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전봉석 2022. 10. 26. 04:54


옛적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사로잡혀 바벨론으로 갔던 자들의 자손들 중에서 놓임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다 도로 돌아와 각기 각자의 성읍으로 돌아간 자
에스라 2:1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주의 긍휼히 여기심이 내게 임하사 내가 살게 하소서 주의 법은 나의 즐거움이니이다
시편 119:67, 71, 77


바사 왕 고레스의 포로 귀환과 성전 재건으로 1차 포로 귀환을 다루고, 그들의 이름과 수효를 적어놓았다. 레위인과 성전 봉사자들이 적혔고 그 가계와 자손들이 언급된다. 레위인, 제사장, 백성 일부, 노래하는 자, 문지기, 느디님 사람들이 자기 본 성들에 거하게 된다. 1차 포로 귀환자들은 총 4만9천897명이다. 그 가운데 제사장이 4289명, 레위인이 341명으로 전체 귀환자 중에 10%를 차지한다.

이러한 사실적인 기록을 보면서 아무리 우리가 흩어져도 하나님이 도로 모으시고 돌아오게 하시면 이 일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곧 “내가 그들을 여러 백성들 가운데 흩으려니와 그들이 먼 곳에서 나를 기억하고 그들이 살아서 그들의 자녀들과 함께 돌아올지라(슥 10:9).”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사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시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흩으신 그 모든 백성 중에서 너를 모으시리니 네 쫓겨간 자들이 하늘 가에 있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모으실 것이며 거기서부터 너를 이끄실 것이라(신 30:3-4).”

결국 주가 흩으셨으나 또한 주가 모으신다. 그러나 교만하여, “이스라엘의 교만은 그 얼굴에 드러났나니 그들이 이 모든 일을 당하여도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구하지 아니하도다(호 7:10).” 우리를 향하신 주의 사랑과 긍휼하심에 대하여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벧전 2:25).” 거기에 지금은 나의 이름이 있고 내가 또한 누구를 더하여 생각하고 기도하고 있다는 생각도 한다. 세상 그 무엇도 영원할 수가 없다.

이를 알았던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그리로 갔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 11:24-26).” 이와 같은 말씀을 되새기다 내가 이제 ‘여기’ 있음을 감사하게 된다. 아, 그래서 바울은 지난날의 모든 그 어떤 것도 배설물로 여겼다고 하였겠구나! “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8-9).” 이와 같은 말씀이 내 것이 되었다는데서 안도한다.

비록 아무 것도 주 앞에서 자랑할 게 없다 해도,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눅 12:15).” 문득 어제 통화를 한 누구를 생각하게 된다. 결국 허리 디스크가 터져서 수술을 하였고 그러는 동안 여러 마음과 생각을 모은 것 같은데, 이때가 가장 필요한 은혜라는 생각을 하였다. 오늘 시편에서 다시 눈에 들어오는 말씀도,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주의 긍휼히 여기심이
내게 임하사 내가 살게 하소서
주의 법은 나의 즐거움이니이다
(시 119:67, 71, 77).

지금의 어려움이 부르심의 신호인 것을, 그동안은 어떠했든지 이제 여기서부터는 주께 모두 맡기고 자신들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기를 당부하였다. 아이 문제나 여러 산적한 문제들이 왜 어려움으로 발목을 잡지 않겠나만 그걸 해결하겠다고 했던 날들을 돌보면? 하나마나한 일들이었지 않나? 결국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2:33).” 행여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스스로들 되물어야 한다. 가장 두려운 것은, “땅에도, 거름에도 쓸 데 없어 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34-35).” 더는 쓸모없어 주가 그냥 버려두심을 당할까 하고…….

모든 게 어려운 까닭은 당장의 이런저런 일들 때문이다. 그것으로 우리는 쉼 없이 거꾸러짐을 당한다. 하나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고전 7:31).” 나는 좀 외람됐으나 현재 저들이 가진 게 참으로 주의 일에 전념한다면 그 소유로도 충분하였다. 그러니 당장 내가 쓸 거 빼고, 취향과 기호는 따로 하고, 원하는 것은 놓을 수 없으면서 무엇으로 주 앞에 드릴까? 특히 사역자들로서의 사명은 그야말로 올인이다. 전부가 아니면 일부로도 누룩과 같을 수 있다. 주객이 전도된다는 말, 이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나둘, 내 필요를 먼저 챙기고 남은 것으로 주께 하려 하니 정작 늘 빈 손이라. 가령 이번 수술 때도 어찌됐든 형편을 생각한다면 가능하였겠나? 하물며 영혼의 일로 영생을 맡은 자들로의 부르심인데….

