기도부탁을 메모하고 마음에 새긴다. 어떤 이의 전혀 엉뚱한 길을 두고 안타까움으로 길게 주의 이름을 부른다. 모두가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지만…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

(116:1-2).

 

말씀과 현실의 괴리는 필수적이다. 이를 채울 수 있는 것이 믿음이고, 믿음의 소산으로 기도를 한다.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롬 4:20-22).” 물론 나는 못한다. 하지만 주는 하신다. 저가 능히 이루실 줄 믿는다. 믿음으로 주께 아뢴다. 곧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나로 이 길을 가게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다. 나로 주의 자녀로 삼으신 것도 주님이시다. 이를 위해 창세전에 예정하시고 택정하신, 아주 오래 된 주의 섭리다. 하면 오늘의 나도 우연일 리 없다. ‘어쩌다 어른’은 없다. 분명히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 29:12-13).” 그런데 당장 안 들으시는 것 같고, 나를 안 만나시는 것 같다 해도 다 그만한 이유가 있으심을 믿는다. 최소한 나는, 내가 한 일을 알고 있다! 그런 나를 주의 자녀로 끝까지 책임지실 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안다. 그러므로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스올의 고통이 내게 이르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

(3-4).

 

아니면 더 좋은 수가 있나?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욘 2:7).” 결국은 기도할 뿐임은 저가 들으시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50:15).

 

이와 같은 말씀이 성경이다. 물론 우린 영적인 침체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런 우리에게 ‘네 하나님이 어디 있냐?’ 하고 누가 조롱한다.

 

내 뼈를 찌르는 칼 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42:10).

 

그럴 때 우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고통은 가중된다. 외적으로 억압인 상황도 있다.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3).

 

그뿐 아니라, 내적인 갈등도 엄연히 존재한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11).

 

이는 도저히 헤어날 수 없는 고통 같기도 하다.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

(7).

 

그런데 놀라운 것은 모진 세파에서 진정한 찬송과 감사도 나온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5).

 

이를 바울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저는 지금 그런 말할 처지가 아니다. 감옥에 갇혀 곧 순교당하여 죽을 판이다. 그런데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그럴 수 있는 비결이 저의 말 속에 있다. ‘하나님께 아뢰라.’ 그러니 누가 누굴 찾아가고, 어떤 말이나 행함으로 위로를 얻으려 하든지,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렸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사 54:8).”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도다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116:5-6).

 

나는 오늘 이 말씀 앞에서 꼼짝을 할 수 없다. 이는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고후 3:5).” 그러므로 주를 인정하고 주를 신뢰한다는 일은 우리로서는 필연적인 것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그러므로

 

내가 생명이 있는 땅에서

여호와 앞에 행하리로다

내가 크게 고통을 당하였다고

말할 때에도 나는 믿었도다

내가 놀라서 이르기를

모든 사람이 거짓말쟁이라 하였도다

(9-11).

 

누가 뭐라든지, 상황이 어떠하든지… 그래서 나의 연약함은 스트레스로 병원을 전전긍긍하는 모자란 사람이라 해도,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고관들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도다

(118:8-9).

 

이를 이제는 확실히 안다. 곧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사 2:22).” 그러므로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하여 감히 말해본다면 오늘 나의 연약함을 사랑한다. 주가 주신 은혜로 삼는다. 하여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7).”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12).

 

그러할 때에,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는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13-14).

 

내가 오늘도 먹고 배부른 것은 주가 주셨기 때문이다.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를 네게 주셨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하리라(신 8:10).” 그리하여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100:4).

 

여호와여 나는 진실로 주의 종이요

주의 여종의 아들 곧 주의 종이라

주께서 나의 결박을 푸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제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내가 여호와께 서원한 것을

그의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내가 지키리로다

(16-18).

 

그러므로

 

예루살렘아, 네 한가운데에서

곧 여호와의 성전 뜰에서 지키리로다

할렐루야

(1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