곧 우리가 이 땅에 영구한 것을 찾는다면 이보다 더 어리석은 일은 없겠다.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 13:14-15).” 우리의 고난과 진보는 보폭을 같이 하는 것 같다. 오늘 본문에서 스바댜의 자손 ‘아라’의 가문에 대해 언급한다(3-6절). ‘아라’의 뜻은 여행객이란 의미다. 우린 그저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아라’가 아니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 10:38-39).”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2-13).” 당장의 어려움이 우리로 주의 땅에 발붙이고 살게 하는 것은 아닐까? 정말로 고난이 없다면 과연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을까? 나는 내가 안이하고 조금만 평안할 때의 모습이 때론 염치없다. 이처럼 말씀 앞에 앉았다가도 채 오전이 가기 전에 어떤 염려와 근심이 또는 평이함과 나태함이 나를 지배하는 것을 자주 본다. 결국 말씀에 의지하고 이에 소망을 두는 것만이 복이다. 오늘 시편은

주를 경외하는 자들이
나를 보고 기뻐하는 것은
내가 주의 말씀을 바라는
까닭이니이다
(74).

이를 솔로몬의 묵시로 들어보면,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잠 23:17-18).” 결국 우리가 주를 경외함이란 그 말씀에 소망을 두는 것인데, 이 소망은 또 환난을 통해서 얻는 것이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이를 위해 우리 주님이 죽으셨다는 사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5-6).” 말씀 앞에 붙들려 산다는 일은 그리 막연한 것이 아니다.

나는 목회자의 길이 어렵고 누추하여 누구에게도 권하기 민망한 것을 알면서도 이보다 복된 한 날의 생은 없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한다. 그러므로

교만한 자들이 나를 심히 조롱하였어도
나는 주의 법을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51).

그럴 수 있는 게 우리의 어떤 투철한 사상 때문이 아니라, 말씀이 주시는 신비다. “너는 갑작스러운 두려움도 악인에게 닥치는 멸망도 두려워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는 네가 의지할 이시니라 네 발을 지켜 걸리지 않게 하시리라(잠 3:25-26).” 말씀 외에 의지할 게 또 무언가? 세상이 흉흉하다. 이런저런 전망이 어둡다. 눈으로 보이는 가시적인 현상도 가히 점입가경이다. 여러 꼴불견을 보면서 우리가 무슨 소망으로 남은 생을 다할까? 나는 종종 아이와 대화할 때 하다못해 장래의 몇 날을 두고 오늘을 참고 견디며 공부하는데, 하물며 영생을 두고 하는 일이라면… 친구에게도 종종 우리 나이에 노후대책을 운운하며 길어야 10-20년 될까 하는 노인의 때를 위해서 지금도 불철주야 돈 벌고 일하는 데 전념하면서 영원한 생을 위하여는 무엇을 준비하고 있나?

어릴 때부터 나는 늘 두려웠던 게 영생이라는 영원의 시간이었다. 고통의 영원도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섭지만 천국의 영생도 그 준비가 없으면 무엇으로 그 영원한 시간을 감당할 수 있을까? 나는 그 영원이라는 시간을 가늠할 수 없어 숨이 차고 두렵다. 이때 오늘 시편은 명료하게도 그 영원한 시간을 감당하고 누릴 수 있는 능력이 말씀에 있음을 알려준다.

여호와여 주의 옛 규례들을
내가 기억하고 스스로 위로하였나이다


내 소유는 이것이니
곧 주의 법도들을 지킨 것이니이다
여호와는 나의 분깃이시니
나는 주의 말씀을 지키리라 하였나이다
(52, 56-57).

분명히 성경은 밝히신 바,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사 55:11).” 하면 말씀으로 말씀 붙들고 훈련하는 이 일에 복음을 전하는 목사보다 용이하고 귀한 역할이 또 있을까? 비록 살림도 그 형편도 세상적으로는 비할 데 없이 비루하고 누추할 수 있으나, 우린 지금 영생을 준비하는 사람들이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 하며 답은 하나이지 않나? 말씀을 사랑하는 일,

내가 주의 의로운 규례들로 말미암아
밤중에 일어나 주께 감사하리이다
나는 주를 경외하는 모든 자들과
주의 법도들을 지키는 자들의 친구라
(62-63).

이처럼 아침 일찍 눈을 뜨기 무섭게 교회로 달려오는 것도, 나는 이 시간의 말씀으로가 아니면 이 하루를 어찌 감당할 수가 없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사 12:2).” 대체 우린 무엇으로 사는가? 돈? 형통한 일? 나름 넉넉한 형편의 살림?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나? 오늘 주가 오라 하시면, 우린 무엇으로 영생을 마주할까? 그러므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하고 저는 앞서 말하기를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3:12, 14).” 노인 바울의 결연함이다. 이제 좀 쉬면서 남은여생을 어찌 평안히 보낼까, 하고 노후대책을 세워도 모자랄 판에 감옥에 갇혀서도 저는 되뇌는 것이다. 그리하여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하지도 아니하리이다
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악한 자와 같이 앉지 아니하리이다
(26:4-5).

내가 저를 멀리하고 주의하는 까닭은 쉬 저들과 같이 되는 나를 잘 알기 때문이다. 그리 살았었고 여전히 그리 사는 일에 익숙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넘겨 네게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어떤 언약도 하지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또 그들과 혼인하지도 말지니 네 딸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들의 딸도 네 며느리로 삼지 말 것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가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신 7:2-4).” 아닌 것은 죽었다 깨어나도 아닌 것이다. 아,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좋으니이다
(72).

부디 그러하여서 그 어떤 시간보다, 무엇보다 이를 귀히 여길 때,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마 13:44).” 나는 가끔 뒤늦게 더는 어쩔 수 없어서 두 손 들고 주 앞에 붙들려올 때 감사했던 것은 더는 물러설 곳이 없다는 데 있었다. 신대원을 떨어졌을 때도, 다음 해에 다시 하면 된다하였고, 목사고시에서 두 번 떨어져 세 번째 때 면접관이 아무래도 여의치 않은지, 다음에 또 올 것이냐 물었을 때도 개의치 마시라! 하고 오히려 저를 위로하였다. 그건 남은 생을 이제 시험만 보다, 목사고시만 떨어지다 끝난다 해도 괜찮았다. 더는 다른 길이 내게는 없었다. 하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 3:8).” 하는 바울의 고백을 아는 어느 정도 알 것 같다.

말씀만이 답이다.

주의 손이 나를 만들고 세우셨사오니
내가 깨달아 주의 계명들을 배우게 하소서
주를 경외하는 자들이 나를 보고 기뻐하는 것은
내가 주의 말씀을 바라는 까닭이니이다
(73-74).

인생의 다른 방식을 나는 더 이상 모른다.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잠 6:23).” 곧 “지혜로운 자는 위로 향한 생명 길로 말미암음으로 그 아래에 있는 스올을 떠나게 되느니라(잠 15:24).” 이에,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
(43:3).

말씀으로밖에는 답이 없다. 행여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 4:6).” 이보다 더 끔찍하고 불쌍한 결과가 있을까?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부디 나의 나은 날들도 그러하기를. 하여,

나의 영혼이
주의 구원을 사모하기에 피곤하오나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
나의 말이
주께서 언제나 나를 안위하실까 하면서
내 눈이 주의 말씀을 바라기에 피곤하니이다
내가 연기 속의 가죽 부대 같이 되었으나
주의 율례들을 잊지 아니하나이다
(81-83).

놀라운 것은 이와 같은 느낌을 묵상글을 쓰면서 또는 설교원고를 작성하면서, 또는 누구를 위로할 때 적절한 말씀을 근거로 찾으면서 내가 되레 은혜를 받는다. 그리하여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히 3:14).” 그러할 수 있겠다. 하면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오늘의 이런저런 일을 겪으면서 물론 힘들고 지칠 때도 있고, 당장 쿠팡물류창고에서 택배 일을 하며 앞으로 남은 생을 주의 일에 매진할 것을 준비하는 동생을 나는 존경한다. 여기저기 기웃거리지 않고 동료나 선배를 찾아 목회지를 구걸하지 않으면서 당당히 주 앞에 책임지시라, 나아가는 것을 보면서…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잠 24:16).” 그렇지, 그것이 우리의 온전한 사명이겠거니!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34:19, 37:24).

우리가 말씀으로가 아니면 도대체 이를 어찌 붙들고 나아가겠나?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사 40:7-8).” 됐다 그럼.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 24:35).” 하여,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의 입의 교훈들을 내가 지키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말씀은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섰사오며
주의 성실하심은 대대에 이르나이다
주께서 땅을 세우셨으므로
땅이 항상 있사오니
천지가 주의 규례들대로 오늘까지 있음은
만물이 주의 종이 된 까닭이니이다
(88-91).

그러므로,

나는 주의 것이오니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의 법도들만을 찾았나이다
(94). 아멘.